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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4.20/강성희/윤석열/검찰/뱅크런/이스라엘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3. 4. 8.

전지윤

장애인들을 시설로 다시 집어넣으려는 오세훈

얼마전 전장연과 장애인 동지들은 420공동투쟁단 출범식과 전국장애인대회와 지하철 행동과 행진과 장애해방열사.희생자 합동추모제까지 하루 종일 투쟁을 전개했고 12일 투쟁을 했다. 이 모든 것을 함께 하지는 못하고 어제만 참가하면서 중간에 행진할 때 갑자기 연대 발언도 하게 됐는데 좀 횡설수설한 것 같아서 아쉽다.

그런데 다시 느낀 것은 윤석열 정부와 오세훈 서울시 아래에서 경찰의 태도가 정말 바뀌었다는 것이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적대적이고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어제도 이놈의 경찰들은 집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굉음의 경고 방송을 하면서 우리를 방해했다. 이런 집요한 괴롭힘 수준의 방해는 하루 종일 계속됐다.

경찰 폭력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 오세훈 서울시는 자립생활지원센터 등의 재정과 회계에 대한 표적조사까지 진행하고 있다. 심지어 개개인의 장애인 활동가들에 대한 활동지원시간 표적조사까지 진행하고 있다. 정의연, 민주노총 등에 했던 것처럼 꼬투리를 잡아내서 낙인찍고 괴롭히고 활동을 파괴하려는 가장 비열한 수단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가장 분노하게 되는 것은 탈시설 운동의 성과를 거꾸로 돌리고 파괴하려는 오세훈의 시도에 있다. 국힘이 시의회 과반수가 되기 전에 가까스로 통과시켰던 탈시설 지원조례를 폐기하고, 탈시설한 장애인들을 다시 시설로 돌려보내고, 새로운 시설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번에 오세훈의 유럽순방도 그런 목적이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유엔협약 등에 따라서 탈시설이 대세가 된 유럽에 그나마 남아있는 시설들을 굳이 찾아가 견학하고는, ‘이렇게 선진국과 유럽도 시설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탈시설 운동 공격에 이용하려는 속셈이다. 이 꼼꼼한 야비함에 질리게 된다. 중증장애인들이 평생 동안 갇혀서 하루 종일 벽과 천장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그런 곳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싶어하는 그 마음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자신이 그런 처지에 있다고 잠깐 상상만 해봐도 끔찍할 것일텐데 말이다.

마침 전국장애인대회 이후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보니 동물원을 탈출한 얼룩말이 결국 마취총을 맞고 다시 잡혀가는 것이 뉴스로 나오는 것을 봤다. 장애해방과 동물해방을 연결시키던 <짐을 끄는 짐승들>의 이야기들이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자유롭고 싶은 영혼을 다시 시설로, 우리로, 철창 속으로 가두려는 자들은 몰아내야만 한다.

🚆 420장애인권위원으로 함께 연대해주세요. https://campaign.do/UGH3

#전장연을_지지합니다 #열차가어둠을헤치고 #장애인차별철폐의날

종북몰이 체제에 금을 낸 전주을 재보선 결과

며칠전 재보선 결과는 모처럼 듣게 된 기쁜 소식이다. 울산에서 노옥희 교육감의 빈자리를 또다른 진보교육감이 차지하게 된 것도 반갑지만(노옥희 교육감님의 갑작스러운 비극은 아직도 가슴 아프다) 무엇보다 전주을에서 진보당 강성희 후보의 당선은 놀랍다.

이것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있는데, 무엇보다 종북몰이 광풍 속에 강제해산된 통합진보당의 부활이라는 점을 꼽고 싶다. 2012~2014년의 종북몰이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기억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야말로 좌우를 넘어선 모든 세력이 총단결해서 종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한국사회에서 영원히 제거하려고 했다.

이제 그 세력은 제도정치권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8년만에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신영복 글씨체라는 이유로 처음처럼도 안마신다는 술고래 윤석열이 종북몰이 시즌2를 위해 종북간첩단과의 전쟁을 선포한 상황에서 말이다. 윤석열의 어제밤 술맛이 떨어졌을 것을 생각하면 통쾌하기만 하다.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는 시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한미일 군사동맹과 전쟁연습에 반대하고 반전평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국회에 들어간다는 것도 의미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데도 다른 진보좌파들은 무관심하거나 취약한 반면, 이 문제에서 진보당만큼 입장이 분명하고 실천적인 세력은 흔치 않다.

강성희 후보가 자동차사내하청노조 활동가와 택배노조 활동가 출신이라는 것도 강점이다. 윤석열이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말하며 민주노총을 비난하는 역겨운 논리를 펴던 상황에서 정말 비정규직, 하청, 플랫폼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무엇이지 보여 줄 기회일 수 있다. 윤석열과 국힘에 대한 반대가 도로 민주당을 넘어서 진보정치의 희망으로 연결될 가능성도 반갑다.

물론, 진보당과 강성희 후보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 수는 없다. 정치적, 전략적, 전술적 차이와 이견들은 차차 계속 토론해 나가더라도,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대한 진보당의 분명한 반대와 비판이 아쉽다. 그것이 강대국의 패권을 반대하고 소수민족의 자결권과 반전평화를 말하던 태도에도 부합할 것이다.

다만 그런 이견과 차이 때문에 함께 기쁨을 느끼며 축하할 마음이 사라질 수는 없다. 지난해 민주노총 확대간부 설문조사 결과를 다시 돌아보면 대선 때 진보정당에 투표한 간부는 48%, 민주당은 42.6%, 국힘은 7.3%였다. 조합원으로 넓히면 이 비율은 더 커질 것이다.

사실, 이번에 전주을에서도 민주당의 무공천이 없었다면 당선은 쉽지 않았을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압도적 진보좌파 지지라는 목표로 바꿔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도, 한순간의 도약도 아닐 것이고 온갖 우여곡절로 가득할 것이다. 나아가 조합원을 넘어서 모든 시민과 유권자들까지도 변화해야 양당체제를 넘어선 진보적 권력에 다가갈 수 있다.

그 오래고 힘든 과정에서 일단 필요한 것은 서로의 성공을 돕고, 함께 기뻐하는게 아닐까 싶다. 그 점에서 전주을에서 녹색당이 진보당을 지지해주고, 페미니즘당이 함께 정책협약식을 하고, 정의당 강은미 의원이 강성희 당선을 자기일처럼 기뻐해 준 것은 반가운 장면들이었다.

세월호 참사 9주기가 다가온다

세월호 도봉지킴이분들이 준비한 9주기 행사들에 동참해서, 오늘 아침에 창동역에서 세월호 9주기를 잊지말고 기억하자는 출근길 피켓팅을 했다. 다양한 추모행사뿐만 아니라 이런 출근길 피켓팅을 한달 내내 돌아가면서 할 계획을 세우신 것을 보면 정말 그 마음에 감탄하게 되고, 작은 힘이나마 보탤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9년전의 잊을 수 없는 그날과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곁을 떠난후 9년의 시간이 어떠했을지 생각하면서 피켓팅을 했는데, 출근길에 바쁜 중에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이고 노란 리본을 집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떤 분은 수고한다면서 샌드위치를 사주고 가기도 했다.

하지만 반년밖에 지나지 않은 이태원 참사도 기억하지 못하고 지워버리고 있는 윤석열 정부가 세월호 9주기를 기억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윤석열 정부는 세월호 참사에서 어떡하면 참사를 지워버리고 진상규명을 가로막고 유가족을 탄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배우고 기억하는 것 같다.

이것을 윤석열 정부에게 계속 코치하면서 각종 논리와 방법을 계속 제시하고 있는 것은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수시로 민주당 등이 세월호 괴담을 퍼트리며 반정부 정치판을 벌이고 9번이나 쓸데없는 조사를 반복하면서 혈세를 낭비했다. 이태원으로 그것을 반복하려 한다는 주장과 논리를 칼럼, 기사, 사설로 계속 내보내고 있다.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핼러윈 참사를 '세월호 시즌2'로 만들려고 하느냐")이나 진중권 교수(‘세월호 때도 그렇게 난리쳤잖아요’, ‘세월호 때처럼 또 한판 벌이겠다는 얘기잖아요’)같은 이들이 이와 다를 바 없는 주장을 하는 것을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이들은 9번이나 조사하고도 진상이 밝혀지지 못할 정도로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강력한 힘과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려하지 않는다. 이런 이들이 과연 지난해 나온 사참위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보고서>를 한줄이라도 읽어봤을지 의심스럽다.

이 보고서는 세월호 참사에 책임있는 국가기관 중에서 국정원, 경찰, 검찰에 대한 조사는 9번 동안에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똑같은 문제가 이태원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도 가로막고 있고, ‘과거사위원회를 보면 반세기도 더 지난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아직도 안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합리적이고 과도한 의혹 제기나 음모론에 대한 경계를 넘어서 세월호 침몰의 진상은 이미 어느 정도 밝혀졌고, 더 이상의 자세한 조사는 불필요하다는 일부 지식인, 전문가들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이것은 <뉴스타파>를 항상 높이 평가하면서도 예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의 특징은 자신들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지만 다른 이들은 정파적이고 편향적이며, 자신들은 진정성이 있지만 다른 이들은 잘못된 의도를 가지고 세월호에 관여한다고 전제한다는 점이다. 바닥에서 충돌하는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이다.

하지만 아직 세월호 침몰에 대한 어떤 가설도 명백한 증거로 검증 확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런 식의 구분은 진실을 찾으려는 옳은 태도가 아닐 것이다. 모든 정보와 자료의 투명한 공개를 요구하고, 의혹들을 낱낱이 검증해나가면서 함께 진실을 찾아나갈 과제는 여전하다.

디지털 뱅크런과 경제 위기의 징후

경제 위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항상 거리를 두고 싶은 것은 파국론이다. 경제적 상황에 대한 좌파적 분석은 대부분 파국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석들 대로면 지난 수십년간 도대체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고, 대부분 최악의 시나리오가 가정된다. 그걸 읽다보면 곧 경제적 붕괴가 닥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에 따르면 그동안 경제적 붕괴와 파국이 몇 번이라도 왔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자본주의 경제가 수많은 모순을 가진 불안정한 체제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파국론적 가정과 결론은 피하면서도, 최근의 위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처음에 위기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은행에서 시작했다.

이 은행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소문이 돈지 불과 하루만에 50조가 넘는 돈이 빠져나갔다. 이것은 휴대폰으로 쉽게 돈을 옮길 수 있는 디지털 뱅크런의 파괴력을 보여줬고, 비슷한 문제가 있는 은행들이 20개는 더 된다는 관측은, 이후 시그니처 은행의 붕괴, 크래딧스위스 은행의 위기와 퍼스트리퍼블릭 은행의 파산 위기로 이어졌다.

특히 주목받는 것은 이 은행들이 2008년 금융위기 때처럼 주로 불안정한 파생금융상품에 투자한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장 안전하다는 미국 국채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코로나가 끝나면서 양적완화를 중단하고 금리를 인상하자, 미국 국채의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이 은행들은 돌아오는 상환 요청을 국채를 팔아서 메우기가 어려워졌다.

또 주택저당증권도 많이 보유하고 있었는데, 부동산 거품 하락은 위험을 더욱 키웠다. 비슷한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은행들이 많은 상황에서 금융시장은 지뢰밭처럼 인식되기 시작했고,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양적완화와 가계부채를 국가부채로 옮겨놓은 것이, 양적긴축과 금리인상 속에 새로운 뇌관으로 변해 버린 셈이다.

문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에 격해진 에너지난, 고물가 속에서 금리인상을 멈출 수도 없다는 것에 있다. 당장은 은행 위기를 막기 위해 다시 돈을 쏟아붓고 금리 인상도 멈춘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것은 양적긴축과 금리 인상을 통해 해결하려던 문제들을 다시 돌아오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지금 미국 정부와 지배층은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두가지 요인이 이러한 딜레마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 하나는 돈을 쏟아부어도, 다시 거둬들여도 기업들의 투자와 수익이 크게 회복돼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경기가 좋고 기업들의 수익이 충분하면, 국가의 조세 수입도 증가하고 은행들도 여유가 있고 위기에 대처할 실탄도 충분할텐데, 상황은 그 반대이다.

또 하나는 미국의 자본과 투자가 중국으로 가고, 중국의 값싼 상품이 미국으로 오고, 미국은 인플레 걱정없이 돈을 풀고, 중국은 다시 미국 국채를 사들이는 선순환 구조가 이제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협력관계는 이제 안보적 대결 관계로 바뀌었다. 가장 안전한 자산이었던 미국 국채는 지금 위기의 방아쇠가 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배제한 새로운 공급망 구축으로 이 상황을 돌파하겠다면서 다른 나라들에게 비용을 떠넘기며 팔을 비틀고 있다. 미국 물건을 사고, 미국에 공장을 짓고, 반도체 기술도 넘기라는 식이다. 윤석열 정부는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었다면서 이것을 졸졸 따라가기 바쁘다. 아무런 대책이 없어 보이고, 무역수지나 경상수지는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더구나 한국 또한 막대한 가계부채뿐 아니라 부동산 PF 대출잔액이 금융 위기의 뇌관으로 존재한다. 감세정책 때문에 세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그저 해외여행을 자제하고 원전 수출로 돈을 벌자는 정도의 계획만 제시하면서, 오로지 노동시간 연장과 반노조 탄압등을 통해서 노동자들을 쥐어짤 궁리만 하고 있다.

요즘 족벌언론이나 경제신문들을 보면 이러한 윤석열 정부의 무능력, 무대책, 헛발질에 대해서 지배계급들 사이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상당히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이런 불만이 2016년 촛불 때처럼 기득권 카르텔의 심각한 분열로 나아갈 것인지는, 지금의 반윤석열 투쟁과 연대의 힘이 얼마나 커질 수 있을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윤석열 외교참사 뒤의 바이든 그림자

거듭 말하지만 이번 강제동원 해결은 일본의 완승이고 죽은 아베가 무덤에서 웃고 있을 일이다. 일본 국가와 지배계급은 이제 평화헌법으로 묶여 있던 족쇄를 풀어버리고 적기지를 선제공격하고 전쟁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를 향해서 더 성큼 전진하게 됐다. 군사대국으로 나아가면서 유사시에는 한반도에도 군대를 보낼 가능성이 커졌다.

따라서 이번 합의를 비판하면서 윤석열은 단지 친일이 아니라 일본놈이다’, ‘역시 토착왜구란 용어는 옳았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은 이해가는 면이 있다. 한국의 보수우파가 일본 지배계급과 공동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하위 파트너로 스스로를 집어넣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인종혐오적이라는 반발을 일으키며 일본과 한국의 보통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보수우파들이 반격할 빌미만 준다는 점에서 그런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게 옳다.)

그런데 사실 이번 역사적 만행의 더 큰 책임자는 미국과 바이든 정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이든 정부는 국내 정책에서는 분명 트럼프보다 나은 점이 있지만, 대외 정책에서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을 위해서 최악의 선택을 계속하고 있다. 두드러지는 것은 동아시아에서이다. 중국을 봉쇄하기 위해서 일본을 앞세우고 한국의 팔을 비틀어,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덮어버리며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이 물을 만난 것 같은 태도로 이 지역에서 온갖 무시무시한 첨단무기를 동원한 세계최대 규모의 전쟁연습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1년 내내 계속되고 있어서 무감각해지고 있지만, 이런 강력한 살상무기들을 동원한 대규모 전쟁연습은 너무 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당연히 북한의 군사적 대응과 반작용을 낳고 있고, 바이든과 윤석열은 그것을 더 큰 전쟁연습의 핑계로 사용하지만, 누가 봐도 이것은 중국을 겨냥한 전쟁연습이고 압박이다. 그러면서 미국은 대만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을 때 한국군이 투입돼야 하고, 한반도를 미국과 중국의 제한적 군사대결의 전쟁터로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몰아가고 있다.

결국 미중 갈등은 이렇게 무역전쟁 -> 기술전쟁 -> 군사전쟁이라는 갈수록 위험한 방향으로 상승 발전하고 있는데, 여기서 미국과 바이든의 구실은 핵심적이다. 기존강대국과 신흥강대국의 패권 다툼이 전쟁으로 치닫는 투키디데스의 덫이 문제라면, 이 덫을 조심하고 피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앞장서 걸어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중국은 훨씬 조심스럽다. 중국이 최근 중동에서 그토록 서로 불신하고 싸우던 사우디와 이란을 중재해서 화해하도록 한 것은 욕하기 어렵다. 비록 힘이 빠지는 미국의 빈 틈을 노리는 작전이고, 800여개의 해외 군사기지를 가진 미국에 비해 그런 것도 없고 군사비도 1/3에 불과한 중국으로서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미국과 바이든이 평화를 위협하며 전쟁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열어가고 있다는 점은 달라질 수 없다. 북한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트럼프는 북한을 달래거나 대화하려 한다는 것에서 나은 점이 있었다. 비록 북한을 중국 옆에서 떼어놓거나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목적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바이든은 오로지 중국 압박용 군사력 증강과 군사동맹 강화를 위한 핑계 마련을 위해 북한을 압박, 자극하며 위험천만한 불장난에 매달리고 있다. 그러면서 북한에게 섣불리 오판하면 정권의 종말이 올 것이라며 협박하고 있다. 군사력 2위부터 10까지 국가를 다 합쳐도 못이기는 미국의 군사력을 볼 때, 이것은 사실일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북한 정권의 종말만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모든 생명의 종말일 것이라는 점에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언급하면서 한반도에서 전쟁은 시작과 함께 끝날 것이라고 했다. 대피하고 그럴 시간도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미국과 바이든만 졸졸 따라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한미동맹 지상주의자이며 북한붕괴론, 선제타격론, 자위대 한반도 개입론자인 김태효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얼마전 국민의힘 북핵위기특별위가 제주도에 미국 핵무기를 배치하고 제2공항에서 미국 핵폭격기를 이착륙하게 하자고 한 것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는 다음 총선 때 여가부 폐지와 함께 핵무장을 공약으로 지지층을 결집할 계산으로 보인다.(이미 핵무장 찬성이 반대를 훌쩍 넘어섰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돌고 있다.)

지난해 윤석열이 선제타격을 떠들던 때에는 그나마 미국에게 전시작전권이 있는게 다행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 한미일 군사동맹 구축으로 내달리며 화약고 옆에서 불을 지르는 바이든 정부를 보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요즘은 중국이나 북한이 조금이라도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를 기대하게 된다. 불안하고 또 불안하다.

검찰수사권 축소와 외국인 무기한 구금에 대한 판결의 뒷면

얼마전 헌법재판소에서 나온 두가지 판결 소식은 매우 반가운 것이었다. 하나는 한동훈과 국민의힘의 검찰 수사권 축소 법안의 무효청구가 기각된 것이다.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에 대한 독점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는 저들의 오만하고 황당한 논리는 아무런 헌법적 근거도 없고 정당하지 않다며 완전히 기각됐다.

오히려 더 나아가 헌법재판소는 직접 수사권을 행사하는 검찰이 영장신청도 결정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데, 억압적 국가기구 중의 하나가 이렇게 북치고 장구치고를 다 할 수 있으면 필연적으로 심각한 인권침해와 조작 수사 등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기구의 핵심 구성원들이 수사의 목적은 유죄입증이라는 정순신이나 최고의 나르시스트인 한동훈같은 자들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또 하나의 정말 너무나 반가운 판결은 외국인보호소에서 무기한 구금을 가능케 하는 출입국관리법 제63조 제1항에 대해 위헌 판결이었다. 이 기가막힌 조항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이주민과 난민들이 끔찍한 고통과 인권유린을 겪었는지는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 단지 희망을 찾아서 낯선 땅을 찾아온 범죄자도 아닌 무고한 사람들이 몇 년 동안 감옥보다 못한 곳에서 기본적 인권도 보장받지 못해 왔다.

우리가 이 판결들에 기뻐하는 것은 그것이 법의 신성함을 보여줬기 때문이 아니라 인권과 정의에 부합하는 판결이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가 나름 전향적인 결정을 내리는 경향은 지난 몇 년 동안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 대표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나 임신중단에 대한 판결이 그랬다. 그런데 기쁨과 함께 먹구름처럼 밀려 오는 걱정을 다시 한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윤석열 정부가 앞으로 남은 4년 동안 헌법재판소 재판권 9명 전원을 교체해서 임명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이번 판결들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결정에 반대한 소수의견의 존재다. 검찰 수사권 축소 법안은 무효이고 수사권과 기소권은 검찰의 천부적 권리라는 입장에 선 소수의견은 4명이었고, 이주민과 난민의 무기한 구금은 필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법체류 외국인이 급증할것이라는 소수의견도 3명이었다.

이중에 겹쳐지는 3명은 동일한 사람들이었고 보수 정권에서 임명한 보수적 재판관들이었다. 반면에 전향적인 입장을 보여 준 5~6명의 재판관은 조선일보와 진중권같은 이들이 낙인찍으며 비난한 소위 문재인이 지명한 우리법연구회와 민변 출신의 재판관들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이런 사람들을 몰아내고, 이번에 소수의견을 낸 것 같은 사람들로 채울 것이다. 그러면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 강제해산같은 놀라운 반역사적 판결을 내렸던 시절로 돌아갈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윤석열 정부가 임기 4년을 그대로 채우도록 나두고서는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인다. 결국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이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지적한 것처럼 중요하고 신성한 것은 법이 아니라 인권과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강력하고, 거대하고, 끈질긴 오랜 투쟁이 필요한 시절이다.

“이 세상의 모든 권리는 투쟁에 의해 쟁취되며, 중요한 모든 법규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법규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맞서 투쟁함으로써 쟁취된 것이다... 법의 역사가 보여주는 모든 위대한 업적, 즉 노예제나 농노제의 폐지, 토지소유권의 자유나 영업 혹은 신앙의 자유와 같은 이러한 모든 것들은 치열하게 그리고 수세기에 걸쳐서 계속된 투쟁을 통해 쟁취되었다.”

급진좌파들 속에서도 성폭력과 잘못된 대처가 반복되는 까닭

미국와 유럽의 급진좌파들 속에서도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잘못된 대처와 후폭풍이 끊히지 않는 것 같다. 아래 글https://bit.ly/3zdV8OL은 그것을 다루고 있는데, 과거의 여러 경험들을 또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번역도 하고 해 왔지만, 역시 유사한 경험을 통해서 나오는 고민과 교훈들은 겹쳐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런 고민과 돌아보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먼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정답이고 대부분의 문제에 대한 가장 명확한 해답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전통에 대한 의문과 이견 제시를 불온시하기 시작하면, 페미니즘이나 생태주의를 비롯해 끝없이 계속되는 정말 다양하고 풍부한 이론적 발전에서 배울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차단하는 결과만을 낳는다.

“정통 마르크스주의 경전들 외에 다른 책을 못 읽게 할 정도로 진짜로 정통 마르크스주의 방식만을 고집한다면, 성폭력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이론적 발전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온갖 주제들에 대해 건강한 의견 차이를 가질 수 없는 조직이라면, 성폭력 문제를 잘 처리할 가능성은 절대로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우리는 공정하고 철저한 내부적 규율과 징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확신도 매우 위험하다. 그러한 소환-조사-징계시스템은 오히려 심각한 편향과 문제들을 낳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검찰같은 억압적 국가기구를 어설프게 흉내내면서, 자유주의가 이루어낸 국가 억압에 대한 완화조차 따라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내부적으로 성폭력을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마치 작은 국가라도 된 양, 부르주아 법정 시스템을 흉내 내면서 말이다. 내 경험으로는, 그럴 경우 부르주아 법정 시스템에서 나오는 온갖 나쁜 일들을 겪고 트라우마를 얻게 되면서도, 부르주아 법정 시스템에서 해주는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된다.”

또 문제인 것은 조직 건설과 보존과 성장 그 자체가 너무나 중요한 목적이 돼버리면, 그것에 기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게 되고, 그것은 그런 사람들이 조직의 중요한 간부와 지도부를 구성하면서 더욱 더 폐쇄적인 조직이 되어간다는 점이다.

“당 자체가 목적인 당을 만든다는 것은... 조직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바칠 수 있는 사람의 지위가 높아지는 문제도 있다.” “건강한 조직이라면, 자신의 건강과 안녕을 해칠 정도로.. 헌신한 사람을 보면, 개입해서 ‘이봐요, 동지 괜찮아요? 동지의 삶은 문제없이 잘 되고 있나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소수정파에서 평생 당에 몸담고 있는 누군가는... 중요한 간부가 되곤 한다... 신문을 팔 대학생을 몇 명 조직했다고 조직화의 슈퍼스타로 떠받드는 것”

결국 문제는 과연 레닌주의적 중앙집중주의 조직이란 것이 여전히 타당한 모델이냐는 고민으로 연결된다. ‘혁명이 인류의 대안이다 -> 혁명정당이 있어야지만 혁명은 성공한다 -> 혁명정당을 만들려는 우리는 너무나 중요한 사람들이다는 삼단논법은 반드시 의심해봐야 한다.

“당신이 어디든 작은 사회주의 조직이 인류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 속에서 나타나는 사람들 사이의 위해와 폭력을 어느 정도 정당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도부 및 ‘레닌주의’ 권위의 안정적 보존을 최우선시 하다보면, 억압 행위를 한 구성원, 특히 소위 지도자를 징계나 제명하는 것을 피하려고 할 수 있다.” “소위 레닌주의 정당 모델이라고 불리는 것은 정말 시대에 뒤떨어진 모델이고 완전히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타나는 문제들은 단지 운동사회와 정치조직만이 아니라 검찰이나 종교집단 등 어디서든 자신들이 사회를 이끌어야 하고 옳은 길을 가고있다는 지나친 확신으로 가득하고, 그것에 대한 의문과 이견은 거의 허용돼지 않고, 지도부의 권위와 권한이 너무나 강력한 모든 집단에서 나타나는 문제로 보인다.

반일은 틀렸는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우

몇 번 이야기했지만 윤석열 정부와 일본 정부의 반역사적 야합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는 것을 백분 이해하더라도 토착왜구’, ‘일본놈같은 용어나 표현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일은 좀 다르다. 민족주의와 거리를 두는 좌파적 순수성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어떤 분들은 반일도 잘못됐다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단순하지가 않다.

물론 민족주의는 궁극적 대안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계급만, 젠더만, 인종만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궁극적 대안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예컨대 젠더나 인종은 중요하지 않고 무조건 계급만 단결하면 된다는 입장은 가장 좌파적인 듯 보이지만 구체적 현실에서는 심각한 오류로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계급을 기각해야 한다는 말이 될 수는 없다.

민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모순을 외면하고 민족적 단결만 강조하는 입장은 문제이지만, 민족적 억압과 모순을 기각할 수는 없다. 그 점에서 반일은 민족주의이고 틀렸다는 주장은 너무 단순한 것이다. 식민지배와 전쟁범죄 속에서 청산하지 못한 피해와 가해라는 명백한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물론 이 속에도 당연히 계급과 젠더는 연결돼 있었다.)

이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대개 반일로 표출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것을 무시하고 반일도 문제고 혐한도 문제다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와 현실을 삭제하는 공허한 추상에 머물게 된다. 게다가 어떤 집단의 권력을 가진 지도부와 통제 속에 있는 구성원들을 구분해서 표현하고 비판하는 것은 항상 쉽지 않은 문제이다.

우리는 당연히 삼성의 경영진과 노동자들을, 국민의힘의 지도부와 평당원이나 지지자들을 구분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반삼성’, ‘반국힘의 구호로 표현되기 십상이다. 그것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따지기 어려울 때가 많다. 예컨대 지금 우크라이나 민중에게 우리가 반러시아가 아니라 반푸틴이라고 고나리질을 한다면 정당한 반발만 불러올 것이다.

베트남 민중이 한국군의 전쟁범죄를 비판하며 반한을 말하는데 우리가 반성하고 사과하는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반윤석열이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뻔뻔스럽게 보일까. 어떤 단체에서 성폭력을 겪은 피해자가 그 단체의 나머지 회원들과 칼같이 분리해서 그 단체의 지도부만 골라서 비판하기는 말처럼 쉬운게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 보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우리가 반이스라엘이 아니라 반네타냐후가 옳다고 가리치려 한다면 그것은 주제넘게 보일 수 있다. 사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좀 더 복잡한데,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자체가 중동의 한복판에서 살고있던 아랍인들을 내쫓고 서방 제국주의의 개입과 패권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강탈국가라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보통 시민들도 팔레스타인과 아랍 민중을 억압하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냉정한 사실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진보적 좌파들마저도 팔레스타인 억압에 반대하는 것을 보기가 쉽지 않고, 이것은 아랍 민중의 연대를 넘어서 팔레스타인 민중과 이스라엘 민중의 연대를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 최근 이스라엘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네타냐후 정부가 사법개악을 추진하면서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규모의 저항이 폭발하고 있다. 네타냐후 정부가 자신들의 비리를 덮고 독재적 통치를 위해 사법부의 독립성을 파괴하는 개악을 추진하고, 이에 대한 시위마저 폭력 진압하면서 저항은 더욱 거대해지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네타냐후의 극우연합 정부는 얼마전 재집권 이후 팔레스타인에 대한 학살과 폭격을 더욱 강화해 왔다. 그래서 지난 반년간 팔레스타인에서는 최악의 유혈사태와 인명살상에 대한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이것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네타냐후가 임명한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우익 벤 그르비 치안장관이다.

네타냐후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끔찍한 억압을 자행하면서, 내부적으로 독재적 통치를 위한 사법개악을 추진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의 반정부 시위 현장에서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주장도 아직 크지는 않지만 일부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이런 목소리가 더욱 커지길 기대한다. 이스라엘에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침묵과 외면을 반성하고 팔레스타인 억압에도 반대한다는 것을 분명히 할 때,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자신들의 투쟁 상대가 이스라엘 정부와 국민 전체가 아니라, 권력을 가진 상층부라는 것을 더 분명히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반일의 경우에도 비슷한 점이 있다.

사회적 다수파가 내부적 소수파가 될 때의 딜레마

세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누군가를 괴롭히는 다수파에 속하는 사람이 특정한 공간에서는 다수의 매도를 당하는 소수파가 되는 것을 때때로 보게 된다. 예컨대 지금 윤석열 정부, 언론, 자본은 대체로 한 목소리로 노동운동을 공격하고 탄압하면서, 다양한 수단으로 괴롭히고 있다. 그러면서 양보와 타협을 강요한다.

반면에 노동운동 안에서는 협상과 양보를 주장하는 사람이 소수파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 문제는 그런 사람에 대한 비판이 배신자’, ‘변절자라고 하는 저주섞인 악플과 욕설과 막말까지 등장하는 집단적 따돌림이나 공격으로 발전하는 경우이다.

지금 윤석열 정부, 주류언론, 국가기관이 야당 대표를 거의 조리돌림 수준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그러면서 대표에서 물러나서 체포와 구속에 응하라고 압박한다. 반면에 야당 안에서는 그런 압박에 타협하고 후퇴하자는 주장이 소수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소수파는 마찬가지로 수박이라 불리며 열성당원들의 문자폭탄, 악플에 시달린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중요한 것은 누가 사회적으로 다수와 주류의 편에 있고, 누가 소수와 비주류의 편에 있는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간첩단까지 조작하면서 노동운동을 마녀사냥하고 노동 개악을 추진하는 윤석열 정부와 주류언론이 만들어낸 구도 속에서, 노동운동이 정부하고 대화하고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또 정치검찰과 족벌언론들의 일방적 조리돌림이 속에서 야당 대표가 무조건 사퇴하고 체포 위험을 감수하라고 압박하는 것도 동의하기 어렵다. 이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주관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윤석열 정부, 집권여당, 주류언론, 정치검찰 등 사회적 주류 세력이 듣고 싶어하는 주장을 펴며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셈이다.

그리고 이들 사회적 다수파와 주류인 세력이 검찰 등 억압기구와 언론을 이용해 상대에게 쏟아붓는 공격은 노동운동이나 야당에서 내부적 소수파를 향해 쏟아지는 공격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강력하다. 국가 권력과 사회경제적 힘을 이용해 상대방을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마녀사냥과 조리돌림은 여기서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노동운동이나 야당 내부로 눈길을 돌려보면 양상이 달라진다.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윤석열 정부의 하수인, 변절자라고 매도를 당하게 된다. 대표 사퇴와 영장심사 출석을 주장하는 사람은 검찰공화국에 굴복하자는 배신자라고 비난받게 된다.

노동운동이나 야당에서는 상대방을 언론과 포털을 동원해 좌표찍고, 압수수색하고, 영장을 치고, 구속하고 이럴 힘이 없으니 강한 표현의 비난에 더욱 매달리게 되고, 정치적 비판은 감정적인 비난과 막말로까지 발전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것은 검찰과 언론이 표적을 괴롭히는 것과는 분명 그 성격과 수준이 다르지만, 다소 비슷한 양상으로 변해간다.

그러면 몰리는 사람들은 이것은 마녀사냥이고 조리돌림이다라고 반발하게 되고, 그것이 낳는 내부적 갈등과 불신은 심각한 분열로 발전하고, 족벌언론들은 그걸 이용해 이들 내부에서 이런 아귀다툼과 균열이 벌어지고 있다며 또 공격의 명분과 이간질의 기회로 삼아서 노동운동과 야당을 대중적으로 고립시키려고 한다.

결국 반동적 권력과 억압기구, 족벌언론들에 맞서서 타협하고 후퇴하자는 잘못된 주장을 비판하면서 더 강력한 저항을 구축하겠다는 의도와 달리, 그것은 내부적 불신과 갈등과 분열을 키우면서 연대와 투쟁을 더 어렵게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따라서 동의할 수 없는 잘못된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정치적 비판과 토론을 통해서 대응해야만 한다.

결코 지나친 감정적 매도, 인신공격, 무분별 의혹 제기, 막말과 욕설, 명단작성, 좌표찍기, 조리돌림, 낙인찍기, 딱지 붙이기, 강제태그, 사이버불링 등으로 공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검찰과 주류언론이 자행하는 공격만큼은 아니겠지만 마찬가지로 정의로운 방식이 아니고, 정치적 역효과만 낳는다. 무엇보다 기득권 카르텔이 정치적 경쟁자를 괴롭히던 바로 그 방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나 상대방이 그런 입장을 숨기고 있다가 뒤통수를 치는데, 어떻게 정치적 토론과 설득으로 문제가 풀린다는 말인가라고 되묻는다. 그러나 솔직하게 돌아봐야 한다. 과연 어떤 입장이든 눈치보지 않고 부담없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였는가? 특정한 방향을 대세로 몰아가며 답은 정해진 분위기 아니었는가? 내부적 소수의 주장은 묵살되지 않았는가?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그 집단에서 다수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침묵하게 되고, 결국 나중에 다른 선택과 행동을 하게 된다. 서로 다른 생각을 드러내놓고 토론하고 설득하는 과정도 없었는데, 왜 다수파인 우리와 다른 선택과 행동을 하냐고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견을 존중하는 토론과 설득, 비판과 반박 속에서 함께 생각을 모으고 길을 찾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한 포악한 권력과 자본에 맞서서 강력한 저항과 연대만이 대안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윽박지르는게 아니라, 그것만이 가장 효과적인 길이라는 것을 설득하고 실천에서 입증하는 것을 통해 받아들여질 것이다.

(기사 등록 20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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