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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소련과 시온주의: 교감과 애증의 관계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4. 3. 29.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제가 태어난 곳은 구소련이었고, 제 친척의 상당수가 사는 곳은 이스라엘입니다.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정리하자면...정말 난제 중의 난제죠. 일면으로는 볼셰비즘과 시온주의는 서로 "양극"의 관계이었지만, 동시에 서로를 계속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리고 소련/러시아와 이스라엘의 "특수 관계" 속에서는 20세기 역사의 "큰 그림"의 여러 가지 중요한 측면들이 광장히 잘 부각돼 있습니다. 민족주의, 소련식 "사회주의", 그리고 냉전 질서나 현재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 등등은, "특수 관계"의 프리즘을 통해서 보면 그 의미 파악은 훨씬 쉬워집니다.

19세기 말의 세계에서는 러시아는 유대인들에게 핵심적으로 중요한 나라이었습니다. 1880년에 세계 유대인들의 53%나 러시아 국경 안에서 살았습니다. 한데 제정 정권의 학대와 엄청나게 대중화돼 있었던 반유대주의적인 민간의 폭력 등으로 미국으로의 유대인 이민이 계속 진행돼 세계 유대인 중의 재러시아 유대인의 비율은 1914년에 이르러 39%로 떨어졌습니다.

학대와 압제 속에서 유대인들은 "계급"이나 "민족" 중심의 운동에 몰려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계급" 중심의 운동의 가장 급진적 표현은 바로 볼셰비즘이었는데, 레닌은 "민족" 중심의 시온주의 운동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선택 받은 민족"이나 "약속의 땅" 등이 무산계급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라는 논리이었죠.

한데 동시에는 시온주의 운동과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 사이에서의 "교류"는 물밑에서 계속 진행됐습니다. 과거의 사회주의자들이 시온주의 진영으로 가기도 하고, 시온주의자 출신들이 소련 사회에서 잘 적응돼 상당히 높은 위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소련 아동 문학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인 사무일 마르샤크 (Samuil Marshak)는 대표적으로 바로 예루살렘 순례까지 갔다온 열성 시온주의자 출신이었죠 (물론 소련 시절에 그는 그 사실을 철저히 숨겨야 했죠).

좌파 시온주의자들은 소련의 집단 농장이나 계획 경제, 노조들의 경영 참여 등을 벤치마킹하기도 하고, 시온주의 민병대 (하가나)는 소련군처럼 여성의 직접적 교전 참여를 허용했습니다. 1920년대말까지만 해도 소련 당국은 소련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허용해주고 있었습니다. , 어디까지나 "피억압 민족 해방론"이라고 그 당시에 인식됐던 시온주의에 대해 완전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시온주의에 가장 부정적이었던 소련에서의 조직은 본래 코민테른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과 아랍인 적대, 충돌 , 대립이 양쪽의 혁명적 협력을 불가능하게 해 결국 제국주의만을 이롭게 한다는 논리이었습니다. 코민테른 산하의 팔레스타인 공산당은 영국 위임 통치 시기 팔레스타인에서 유일한(!)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동 정치 단체이었습니다.

한데, 보수주의적 국가주의자이었던 스탈린에게는 코민테른과 세계 혁명, 계급 본위의 논리는 눈엣가시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코민테른은 1943년에 해산 당하고, 대체로 그 시기부터 스탈린의 소련과 팔레스타인에서의 (좌파적) 시온주의자들은 "협력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독소 전쟁 시절의 소련은, 1941년 이라크에서의 친독 쿠데타 시도나 에루살렘의 종교 지도자 아민 알 후세이니 (1897-1974) 같은 팔레스타인 아랍 지도급 인사들의 친파쇼적인 경향에 대단한 위기감을 느껴, "친독 아랍 민족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그 당시에 "친소련적"으로 보였던 다윗 벤-구리온 계열의 좌파 시온주의 세력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 1917-1942/43년 사이의 시온주의에 대한 "묵인/비판/불밑 교류"의 관계는, 1943-1948년 사이에 "적극적인 협력"으로 바뀐 겁니다. 1947년에 소련은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을 유엔에서 적극 지원해주었고,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즉시 이스라엘을 인정하여 수교했습니다.

인적 자원이 유한한 소련은 소련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이주를 그때 일단 막아놓았지만, 소련의 통제 하에 있었던 폴란드나 헝가리 등 동유럽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이민을 초기에 막지 않았습니다. 1948년 소련이 추진한 이스라엘에의 체코산 무기 공급은, 사실 이스라엘의 독립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승리를 보장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건국의 일등 공로자는 바로 스탈린"이라 해도 큰 과언은 아닐 겁니다.

도대체 스탈린이 이념적으로도 그다지 친화적이지 않았던 (좌파) 시온주의자들을 이 정도 도와 이스라엘의 "생명의 은인"이 되어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이스라엘 정부는 초기부터 소련에 "작은 친절"을 여러 방식으로 베풀어주었죠. 예컨대 러시아 제정 정권이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보유했던 각종의 교회 등의 재산을, 이스라엘 정부는 건국 즉시 바로 소련 명의로 재등록해 놓았습니다.

, "부동산" 등으로 스탈린의 도움에 "답례"한 거죠. 한데 스탈린이 바랐던 것은 그것보다 훨씬 컸습니다. 스탈린은, 이스라엘이 동유럽 국가나 북한처럼 특정 지역 (중동)에서 소련 영향의 "대변자"가 되고 소련의 "우방"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스라엘 안에서도 소련에 다소 친화적이었던 좌파 시온주의 정치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문제는 "건국 비용"이었습니다.

새로운 이민자 정착, 인프라 구축, 군 유지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 비용을 대줄 수 있었던 재미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당연하게도 이스라엘의 친소련화를 절대 바라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미국에서는 그 당시 트루먼 대통령 스스로 시온주의의 열렬한 지원자이었기에, "친미"의 길을 걸을 경우 순탄하게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국에 1950, 한국 전쟁의 발발이 하나의 분기점이 되기도 했지만 1948-50년 사이에 이스라엘은 점차 친미화되어 1950년 이후 완전하게 친미 국가가 되었습니다. 사실, 사민주의 세력이 통치했던 그 당시 영국이나 노르웨이 같은 나라와 동일한 "온건 사민주의자들의 냉전 시대 친미화"의 경우이었죠.

스탈린의 대응은 잔혹했습니다. 1949-53년 사이에 소련에서 활동했던 대부분의 잘 알려진 이디쉬어 문학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가 하면, 이디쉬어 학교들이 거의 다 폐교 당하고 이디쉬어 매체도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자인 시온주의자들이 "친미"로 갔다면, 재소련 유대인들이 더 이상 "민족어""민족 문화"를 가지면 안된다는 논리이었습니다.

재소련 유대인들이 "민족 해체", 즉 강제 동화의 과정을 겪어야 했던 동시에, -국가 메커니즘 안에서는 그 행동의 반경이 극도로 좁아졌습니다. , 당이나 군, 비밀 경찰로의 그 진출이 ""에 막히는가 하면 그나마 교육계나 학계, 경제관리직 등에서 그 활동이 제한적으로 하용됐던 겁니다.

이런 ""을 만난 재소련 유대인들의 "엑소더스"1970년 이후로 시작되었는데, 그 결과 중의 하나는 오히려 소련/러시아와 이스라엘을 다시 더 가깝게 만든 겁니다. 수많은 구소련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향하게 되고, 1991년 이후 그 숫자는 더욱 더 늘어 지금 이스라엘 총인구의 약 20%나 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된 것입니다. "재이스라엘 구소련 유대인"은 결국 러시아와 이스라엘을 다시 잇게 하는 "인간 가교"가 되어버린 겁니다.

1989년까지 구소련은 반미, 반이스라엘 아랍 (좌파) 민족주의를, 상당한 비용을 들여 후원했습니다. 한데 푸틴 시대의 러시아는 그것보다 더 다원적, 다방면의 실리 외교를 펼친 겁니다. 일면으로는 소련 때부터 후원해온 좌파 민족주의 계열의 시리아 정권 등에 대한 후원 관계는 계속 유지, 강화됩니다.

한데 또 일면으로는 초강경 국가주의자인 푸틴은, 이스라엘에서도 강경 민족주의, 권위주의 지향적 세력인 나타냐후 세력과의 "장기 지속 파트너십"을 구축했습니다. 12번이나 모스크바를 공식 방문하여 푸틴과의 정상 회담을 가진 네타냐후는, 아마도 "서방" 지도자 중에서는 푸틴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죠. 그 파트너십은 기반은, 푸틴과 네타냐후의 강경 우파 민족주의 사이의 "친화성"만은 아닙니다.

재이스라엘 구소련계 유대인이나 모스크바에서 사는 8만 명 이상의 이스라엘 교민 중에서는 부유한 사업가들이 많은 만큼 두 나라 사이의 경제적 "이해의 중첩"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침공의 상황에서 "무기"가 급해진 모스크바는 이스라엘의 숙적 이란과의 아주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도, 이스라엘과의 관계도 상당부분 유지됩니다. 여전히 이스라엘은 - 예컨대 한국과 달리 - 대러 제재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것이죠.

지난 100년 이상 소련/러시아와 시온주의/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보면 한 가지가 확실히 느껴집니다. 소련/러시아와 시온주의/이스라엘의 역사적 "궤도"는 많은 면에서 서로 굉장히 닮은 판이 되죠. 1920-30년대에 코민테른이 반시온주의 노선을 추구하고 시온주의자들이 은근히 소련의 집단농장을 모방하여 키부츠를 만들었지만, 어쨌든 양쪽은 모종의 좌파적인 미래를 꿈꾸고 계급 혁명이든 민족 혁명이든 "혁명"을 추구한 겁니다.

1948-50년 이후에 스탈린의 도움으로 건국된 이스라엘이 미국의 돈에 의존하게 되는 동시에 소련은 점차 아랍 민족주의의 후원자가 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데, 양쪽은 냉전 질서 속에서 냉전의 논리가 요구한 역할을 맡게 된 셈입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수많은 구소련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이민가고 이스라엘과 러시아가 다시 많이 가까워졌지만, 양쪽은 엄청나게 우경화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지금은 푸틴도 네타냐후도 다원화된 미국 헤게모니 이후의 세계 질서에서 "실리 외교"를 통한 자국 이익의 극대화를 노리면서 "이익" 위주의 관계망을 구축합니다. 네타냐후는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미국의 입장을 잘 고려하지 않으면서도 미국의 지원을 따내는 한편 러시아나 중국과의 관계 증진도 동시 추진해온 겁니다.

푸틴은 이란과는 무기거래와 투자를, 사우디와는 석유 생산 감산 등 석유 관련 협력을, 시리아에 대해서는 러시아 영향력 구축과 군사기지화를 각각 진행하면서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그 어떤 "미래 이상"도 사라진 러시아나 이스라엘의 정치에서 남은 것은 결국 민족/국민 국가의 "이해 관계"뿐입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전장을 보나 가자에서의 학살의 현장을 보나, 푸틴도 네타냐후도 국제법이나 인권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나 생각이 전무하다는 생각밖에 안듭니다. 1920년에 러시아는 볼셰비즘의 계급적 실험, 팔레스타인은 좌파 시온주의자들의 민족적 실험의 현장이었는데, 지금 러시아도 이스라엘도 극우 보수 국가의 "전형"에 가깝습니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가 과연 어느 정도 힘들 것인가요?

(기사 등록 2024.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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