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세상이 이제 다 잊었겠지만, 2007년의 대한민국 여러 사건 중의 하나는 "<먼나라 가까운 나라> 미국편 사건"이었습니다. <먼나라 가까운 나라>는 한국 만화계의 아이콘이라고 할 이원복 교수의 유명한 만화 시리지죠. 문제는, 그 미국편에는 "유대인" 관련 내용은 시몬 비젠탈 센터 등 아예 해외 유대인 단체의 주목을 받을 만큼 국제적으로 보기에는 다소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유대인이란 구미권, 그 중에서는 특히 영미권 전체를, 그리고 그 중에서는 금융업과 방송매체 등을 거의 "장악하고 지배하는", 영미권 정치의 "막후 실력자"이었던 것입니다. 서구 사회에 대한 유대인의 "장악"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바로 19세기말 이후에 번지게 된 "반유대주의라는 열병"이라고 이원복이 서술했는데, 이 서술은 반유대주의라는 "열병"의 출현을 마침 합리화하는 듯한 늬앙스를 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더하여 이 만화는 "유대인에 의한 미국 사회의 장악"이 재미 한인들의 미국 사회내 신분 상승에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인들이 유대인이라는 벽에 부딪친다"와 같은 식의 내용이었죠. 이 내용이 재미한인 단체의 반박, 해외 유대인 단체 반발, 거기에다가 결국에는 미 국무부 <세계 반유대주의 보고서>에 인용돼 국제 스켄들이 되었고, 이 작가는 결국 이 내용을 삭제해 사과를 했습니다. 사건의 내용은 여기까지이었습니다.
한 종족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을 뭉뚱그려서 다 똑같은 "부자", "막후 실력자" 등으로 그린다는 것은 물론 객관적인 접근과는 거리가 아주 멀죠. 재미 유대인들의 4분의 1이 고소득층 (연간 소득 20만 달러 이상)으로 분류되는 등 재미 유대인이라는 집단은 미국에서 - 재미 대만인, 재미 인도인 등과 함께 - 비교적 "성공적 마이너리티"로 구분하긴 합니다.
한데, 그 집단 안에서의 계급차도 만만치 않아 재미 유대인의 약 10%는 3만 달러 이하의 저소득층이기도 합니다. 중세 이후 농지 소유 금지라는 불이익 때문에 금융업 등에 종사해왔던 영국 등 유럽의 유대인들이 근현대 금융업-공업-방송업 등에 그 커뮤니티의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큰 몫을 차지해왔다라고 하면 큰 거짓말은 아닐 것입니다.
한데 "큰 몫을 차지한다"와 "지배한다"는 다릅니다. 경제사 연구 성과에 따르면 비농업 부문에서는 예컨대 영국에서 최고의 부호 (백만 파운드 이상의 재산 보유자) 중에서는 유대인들이 1910-19년간 약 23%를 차지했습니다. 나중에 그 숫자가 줄어들어 1970년대에 이르러 9%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재영국 유대인이란 전체 인구의 0,5-1%밖에 안되는 커뮤니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나름 상당한 숫자긴 하지만, 좌우간 "지배"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최근 몇년간 <포브스>지가 발표하는 미국 최고 부호 400명의 명단을 보면 해마다 조금씩 바뀌지만 유대인의 비율 역시 25-30% 안팎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데 그들이 "유대인"이라 해도 각자 종교 지향이나 정치 지향, 지지 정당 등이 다 달라서 그들이 상당한 로비력을 보유한다고 말할 수 있어도 "미국을 지배한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태심한 과장입니다.
전혀 객관적이지 않고 명확한 자료에 뒷받침되지 않지만, 이원복이 그 만화에서 표현한 "유대인의 미국 지배론"은 한국에서 거의 "국민적 상식"(?)이 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국기를 흔드는 극우들에게는 그 "사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가 하면, 반대쪽에서는 "재미 유대계 영향력 때문에 미국이 이스라엘의 가자 제노사이드를 지원한다"고 불만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이스라엘과 깊이 유착돼 있는 미국의 펜타곤이나 첩보 기관 등은 "유대계 영향"과는 다소 무관하고, 그들이 이스라엘을 전폭 지원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중동에서 이란 등을 견제하며 인접 지역을 콘트롤하면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대리하며 관철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유착은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확인된 뒤에야 본격화됐고, 그 주된 원인은 냉전이라는 상황에서 아랍 국가들의 상당수가 친소련 진영에 넘어가는 바람에 미국이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군사 국가를 중동에서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에는, "유대계의 영향력 때문에 미국이 이스라엘을 챙겨주고 지원한다"는 말은 음모론에 다소 가깝고, "유대계의 미국 지배론"은 단순한 음모론에 다름 없습니다.
이 음모론은 과연 얼마나 위험한가요? 한국의 경우에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온갖 혐오들이 난무를 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는 유대인 관련의 부분들은 한참 부차적이며 주변적입니다. 한국은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 즉 반북 의식이 가장 강하고, 그 뒤로는 혐중과 이슬라모포비아, 그리고 아시아 노동자에 대한 혐오 등이 가장 현저한 위험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구 대현동에서 "이슬람 사원 건설 반대"를 외치는, 개신교 광신도로 추측되는 주민들이 이슬람 신도를 고의적으로 모독하려 하는 "돼지고기 파티"를 벌인 것만 봐도, 한국의 이슬라모포비아가 이미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자유통일당이라는 극우 정당의 열성 지지자들이 최근 총선 유세하면서 전국을 돌며 공단 근처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사적으로 검문, 감금하는 등 주로 중앙아시아나 동남아 출신의 외국인에 대한 혐오에 기반하는 일련의 불법 행동을 벌인 것도, 한국의 극우 배외주의가 "위험 수위"를 한참 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데 극우 배외주의자들의 타깃은 대개 더 약한 집단으로 판단되는 개도국 출신의 아시아 노동자들입니다. 저들은 더 강한 집단으로 판단되는 유대인 등을 혐오한다기보다는, 반대로 이스라엘의 극우들에게 은근히 배우고 따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구미권의 맥락에서는 특정 종족 집단의 "지배력"을 논하는 것은 훨씬 더 위험해 보입니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만 해도, 유대계가 "자본주의 미국"도 "제국주의 영국"도 "볼셰비즘 소련"도 동시에 다 "지배"하면서 독일 민족에 해를 끼치고 있다는 개념에 입각해 있었습니다. 즉, "지배론"은 가장 강력한 혐오 의식의 기반이 된 것이었습니다. 1920-30년대와 비교될 수 있는 혐오의 "해일"을 (아직) 구미권에서 볼 수 없지만, "지배론"은 여러가지로 변모하면서 여전히 상당히 강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사업계에서의 유대인의 영향력이 지나치다"와 같은 주장에는, 5년 전에 71%의 헝가리 응답자나 56%의 폴란드 응답자, 50%의 러시아 응답자가 동의했습니다.
서유럽의 경우에는 "유대인 지배론"의 골수 지지층은 대개 10-15%에 불과하지만, 극우 정당 지지층 중에서는 그것보다 훨씬 많은 편이고, 그 극우 정당들은 위기의 시대인 오늘날에 오히려 그 주가가 오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위기가 심화될 수록 더 오을 것이라고 지금으로서 예측됩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 "유대인 지배론"이 앞으로 더 어떤 문제를 일으킬 것인지 지금으로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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