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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유대인 사회주의 운동"의 흥망사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4. 4. 10.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요즘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를 뉴스에서 들을 때마다 저는 제 어머니쪽 할머니를 종종 떠올립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이스라엘의 국무총리는 레바논 침공 등으로 악명을 떨친 극우파의 메나헴 베긴이었는데, 그에 관련된 소식이 흑백 텔레비전 화면에서 나올 때마다 제 할머니는 거의 쌍욕에 가까운, 무서운 말들을 혼잣말로 퍼붓곤 했습니다. 열렬한 공산주의자이었던 할머니는, 베긴과 같은 극우파 시온주의자들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혐오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운동에 있어서는 공산주의와 극우파 시온주의는 화합이 불가능한 "양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제 할머니가 속했던 그 세대에는, 굳이 극우파 시온주의자보다는 제 할머니와 같은 급진 좌파/공산주의/사회주의 계열의 유대인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제 할머니는 1905년생이었습니다. 대체로 1860년부터 약 1930-35년까지 태어난 아슈케나지 (유럽쪽) 유대인이라면 시온주의보다 모종의 (급진) 좌파에 입문할 가능성은 훨씬 높았습니다. 아마도 늦게 잡아 거의 1960-70년대까지 "유대인 사회주의" 같은 현상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는 자명했습니다. 사실, 예컨대 재일 조선인들이 - 적어도 과거에 - "좌파"쪽으로 갈 확률이 매우 높았던 이유와 거의 같았습니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구미권 유대인의 상당수는 중하층 이하의 삶을 살아야 하는 수공업자나 영세업자,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계급적 억압에도 민족차별이 가미됐습니다.

히틀러나 나치 만큼의 극단성을 띤 건 아니더라도, 홀로코스트를 피해 피난 가는 유대인들의 미국 입국을 막았던 미 국무부의 많은 관료들부터 1930년대에 심한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암 촘스키의 어린 시절의 회상을 들어보면 1930년대의 미국에서 그를 "유대놈"이라고 놀리고 괴롭혔던 백인 아이들과의 주먹다짐은 매일매일의 일이었답니다.

재일 조선인의 경우도 그렇지만 다수의 가난과 민족 차별, 거기에다가 이동 차별 (많은 국가들이 유대인의 입국을 통제했죠) 등이 겹쳐지면 "왼쪽으로의 급진화"는 당연한 순수죠. 거기에다 문자 해독률이 높고, "공부"의 위상이 높았던 유대인 공동체의 분위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공부"가 마르크스주의 쪽으로 가도 일단 "공부하는" 활동가는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거죠.

이런 상황의 결과로 사실 구미권에서 거의 1960-70년대까지 "유대인""사회주의"는 거의 동의어이었습니다. 아마도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유대인이라면 아인슈타인일 터인데, 아인슈타인이 1949년에 <먼슬리 리뷰>라는 급진 마르크스주의 잡지의 창간호에 "왜 사회주의인가?"라는, 사회주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글을 실은 평생의 사회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냉전 초기, FBI의 감시를 받고 살았던 이민자 아인슈타인이 그런 글을 실었다는 것은 사실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던 것이죠. 그렇지 않아도 미국의 보안 기관들은 "유대인 빨갱이"에 대해 이미 1920년대부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뉴욕 등 미국 대도시마다 1920-30년대 미국 공산당 당원의 다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1929년 당시, LA 공산당 시당 당원의 90%나 유대인이었던 것이죠. 1920-30년대 뉴욕에서는, 이디쉬어 공산당 신문인 <디 프라이하이트> (<Di frayhayt>, <자유신문>), 공산당의 영문 일간지인 <데일리 워커>보다 그 부수 (3만부)는 훨씬 더 높았습니다.

정통 공산당만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국내의 "노동자연대"의 모체인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창립 그 당시의 당수이자 이론가인 토니 클리프 (이가엘 글룩스타인)를 비롯하여, 세계 트로츠키주의 이론가나 지도급 간부 역시 유대인 출신인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촘스키와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아나키스트들도 같은 사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미 적어도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누렸던 서구 이상으로, 유대인 차별이 오래 지속됐던 동구에서의 유대인의 혁명성이 더 강했습니다. 1917년 이전의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뿐만 아니라 사회혁명당이나 멘세비키 등 거의 모든 혁명 지향의 정파에서 유대인 계열의 열성 멤버나 지노자들이 수두록했습니다.

혁명 이후에는 소련 정권이 유대인이라는 "과거 피억압 민족"의 고등교육 이수, 간부로의 진출 등을 장려했기에 벨로루시 등 유대인의 도시 인구가 많았던 일부 지역에서는 1930년대말에 공산당 당원의 거의 40%나 유대인이었습니다. 1939년 모스크바 유대인 인구의 82%나 주로 고등 교육을 이수한 "사무원"들이었습니다.

, 김철수 등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1920년대에 모스크바에 가서 조선 공산당 관련 정책에 대해 회의를 하고 대화를 나누었던 코민테른의 간부 (보이틴스키, 퍄트니츠키, 마댜르 등) 역시 거의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심지어 김일성에 대한 관리 (이미지메이킹 등)나 김일성의 연설 작성 등을 담당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 같은 해방 이후 정치부 계열의 소련 장교 역시 유대인 출신이었죠.

"유대인""사회주의"를 연결했던 연결줄이 끊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1940년대 소련의 "민족주의화"부터이었습니다. 보수적인 성향의 스탈린은, 이미 1941-45년 전쟁 시절에 "국제주의" 이데올로기를 대신해서 "러시아 애국주의"를 내세워 러시아인 간부 중심의 새로운 정치적 구도를 만들기에 착수했습니다.

특히 1948년 이스라엘 건국, 그리고 이스라엘의 친미화 이후에는, 소련 유대인들에게 불어닥친 숙청의 바람은 무서웠습니다. 군과 비밀경찰, 당 간부 중에서는 유대인들이 거의 남지 못했으며, 오로지 학계나 예술계 등에서의 그 활동이 여전히 용인됐습니다. 이런 "출세 제한"에 대한 불만이 쌓여 결국 1970년 이후의 유대인들의 대다적인 소련 출국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그것보다 더 결정적으로는, 1960년대 이후 구미권에서는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중산계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반유대주의가 상당히 완화된 가운데, 과거의 수공업자나 영세업자, 노동자 가정 출신의 자녀들은 교수나 변호사, 의사, 기업 임원 등으로 진출하는 것이 다반사가 됐습니다.

그래서 예컨대 노암 촘스키나 버니 샌더스처럼 좌파 운동에 이미 입문한 유대인들이야 그 궤도를 계속 달렸지만, 1970년대 이후에 태어나서, 이미 유복한 가정에서 크고 그다지 차별을 많이 당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다수는 "좌파"보다 차라리 "자유주의"쪽으로 갈 확률이 더 높아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점차 "주류화"되었고 "유대인 사회주의의 한 세기"는 그렇게 해서 저물어가게 됐습니다.

사회주의자인 저로서는 이게 상당히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긍정적인 측면이라면 자유주의 계열의 재미, 재유럽 유대인들도 요즘 가면 갈수록 이스라엘의 제노사이드적 정책에 대해 더 명확한 반대 입장을 내비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압력이 이스라엘 정책 변화의 한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기를, 저는 그래도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기사 등록 2024.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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