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요즘 다른 공부를 하고 있지만, 2000년대말에 제가 한국에서의 러시아 이미지의 역사를 한 때에 연구했습니다. 그 때에 그 연구를 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정말 칸트의 말대로 외물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실체는 그야말로 칸트적인 物自體, (Ding an sich), 관찰자들의 인식과 전혀 별도의, 제대로 알 수조차 없는 그 무엇인가입니다.
한국인을 포함하여 그 관찰자들이 보게 되는 표피적인 현상은, 그 물자체와 가끔가다가 엄청난 간극을 벌이는 것이죠. 그러니 러시아에 대한 인식의 역사는 한국에서는 환상과 환멸의 역사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역사는 계속 이어져 나간다는 인상을, 저는 요즘 불식하기가 여럽습니다.
첫째의 환상은, 구한말 때에 많은 지식인들이 가졌던 "최고의 강국, 러시아"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민영환의 <海天秋帆>이나 <千一策>에서는 이런 이미지는 확실히 보이지요. 러시아에서 갔다오고, 대관식에서 그 황제 니콜라이 2세도 알현한 민영환은, 일단 러시아의 상비군이 세계 최다의 1백20만 명에 달하고 있다는 점 등에 착안하여, 러시아를 대단한 강대국으로 본 것입니다. 실제 1900년에 중국 의화단 봉기의 진압에 러시아가 10만 명의 병사를 파견했는데, 그 진압군은 여라 열강 중에서는 제일 규모가 컸던 것이죠.
그래서 공로증 (恐露症)이 심한 일부 지식인 (유길준 등)이 러시아를 "야수적인 진나라"의 후신 쯤으로 보고 경계하는 한편, 고종 황제와 그 측근들은 러시아의 "보호"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한데 보수적 근왕파도 유길준 등의 입헌군주론자들도 철석 같이 믿었던 러시아의 "강함"은, 1904-5년에 러일 전쟁의 패배가 계기 되어 사실이 아닌 신화로 밝혀지고 말았습니다. 러시아는 고종의 황위를 보호할 후견국도 아니고, "야수적인 진나라"도 아니고 이미 치명적인 위기에 빠져 있었던 일개의 후진적 전제 제국에 불과했습니다.
둘째의 환상은, 결국 스탈린의 "1국 사회주의"의 진보성이었습니다. 중국만 해도 스탈린의 독재가 본격화돼 가는 1927년 이후에는 상당수의 트로츠키파, 즉 반스탈린파를 배출했지만, 한국의 식민지 시기 사회주의 운동사에서는 왼쪽으로부터의 스탈린주의 비판을 (아나키즘 이외에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소련/스탈린이 일제를 쳐부시어 조선을 해방시킬 데에 대한 희망이 컸던 것입니다.
1937년 가을에 스탈린 정권이 20만 명의 원동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고 고려인 지식인 2천 여명을 총살 내지 징역형에 처하게 했는데, 이 소식이 조선 국내에서 알려져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의 반응은 그다지 없었습니다. 스탈린의 소련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했는지, 1940년대말에 소련을 두 번 방문한 이태준은 계속해서 모스크바 등지에서 포석 조명희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포석은 말도 안되는 "친일 간첩" 혐의로 1938년에 처형됐는데, 소련이 조선으로부터의 혁명적 망명자를 죽였다는 생각을 이태준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 그리고 스탈린과 마오에 영향을 받았던 김일성의 통치 방식에 대한 좌파적 비판은, 주로 재외 좌파 지식인, 예컨대 중국의 김학철이나 소련의 허진 (<북조선왕조성립비사:김일성정전>의 저자)이나 이상조 등에 나타납니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환상의 청산은, 한국 국내의 좌파들 사이에서는 아마도 1990년대가 와야 비로소 어느 정도 본격화된 것입니다. 1980년대에 소련은 일각의 운동권 사이에서는 거의 "이상향"으로 인식됐는가 하면, 1990년대에 스탈린주의 패망에 대한 환멸은 아예 사회주의적 모색 그 자체에 대한 거부와 대대적인 보수화 등으로 나타납니다.
러시아에 대한 인식은 그야말로 "극과 극"을 오가게 되고, 그 "극과 극" 사이에 "러시아"라는 물자체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제가 한국에서의 러시아 인식사 연구를 했던 2000년대에는, 사실 러시아에 대한 국내적 관심도 매우 저조했습니다. 그 당시의 푸틴 체제 초기의 러시아는 서방과 동아시아에 대한 자원/재료 공급자이자 외국 완제품의 시장, 즉 전형적인 "주변부"로 신자유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그 자리를 잡은 듯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란, 거기에다 차나 가전제품을 팔려 했던 재벌 기업 쪽에서 가장 많았던 것입니다. 한데 2008-9년의 위기 이후에는 상황이 급격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신자유주의는 세계적으로 공황에 빠져버리고, 미국은 이라크에서 패퇴하는 등 "패권 누수"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러시아에서는 강고화된 권위주의 체제는 외부로의 "확장"의 기회를 이제 막 노리기 시작합니다.
푸틴 정권의 중기, 즉 2010년대에는 신흥의 러시아 국가 주도 자본주의는 그 주변의 과거 소련 시절의 영토들을 다시 확보하려는 움직임들을 본격화하고, 그 움직임들이 계기가 되어 약화돼 가는 미국 헤게모니와 서로 충돌합니다. 이 충돌이란, 누가 봐도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간의 모순에 해당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예컨대 돈바스 등의 그 "외부 영향권"에서는 노동자의 복지에 신경을 쓰거나 노동자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한 바 없었습니다.
그저 과거 우크라이나의 대자본이 소유했던 자원이나 공업 자산들은, 러시아 내지 현지 친러 기업인들의 손에 넘어간 것이죠. 한데 "반미"를 최고의, 지상의 가치로 인식해온 국내 일부의 좌파적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 정권과 자본의 미국과의 경쟁과 대립을, 마치 무슨 "민족 해방 운동"쯤으로 오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에 대한 세번째의 환상, 즉 푸틴의 "반미"에 대한 환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환상들은 2022년2월 이후, 즉 말기의 푸틴 정권이 군국 체제/사회 총동원 체제/수입 대체 공업화 체제로 전환하면서 벌인 우크라이나 침공의 시기에 그야말로 꽃을 피게 됩니다. 국내의 일부의 진보적인(!) 대학 교수 등은, 갑자기 푸틴의 프로파간다와 거의 구별이 가지 않는 주장들을 확산시켜 일각에서 푸틴 정권을 거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보적 대안"으로 인식하게끔 만들었습니다.
러시아에서의 예컨대 비정규적 내지 플랫폼 노동자들의 권리 등이 한국보다 더 침해를 많이 받고 민주 노조를 운영하거나 파업을 벌이는 게 한국 이상으로 더 어려운데도, 자칭 "진보주의자"들이 러시아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긍정적 "대안"으로 인식하는 것은 "환상의 역사" 속에서도 그 백미(?)에 해당될 것입니다.
지금도 러시아 침략으로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이 매일매일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심지어 민주노총 소속의 일부 노조에서까지 "부차 학살이 없었다"는 이야기들이 외부 강사들의 강연에서 종종 나온다는 것은 사실 한국 진보 운동의 역사에서 오점으로 남을 일입니다. 우크라이나에서 푸틴이 정권이 벌인 학살, 표적 암살, 불법 감금, 민족 탄압, 민족어 말살, 강제 이주, 강제적이며 강압적 징병 등의 전모가 다 밝혀질 때에는 과연 오늘날 국내에서 "친러"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뭐라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부의 골수 스탈린주의자들처럼 사실들을 끝까지 부인하면서 그들만의 인식론적 세계 속에서 살고 있겠죠? 미국을 비롯한 서방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물론, 당연히 필요합니다. 한데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러시아 등 그 경쟁 세력에 대한 무비판적인 추종으로 대체하면 결국 그 환상들이 언젠가 다수들에게 깨져 환멸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환상과 환멸"의 주기는, 궁극적으로 보수적인 기득권자들에게만 득이 되는 것이죠. 그 "환상과 환멸"의 악순환을 멈추게 하자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모든(!) 제국주의 세력들에 대한 實事求是이며 비판적인 태도입니다. 미국이든 러시아든 그 어떤 열강에 대해서도 그 어떤 환상도 가지면 절대 안되는 것이죠.
(기사 등록 20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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