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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전개와 오늘날의 전망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4. 10. 27.

[편집자 주] 원문에 실린 참고문헌과 주석들을 여기서는 삭제했다. 필요하면 아래 링크의 원문을 참조하라. 대신에 조형석이 부 용어와 개념들을 설명하는 역주를 첨가했다. 시간의 문제로 꼼꼼하게 교열을 하지는 못했다. 오역이 있다면 지적을 바란다(언젠가 꼼꼼한 교열과 감수를 거쳐 더 완벽한 번역본을 제출하겠다).


출처(링크): Neil Davidson, 'The neoliberal era in Britain: Historical developments and current perspectives', <International Socialism>, issue139.



닐 데이비슨(Neil Davidson)

2013년 7월 5일



자본주의가 세계 체제로 등장한 이래 세계 경제는 체제 전반에 걸친 위기를 네 차례 겪었다. 처음 세 차례는 각각 1873년, 1929년, 1973년에 시작되었다. 제라드 뒤메닐(Gérard Duménil)과 도미니크 레비(Dominique Lévy)가 썼듯이, “이 각각의 지진 같은 충격들은 새로운 사회 질서의 성립과 국제 관계의 철저한 변화를 불러 왔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대로 “현재의 위기가 비슷한 변화 과정의 서막에 해당”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종말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선언된 적이 있다. 때로는 같은 사람이 상황이 바뀌면 그제서야 신자유주의가 끝났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예컨대, 고(故)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19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2002년의 자서전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부고(訃告)를 되풀이하여 발표했다. 


하지만 홉스봄은 2008년에는 비슷한 선언을 자제했다, 그 때야말로 그런 선언이 훨씬 그럴듯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 가장 확고하게 신자유주의를 추구해 온 영국, 미국 같은 나라들을 포함하여 ─ 은 도산에 직면한 은행들의 지분을 엄청나게, 어떤 경우는 대부분 매입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예전 같으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거나 ‘시장을 왜곡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준으로 공공 지출을 사용해서 그렇게 했다.


2013년 4월 8일 쌔처(Thatcher)의 죽음은 신자유주의가 끝났다는 직감을 공고히 하는 듯했다. 비록 쌔처에게 당한 사람들에게 그 성대한 장례식은 터무니없는 모욕이었겠으나, 그의 숭배자들에게는 이 장례식이 극적인(theatrical) 보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 장례식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쌔처라는 인물이 “역사를 폐지해 버린 문화 속의 역사적인 각주” 정도로 전락해버린 세상에 남겨졌을 수도 있었다. 불행하게도, <데일리 텔레그라프>에서 <소셜리스트 워커>까지 정치적으로 다양한 지향을 지닌 이들의 부고기사와 그의 사망 관련 특별판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며 입증되었듯이, 우리는 여전히 쌔처가 만든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신자유주의는 스스로 붕괴했다”는 주장들을 마주할 때는 어느 정도 회의적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현재의 위기는 “탈-신자유주의(post-neoliberalism)”의 새로운 시대를 열지 못했으며, 뒤메닐과 레비가 주장한 바와 같은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프레도 사드-필류(Alfredo Saad-Filho)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지속되는 신자유주의 시대 안에서 위기를 겪고 있으며, 피착취자들과 피억압자들의 성공적인 저항이 없다면 이 위기는 신자유주의를 끝장내기 보다는 이를 한층 더 진화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2008년 이전과 이후의 신자유주의에는 한가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2008년 이전 시대의 주요 인물들 — 쌔처 자신을 포함하여 — 은 언제나 그 지지자들이나 반대자들이 본 것보다 더 실용적이었고 기회주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제나 작지만 분명한 목표와 전략들의 조합(이것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을 지라도)을 공유했다. 반면 오늘날의 계승자들은 그렇지 않다. 대신에 이들은 점점 증가하는 뚜렷한 공황의 직감과 그에 따른 혼란을 보인다. 이러한 혼돈과 불확실함 속에서도 세계의 지배계급은 한 가지 분명한 의견 일치를 보았다. 바로, 지금의 위기로 인한 희생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에게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몫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1970년대 중반 신자유주의 도입을 여러 측면에서 돌아보려 해 왔다.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문제에 대해 같은 해결책이, 똑같은 희생자들을 겨냥하여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세계사의 위대한 사건과 인물들”이 “처음엔 비극으로 다음엔 희극으로”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국가들에서 전후 시대에 기틀을 잡았던 사회 복지가 이미 확연히 줄어드는 판에, 지배계급이 자신의 목표를 성취한다면 처음의 비극을 확장하고 심화시킬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국면에 대한 저항은 이미 시작되었다. 


현재 우리는 미래의 자본주의가 무엇을 겪게 될 지를 논할 처지에 있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더 한층의 변화일 것인지, 새로운 자본주의 구조에 의한 신자유주의가 대체될 것인지, 너무나 멀어 보이긴 하지만 체제의 전면적인 전복일 것인지 등등. 하지만, 지금 우리는 2008년 이전의 신자유주의는 무엇이었는지, 똑같이 중요하게, 무엇이 아니었는지에 대하여는 이야기할 수 있다. 





  자본주의 역사상 하나의 시대로서의 신자유주의


지금까지 필자는 신자유주의와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인 것처럼 취급해왔다. 물론 이 점은 바로 논쟁 중인 문제들 중 하나이다. 일부 예외 ─ 특히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와 필자 ─ 를 제외하면 이 저널[International Socialism]의 기고자들, 특히 고(故) 크리스 하먼(Chris Harman)은 신자유주의를 이데올로기 또는 한 다발의 정책들 이상으로 규정하는 개념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이 1973년부터 2008년, 그리고 가능하다면 08년 이후까지의 역사적 시대의 특징을 규정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냐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하나의 역사적 시대(period)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회의적이었던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타당한 이유지만, 나머지 하나는 타당하지 않다.


타당한 이유는, 특히 금융화와 부채 문제와 같은 신자유주의의 일부 성격들로 현재의 위기를 설명해오던 일부의 접근에 대한 응답이다. 이 저널과 관계된 몇몇 사람들을 포함해, 맑스주의 공황 이론의 핵심 교의를 기각하는 것을 꺼리는 논자들은 최근 위기의 근원은 1960년대 후반 이래의 체제가 겪어온 체체 자체의 장기적 이윤율 문제에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런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윤율 저하 경향[각주:1]이라는 법칙의 불가피성은 위기를 분석하는데 있어 필요한 접근이지만, 그럼에도 불충분하며, 그 자체의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접근법이다. 


예를 들어, 로버트 브레너(Robert Brenner)와 연관된 '정치적 맑스주의' 학파(The school of Political Marxism)는 체제의 근본적인 착취적이고 경쟁적인 관계를 강조하면서, 시대 구분을 단순한 징후 따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여겨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맑스가 <자본>에서 확립한 모델에 따라 작동하는 순수한 형태로 존재한 적이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본주의 발전의 순차적인 단계들을 규명하려 시도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시대를 규정하는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이윤율 저하 경향’에 대한 주된 상쇄 경향의 [시대적] 변동을 규명하는 것이다.


국제사회주의 전통은 자본주의 역사를 세 가지 주요 시대로 구분했다. “고전적 자본주의” 시대 ─ 맑스가 묘사한 것과 가장 근접한 시대 ─ 는 1873년 위기로 진입했다. 이 위기를 맞아 자본주의는 두 번째 시대로 이행했다. 이 시대엔 내부적으로는 중심부에서 독점이 형성되었고 동시에 외부적으로는 식민주의가 확장되었다. 궁극적으로 독점 형성과 식민주의 확장 과정이 결합하면서, “금융 자본주의”, “독점 자본주의” 또는 “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알려진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갔다. 


1929년의 독점 자본주의 위기는 이어서 자본주의가 세 번째 단계로 진입하도록 했다. 이 시대는 국가 자본주의의 공고화가 주요한 특징이었고, 냉전의 시작과 함께 ‘상시 군비 경제’[각주:2] 체제에 의해 뒷받침 되었다. 가장 전형적으로는 스탈린주의 국가가 있으며, 사회민주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적 변종들이 서구의 선진국에서 나타났고, 여러 요소가 혼합된 형태가 이전 식민지 세계였던 비(非)스탈린주의 지역에서 등장했다.


이 점은 곧 시대로서의 신자유주의 개념을 거부하는 데 타당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드러낸다. 우리는 새로운 단계 또는 시대가 1973년에 시작되었다는 점을 적어도 아주 최근까지는 수용하기를 꺼렸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변화를 대하는 세 가지 주요한 입장 중에 하나를 택할 수 있다. 한 가지는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났으니 예전 입장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토니 블레어는 “새롭다, 새롭다, 새롭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라고 외쳤는데, 이 말은 의심할 바 없이 노동당의 1997년 선거 승리 직후 어안이 벙벙해 있는 ‘소셜리스트 인터내셔널’의 대표단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하지만 심지어 진정한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이른바 새로운 상황에 대한 좌파적 입장과 우파적 입장이 당연히 혼재한다. 옛 영국 공산당의 유로코뮤니스트 진영과 연관되었던, 지금은 발간이 중단된 저널인 <맑시즘 투데이> (Marxism Today)는 우파적 입장을 고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본주의 변화는 추정컨대 노동계급과 그 조직들을 매우 약화시켰으며, 따라서 중간계급 부문과의 동맹만이 “진보적인” 성과를 낳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자율주의”는 신자유주의 초기의 일련의 변화, 이탈리아 전후 경제 기적(post-war miracle)[각주:3] 시기에 등장한 이른바 “대중 노동자”(mass worker)[각주:4]의 출현에 대한 하나의 좌파적인 ─ 실로 초좌파적인 ─ 반응이었다. 이것은 노동계급에 대한 전망을 낙관적으로 본 유일한 사례였다. 왜냐면, 적어도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연관된 자율주의의 최신 버전에 따르면, 노동계급은 자본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든 착취당하거나 억압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집어 삼켜 새로운 “위협적인 계급”을 구성하는 “다중”(multitude)이라는 형태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자율주의”와 같은 좌파적 주장은 “다중”이나 “위협적인 계급”과 같은 단일한 개념일지라도 낙관적인 생각과 비관적인 생각 모두를 내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보면,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그가 “프레카리아트”(the precariat)라 부르는 집단이 새로운 위협적 계급이라고 주장한다. 하트와 네그리의 경우엔 [“다중”이 위협적인 이유는] 자본을 전복할 그들의 잠재력 때문이지만, [스탠딩의 경우엔] 오히려 그들이 극우 데마고기를 잠재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이론적 인상주의와 정치적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내에서 반복되는 입장들의 연속성을 고민해보는 것은 유행하는 어리석은 주장들을 의심하게 하는 필수적인 방벽이 된다.


자본주의의 변화를 대하는 위 주장과 상반된 두 번째 입장을 다뤄보자. 자본주의의 변화를 과장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자본주의가 모종의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입장이 있다. 일부는 자본주의는 변화를 아예 겪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에겐 [자본주의의] 연속성만이 모든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는, 이런 “근본주의적”인 접근법은 가장 교조적인 혁명적 좌파 부문의 정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자본주의는 여전히 자본주의이다. 노동계급은 여전히 노동계급이다” 따위의 불변의 진리를 강변하는 것으로 진정한 분석을 대체한다. 이런 접근법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물론 주류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1948년에 채택한 입장일 것이다. 


이 경우에는 자본주의의 본질에 관한 일반적 주장 대신, 정설(orthodoxy)의 척도가 되어 버린 1938년 트로츠키의 특정한 주장을 그들은 고수했다. 이 사례는 특히 IS 전통에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토니 클리프(Tony Cliff)는 이런 교조적 주장에 반대했고 현실에 더 이상 부응하지 않는 정설 트로츠키주의의 주장을 수정했으며, 이 혁신의 토대 위에 IS 전통은 건설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지 우상의 파괴만이 아니었다. 이는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성격과, 세계 경제와 제3세계에서의 혁명적 결과를 포괄하는 전망에 대한 트로츠키의 관점이, 그 본래의 장점이 무엇이었든 간에, 타당하지 않음을 역사가 입증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었다.


<클리프의 접근법은 특히 1948년과 1963년 사이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성격”(The Nature of Stalinist Russia)[각주:5]에서 “연속 혁명”(Permanent Revolution)에 이르는 일련의 획기적인 저작들을 통해 내가 앞서 말한 자본주의의 변화에 대처하는 세 번째 입장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자본주의가 근본적인 연속성 ─ 이것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 을 갖추고 있다는 이해에서 출발하며, 또한 동시에 자본주의의 형태는 그 자체의 역사적 발전의 표현인 시대적 변화를 겪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혁명가들은 후자, 즉 자본주의의 변화 국면을, 애지중지하던 조직적 형태나 이미 체계화된 개입 전략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가 아무리 낯설고 불안정할지라도 혁명가들은 대신 이런 변화들이 낳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1979년 클리프는 이 저널에 기고하면서 “하강기(the downturn)”라는 은유를 사용해 1970년대 후반부터 영국 노동계급이 겪기 시작한 후퇴와 사기 저하의 상황을 요약하려 했다. 또한 이 용어는 전후(戰後)시대 투쟁의 정점인 시기였던 1968년에서 1975년의 양상에서 계급투쟁이 국제적으로 하강하는 현상을 망라하는 분석으로 급속히 확장되었다. SWP 내에서 논란이 되었던 이 분석은 현실을 인정하려는 필요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언 버철(Ian Birchall)은 클리프의 전기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시기에 관한 진정한 논쟁은 하강기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실들로부터 다른 결론을 이끌어 내려는 사람들과 벌어졌다.” 버철은 클리프 전기에서 홉스봄이나 앙드레 고즈(André Gorz) 같은 부류를 회상하면서, 클리프는 그들과 달리 “사회의 본질적 변화가 아닌, 계급 세력균형의 변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제 분명한 것은 누구도 1970년대 후반의 시점에서 어떤 변화가 이끌어져 나왔는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전환점에서도 항상 마찬가지지만, 미래의 사태 전개는 결정되어있지 않으며, 국제적인 계급투쟁의 결과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의 시작 즈음에는 변화의 윤곽을 예측하는 것 정도는 분명히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것은 1970년대 중반은 자본주의 발전에서 하나의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계급 세력균형의 변화 뿐 아니라 사회적 변화도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1948년에서 1973년에 이르는 시대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 비교하면, 이에 뒤따른 시대에 대한 우리의 토론은 명확성을 도출해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상시 군비 경제’ 이론은 우리의 전통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전후 호황을 위한 완벽한 설명이 아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클리프는, 전후 호황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막간극이며, 그 후 제 2차 세계대전의 직전 트로츠키가 선언한 해결할 수 없는 위기와 “생산력의 침체”가 재개되어, 이것이 일시적인 후퇴와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계급투쟁의 부활을 낳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선진국에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확장하고 있지 않으며, ‘체계적인 사회 개혁과 대중 생활 수준의 향상에 대한 논쟁은 없을 것’이라는 1938년 '과도 강령' (transitional program)[각주:6]의 설명은 다시금 들어맞는다.” ‘이윤율 저하 경향’에 대한 최소한 의미 있는 정도의 상쇄 경향은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부흥(boom)이 시작된 1982년,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International Socialism)에 처음으로 실린 하먼의 <위기를 설명하기> (Explaining the Crisis) 결론 문단은 이런 시각을 드러낸다.


세계 경제가 그저 쇠퇴할 운명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경기침체를 향하는 전반적 경향 속에서도, 잠깐의 호경기, 작지만 일시적인 고용 증가는 여전히 나타날 수 있다. …… 현재 위기 국면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대부분이 야만으로 거꾸러지거나 연속된 노동자 혁명에 의해 해결될 때까지.


하먼은 이후 “끝없는 위기”라는 관점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이런 공식을 사용한 것은 나의 실수였다. 변명을 하자면, 우리는 나의 세대가 경험한 단지 두 번째 실제 경기후퇴에 직면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첫 번째 경기후퇴가 끝나고 단지 4년 만에 일어났다.” 하지만 이런 인정은 다음과 같은 그의 처음 입장에 비하면 의미심장하지 않았다. “끝없는 위기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탈출할 수 없는 반복적인 위기들의 국면이며, 이 위기들이란 경제적일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것이다.” 끝이 없는 위기를 겪는 것과 그저 끝없이 반복되는 위기를 겪는 것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있는지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두 공식 모두는 1973년부터 이어진 경기후퇴로부터 자본주의가 회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꺼린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긴축만으로 사태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정세에는, 세력균형이 다시 유리해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 개입하던 혁명가들에는 대단히 도전적인 함의들이 있었다. 노동과 자본이 근본적으로 재구성되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해석을 이뤄 내고, 그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전망과 전략을 발전시키는 것은 정말 거대한 과제여서, 당면한 우리의 과업과는 너무나 먼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이 없다면, 이 임박한 과제들을 수행할 우리의 능력은 의문 속에 남겨질 것이다. 1848년의 독일 혁명을 회고하며 엥겔스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당시 우리의 관점이 환상에 불과했음을 드러냈다. 더 나아가, 역사는 단지 우리의 잘못된 관념들을 떨쳐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가 맞서 싸워야 하는 환경을 완전히 변화시키기도 했다.” 우리가 1970년대 이후로 가져온 “잘못된 관념들”과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변화된 환경” 모두에 대한 재평가가 당장 필요하다. 물론 그러한 평가들의 준비에는 이론적 연구에서 얻어진 것만큼이나 계속되는 실천적 개입으로부터 이미 얻어진 지식이 포함되어야 하며, 투쟁의 직접적 경험 또한 해석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우리를 지금 여기로 몰고 온 영국에서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한 평가의 출발점으로서 대략적인 개관(물론 불충분하겠지만)을 제시하겠다. 나의 목표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총체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이 사안에 대해 다른 몇가지 문제에선 내가 하먼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 위기는 단지 경제적 측면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옳다고 생각한다. 로이크 와캉(Loïc Wacquant)이 쓴 바와 같이, “널리 쓰이는 신자유주의의 개념은 경제학적 개념이다.” 역사적 현상으로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토론은 경제와 정치가 교차하는 지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총체적으로 고찰하려면, 또한 우리는 경제와 정치의 사이에서 중첩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회적 영역에도 최소한 동등한 관심을 기울여야한다.



자본주의 세계화가 낳은 장기적 효과


1950년부터 1960년대의 거대한 경제 부흥은 전례 없는 성장기를 만들어 냈다. 이 기간 동안 세계 경제에는 세 가지 발전이 이뤄졌는데, 이는 그 후에 벌어진 상황의 기틀을 확립했다. 또 이런 변화들은 1929년 대공황 이래로 대부분의 국가들이 시행해 오던 경제 정책의 전제들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첫 번째는 국제 무역이 세 배 규모로 유례없이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이 증대 속도는 같은 기간 동안 실제 생산량 증대보다 두 배나 빠른 것이었으며, 1973년 위기가 터지기 직전 10년 동안 역사상 가장 급격한 증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주요 국가들의 경제가 점점 더 내수시장보다 수출입에 의존하게 되면서, 국경을 넘어선 생산비용의 상대적 차이가, 대부분의 교역이 영토 내에서 자족적이었던 시기와 비교하면 훨씬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두 번째 중요한 변화는, 하나의 국민국가에 한정되지 않는 세계적 생산력을 이용하는 다국적 생산의 규모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무엇보다도, 다국적 시장에 의해서만 실현가능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 추동된 것이다. 이런 변화가 가져온 충격을 과장해서 인식해서는 안 된다. 몇몇 나라를 넘나드는 생산이 확대됐고, 그 결과로 이런 경제적 흐름이 국가들의 통제로부터 부분적으로 자유로워지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진정 세계 전체 차원에서 이뤄진 현상이라기보다 일부 지역에서 한정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또한 자본가들이 한 지역에서 생산을 손쉽게 중단하고 이를 다른 국가로 이동시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노동자들이나 정부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국적 기업이 이 문제에서 가진 운신의 폭은 더 좁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변화는 다국적 기업의 힘을 강화시켰고 상대적으로 정부의 힘을 약화시켰다.


세 번째 발전은 국제화의 또 다른 사례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상품 생산보다는 주로 금융과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었다. 하나는 해외 직접 투자(FDI)가 대규모로 증가한 것이다. 해외직접투자의 규모는 특별히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해외직접투자는 1960년대 이루어진 상품과 서비스의 국제적 이동량에 비교하면 2배나 더 크게 늘어났고, 1980년대에 비해서는 4배나 증가했다. 1990년대에 이르면 “해외직접투자는 314퍼센트나 급증했는데, 이는 세계 무역 시장이 65퍼센트 성장한 것이나 세계 전체의 국내 상품 시장이 40퍼센트 증가한 것에 비춰보면 실로 막대한 규모이다.” 또 다른 측면은 “국제” 금융이 탄생했으며, 국경에 구애받지 않는 화폐 자본의 흐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공장과 달리, 돈은 쉽게 이동할 수 있고 영토나 국가의 제약에 구속되지도 않는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흐름은 자본의 이익과 상충하는 정부 정책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들 중 어느 것도 시장 앞에서 국가를 완전히 무력화한 것은 아니다. 이런 주장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정치인들에 의해 꾸준히 보급되어 온 세계화에 대한 신화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는 분명히 하나의 선택이었다. 물론 그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자본주의를 확장하고 보존하려는 목표를 가진 한, 갈수록 더 회피하기 어려운 그런 선택이었다. 1971년 8월 닉슨(Nixon)이 미국 달러화를 평가절하하고 금본위제[각주:7]에서 해방시켰을 때, 이 신자유주의적 정책 결정[각주:8]은, 바로 모리스 버먼(Morris Berman)이 지적한 바처럼 “세계화의 결과”, 1945년 이후 자본의 세계화가 부활한 데 따른 누적적 변화의 결과였던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사이의 상관관계에 주목해 보면, 바로 전자가 후자의 조건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이제는 위기의 조건이 되어 버린, 고도로 국제화된 경제였다.


신자유주의의 성립에는 두 가지 직접적 전제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자본주의 기업의 규모가 커진 것이다. 거대한 경제 부흥이 일어난 동안, 소규모 사업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정부 개입에 대한 적대감이 남아있었지만 거대 사업과 기업들에서는 국가 개입이 일반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이런 차이는 바로 거대 기업이 시장에서 가진 상대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대기업들은 가격 경쟁으로 최악의 상황에 내몰릴 일이 적었고 성장을 위한 장기적 투자를 계획할 수도 있었으며, 종종 국가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작은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취약했고, 그들에게 국가는 세금을 뜯어가거나 관료적 규제로 자신들을 괴롭히는 존재로 느껴질 뿐이었다.


증대하는 국제적 경쟁은 기업의 상대적 지위를 변화시켰다. 몇몇 초국적 기업 외에는 거의 모두가 국제 시장 안에서 크기 비교를 하면 전후(post-war) 시기의 중소기업 같은 처지가 되었다. “경쟁이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면서, 세계화 과정은 대기업과 은행들에게 경쟁 압력을 급등시켰다.” 기업들은 여전히 자국 국가가 나서서 기본적인 역할들을 해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더 국가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고 주문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기업으로 하여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금 부담을 줄이고 규제 장벽을 낮추는 것,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고 그들의 국제 경쟁자들에 맞서 더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있게 해주는 조치들에 지지를 보내게끔 만들었다.” 즉, 기업들은 프리드리히 폰 하이예크 (Friedrich von Hayek)와 밀턴 프리드먼 (Milton Friedman)이 오랫동안 주창한 몇몇 정책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치인들과 국가 관료들은 이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들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 축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전략을 바꿀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으며(자본주의 국가가 자본의 이익을 위해 작동있다고 본다면), 그들이 오늘날 필요해진 새로운 실천에 이미 존재하는 이론을 덧씌우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 위기가 초래한 단기적 영향


두 번째, 더욱 극적인 발전은, 1973년에서 1974년 동안 경제 위기가 다시 찾아온 사건이었다. 애슐리 라벨(Ashley Lavelle)이 썼듯이,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의 등장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었고, 전후 경제 부흥의 종말은 “궁극적인” 설명이었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와 화해하려 한 움직임은 변화된 경제적 조건에 대한 대응으로 볼 때 가장 잘 해석될 수 있다. 경제적 조건의 변화는 이데올로기와 정치 지형을 바꿔놓았고, 이런 변화는 정부가 자국의 경제를 초국적 투자와 무역 흐름에 개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이런 ‘세계화 과정’은 전통적인 사민주의 정책들의 기반을 약화하고 그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1973년 이후 다시 시작된 위기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두고 광범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다수의 분석가들은 특히 몇몇 요소들을 강조해 주장했다. 선진국 내에서는 서독과 일본에 인해 가격 경쟁이 격화되었는데, 이들의 경쟁력은 기술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와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결국 이는 그 때까지 그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들 — 누구보다도 바로 미국 — 로 하여금 생산 비용의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판매 가격을 낮추도록 만들었다. 미국의 기업들은 이윤율을 낮춰서라도 시장 점유율을 유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많은 신규 투자를 했고, 이로 인해 노동에 대한 자본의 비율이 높아졌으며 결국 자본의 유기적 구성[각주:9]을 높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이윤율에 대한 더 큰 압박을 낳았다.


따라서 알 캠벨(Al Campbell)이 썼듯이,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에 대한 대응, 더 이상 자본 축적의 방식으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일련의 “정책, 실행, 그리고 제도들”을 바로잡기 위한 해법이다. “보다 좁게 이야기하자면, 이윤율 저하에 직면한 자본주의가 케인즈주의적 협약을 포기해 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이윤율 상승과 축적을 더 효과적으로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러나 케인즈주의 정책이 잘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은 바로 세계 경제의 성격 변화 그 자체 때문이었다. 기나긴 호황 기간 동안 세계 경제는 계속해서 변화했고, 이는 결국 점점 더 케인즈주의 정책이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없게끔 만들었다.


신자유주의는 난해한 이데올로기적 교리로서 세계에 등장했다기보다, 지배계급의 의식적인 전략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전후 경제 호황의 종식에 대한 대응이었고, 경제 호황의 결과로 뒤바뀐 객관적 조건의 산물이기도 했다. 케인즈주의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국가자본주의의 실패는 많은 자본가들과 국가관료, 정치인들로 하여금 단지 신자유주의에 동의하는 수준을 넘어 충성을 바치도록 만들었다, 그들 스스로가 신자유주의 이론을 전에는 괴상하다고 여겨 배척하고 심지어 위험천만한 체제 와해 정책으로 취급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설령 정책이 변화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이념에 대한 확신 이상으로 종종 실용적인 적응책으로 간주되었다. 1974년에 <이코노미스트>는 여전히 얼마간 케인즈주의 관점에 동의를 보내고 있었는데, 케이스 조셉(Sir Keith Joseph)을 프리드먼의 “신봉자”라고 비판하는 기사를 냈다. 조셉은 “내 자신의 관점 변화는 거의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서 이렇게 답변했다.


오히려 국내 케인즈주의 정책에 대한 나의 비판적 견해는 주로 …… 1970년대 초 우리가 겪은 쓰디쓴 경험들에서 비롯한 것이다. …… 올 해[1974년] 초, 우리는 역사적으로 유례없이 높은 인플레이션과 허약해진 경제, 수십 년 동안 경험한 것 중 가장 나쁜 노동조합과의 관계, 그리고 1929년 이래 가장 낮은 지지율로 인한 선거 패배 등을 경험했다. 이런 상황들은 우리가 여러 가지 관점들을 재고해보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우리는 사상과 정책을 그 결과를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실용적인 사람들이다.


공식적 입장 차원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은 수익성의 회복에 대해서보다는 주로 국가의 지출 규모와 국가기구의 크기에 초점을 맞추었다(사실 ‘작은 국가’라는 아이디어는 다양한 다른 목적들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리고 이들은 물가를 잡겠다고 공언했는데, 이것이 곧 납세자이자 소비자인 시민들에게 큰 이득이 걸린 문제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목표가 어떻게 표현되었든, 위기에 대응해 자본을 재조직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도처에서 큰 장애물에 직면해 있었다. 1970년대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원래 자신의 주적을 페론주의 운동으로 삼고 있었는데, 후에 그들 중 한 요인은 이렇게 시인했다. “1976년 이래로, 우리는 이미 노동계급이 진정한 문제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면 더 이상 혁명이 임박했다는 위협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노동계급이 “문제”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였을까?


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폴란드의 경제학자인 미하우 칼레츠키(Michał Kalecki)는 “영구적 완전 고용 체제”가 실제로 이윤을 증대시킴에도 불구하고, 고용주들은 이런 변화를 반대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런 체제가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증대시키고 임금 인상을 위한 산업 투쟁을 고무하며 “정치적 긴장을 촉발”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칼레츠키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공장에서의 규율’과 ‘정치적 안정성’은 사장들에게 이윤 이상으로 가치 있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황금시대는 여러 산업 투쟁들을 촉발시켰지만, 그 시대의 막바지에 이르기까지는 노동조합의 지위를 후퇴시키려는 일치된 시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윤율이 충분히 높은 수준으로 유지될 때라면, 고용주들이 마지못해서라도 임금 인상 압력을 수용할 여지에 대해 칼레츠키는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점점 더 증가한 여러 사례들에서 보듯이, 일단 이윤율이 일정 수준으로 떨어지자 자본에게 상황은 더 이상 녹록치 않아졌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지 사업장 수준이나 노동 조건 문제가 아니라, 노동계급에게 이득을 안겨주었던 복지 국가의 여러 측면들 — “사회적 임금” — 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복지 급여들을 지탱하던 비용은 주로 노동계급으로부터 온 것을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간은 자본도 그 비용을 부담하고 있었고, 이는 투자할 돈에서 유출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체제가 성장하는 경우에만 마지못해 그렇게 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1973년 이후로 자본주의 경기가 수축되기 시작하자, 임금과 마찬가지로 자본에게 이러한 비용은 반드시 줄여야만 할 대상이 되었다. 자본가들은 자신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연금, 건강 보험 등의 복지 급여에 직접적인 공격을 시작했고, 이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부담도 노동계급 납세자에게 더 많이 전가하려 했다. 그렇다면 이런 목표는 어떻게 이뤄질 수 있었을까? 그리고 누가 이를 해낼 수 있었을까?



  전위적 신자유주의: 방향전환(reorientation)의 체제(regime)


신자유주의가 불균등하게 세계적으로 확산된다는 사실은 단지 국내 노동운동의 상대적인 힘과 결의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현실화하려는 정치인들의 힘과 결의의 존재 또한 보여 준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사실상 자본의 이익을 위해(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행동하는 임명직 관료들에 의해 움직이는 항구적인 기구들을 갖추고 있다. 이에 반해 의원내각제 정부는 자본의 이해관계에 자발적으로 맞추려는 선출직 각료들이 구성하는 일시적인 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위기 상황에서 자본은, 만일 필요하다면 자본가 계급 자신의 개별 인자들에 맞서면서까지, 확고한 신념을 갖고서 특정한 전략을 결정할 정치인들을 필요로 한다. 


1930년대 안토니오 그람시는 위기에 대응하는 이와 같은 지배계급의 형태를 “유기적이며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단일 지도력 하에 융합된 하나의 사회계급 전체를 대표한다. 단일 지도력은 최우선 과제를 해결하고 심각한 공격을 물리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976년 가을에 노동당 내부의 중도파와 우파의 주요 인사들은 공공부문 지출을 삭감하기 위해 통화주의 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신 우파(New Right)의 관점까지도 수용했다. 이주와 교육 쟁점에서 특히 그랬는데, 어떤 경우는 학계의 견해를 조심스럽게 가져오는 것이었으나, 대개는(적어도 이 단계에서는) 즉각적인 실리적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한편으로는 이러한 방식의 해결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신빙성을 안겨 주는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강력한 노동조합 운동과 당내 좌파들로부터 제기되는 반대에 직면한 노동당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는 전형적인 일이었다. 1984년 이후 이런 무능함이 드러나지 않은 유일한 예외는 뉴질랜드뿐인데, 집권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은 신자유주의가 당대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형태가 되기도 전에 이미 신자유주의의 중개상으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에 형성된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는 전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정권을 필요로 했는데, 피할 수 있으면 피하려다가 어쩔 수 없이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묵인하는 정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행에 전적으로 헌신할 정권이 바로 그것이었다. 최초에 이는 곧 기존 우파 정당이었다.


영국 상황에서 보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마가렛 쌔처의 역할은 그 뒤의 상황전개에서 핵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내각은 이들이 노동계급 운동을 짓누르는 한 자본을 직접 (“수직적으로”) 대표했지만, 자본의 모든 구성인자들을 (“수평적으로”) 대표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자본주의 전략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1979년 이후로 도입된 자본주의 전략으로부터 개별 자본들이 피해를 입었거나 적어도 그럴 수 있을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일반적 합의는 더더욱 존재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 조직 구조의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전환은 노동자 혁명에서처럼 새로운 형태의 기구를 개발할 필요가 없다. 국가는 이미 일반적 차원에서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데 헌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양한 국가 기구들의 활동은 특정한 방향, 다양한 방향으로 맞춰 조정될 필요가 있다. 영국의 경우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동력은 영국 자본가 계급의 전위로서 활동하던 보수당 내 신진 세력의 소수로부터 발현되었다. 1983년 총선 이후 쌔처는 여전히 다음과 같이 언급할 수 있었다. “여전히 이뤄져야 할 혁명이 있었지만, 혁명가들이 거의 없었다.”


개인으로서 쌔처의 중요성은 무엇이었는가? 1970년대의 역사를 쓴 앤디 베켓(Andy Beckett)에 따르면 “1979년 총선의 마지막 날까지도 쌔처가 지난 10년간 제기된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알프레드 셔먼(Alfred Sherman)이 그의 집권기에 대해 평가했던 내용을 인용한다. “우연한 일이었어요.” 캘러헌(Callaghan)[각주:10]은 1978년 10월에 조기총선을 요구할 수도 있었고, 이 경우 노동당의 승리가 유력했다. 하지만 그들이 이기지 못하고 보수당이 좀더 일찍 총리실을 차지했다고 한다면 “불만의 겨울”[각주:11]을 다뤄야 할 정당은 바로 보수당이 되었을 것이다. 보수당은 이 도전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적어도 쌔처가 보기에는 정권이 출범하기도 전에 붕괴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콜린 헤이가 주장하듯이 캘러헌이 조기 총선 요구에 머뭇거렸던 것은 쌔처와 언론계에 있는 그의 동맹자들로 하여금 “불만의 겨울”을 정권의 위기로 “구성”하도록 했고, 쌔처는 이를 통해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베켓의 관점과는 반대로 스코틀랜드의 작가인 제임스 켈먼(James Kelman)은 쌔처가 총리 관저에서 나간 직후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가 주위에 없었다면 다른 누군가가 선택되었을 것이다. ‘쌔처리즘’이라는 개념 자체는, 이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제한다. 그러므로 그와 함께 이런 일도 끝날 것이라고 여긴다.” 베켓은 쌔처의 집권기를 다른 결과의 가능성도 있었던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으로 바라본다. 반면 켈먼은 결정론적이다. 그는 자본의 이익을 위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적 지도력 낳을 수 밖에 없는 위기 상황을 강조한다. 양 주장 모두 얼마간 타당성이 있지만, 결국 지도력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는 문제점도 공유한다.


쌔처는 총선에서 절반 이하를 득표했던 정당(후에 재선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에서도 지도부 중 소수파였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이점도 있었다. 하나는 북해(North Sea)산 석유의 수출을 통한 매출 증가로 인해 재정적 부양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석유 가격은 이란 혁명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 인해 급등했으며, 1979년 총선을 전후한 국제 수지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런 횡재가 실제로 쌔처의 프로젝트에서 행복한 우연이라고 한다면, 보수당이 타협적이고 모순적인 노동당을 상대했던 것은 단지 우연은 아니었다. 노동당의 일부 당원과 지지층은 그들로부터 분열하여 새로 형성된 영국 사회민주당으로 이동하기까지 했다. 이 현상은 사회민주주의 전통 일반의 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사회민주주의는 개혁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자본주의 체제가 건강하게 작동한다는 조건에 의존하는데, 이제는 그럴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결국 보수당 정권의 진정한 적인 광범한 노동운동은 사상적으로도 조직적으로도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 이미 이전 노동당 정권에 느낀 환멸감이 컸던 데다가 실업률 확대로 노동운동도 약화되었다(1981~82년 불황의 저점으로부터 경제가 회복되면서 조금 완화되긴 했지만). 1980년대 초반에만 해도 쌔처는 여전히 몇몇 투쟁에서 거의 패배할 뻔했다. 쌔처 정권의 똘마니 중 하나이자 1980년 당시 총리실 정책 수석비서관이던 존 호스킨스(John Hoskyns)는 이후에 만일 그 해의 철강 파업이 정부를 “굴복”시키며 마무리되었다면, “쌔처는 누구나 아는 이름이 아니었을 것이며, 노조 개혁이나 민영화를 비롯한 다른 급진적인 정책들도 시행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의 입지는 오직 두 차례의 승리를 통해 확고해졌다.


첫 승리는 1982년 아르헨티나에 대한 군사적 승리였다. “포클랜드 요소”는 당시에 영향력 있던 <맑시즘 투데이> 필자들이 믿었던 것과는 달리 지속적으로 이어진 대중적인 효과를 누리지는 못했다. 이 요소의 진정한 효과는 보수당에 대한 쌔처 정권의 우위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쌔처에게 전쟁은 일종의 도박이었는데, 영국 군대가 패배할 가능성 때문에 도박인 것은 아니다. 아르헨티나 군사력과 비교했을 때 영국의 군사력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승패 여부가 도박일 수는 없었다. 진정으로 감수해야 할 부담은 승리로 지불해야 할 대가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서 대중적으로 이 전쟁이 용납되지 않는 경우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각주:12]


두 번째 승리는 1985년 전국광부노동조합(National Union of Mineworkers, NUM)에 대한 승리였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영국에서 신자유주의 체제를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승리를 위해 쌔처는 기꺼이 시장 이론을 폐기하고, 루카치 죄르지(Lukács György)의 표현을 빌리면 국가기구를 “일종의 무기로써” 활용했다. 민영화의 도입으로서 탄광 폐쇄 조치 확대를 검토하기 시작했던 1990년에 그는 “결코 상업적인 측면만을 고려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쌔처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조치는 부분적으로 “충심과 책임”의 심정을 가지고서, 1984~85년간 파업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탄광 노동자들에게 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어쩌면 또 다른 파업에 직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평범한 광부들이 출근하는 광산을 폐쇄하면서, 더 이윤을 많이 내지만 좌파들이 득세하는 광산을 가만 둔다면 우리 처지는 뭐가 되는가?” 쌔처는 적어도 자신의 계급 일반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특정한 경제의 신조와는 다른 전략을 채택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


이러한 승리들은 이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쌔처는 부르주아 전위의 진정한 화신이었다. 쌔처의 계급 내에서도 보다 우유부단한 구성원들이라면 일찌감치 타협을 모색했겠지만, 레닌의 반대편에서 그는 전위였다. 영국 자본주의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쌔처는 대체 불가능한 인자였고, 이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자본주의와 맺는 관계와는 구분되었다. 레이건은 분명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였지만, 집권기에 백악관의 정책을 실제로 좌지우지한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그들과 기업 대표들로 구성된 집단적 지도력을 표상하는 대체 가능한 인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켈먼은 틀렸다. 신자유주의는 쌔처, 혹은 그와 비슷한 개인이 없었다면 그만한 속도와 강도로 도입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켓도 틀렸다. 영국 자본주의가 직면했던 위기는 집권당이 어느 당이든 신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을 것이다, 비록 더 신중하고 주의 깊게 진행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베켓이 옹호하려는 황금기의 마지막 시기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의 힘에 대한 공격은 순차적으로, 서로 중첩되는 세 전략을 담고 있었다. 첫째로는 실업률이 증가하도록 의도적으로 방관하는 것이었다. 이는 고금리 유지, 혹은 국가가 산업부문에 제공해야 할 보조금, 공공 계약, 수출입 통제 등을 거부하는 것을 통해 구현되었다. 애덤 커티스(Adam Curtis)는 1992년 BBC에 방영된 다큐멘터리 <판도라의 상자>를 제작하며 앨런 버드 경(Sir Alan Budd)을 인터뷰했는데, 거기서 그는 정치인들 중 일부가 “이 조치로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다고 결코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염려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정책이 실업률을 높이는 최적의 수단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업률 증가는 노동계급의 힘을 감소시키는 지극히 바람직한 방법이었죠. 뭐랄까요, 잘은 모르지만 맑스주의자들의 용법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위기는 산업 예비군을 다시 만들어서 자본가들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거든요.


1982년 1월이 되면 영국의 실업자 수는 1930년대 이래 처음으로 3백만을 넘어섰고, 대략 이 수치는 1986년까지 이어졌다. “실업수당은 많은 사람들이 아직 일터에 남아 있는 동료들과 단절하게 만들 만큼 충분히 적었고, 이 사실 자체가 노동계급 연대의 가능성을 축소했다. 하지만 실업수당은 굶어 죽을 정도로 적지도 않았다.” 실업의 증가가 사업장에 미친 영향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예전 같으면 수용하지 않았을 조치들을 수용하도록 훈육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경우 단지 연기되었을 뿐인 폐업을 막기 위해 임금 인상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현재의 임금 수준을 삭감(“환수”)하는 데 동의하는 것까지 포함되었다. 얼마간 이러한 내부 훈육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다. 노동자들이 표현하는 해고의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케빈 두건(Kevin Doogan)이 지적한 것처럼 불확실성의 증거로 해석되곤 한다. 즉 그들은 벌써부터 실직의 “가능성”이 아니라 실직의 “결과”들에 대한 염려에 압도되는 것이다. 수입의 재앙적인 감소, 부채 상환, 파산과 무주택자로의 전락 등을 걱정한다. 이 모든 것들은 국가기구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강화되는데, 이들 기관들은 기본적으로 실업자들에게 불신을 보내며, 때로는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낸다.


둘째 전략은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장들과 노동조합으로 조직화한 한두 개의 주요 노동자 부문과의 사이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의 성공은 폐업이 일어났던 곳에서 효과적인 저항의 가능성을 짓밟아 버렸다. 바로 캐나다에서는 우편 노동자들(1978), 이탈리아에서는 자동차 노동자들(1980), 미국에서는 관제사들(1981), 인도에서는 섬유노동자들(1982)과의 결정적인 전투가 그것이었고, 이 모든 일들은 영국에서의 탄광 노동자들이 벌인 전투(1984~85)에 앞서 일어났다. 


1981년 당시 스코틀랜드 노동조합회의 사무총장이었던 지미 밀라인(Jimmy Miline)은 이 시기의 후퇴가 1930년대와 비견될 것은 아니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30년대는 1926년 총파업의 가혹한 패배 이후에 찾아왔습니다. 오늘날 운동은 대체로 패배하지 않았고, 조직들도 온존되어 있습니다.” 영국 총파업의 패배와 견줄 만한 하나의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는 이 말이 사실이었다. 실제로는, 1978~79년 소위 “불만의 겨울” 당시 영국의 파업일수는 1926년 이후 최고점을 찍었다. 1979년에는 29,474,000일의 파업일수를 기록하고 “패배”했는데, [에드워드 히스의 보수당 정권을 무너뜨린] 1974년의 14,750,000일과 비교해도 높은 수치다. 그러나 1974년과는 달리, 혹은 더 일반적으로 1968년부터 1975년까지의 시기와는 달리, 1979년의 파업은 희망과 낙관보다는 절망과 비관의 정서로 가득했다.


노동운동은 사민주의 정권과의 타협(소위 “사회적 계약”)에 의해, 그리고 이에 맞선 어떤 대안도 제출하지 못하는 무능함으로 인해 조직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취약해져 왔다. 신자유주의 정권의 출범을 위해서는 당시까지 일어나지 않았던 수준의 패배가 필요했는데, 이것은 약화된 노동조합으로 인해 가능해졌다. 이렇게 발생한 패배들은 다른 노조들에게 본보기가 되었고, 이들은 폭증하는 법적 규제와 비타협적인 사장들에 맞서야 할 처지에 놓였다. [정권과 자본의] 승리는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저들의 승리는 단지 고삐 풀린 국가 권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  물론 대단히 큰 힘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  공격받는 노조를 다른 노조들이나 ‘영국노동조합회의’(TUC)가 제대로 지원하는 데에 실패함에 따라 달성된 것이었다. 쌔처는 한 가지 맞아 떨어진 도박을 벌였다. 즉 노동조합 관료들의 대다수 부문은 설사 노동조합의 힘이 적잖게 줄어들더라도, 공격받는 노동조합에 연대를 제공하느니 조직 보존을 선택하리라는 것이다.


대안적인 다른 미래로 이끌 수 있었을 유일한 사건은 정부가 노동운동에 패배하는 것뿐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광부 총파업 당시 전국광산노동조합의 승리를 뜻한다. 이는 오늘날 실제 나타난 결과를 (공개적으로든 아니든) 반기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파업에 돌입한 뒤 늦춰 잡아도 6개월 뒤까지는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환점들이 있었다. 영국에서 신자유주의는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후 1995년에 프랑스에서처럼.[각주:13]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신자유주의 확대로 인한 황폐함으로부터 구해낼 수도 있었다. 노동조합 가입자 수는 1980년에 역대 최고치인 13,289,000명에 이르렀다. 1990년에 이 수치는 9,947,000명으로, 1997년에는 7,841,000명으로 거듭 감소했다. 


영국 안에서의 저항이, 신자유주의가 국제적인 수준에서 자본주의 조직구조의 지배적 질서로 확립되는 것을 얼마만큼 막아내고 세력균형을 얼마나 질적으로 바꿔놓았을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일단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공고화하고 이것이 미국에 의해 통제되는 각종 세계 경제기구들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신자유주의라는 모델은 누적된 추진력을 얻었다. 미국과 경쟁해야 하는 선진국 사이에서는 경제에 이로운 것처럼 보였던 신자유주의적 조직 형태들을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남반구 국가들은 대출과 원조를 얻어 내기 위해서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 자신들의 경제를 구조조정 하라는 조건들을 수용했다.


셋째 전략은 노동조합 조직화 수준이 낮거나 없는 지역으로 가서 사실상 새로운 산업 부문과 생산기반을 창출하고, 이것이 자리를 잡기 전에 최대한 조직화 문화로부터 거리를 두도록 하는 것이다. 최근에 이 과정은 글래스고처럼 예전에 이런 일을 겪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반복되고 있는데, 이 지역은 한때 노동조합 조직이 가장 강력했던 곳이었다.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졌는데도 높은 수준의 실업이 유지되었던 이유는, 이 시점에 노동시장으로 유입된 기혼 여성이나 젊은이들이 실직한 사람들 대신에 새로이 창출된 일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의 두 전략들보다는 보다 장기적이고 개별적으로 이뤄졌다. 또한 국가보다는 고용주들이 주도한 전략이었다. 


물론 국가는 이 전략을 세금 감면이나 보조금 지급 등으로 지원했다. 이 전략의 고전적인 사례는 미국 북동부 산업지구인 “러스트벨트”에서 남동부인 선벨트에 이르는 지역에서 일어난 산업 자본들의 운동이었다. 비슷한 예로 잉글랜드(북동부에서 북서부에 이르는 “M4 고속도로변 산업지구”)와 스코틀랜드(글래스고에서 “실리콘 글렌”과 리빙스턴 등의 뉴타운 지역)에서도 그 강도는 덜하지만 같은 과정을 거쳤다. 1987년까지 글래스고에서 산업단지에 고용된 남성 경제인구가 10명 중 1명도 채 되지 않았는데, 동시에 공공 서비스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의 비중이 1/4에 육박했다.


이렇게 국민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지리적 이동은 더욱 빈번한 일이 되었으며, 남반구 지역으로 이전하겠다는 위협보다 국가 내부의 이동이 노동조합 조직에는 더 큰 타격을 주었다. 공장을 다른 나라로 옮겨버리겠다는 위협은 종종 고용주로부터 나오곤 했으나 정작 실행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이유는 주로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개발도상국들이 산업에 필요한 기술적인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을지가 불확실했으며 공장 이전을 통해 이미 투자가 이뤄졌던 고정자본을 버리는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엄 터너(Graham Turner)가 지적하듯, “보다 임금이 낮은 곳으로 이전하겠다는 위협은 그 자체로 실제 이전만큼이나 강력한 두려움을 자아낸다.” 이러한 위협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성공적이었다. 이는 노동조합 관료들과 좌파들이 외주화와 자본 이전의 정도를 과장해온 방식과도 관련이 있는데, 이들의 주장은 평조합원들의 저항할 수 있는 자신감을 크게 떨어뜨리는 주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들의 상대적 성공을 통해 회사들은 기업 구조조정에 나섰다. “비생산적인” 부문이 폐쇄되는가 하면, “경영에 대한 경영자의 권한”이 사업장 내부로 침투하면서 차례로 인건비가 삭감되고 정체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자본으로 향하는 이윤몫이 증가되었다. 신자유주의의 맹폭격은 아래에서 되돌아볼 두 가지 장기적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첫째로 경제 성장이 재개되었을 때 노동계급 조직은 증가된 이윤율을 바탕으로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 등을 요구할 처지가 되지 못할 가능성이 증가했다. 다시 말해 미래에 있을 호황은 기본적으로 노동이 아니라 자본에 이익이 될 공산이 커진 것이다. 


1979년 영국의 노동조합 조직율은 55.4%였고, 1983년에는 47.6%였다. 1987년에는 43.4%, 1992년에는 36.3%, 1997년에는 29.9%였다. 둘째로 광범한 노동운동의 압력이라는 주요 변수가 상쇄되면서 사민주의나 자유주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경제정책이나 그 밖의 변화들이 친자본적으로 흐르는 경향을 되돌리기 더욱 어려워졌다. 노동운동에 대한 성공적인 공격을 통해 하먼이 “반개혁”이라고 부른 신자유주의의 다른 요소들을 위한 조건이 만들어졌다. 오래 지속된 일련의 정책들의 목록은, 물론 총망라된 목록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국가 소유 산업과 공공기관의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주변부 기능의 외주화, 금융시장 규제완화, 통화장벽 제거, 관세 철폐 및 핵심 상품에 대한 보조금 지급 폐지, 무상으로 제공되던 공공재의 상업화, 직접세와 누진세에서 간접세와 역진세로의 전환, 낮은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유지하기 위한 통화 정책 등.


이와 같은 요소들을 조합한 하나의 체제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수많은 잘못된 시작, 우연한 발견, 기회주의적 행동, 의도치 않은 결과들을 겪으며 조금씩 조금씩 형성된 것이었다. 1979년 이후 등장한 보수당 정권은 대체로 민영화를, 이론을 현실에 적용한 것이라고 여겼다. 특히 쌔처 자신이 더욱 그랬는데, 그의 자서전에서 영국을 개조하기 위한 계획의 확고한 요소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민영화였다. 민영화가 21세기에 들어서까지 사회와 경제 전반에 주요한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은 명백하다. 민영화는 특히 개별 자본가들(그리고 서로 자신들의 지위를 자주 맞바꾸는 국가 관료 및 정치인들)에게 장기적인 이익을 제공했다. 설사 이들이 이익을 누리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국가나 시스템 전체로서는 이득이 되었다. 기업들은 민영화를 통해 전에는 배제되었던 부문으로까지 시장을 확장시켰고, 국영 기업들은 좀처럼 나서지 않는 국제적 인수합병에 나설 만한 조건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민영화 전략은 대부분 쌔처 집권 1기 시절에 직면했던 불리한 상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진 결정이었다. 특히 정부가 받고 있던 두 가지 압력이 결합된 결과물이었는데, 이것들은 보수당의 집권을 불러 온 경제위기의 두 측면이기도 했다. 첫 번째는 공공부문에 기술투자를 늘려야 할 필요와 높은 수준의 실업률이 결합되면서 재정 지출이 지속적으로 올라가도록 압력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핵심 산업과 서비스의 매각은 전자의 필요성을 제거하는 한편 재무부가 후자를 충족시키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게 해 줄 터였다. 두 번째는 보수당이 비록 영국의 선거 제도에 따라 두 차례의 총선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선거에서 과반수 득표에 계속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소유한 공공자산들의 주식시장 상장은 대중이 소유에 참여하는 소유체계를 창출했는데, 이는 “국민 자본주의”(people’s capitalism)를 가능케 하는 것처럼 보였고, 이런 정책의 지지자들은 이후에 보수당을 자신들의 정치적 고향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각각의 매각으로 얻은 단기적인 자금 유입을 논외로 한다면, 재정 지출의 감소도 정치적 지지 획득도 달성되지 않았다. 민영화 이후 조각난 철도망에 투입되는 보조금은 영국철도가 받던 이전의 보조금에 비해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살고 있던 임대주택을 구매했던 사람들이나 민영화된 회사들의 주식을 샀던 노동자들이 전보다 보수당에 더 많이 투표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앤서니 히스(Anthony Heath)와 그의 동료들은 1983년 영국 총선에 관한 연구를 통해 보수당에 투표했던 임대주택 구매자들은 계속 보수당을 찍는 경향이 있으며, 동시에 전에 노동당을 찍었던 사람들은 그들이 임대주택의 임차인으로 거주하더라도 계속 노동당을 찍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는 보수당에 대한 투표로써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사실, 노동계급에 대한 민영화의 이념적 영향은 대부분의 경우 생각보다 더욱 미묘하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영주택 임대에서 개인주택을 소유를 하도록 압력을 받게 되는 변화는 그 자체가 노동계급 의식이 약화되는 신호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계급이 더 약화한 전략적 위치에 놓이는 것을 의미한다. 스코틀랜드의 소설가 앨런 비셋(Alan Bissett)은 그의 친구들의 현 상태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은 하루 이상 파업을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럼 누가 주택 융자금을 갚을 것인가?” 길어지는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들의 채무 상환 날짜를 맞출 지불 능력을 위협하고, 그 결과 압류와 파산, 노숙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물론, 이것은 부채의 더욱 일반적인 기능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은 신자유주의적 신념을 진실로 전환시키기는커녕, 신자유주의 공격에 대한 경계심을 낳는다. 실제로 높은 금리는 자택 소유를 거대한 재정적 부담으로 변화시키는 경향이 있고, 담보로 맡긴 물건보다도 대출금이 많은 역자산의 시대에 노골적인 책임전가는 체제에 대한 수용(acceptance)보다는 그에 대한 불만을 양산하는 경향이 있다. 민영화의 실제 이념적 결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째로, 건강이나 교육과 같은 공공 서비스가 민영화되면(또는 그것들이 사기업들처럼 운영된다면), 순수하게 자본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 영역들, 전자[건강]와 같은 사회적 정의, 후자[교육]와 같은 개인적 발전에 대한 지원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교육에는 추가적인 이념적 요소가 있다. 셸던 월린(Sheldon Wolin)이 지적했듯이, 민영화는 “공급에 있어서의 변경 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며 또한 “경쟁력, 계급제도, 이기주의의 문화”를 포함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교육은 읽고 쓰는 능력과 다른 기술들의 획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개발한다는 면에서 힘의 부여(empowerment)도 의미한다. “교육의 민영화는 공립에서 사립으로 추상적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정신을 형성하는 도구이자, 어쩌면 민주주의를 더 잘 관리하기 위해 대중적 교육과 미디어 문화를 조화시킬 수 있는 도구의 인수를 의미한다.”


민영화의 두 번째 결과는 다음과 같다. 국가가 소유권과 통제를 포기한다면 경기후퇴의 결과들은, 시장에 참여하는 방법을 제외하고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더 쉬워진다. “국가로부터 산업을 분리시키는 것과 그것을 시장에 종속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는 시장의 힘에 대한 책임 전가를 통해, 위기에 수반되는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을 비정치인 것으로 포장할 수 있게 만든다”고 하먼은 설명한다. 동시에, 일단 시장이 이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면, 이는 또한 시장의 작용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달래는 효과를 낸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이렇게 썼다. “만약 누군가 그 원인이 비인간적이고 맹목적인 힘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 불평등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쉽다는 것을 프리드리히 폰 하이예크는 알고 있었다. ‘시장의 부조리함’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이런 관계[라는 관점]에는 장점이 있다. 나의 실패나 성공을 ‘내가 초래한 것이 아닌’ 우연의 결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몰락과 1999년 시애틀 전투 사이인 10년 안에, 방향전환(reorientation)을 실행한 모든 전위적 정권들은, 표면적으로는 대안적 진로에 헌신한 정당 혹은 정치인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예를 들면, 칠레(1989), 뉴질랜드(1990), 미국(1992), 영국(1997), 소련(1999)[각주:14]이 그러했다. 그러나 캘리니코스가 지적했듯이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는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을 제시하는 정당들의 선거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더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의해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사실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왜 근본적인 것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가? 두 번째, 그런데 왜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원래의 전위적 정권들에 의해 유지될 수 없었는가?



  사회-신자유주의: 통합(consolidation)의 체제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 시장 정책의 확립은 사회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저절로 이로운 영향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거짓일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자체(어떤 모습으로 현신現身한 자본주의라도)에 내재한 해악을 더욱 심화시킨다. 결과적으로, 시민들에게 투표할 권리가 있는 한, 자신의 이해관계를 표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정당이 존재한다고 시민들이 여기는 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기반이 약화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이러한 지배 계급의 딜레마에 대한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첫 번째 해결책으로, 비민주적 수단의 동원이 필요한 경우에, 오직 신자유주의에 동조하는 정치인들만이 국가를 통제할 수 있도록 확립하는 것이다. 하이예크는 『노예의 길』(1944)을 썼을 때부터 “민주주의의 물신화”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왔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그가 1978년 타임지에 보낸 악명 높은 투고에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심지어 그간 중상모략에 시달려 온 칠레에서조차, 아옌데 시절보다 피노체트 아래에서 개인적 자유가 훨씬 증대되었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칠레식의 [신자유주의화] 방식은 선호되는 방식은 아니었다. 군사적이고 파시스트적인 독재 체제는 부르주아지 자신들에게도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해결책은, 형식적 민주주의는 바람직하지만, 실질적 민주주의는 문제적인 상황이라는 인식에서 도출된다. 그리고 최소한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이론적 선지자들의 계획을 시행하려 시도해 왔다. 앨랜 마이크신스 우드(Ellen Meiksins Wood)는 미국 지배계급의 민주주의를 대하는 당대의 태도가 다음의 두 가지 전략을 포함했다고 규명했다. “하나는 어떻게든 다수의 의지를 좌절시킬 선거적 절차들과 제도들을 형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 이것이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인데 ─ 민주주의에서 사회적 내용을 되도록 많이 비워 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신중한 일부의 시각에서는 전면적 공격 전략을 통한 노동계급에 대한 초기의 승리가 지속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음이 점차 명백해졌다. 특히 영국에서는 정부가 인두세(poll tax)[각주:15] ─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 계획에 맞서 승리한 대중 저항의 첫 번째 사례를 낳은 ─ 를 도입함으로써 선을 넘어 버렸다. 초기의 신자유주의 공격은 노동자 운동을 약화시키고, 노동조합 관료체계가 전반적인 구조적 차원에서 소심해지도록 만들어 공식적인 전면 행동에 개입하는 것을 망설이게 하려는 기본적 목표를 달성했었다. 이런 조건을 성취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자본에 선사한 최상의 기여일 것이다. 이러한 성공은 본래의 전위를 형성했던 우파 정당 이외의 정당을 [지배자들이] 지지하거나 최소한 용인하는 것 또한 가능하게 만들었음을 의미했다.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은, 아무리 줄여 잡더라도 어떤 유권자 집단이 “신자유주의의 정신을 촉구하는 순수한 자유 시장 정책”에 끌리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쌔처와 레이건이 내놓은 “이데올로기적 보완물” ─ 각각 제국주의적 국민주의와 종교 근본주의 ─ 은 대중적 지지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지만 그만큼이나 대중적 지지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에 요구되던 것은 사회민주주의적 혹은 자유민주주의 수사에 의해 공식적으로 규정된 “통합(consolidation)의 체제”였다. 이것은 사회적 연대의 수사를 포함하면서 신자유주의의 본질적인 요소는 유지하고 심지어는 확장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사회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 정당들은 추가적으로, 더욱 개량적인 요소들을 신자유주의의 무섭고 섬뜩한 래퍼토리에 추가할 수 있었다. 날것의 시장의 법칙에 대한 보완책임이 명백한 이 요소들은 원래는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중간인 “제3의 길”로서 홍보되었다. 이것은 알렉스 로(Alex Law)와 게리 무니(Gerry Mooney)는 “사회-신자유주의”(social neoliberalism)[각주:16]라고 더 정확히 묘사했다. 이것은 [‘사회적’과 ‘신자유주의’] 양자를 동률로 통합한 것이 아니라, 전자를 후자에 순응시킨 것이다.


방향전환(reorientation)의 체제에서 통합(consolidation)의 체제로의 전환에는, 그람시의 용어로 표현하면, 기동전에서 진지전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즉, 기동전은 노동운동에 대한 정면 공격과 이미 뿌리내린 사회 민주주의적 제도들을 해체하는 것(“원상 복귀, roll-back”)을 포함한다. 그리고 진지전은 사회생활의 거대한 새로운 영역을 점진적으로 상품화하고 특히 신자유주의적 원칙에 기초한 새로운 제도들의 창출(“재창출, roll-out”)과 같은 더욱 섬세한 과정을 포함한다. 이런 전환의 중심엔 전통적으로 자본주의를 개선하거나 극복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여겨져 온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있었다. 어쩌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 그것도 자본주의의 가장 노골적인 형태[신자유주의]의 공개적이며 뻔뻔스러운 후견인 노릇을 하게 되었을까?


그레고리 엘리엇(Gregory Elliott)은 사회민주주의가 세 개의 구별되는 시기를 따라 발전해왔다고 주장한다. 그 시기는 각각 ‘1889~1945년’, ‘1945~1975년’, 그리고 ‘1975년~현재’로 구분된다. 하나의 운동으로서, 사회민주주의는 실천에서는 언제나 근본에서는 자본주의를 수호했다. 그러나 구분되는 첫 번째 시기 사회민주주의는 최소한 강령상으로는 자본주의의 폐지를 위해 노력했다. 사회민주주의의 두 번째 시기는 전후 장기호황 시기와 일치했기에 체제를 위협하지 않고도 노동계급을 위한 유용한 개혁들이 가능했다. 


물론, 이런 개혁들은 우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형성한 압력에 의해 성취된 경우도 있으며, 몇몇 경우엔 기독교 민주주의(Christian democracy)에 의해 압력이 형성된 적도 있다. 개혁의 전망이 소실되었을 때, 적어도 당 지도부의 입장에서 남은 것이란 자본주의에 대한 책무와, 일부 남겨진 수사(rethoric)들뿐이었다. 이 과정의 핵심엔 케인즈주의의 위기가 있다.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스탈린주의 체제의 몰락은 [대안을] “입증”하기는커녕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의 대안적 형태는 불가능하다는 이미 만연한 신념을 강화했다.


블레어가 총리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신자유주의적 노선에 따라 국가를 재구성할 필요가 없었다. 쌔처가 이미 길을 닦아놓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이미 준비된 새로운 구조물을 물려받았다. 지도부와 당원 사이의 관계 역시 달랐다. 블레어는 노동당 지도부의 소수파에 속해 있었다는 점에서는 쌔처와 비슷하지만, 정책의 근본적 쇄신을 지지할 태세가 된 당원들의 후원을 끌어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달랐다. 쌔처는,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에 타협하느라 무너져오던 전통적인 정책을 그가 복원할 것이라고 여긴 보수당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블레어는, 당의 선거 승리 전망이 명백하게 암울하다는 좌절감에서 선거 승리를 위해 대중적 반향을 얻을 듯한 보수당 정책과 타협하고자 전통적 정책을 폐기하려는 노동당 당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많은 경우에서 타협의 쓴맛은 달콤한 자기최면을 누리고 나서야 맛볼 수 있다. 지도부는 단지 권력을 얻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포용하는 척하는 것이고, 승리 이후 그들이 염원하는 개혁은 시행될 것이라는 환상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신(新)노동당(New Labour) 지도부는 전통적 우익의 대표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수준보다 훨씬 열성적으로 자본주의와 자본가들을 포용했다. 신자유주의 대변 언론인 <이코노미스트>는 블레어의 “지속적 유산”은 그의 정책보다 더 급진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주류 정치인들을 사라지게 만든 것이라고 지적한다. “신(新)노동당의 자유 시장 원칙과 사회적 정의의 특수한 조합은 이제 영국 정치의 자연스런 길로 넓게 인정되고 있으며 어떤 성향의 정치인도 감히 이것으로부터 방향을 선회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가 자본에 안겨다준 핵심적인 성과 가운데 하나는 초기의 통치의 방향 전환에 의해 구축된 경제 정책들에 대한 대안 ─ 최소한 이것의 왼쪽에서 ─ 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들어온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신자유주의 실험의 각각의 연속적인 국면들은 정부가 전통적으로 경제 활동에 영향을 미치던 조치들의 목록을 하나 둘씩 폐기해온 것으로 보였다. 이 과정은 제프리 하우(Geoffrey Howe)가 1979년 외환 관리의 포기한 것을 시작으로, 고든 브라운(Gordon Brown)이 이자율 조정 권한을 재무부에서 잉글랜드 은행(the Bank of England)의 선출되지 않은 위원회로 이관한 것으로 끝을 맺었다. 


앤더슨은 전자[외환 관리 포기]는 쌔처 정권의 “권력에 이르기 위한 최초이자 가장 근본적인 조치”이며, 후자[이자율 조정 권한 이관]도 쌔처의 승계자에게 동일한 위상의 조치일 것이라고 묘사했다. 주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 경제라는 엉터리 처방을 수용한 것은 “탈정치화(depoliticisaioin)”의 형태로 이어졌다. 피터 버넘(Peter Burnham)은 탈정치화란 “하나의 통치 전략이며, 이런 점에서 매우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전략은 [정부의] 의사결정에서 정치적 성격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 가지 형태를 취한다.


첫째, 정부가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수단으로 집권 여당의 직무를 표면상으로는 “비(非)정치적”인 다수의 기관으로 재배치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두 번째 형태…는 표면상으로 책임성과 투명성 그리고 정책의 외부 검증을 강화하는 조치들을 채택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정부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을 제약하는 구속적 “규제”를 선호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 또한 탈정치화 전략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서는 탈정치화 전략이 전개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해왔다. 1930년대에, 그람시는 그가 명명하기로 국면적(conjunctural) 현상과 유기적(organic) 현상을 구별했다. 국면적 현상이란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만한 역사적 중요성을 띠지 않는 것으로, 그때그때의 성격에 따라 사소한 정치적 비판을 발생하게 하며 이 비판의 주체로서 최고 정치 지도자와 인물들에게 직접적인 통치의 책임을 묻게 한다.” 반면, 유기적 현상은 “사회역사적 비판을 불러일으키며, 이 비판의 목적은 상층 인물들과 상층 지도자들을 넘어서는 더 넓은 사회적 조직화에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변화된 탈정치화 전략은 국면적 현상을 정치의 한 측면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 국면적 현상은 정치의 본질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정치에 대한 대부분의 담론은 ─ 최소한 선진국에서는 ─ 의회나 여타의 선출 기구 내의 본질적으로는 무의미한 인물 교체에 대한 뻔한 논평이나 추정에 관심을 쏟는 것에 기울어 있다. 피터 오본(Peter Oborne)은 영국에서 정당의 성격이 수렴되는 현상에 대해 그 과정이 단지 잘 진척되어온 정도가 아니라 이미 완료되어 버렸다고 부정확하게 추정한다. 그러나 그의 핵심 지적은 타당하다. “실제로 주요 정당들 간의 차이는 미미하다. 대부분이 [정치]기법적인 차이이기 때문이다. 공개적 정치 무대에서 정당들의 쓰라린 경쟁과 무대 뒤에서 정당들의 협력 사이의 모순은 현대의 정치적 곤경의 성격을 규정한다.” 그러니 정당 사이의 논쟁은 인형극 수준, 즉 허례허식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런 허례허식 속에서 자신이 진정한 대안이라는 인상을 풍기며 정당들 사이의 경합의 지속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소하거나 피상적인 차이들이 강조될 뿐이다.


증대되는 정치의 무관계성은 영국만이 아닌 서구 전체에서 몇 가지의 분명한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유권자들의 변덕은 늘어가고 있으며 파트너쉽은 약화되고 있다.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여전히 투표에 참여하는 다수의 유권자들은 정치적 선택에서 ─ 적절히 충분한 ─ 소비자 모델에 입각해 투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이 유도한 시각에 따르면, 투표에 참여하게 되면 유권자들은 즉각적인 개인적 이득을 얻을 것이다. 놀랄 것도 없이, 심지어 이런 최소한의 수준의 활동마저 참여할 의사를 가진 유권자의 수조차 점점 줄고 있다. 2004년 영국에서의 연구에 따르면 신(新)노동당의 2001년 재선 승리는 전후 선거상 최저수준의 투표율(59%) 속에서 이뤄졌다. 투표율은 그 뒤로 더욱 떨어지고 있다. 2004년 이전의 최저 투표율은 1997년 총선이었다. 이 선거에서, 전통적 선거 지지층을 재통합했음직한 노동당이 1987년(노동당이 보수당에 연속된 세 번째 패배를 겪은)의 득표보다 더 적은 득표수를 가지고 승리했다.


한 편에서의 증대되는 정치적 수렴 현상[노동당과 보수당이 점점 차이가 없어지는 현상]과 다른 한 편에서의 유권자의 투표 기권 현상이 결합하여, 이 절의 시작에서 개관한 정치인과 국가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피터 마이어(Peter Mair)가 지적한 것처럼, 한때 유권자들은 “절차”만큼이나 “대표성”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제 확고한 강조점은 “절차”로, 또한 시민사회에서 국가로 옮겨지고 있다.


정당들은 점점 대표(represent)하는 기관(agencies)이 아니라 (가장 넓은 의미로)통제(govern)하는 기관이 되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강요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엘리트들의 퇴진이나 사임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퇴장하는 시민들은 대개 더욱 사적인 세계로 향하지만, 퇴장하는 지도적 정치인들은 제도적인 곳 ─ 공직의 세계 ─ 으로 물러날 뿐이다.



  신자유주의의 대차대조표


우리가 현재의 상황에 처하게 되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경제 위기였던 1973년과 2008년 사이에 신자유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영국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만들고자 했던 세계의 모습과 그것은 얼마나 유사한가?


거품 경제(A boom economy)?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신자유주의란 곧 “국제적 자본주의를 이론적 모델에 맞추어 재조직화하려는 공상적 프로젝트이거나 자본 축적 구조의 조건을 재확립하고 경제 엘리트들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정치적 프로젝트”라고 주장해왔다. 하비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신자유주의를 정리했지만, 사실 잘 살펴보면 이 얘기에는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오직 자본가들의 현실을 빈약한 수준으로 반영할 뿐인 신자유주의 이론(“유토피아적 프로젝트”)이라는 요소다. 다른 두 요소는 하비가 “정치적 프로젝트”라고 규정한 것 내부에 존재하는 두 가지 다른 측면이다. 경제 엘리트들의 권력을 회복한다는 면과 자본주의 축적 구조를 회복하기 위한 조건을 재확립한다는 면인데,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되지 않은 별개의 과정이다. 그런데 나는 이 이야기들에서 신자유주의가 엘리트들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은 권력을 잃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가지 문제는 어떤가?


하비는 신자유주의가 “아주 효과적이지는 않았”다고 본 점에서는 옳았다. 사태의 기저에는 이윤율이 지속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는 문제가 놓여있었다. 로버트 브레너가 설명했듯이,


1990년대의 장기적 호경기 동안, 미국의 사적 부문의 평균 이윤율은 1950년대와 60년대에 비해 15∼20퍼센트 낮았으며, 더 중요하게는 일본과 독일에 비교해 더 침체되어 있었다. 게다가 1997년부터 미국과 세계 경제의 수익성은 신경제 부흥이 절정을 구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추락했다. 신경제는 미국과 세계 경제를 새로운 경로로 이끌어 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 세계 경제의 이윤율의 저하를 낳은 제조업과 관련 부문에서의 장기 성장 둔화 — 지속적이고 만성적으로 지속되는 — 라는 근본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브레너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황금기와 비교해 이윤율을 높이는 데 실패했음을 정확히 지적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다. 데이비드 맥낼리가 썼듯이 “[전후] 거대한 호황은 사회-역사적으로 예외적인 일련의 상황의 산물이었다. 그런 상황이 없었다면, 전례 없는 경제의 성장 물결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심부 경제들에서 생산과 임금, 고용의 성장이 경제 성장과 함께 지속된 것은 자본주의적 기준에서 보면 기이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이 구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상황을 반드시 ‘위기’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전후 호황 시기를 기준점으로 계속 제시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부적절하다.


첫째로, 이런 기준은 다음에 찾아올 수 있는 모든 호황이 반드시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복지 제도를 확대하며 계급의 자신감을 올리는 등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로 이어질 수 있다. 1973년 이후로 정확히 그와 반대되는 후퇴들이 일어났는데, 일각에서는 이런 노동계급의 현재 상태를 근거로 자본주의 체제의 현재 상태를 위기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침체라고 파악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처럼 역동적인 체제가 40년간 영구적 위기(또는 반복되는 위기)의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실로, 이런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최근의 사건들이 성장과 확장의 시기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 어째서 그토록 중요한 의의를 갖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920년대와 1890년대에서 보듯이, 이전의 경제 붐 시기에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혜택을 받지 못했으며 그들의 임금과 노동 조건에 대한 전반적인 공격에 계속 시달려야 했다. 신자유주의적 공격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1920년대, 1890년대 등 이전 시기에 비해 강한 힘을 갖추고] 경제적 조건에 맞춰 스스로의 이익을 확대할 수 있게 된 노조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둘째, 맑스주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자본가들과 경영자들은 그들의 현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지난 4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 편이다. 1982년 이후 자본주의의 회복은 결코 전후 호황의 전형적인 성장 수준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지 몰라도, 보통 CEO들의 계산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게다가, 뒤메닐과 레비가 썼듯이, “경영자들의 목표는 해당 사회가 주되게 수행하는 경영관리기법에 의해 좌우된다.” 이런 목표들은 계속해서 변화해왔다. “2차 대전 이후에 경영관리는 기본적으로 성장(기업 차원에서나 정부 정책의 방향에서나)과 기술 발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신자유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바로 주식 시장과 자본 수입이 되었다.” 경영자들은 이제 지난해보다 더 많은, 혹은 경쟁 회사들보다 더 많은 즉각적인 수익을 원하는 이해관계자들의 요구에 부응해 움직이고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생산에 투자를 계속하고 그에 대한 이득을 회수할 수 있다고 확신할 만큼 이윤율이 충분히 높은지 여부이다. 그리고 1982년부터 2007년까지 많은 경우 실제로 높았다. 물론, 일반적인 궤적에서 보자면 이윤율은 1973넌 이래로 계속해서 하락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계속”되어 왔다는 것인데, 그러한 일반적 하락세는 심지어 전후 호황 시기에조차도 계속되었다.


1982년 이후로 지속된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호경기는 부분적으로는 모든 불황이 낳는 일반적 효과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즉, 불황은 일부 자본을 파괴하고 살아남은 자본으로 하여금 이를 흡수 및 재편하게 함으로써 부분적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널리 알려져 있듯이, 자본의 파괴가 죽은 노동을 축적하는 이 체제를 완전히 정화할 만큼 충분한 규모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 [이런 호경기를 설명하는 데에는] 네 가지 다른 요소들이 상당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 각각은 그 자체의 내재적 한계를 안고 있기는 하다. 이러한 요인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서로 중첩되어 나타났는데, 그 요소들이 체제에 일으킨 가장 큰 변화는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생겨났다.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노동력에 대한 착취율이 크게 상승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생산성 향상에 의해(각 기업들이 더 적은 노동자들을 더 힘들게 더 오래 일하도록 만듦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을 줄임으로써(실질적으로 임금을 줄임으로써). 이 두 가지 공격 방식은 나라마다 다른 모습과 비중으로 구체화됐다. 영국의 사례를 보면, 미국과 달리 전자의 측면이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평균 임금은 2010년까지 상승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래에서 살펴볼 바와 같이, 비록 이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조직 노동자, 혹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경험을 반영한 것일 뿐이지만. 


그 이후로는 평균 임금은 하락세로 돌아섰으며 이는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 착취를 증대시키는 이런 두 가지 방법은 모두 노동운동에 대한 공격이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현실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방법 덕에 이윤율은 부분적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 그런데 전자[노동 강도와 시간을 늘리기]의 방법은 막연하게 생각해보아도 물리적으로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고, 후자[실질 임금 하락]의 방법은 소비를 위축시킴으로써 생산을 통해 만들어낸 가치를 실현하는 데[노동자들에게 상품을 판매하는 데] 악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있다.


두 번째로, 소비자 부채의 급증과 가장 연관이 큰 요소다. 맥널리가 썼듯이, 신용은 1982년의 경기 회복이 힘을 다한 이후부터 위기의 재발을 막기 위해 아주 중요한 수단으로 떠올랐다. 1997년의 동아시아 위기와 2000∼2001년의 닷컴 위기는 “2001년의 기록적 이윤율 저하 이후 급격히 가중된 거대한 신용 확장이 결국 징벌의 그 날을 연기할” 수 있을 뿐임을 보여주는 전조였다. 부채 증가의 핵심적 이유는 개인 혹은 가계의 수입 수준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실업과 노동 통제, 그리고 생산시설의 이전이라는 세 가지 전략은 위협적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냥 효과적일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효과는 신자유주의 경제 부흥의 성격에 의하여 연장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체제의 핵심 지역에서 일어난 성장은, 제조업이나 다른 생산적 부문보다 서비스 부문에 대한 투자와, 더 불안정한 노동 혹은 불완전 고용 상태에 있는 새로운 일자리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영국은 EU에서 데이터 입력이나 콜 센터 상담원과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인구 비율이 가장 많은 나라다. 오늘날 영국에는 서비스직(예컨대, 가정부, 보모, 정원사와 같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빅토리아 시대만큼이나 많다.” 그리고 영국 정부도 자신의 통계에서 인정하듯이, 이런 직종들은 임금 수준이 가장 낮은 부문이다. 평균적으로 “사적 부문 서비스 직종의 평균 소득은 2002∼2003년 회계연도 동안 총 1만 4천146 파운드[한화로 약 2천5백만원]를 벌었다.” 그러나 이런 저임금 노동의 등장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신자유주의의 또 한 가지 핵심적 성격은 바로 민영화였는데, 그 결과는 바로 예전에는 세금에서 보조금이 지급되거나 전액 지원이 됐던 각종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동계급이 부담해야 하는 과세 수준은 떨어지지 않았다.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부담은 주된 세금 수입원이 수입과 재산에 대한 과세에서 소비에 대한 과세로 바뀌면서 더욱 커졌다. 그런데도 노동계급은 이제 사회적 서비스들조차 상품이니 이를 이용하려면 추가적 경제 부담을 지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이러한 노동계급의 필수적 지출 규모의 증가는 대규모 부채의 증가를 낳았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이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동시에, 부채는 투쟁이 벌어지기 힘들거나 불가능한 시기에 일종의 대안적 선택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신 노동당이 집권한 동안 개인 부채의 총규모는 5천7백억 파운드에서 1조 5천117억 파운드로 늘었다. 165.2 퍼센트나 증가한 것이다. 같은 기간 동안 개인 부채 대(對) 자유롭게 이용 가능한 개인 수입의 비율은 101.6 퍼센트에서 173.1 퍼센트로 늘어났다. 전임 보수당 정권 시절 동안에조차 49.8 퍼센트 정도 상승했던 것이, 무려 71.5 퍼센트로 증가폭이 늘어난 것이다.


세 번째 요소는 하비가 “약탈에 의한 축적”[각주:17]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개념에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맥락에서 보자면, 하비가 정리한 이 과정은 자본주의의 부분적 회복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국가가 자신이 소유한 산업 부문과 공공 서비스를 민영화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이런 과정은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체제 내의 자원들을 공공 부문에서 사적 부문으로 재배치하는 과정이라고만 볼 수도 없다. 민영화는 공공 부문을 [잉여가치] 실현 과정이나 사회적 임금의 일부에서 [잉여가치] 생산에 직접 사용될 수 있는 — 최소한 잠재적으로는 — 부문으로 변모시킨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도 한계는 있다. 우선, 이에 반대하는 저항들이 계속 벌어져왔다. 또 최근 불황에 대처하기 위해 재국유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공공 부문에서 사적 부문으로의 소유권 이전은 이미 다시는 반복되기 어려울 정도의 수준으로 진행되어 버린 상태다. 잉글랜드에 한정해 말하자면, 오직 NHS[National Health Service, 국립 보건 서비스]만이 큼직한 민영화 대상으로 남아있는데, 이에 대한 민영화도 이미 시작되어 있다. 물론 이것이 1980년대 90년대에 이뤄진 민영화 과정보다는 훨씬 파편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네 번째 요소는, 이윤율이 줄곧 자본가들에게 만족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의 결과였다. 그것은 바로, 생산에 투입된 잉여가치의 비율은 하락하고, 유보된(saved) 잉여가치 비율은 증가했다는 사실, 나아가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커졌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잉여 자본이 투자처를 찾아야할 필요성은 — 생산적 자본이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을 때 — 흔히 산업 자본가들을 금융 투기의 방향으로 이끈다. 그래서 뒤메닐과 레비는 신자유주의가 주로 혹은 거의 유일하게 자본 내 금융 부문이 내는 수익에 의존해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금융자본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입각해 위기를 관리하고, 위기를 장기화”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금융자본은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에 입각해 금융이 역사의 진로를 바꿀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나 금융과 산업 자본이 이런 방식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관점은 부정확하다. 1930년대 대공황은 생산적인 자본(산업 자본)이 더 이상 축적 과정에서 무정부적인 체계에 의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나 “금융 자본은 이와 대조적으로 대체로 자유 방임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규제되지 않는 시장이야말로 금융 자본을 포함한 모두에게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1970년대 들어 산업자본이 이런 관점을 공유하게 된 그 시점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서막을 연 때였다. 그러나 이것은 금융자본에 산업자본이 종속되었음을 의미한다기보다, 둘의 이해관계가 통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금융이 새롭게 주목받는 현상은 단지 투자 문제에 대한 관심 이상의 것을 의미했는데, 이런 현상은 소위 “금융화”라는 말로 집약적으로 표현됐다. 그러나 중개매매와 파생상품, 헤지펀드와 그 외 다양한 것들이 복잡하게 뒤얽힌 속에서도, 금융화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위에서 우리가 몇 가지 요인들을 다뤘던 것에서 보듯이, 투기가 다른 자본으로부터 이윤을 갈취해 개별 자본의 이윤을 늘릴 수는 있어도 체제 전체 차원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점이다.


특정 시점에서 체제가 위기를 다시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신자유주의가 이윤율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불공정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한 가지 더 중요한 기능을 자본가 계급과 부르주아지에게 일반적 차원에서 제공했다. 이 문제는 하비가 정의한 용어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지만, 만일 우리가 하비의 자본가계급의 권력 회복이라는 개념을 더 많은 부와 자원이 자본가 계급과 그 하수인들에게 이동했다는 말로 바꿔 쓸 수 있다면 하비의 문제의식과도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시드니 폴라드(Sidney Pollard)가 1990년대에 일찍이 지적했듯이, 모든 선진국 경제 중에서 영국은 가장 높은 인플레이션과 가장 높은 이윤율, 그리고 가장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다. 게다가 생산은 감소했고, 국민 소득도 감소했으며, 노동 시간은 가장 길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두드러진 기록들은 한 가지 방향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바로 정부가 자신의 정책적 역할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정부가 [경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서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는데도. 그들은 빈곤층과 최빈곤층의 부(富)를 부유층 및 최고 부유층에게 이전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부의 이전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뒤메닐과 레비는 지배계급의 재산에 두 가지 움직임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1970년대의 위기 초반 부자들의 자산 가치가 “상대적 저하”를 겪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자들이 “신자유주의 간판 아래에서 잃었던 것만큼 회복하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벌어들였다는 것”이다. 후자의 현상을 두고 뒤메닐과 레비는 “지배 계급이 신자유주의를 통해 인구의 나머지 계급들에 대해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성취를 거둔 대성공”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생산적 부문의 이윤율 저하 현상을 우회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사드-필류가 썼듯이, 어떤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이 투자에 대한 높은 수익성을 보장하거나 높은 GDP를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 아무런 효과가 없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신자유주의는 인구 내의 최부유층들의 소비 수준을 향상 시켰으며, 소비자들이 기꺼이 빚을 내게 만들었다.” “성장 촉진, 인플레이션 억제, 심지어 금융 자본가들의 증권 투자를 증진시키”는 것보다도, 바로 이런 효과가 신자유주의의 진정한 결과였다.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은 자본가 계급의 개별 구성원들에게 이로운 것이었다. 그들은 이를 통해 빈곤층과 노동계급의 삶을 질을 낮추는 대가로 그들 자신의 부를 증가시킬 수 있었다. 쌔처리즘이 날개를 편 지 10년이 지난 1988년 FTSE[영국의 주식시장] 상위 100개 회사의 평균적인 CEO의 수입은 노동자의 평균 임금에 비해 17배였다. 2008년에 이 수치는 75.5배로 늘어났다.


신자유주의는 항상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존재했다. 물론 이 이데올로기는 공평무사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계급의 이해관계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국제적 차원에서 지배계급의 어떤 중요한 부문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초가 되는 그들의 믿음을 버리지 않은 것은 놀라울 것 없는 일이다. 그럴 때 그들에게는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다른 차원에서도 규정될 수 있다. 그것은 특정한 계급의 이해관계를 일반적으로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이론과 현실의 불일치, 즉 [신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모든 사람의 삶의 질이 나아질 것이라는 약속과 지배자들이 이익을 독점하는 불평등한 현실의 간극을 정당화하고 설명하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지금껏 어디서도 경험한 적 없던 완벽한 자유”에 대한 갈망은 에인 랜드(Ayn Rand)와 그의 신봉자들이 쓴 책에서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데, 사실 이런 정서는 더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 꿈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 명백하기에, [이처럼 ‘이상적인’ 모습의] 신자유주의는 결코 달성되지 못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계속해서 해명하기 위해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적들이 결코 완전히 정복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수 십 년 동안 이뤄진 뒤에조차도, 최근의 정책적 실패가 얼마나 자주 비타협적인 노조, 간섭적인 규제, 무능한 관료들,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이익집단의 탓으로 돌려지는지를 보라.”


시장 국가? 이론과 현실이 불화를 겪는 또 다른 영역은 바로 국가의 역할에 대한 문제다. 민영화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국가는 자신들이 해 오던 역할을 중단할 수 없었다. 2008년 9월 이래로 많은 병든 금융자본의 경영자들은 [국가는 경제에 손을 떼야 한다는] 자신들의 생각을 재고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고전파 선배들과 달리, 신자유주의자들은 반(反) 국가적 수사를 강조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실천이 어떠한지와 상관없이. 그러나 우리가 보아왔듯이, 국가 개입에 대한 반대와 자유 시장은 실패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적 협약에 따르는 국가를 거부하는 것이지, 국가 일반의 역할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어떤 면에서는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오히려 케인즈주의 시기에 비해 더 큰 힘을 획득했다. 따라서 현재의 위기에 대한 대응책인 국유화와 국가 통제라는 수단들은 국가 개입주의의 귀환 따위가 아니다. 실제로 국가 개입은 중단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신고전파와 신자유주의 학파가 모두 국가의 중요성 — 한 편으로는 시장 활동을 보장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집단적인 반대를 무력화하는 — 에 주목하기는 하지만, 현실의 경제 세계에서 국가의 역할은 그들의 이론적 전통이 허용하는 범위보다 훨씬 큰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국가 기구의 규모와 국가 지출 수준 모두 거대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이런 지출의 많은 부분은 과거 사회민주주의 시대에 도입된 국가 사업에 사용되고 있다. 경제적 효과 측면에서만 본다면, 미국에서든 영국에서든 무기 산업은 정부 보조금의 축소를 겪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또 규모가 무척 커서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기업들에 대해 더 많은 선별적 지원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먼은 이렇게 지적했다. “국가는 경제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1950년대나 60년대보다 70년대에 더 많이 개입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위기가 더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하에서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국가 재정 지출의 규모나 국가의 개입 영역이 바뀐 것이 아니라, 돈이 어디에 쓰이며 국가가 어떤 활동을 수행하는가가 변화의 핵심이다. 이런 과정은 “축소라기보다는 방향전환”이었다. 코스타 라파비차스(Costas Lapavistas)는 이렇게 설명한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전후(post-war) 케인즈주의의 성격을 구성하는 개념들 — [국가의] 경제 개입이 완전 고용과 사회 복지를 목적으로 한다는 — 이다.” 존 클락(John Clarke)과 자넷 뉴먼(Janet Newman)은 사실 이런 일은 국가가 “분권화” 전략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국가를 위해 행동하도록 권한을 부여받은 여러 하부 조직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위임—이 용어는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한다.” 그 결과, [국가와] 사적 자본의 관계가 변화했다. 


복지 급여가 그런 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 2010년 연립 정부의 긴축 프로그램이 제출되기 전까지, [정부의] 실제 지출 규모는 변화가 없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저항의 성과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사회적 임금에 대한 지출을 줄이는 것이 안정적 축적 과정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요 지출 항목의 이면을 살펴보면, 그 서비스들의 형태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린이, 노인과 장애인, 장기 질환자에 대한 보살핌은 점점 더 국가의 책임에서 가족들의 — 일반적으로는 가족의 여성 구성원들의 — 책임으로 이전되어 왔다. 이런 이전은 “비공식적”인 합의에 의해 이뤄진 것이지만, 오늘날 국가기관들은 그 효과를 계산하고 있다. 또, “국가가 어떤 면에서는 철수하는 동안, 국가의 권력과 하부 기구들은 어떤 면에서는 확장되어 왔다. 그들은 ‘책임’은 이전했지만 동시에 단속과 강제의 역량은 키워 왔다. 그들은 이를 통해 그런 ‘책임’들이 문제없이 이행되도록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변화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마크 올슨(Mark Olssen)은 신자유주의 국가가 “신자유주의 작동에 필요한 여러 조건과 법, 제도를 창출하는 것을 통해 적절한 시장”을 창조해낸다고 썼다. 또 국가는 “진취적이고 경쟁력 있는 기업가 성향의 개인들”도 만들어낸다. 그리고 국가와 이들 사이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변화를 시사하는 것이다.


주체의 지위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스스로의 이해관계에 맞춰 자연스레 행동하면서 상대적으로 국가로부터 동떨어져있던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통제 가능한(manipulatable) 인간”이 된다. 그는 국가에 의해 창조되고, [국가에게] “끊임없이 반응을 보이”도록 계속해서 자극 받는다. …… 이기적 주체라는 개념은 대체되거나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이상(理想)에 의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보편적 복지의 시대가 나태와 게으름을 낳을 수 있다는 명백한 가능성은, 새로운 방식의 감시와 감독, “근무 평정”, 그리고 다양한 통제 방식들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런 지적이 보여주듯이, 1939년에서 1945년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경험한 총력전 시기를 제외하면, 오늘날 국가 권력이 관여하는 억압과 감시의 영역은 이제껏 상상하지 못한 정도로 커졌다.


사회 붕괴? 신자유주의가 굴종에 못지않게 저항에 부딪히면서, 우리는 이전부터 노조나 제3세계 부채 탕감 운동이나 환경 운동 등 여러 영역에 걸친 사회운동 단체들에 가해지던 법적 제약이 더 확대되는 것을 목도해 왔다. 정부는 파업 참가자 중 사업장 바깥에서 피케팅을 할 수 있는 인원을 제한했는데, 이는 마치 최근 연구소나 본사, 혹은 도시의 공공장소에서 벌어지는 시위에 대해 금지 명령이 남발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러나 저항은 국가의 억압 기능이 더 강화하게 만든 여러 요인 중 한 가지일 뿐이었다. 신자유주의의 다른 두 가지 결과가 저항만큼이나 중요한 요인들이다.


하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물질적 차원에서 공표한 것을 성취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빈곤과 불평등의 증가가 세계의 한 편에 존재하고, 다른 한 편에는 질병과 가족 해체, 그 결과 생겨난 범죄 등이 도사리고 있다. 리처드 윌킨슨(Richard Wilkinson)과 케이트 피케트(Kate Pickett)는 이렇게 쓰고 있다.


2008년 후반기 본격화된 금융 위기가 발생하기 한참 전, 영국 정치인들은 지역사회의 규율과 다양한 형태의 반사회적 행동들에 대해 이런저런 논평을 늘어놓으면서 “사회 붕괴”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냈었다. 그러나 금융 붕괴는 사람들의 주의를 경제 붕괴로 향하게 했다. 사회 붕괴는 가난한 이들의 행태 때문이라는 비난이 때때로 있었지만, 경제 붕괴는 부자들의 탓이라는 관점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사회와 경제의] 두 붕괴 모두가 사실은 주요하게 불평등의 증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하자면 부자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소득 격차를 넓힌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 정부에겐 사회적 유대를 줄이거나, 폭력, 십대 출산, 비만, 약물 남용 등등을 부추기려는 의도가 없었다 …… 이런 문제들의 증가는 소득 분배의 변화에 따라 발생한 의도되지 않은 결과물이다.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신자유주의가 이론상으로는 거부하는 국가 개입의 재개는 신자유주의가 현실에서 만들어낸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했다.


두 번째 결과는 신자유주의의 물질적 실패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내재한 모순적인 열망, 시장에서는 독립적인 개인 소비자로서, 사업장에서는 순종적인 임금 노동자로서, 그리고 국가 앞에서는 종속적인 시민 대중으로서 행동하는 인민을 창조하려는 열망이었다. 몇몇의 서로 아주 다른 논자들이 강조해 왔듯이, 소비자의 선택을 통한 개인적 성취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시장은 가족, 국가와 같이 전통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해 온 정체성의 형식들 뿐만 아니라 축적을 가능케 하는 아주 개인적인 제약들마저 불안정하게 만든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말하듯,


개인 중심적인 이데올로기가 제시한 기대에 혼란을 초래하는 모든 사건들은, 민영화 이데올로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모욕으로, 즉 (무작위로 표적되었을지라도) 개인을 겨냥한 모욕으로 드러나며 또한 그렇게 “이해되었다.” 그 결과 자존감뿐 아니라, 안전감과 자신감이 첫 번째 희생물이 된다. 이런 방식으로 영향을 받은 개인들은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낀다. 민영화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존재하는 고통과 불만을 초래한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 따로 있다고 추정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가치를 떨어뜨린 죄를 지은 개인들을 찾아 내려는 열병을 앓게 된다. 갈등과 적대는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죄인들은 특정되고, 폭로되며, 공개적으로 비난받고 응징을 당한다. 민영화 이데올로기 하에서 “그들”은 “우리”만큼이나 개인화되었다.


여기에는 섬뜩한 정치적 함의들이 있다. 앤드류 신필드(Andrew Sinfield)는, “쌔처리즘(여기서는 신자유주의 전체를 표상하는)의 더 큰 위험”은 노동조합들이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승리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가 불러일으킨 정서를 만족시키거나 통제하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이라고 쓴 적이 있다. 즉,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경제적 정책들을 그럴듯하게 만드는데 동원되는 ‘법과 질서’라는 수사와, ‘종속적 집단을 피해자로 만들기’는 [그 피해자들을] 응징하려는 세력을 불러일으키며, 끔찍한 종류의 만족감을 추구하는 기대를 자극한다.” 이것은 유럽에서의 파시즘의 성장에 자양분을 제공해주는 것이지만, 이것이 가장 무시무시한 결과는 아니다. 


프랑스의 국민전선(the Front National)이나 영국 국민당(the British National Party)이 둘러쓴 것과 같은 품위로 위장했을지라도, 파시즘은 규명할 수 있고, 고립시킬 수 있으며, 분쇄할 수 있다. 최소한 영국에선 1970년대 후반의 ‘반나치 동맹’(the Anti Nazi League)과 ‘인종주의에 대항하는 록’(Rock against Racism)에서부터 오늘날의 ‘파시즘에 맞선 연대’(Unite Against Fascism)와 ‘음악엔 사랑을 파시즘엔 증오를’(Love Music Hate Racism)에 이르는 성공적인 반(反) 파시즘 운동의 전통이 있다. 서서히 확산되고 있기에 더 암울한 시나리오는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가 극우 프로젝트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마치 자동차나 해외여행을 고르듯 소비자들이 일상적으로 선택하는 상품으로 취급되는 상황일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야기한 재산 소유 형태의 변화는, 그것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주관적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국가는 경제 관리만 아니라 사회 통제의 역할도 맡게 된다. 결국, 고(故) 닐 스미스(Neil Smith)가 이라크전의 대실패의 결과로 “신보수주의의 시대는 끝났다”고 옳게 지적했지만, 이 말은 주로 미국 제국주의의 “모험주의적인” 전략적 선택으로서의 신보수주의의 협소한 측면만을 언급한 것이다. 신보수주의는 국내적 차원에서 신자유주의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억압적인 동반자로서 여전히 살아있고 여전히 건재하다. 


데이비드 하비는 “시장, 경쟁 그리고 억제될 수 없는 개인주의의 무질서는 …… 점점 제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고 썼다. 그리고 그가 강조하길, “사회적 무질서와 허무주의”를 맞아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아마도 강력한 통제와 함께 어느 정도의 강압이 필요해질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신보수주의로의 전환의 두드러진 특징은 점점 더, 실업자, 한부모, 이민자, 망명자, 망명 희망자들이, 위기에 진정으로 책임 있는 자들로부터 위기의 결과로 가장 고통받을 사람들에게로 적대감을 돌리기 위한 냉혹한 희생양 만들기 전략의 목표물이 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식 ‘피해자 비난하기’의 고전적인 형태로, 이 경우에는 자본주의가 낳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신자유주의가 실패한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것이다. 억제되지 않은 억압과 상품화의 결합이라는 미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조지 스타이너(George Steiner)가 잘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 “한 손에는 채찍, 다른 손에는 치즈버거.”



  결론


앞선 신자유주의 분석이 옳다면, 혁명가들은 영국에서 어떤 전략적 결론을 도출해야 할까? 연금을 방어하기 위해 파업 행동을 건설하는 운동에 투신하는 것은 명백히 필수적인 과제이다. 이와 비슷하게, ‘저항의 연대’(Unite the Resistance)와 같은 조직은 긴축에 맞서는 매우 다양한 투쟁들을 연결하고 영향을 미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당장 우리 계급이 직면한 공격에 대한 대응이다. 이에 더해 필요한 것은 지난 40년 동안 전개된, “프롤레타리아가 투쟁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조건의 변화”를 반영한 전략적 방향 설정이다. 이 결론은 세부적인 논점을 제공하진 않는 것이 분명하지만, 전략의 일부 요소들은 다음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첫 번째는 국가와 관련된 것이다. 혁명정당의 존재의 의의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노동계급이 국가의 중앙집중적인 권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전국적 차원에서 단호하고, 일관되며, 단일하게 행동할 수 있는 중앙집중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여전히 타당하다. 신자유주의의 특징 중 한 가지는 더 장기적인 경향(그 기원이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의 연속으로, 특히 감시와 억압의 영역에서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국가 권력의 축적을 지향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치 국가devolved nation[각주:18]들도 포함하는 현상이다. 에딘버러의 스코틀랜드 국민당the Scottish National Party 정부는 스코틀랜드 전역의 경찰력 확립에 여전히 관여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어디선가 논한 바 있듯이, 만약 신자유주의 전략이 긴축의 책임을 선출된 최하급의 행정 단위로 양도한다면, 전략의 방향은 통합의 특성만큼이나 파편화의 특성 또한 가진 구조를 향하게 될 것이다. 이런 파편화 경향은 민영화의 해체적 영향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혁명 정당의 중앙집중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지역적 상황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감각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이러한 보완은 단지 자치 국가들의 차원만이 아니라, 다양한 대응과 자발성이 필요한 지역과 도시 단위에까지 적용되어야 한다. 이것은 “연방주의적” 구조를 구축하자는 요구가 아니라, 전국적 수준에서 고안된 보편적 전망 ─ 명백하게 이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 이 지역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상황에 창조적으로 조정 및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는 노동당과 관련된 것으로, 더 일반적 의미로는 개혁주의에 관한 문제이다. 영국의 혁명가들에게 핵심 문제는 노동당이 사회-신자유주의를 채택함으로써 근본적으로 변화했는가 하는 것이다. 존 매킬로이(John McIlroy)에겐 의문의 여지가 없다. “레닌이 모순적 구조물로서 규정했던 구조물, 즉 부르주아적 노동자 정당이 블레어와 브라운의 수중에서, 노동조합의 제도적 지위 때문에 사무가 복잡해져 버렸을 뿐인 단순한 부르주아적 신자유주의 정당이 되어 버렸다.” 확실히 이 선언은 우리가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혁명가들은 당장의 논의의 맥락에 따라서 상황에 따른 다른 특성을 강조하거나 그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노동당에 대한 노동계급의 인식은 그것이 실제로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한,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많은 조직 노동자들과 억압받는 집단들은 민주당을 미국 자본주의의 제2의 정당이라기보다는 공화당과 근본적으로 다른 정당이라 여긴다. 이것은 물론 양당이 완전히 똑같다는 뜻이 아니다. 정말로 그렇다면 별개의 두 정당이 존재할 의미가 거의 없을 것이다. 특정한 사회적 이슈를 둘러싸고 민주당은 공화당에 비해 명백히 자유주의적이다. 노동자들과 억압받는 집단들은 여기서 이득을 얻었다. 그래서 공화당은 전위 역할을, 민주당은 사회-신자유주의적 역할을 맡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지지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서는 양당 사이에 의미 있는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이 노동당을 다른 의회주의 정당들과 다르게 인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세 가지 주요 요인이 있다. (1) 대체로 “국민”이나 “국가”가 아닌 노동계급의 조건 개선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정책들(“개혁”). (2) 노동계급 당원 비중. (3) 조직 노동계급과의 연계.


역사적으로 노동당은 당의 신용에 대한 여러 중요한 성취들을 이룩한 바 있다. 우리는 이를 과도하게 무시하고, 노동당이 저지른 배신의 기록들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물론 여기에는 분명한 근거, 대개 정당한 근거가 있다). 하지만 이런 접근의 문제는 우선, 사람들이 한때 노동당을 신뢰했던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들은 모두 과거의 일이다. 특히 몇몇은 정말 오랜 과거의 일이다. 점점 더, 이 당이 어떠한 실천적 차이를 보여 줄 것을 기대하고 노동당에 투표하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기억이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1920년대 존 휘틀리(John Wheatley)의 임대 주택 건설이나, NHS 같은 기관의 설립, 동일임금 법령 제정 같은 계획들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노동계급 지역사회에는 노동당 활동가 층이 있었다, 이 중에는 매우 우파적인 활동가들도 있긴 했지만. 그들은 의회에 로비하고 청원을 조직하며, 일반적으로 지역사회 개혁주의에 초점을 맞춘 실천을 했다. 이 활동가 층은 거의 소멸되었다. 이런 활동들은 여전히 수행되고 있지만, 더 이상 당연히 노동당 당원에 의해 주도되는 것은 아니다.


당원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다. 원래 노동당에는 압도적으로 노동계급 당원이 많았다, 웹 부부(the Webbs)[각주:19], 애틀리(Attlee), 게이츠켈(Gaitskell) 등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대표되는 전문직 중간계급이 중요한 구성부문을 이루긴 했지만. 이것은 레닌이 “자본주의적 노동자 정당”이라 묘사한 실제 계급 기반으로, 주로 노동자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정당이다. 노동당의 이 계급 기반은 1960년대 이래로 감소해왔으며,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엔 개인 당원에서 신중간계급이 다수를 차지하는 데 까지 이른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변화에 대한 분석에서, 게라시모스 모스코나스(Gerassimos Moschonas)는 비록 사민주의 정당들의 유권자는 노동계급이 다수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당원구성의 비중은 점차 급료를 받는 공공 부문의 중간계급이 차지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이것의 함의는 수(數)로 표현되는 것 이상이다. “대개 공공서비스와 ‘교양있는 부르주아지’에서 충원되는 계층들의 문화적 지배력과 그들의 상당한 개인적, 집단적 동원 잠재력을 고려하면, 우리는 노동계급 문화의 영향력이 엄밀한 산술적 세력관계가 나타내는 것보다 훨씬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모스코나스가 지적하듯, 노동계급의 지위가 “부차적”인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노동계급의 당에 대한 영향력은 점점 “간접적”인 방식으로, 당원으로서가 아니라 노동조합을 통한 방식으로 행사된다. 당 내에서 노동계급의 참여는 감소하고 수동성이 자라나며, 뒤이어 침묵과 “중간계급의 우위를 강화하게 될” [노동계급의] 침묵과 이탈이 따라온다. 현재 노동당 내 노동계급 당원 비중은 대부분 당과 연계된 노동조합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에 따라 노동조합의 지위는 확고하게 중요하다.


당과 연계된 노동조합, 좀 더 광범하게는 TUC, 스코틀랜드 TUC 그리고 웨일즈 TUC는 조직 노동계급의 입장을 노동당 내에서 표현하는 통로의 기능을 했다. 비록 언제나 관료들에 의해 상당히 왜곡되기는 하지만 노동계급의 입장은 노동당 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런 작용은 1974년 즈음에 정점을 찍었다. 이론상으로 이와 같은 작용은 여전히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신노동당의 출범 이래로 관료들은 당에 대한 노동계급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자기-부정적 조치들을 실행해 왔다. 수사적 차원 외에는 ─ 주로 ‘유나이트’(Unite)[각주:20]의 렌 맥클러스키(Len McCluskey)가 하는 ─ 이에 대한 변화의 조짐은 없다. 의심의 여지없이 재정적 차원에서 노동조합으로부터 오는 지원이 없다면 노동당은 사실상 사라져 버릴 것이다. 기업 후원자들은 이미 노동당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지원의 대가로 노동조합이 얻어낸 정책들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최저임금에 관련한 것이나, 고든 브라운이 은밀하게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려온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들 말고 뭐가 있는가? 사실 노동조합과의 연계의 중요한 이점은 다른 데에 있다. 


노동당의 재선 기회를 위협할 것이라는 핑계로 공식적으로 투쟁을 제약하는 것이다. 비록, 노동당이 재선되고 나면 단지 보수당과 같은 정책을 좀 더 천천히 제시할 뿐이다. 그러므로 PCS, UCU와 같은 가장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노동조합들이 노동당과 제휴하지 않으며, 이런 노동조합의 평조합원들이 노동당을 경멸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노동당과 제휴하는 노동조합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재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노동당이 다른 정당들과 구분되는 주요 특징이 실질적으로 노동계급에게 이로운 결과를 낳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은 노동조합과의 연계를 유지하는 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계는 언젠가 또다시 노동계급의 요구(관료화된 형태로 표현되더라도)가 당의 실제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될 가능성을 열어 놓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그저 기다리는 동안, 노동계급의, 또한 그 계급의식의 변화는 우리를 위해 멈춰 있지 않을 것이다.


개혁주의가 노동계급의 지배적인 의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바뀐 것도 별로 없고 지난 100년간 그랬듯이 개혁주의는 계속해서 노동당의 형태로 표현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개혁주의 일반을 곧 노동당이 취하는 특정한 형태의 개혁주의와 곧장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 집권 여부를 막론하고 신자유주의 수용을 통해 두드러진 노동당 자신의 행위와 노동계급 성격의 구조적 변화, 마지막으로 최근에 일어난 노동조합 의식의 저하는 한 가지 변화를 이끌어냈다. 즉 많은 노동계급 구성원들이 보기에 노동당은 근본적으로 다른 정당과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제시된 선택지 중에서는 “차악”이라서 투표하는 경향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노동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아니지만 개혁주의적인 SNP[스코틀랜드 국민당] 를 지지했고, 이 투표는 직접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 노동계급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2011년 에든버러 동쪽의 홀리루드 선거 이후 SNP는 다수당으로서 정부를 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특정한 조건에서 혁명가들이 계속 노동당 투표를 호소할 것인지가 아니라, 노동당의 역할이 바뀌어 온 경로를 인식하는 것이다. 유럽과 오세아니아 지역의 비슷한 정당들처럼, 노동당은 극심하게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노동당의 왼쪽으로의 재이동은 이론적으로는 언제나 가능하다는 사실이 낳은 더욱 근본적인 논점들이 존재한다. 한 가지 논점은, 이제는 노동당이, 초보적인 개혁주의적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유지하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85%를 상회하는 사적 부문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조합 역시 마찬가지라는 요인에 의해 더욱 악화된다. 이런 현상은 혁명가들에게도 한 가지 중대한 문제를 안겨 준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설득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민주주의적” 가치와 믿음이 공유되고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와 믿음의 부재는 적어도 잠재적인 장벽을 낳는다. 또 다른 논점은, 사회적 폭발이 발생하는 곳 — 그리고 위기가 지속되는 한 이 폭발이 지속될 것이라고 우리가 가정하는 곳 — 에서는 노동당이 더 이상 노동계급의 행동을 제약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지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현 상황의 휘발성은 계급의식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급격히 변동할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서구에서 불균등 결합발전이 적용되는 몇 안 되는 현상 중 하나이다. 그러나, 첫 번째 측면[휘발성]의 실제성을 해소하기 위해 두 번째 측면[계급의식의 급격한 변동]의 가능성에 기대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선거를 통한 노동계급의 대표성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는, 그저 어떤 조직이 형성되는지 지켜보다가 이미 다른 정치세력에 의해 조직구조와 정책이 마련된 단계에서 참여하는 방식과는 다른 대응이 필요하다. 더 나은 접근법은, 어떤 형식의 선거 조직이 필요한지(현존하는 모델 중에서 어떤 것이 적절한지는 전혀 뚜렷하지 않다)를 확인하고 이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침몰하는 배에서 뛰어내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현존하는 좌파들을 결집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노동당과의 관계를 막 단절했거나 그들로부터 버림받은 계급의 부문들을 결집시키는 방식이어야 한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요소는 노동계급 자신과 관련된 것이다. 나는 앞에서도 국가 관료, 정치인, 자본가들이 신자유주의적 방법들을 도입할 능력은 노동운동을 약화시키는 데에 성공했는지에 직간접적으로 달려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신자유주의를 뒤엎을 희망은 현존 질서에 충실한 정당들로부터 독립적인 기반에서 이루어지는 운동의 재건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변수는 계급의 힘이 될 것이지만, 이 결론은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좀처럼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 분명하다. 적어도 서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계급을 부차적으로 취급한다. 폴리 토인비(Polly Toynbee)와 데이비드 워커(David Walker)는 “노동계급은 물론이고 소득이 낮은 소수자들은 그들이 일을 하든 안하든 멸시당한다”고 썼다. 심지어 노동계급의 지속적인 존재감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의 무덤을 팔 능력이 있다는 데에는 회의적이다. 앤드류 갬블(Andrew Gamble)은 이렇게 썼다. “오늘날 정해진 궤도를 이탈해서 그 짐과 승객을 내동댕이치는 마부와 같은 존재는 자본주의 안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규모에 관한 것인, 첫 번째 주장은 널리 수용되고 있지만,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다수를 중간계급으로 분류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통념이다. 노동계급의 능력에 관한 것인, 두 번째 주장은 보다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잘못된 것이긴 하지만 첫째 주장이 나온 배경도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조직 노동계급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항상 자신의 심장부에서 저항에 부딪혔다. 이것은 1980년대 노동운동의 패배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인두세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지배계급의 선제행동은 늘 도전을 받았다. 1980년대 후반 이후로 영국에서 대두된 중요한 사회문제들 — 인두세와 형사사법안(the Criminal Justice Bill) 문제, 병원 폐쇄와 임대주택 매각 문제, [극우정당인] 영국국민당과 난민신청 문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가자 지구에 대한 제국주의 전쟁, 아랍의 봄에 대한 연대,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침실세’ 반대 운동에 이르기까지 — 에 대해서 사람들은 늘 자신의 지역사회에 대한 공격에도, 지정학적인 부정의에도 맞서 싸웠다. 


문제는, 비록 노동조합들이 여기 참여는 했지만 핵심적인 역할은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이 사업장 문제에 침묵했다는 말은 아니다. 수십 년간의 신자유주의 소모전 속에서도, 특히 공공부문 노동자들(그리고 철도처럼 민영화된 부문의 노동자들)은 임금과 노동 조건, 자신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들을 지키기 위해 감탄스럽도록 활력 있게 싸웠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점차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는 주장을 올바르게 거부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는 없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조직되어 있지 않고, 특히 사적 부문의 조직률은 14퍼센트 언저리를 맴돌고 있으며, 조직률이 높은 부분은 대체로는 사양산업 분야에 속한다는 것이다.


점차 불안정(혹은 지배계급의 용어로는 “유연한”) 노동이 늘어나는 현상은 조직화에 걸림돌이 된다. 불안정성의 정도는 과대평가되어서도 과소평가되어서도 안 된다. 불안정성이란 노동시장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지, 계급이 처한 객관적 조건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불안정성은 노동계급 다수의 일반적인 경험이었다. 최소한 선진국들 사이에서 안정적 고용이 표준적이었던 유일한 시기는 전후 대호황의 시작과 함께 찾아왔다. 자본주의 역사상 전적으로 예외적이었던 이 시기의 다른 측면들도 그렇듯이, 안정 고용은 이제 기울고 있다. 이 불안정성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대다수 젊은 노동자들이 애초에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들의 처지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전에는 철밥통과도 같았던 금융, 인사, 행정직 일자리는 지금 훨씬 취약해졌다. 이는 특히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들어 빈발한 인수합병에 따른 대규모 경영합리화와 인원삭감 때문이다.


불안정성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수많은 정규직 사업장에서 공식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노동조합을 인정받는 것은 고사하고, 노조 조직화 자체가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자들처럼 핵심적인 집단은 여전히 개별 사업장을, 때로는 전체 산업을 멈춰버릴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잠재력은 그들의 수(數)적인 힘보다 전략적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특히 사적부문에서 두드러지는 노동조합 조직률의 가파른 감소는 많은 노동계급 구성원들이 “노동조합 의식”을 발전시킬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사 그들이 정치적으로 좌파적인 견해를 고수하고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렇다. 


이 노동자들은 조직될 수도 있었겠지만, 당장은 그렇지 않은 상태이며, 이 상태는 자체의 정치적 영향을 낳는다. 효과적인 노조 조직화의 장애물로 여겨지는 요소들 중에서, 작은 사업장 규모(최소한 가족회사 규모를 넘어선다면), 회사 내외부에서 이뤄지는 외주화나 파견으로 인한 복잡한 관계의 증가, 주로 여성 및 소수 인종으로 이루어진 직종 등등의 요인이 반드시 조직화의 장애물이 된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훨씬 더 중요한 변수는 대체로 노동조합이 신규 조직화에 대해 얼마나 헌신적이고 창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노조가 없는 사업장이 노조가 없는 채로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조직화 과정에 큰 어려움이 없는 척 한다면 어리석은 짓이겠지만, 이것을 극복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이다. 영국에서 노조 조직화는 1926년 총파업의 대패에 뒤이은 시기인 1930년대에 이루어졌다 — 일례로 동부 미들랜즈와 런던 근교의 경공업과 자동차 산업이 그랬다. 결코 자동적인 과정은 아니었지만, 대규모 가입화는 상당히 빠르게 이루어졌다. 더 적절한 사례로는 193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거대한 조직화 물결을 들 수 있겠다. 이것은 1920년대 호황이 낳은 소비지상주의 낙원에 자신들도 들고 싶었으나 저임금에 막혀 있던 노동자들의 열망에 의해 추동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동력은 관리자의 규제와 생산 라인에 머물러야 한다는 압력에 대한 그들의 저항이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경제적 배제와 사업장 통제의 성격이라는 두가지 측면 모두에서, 통신판매 혹은 금융 서비스 분야의 거대한 공장식 사무실들에서 확산되고 있는 조건과 매우 비슷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혁명가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웬만큼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주위 환경(environment)에 적응함에 따라, 특정 부문이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노동계급에게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취급해 버릴 위험은 언제나 있다. 사회주의노동자당(SWP)에서는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이 그렇다. 강사, 공무원, 공공부문 용역(council worker)의 저항은 당연히 중요하다. 특히 정치적․사상적 측면에서 그렇다. 


하지만 청소노동자나 세관원 등의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광부, 항만 노동자, 전기 노동자들과 같은 경제적 충격을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가할 수는 없다. (미래 어느 시점에 교사노조의 전국행동으로 맞벌이 부부가 집에 머물러야 해서 국가가 마비될 것이라고 상정하는 전략에 너무 많은 희망을 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탄광, 항만, 발전소의 향수에 젖어서 콜센터, 수퍼마켓, 인력 파견 시장의 현실에 절망하는 것은 쓸모없을뿐더러 불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에게 가르쳐준 경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훌륭한 옛 것이 아니라 나쁜 요즘 것들에서 발상을 찾아보게.”


그러나 노조 조직화는 혁명가들이 반드시 참여해야 할 실천적 목표로 다뤄져야 한다. 노조 관료들이 조직화에 실패했다고 불평만 할 일이 아닌 것이다. 바꿔 말하면, 어떻게 하면 혁명가들은 — 아마도 역사적 유비가 유용한 것인데 — 1930년대 영국과 미국의 공산당이 항공노동자와 자동차노동자들을 조합으로 조직하는 것에 비길 만한 일을 할 수 있을까? 현재 미조직된 사적 부문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운동으로 유입되지 않는다면 투쟁이 아무리 부활하더라도 불필요하게 약화되거나 제한될 것이며, 이 노동자들은 저절로 가입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일반화된 저항이 사업장에서 시작될지는 결코 확실히 예상할 수 없다. 물론 그 저항이 성공하려면 사업장까지 확산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적 부문 노동자들(또한, 많은 공공 부문 노동자들)은 현재 스스로 강력하다고 느끼지 않으며, 사업장에서 자신감이 있는 상태도 아니다. 그러므로 관리자의 감시를 뚫고 작업장에서 저항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지역사회에서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더 쉽게 생각한다.


자본주의 체제(단지 신자유주의만이 아니라)가 안고 있으며, 이 체제가 변명하고자 하는 한 가지 핵심 문제는, 이 체제가 결코 다수의 생활조건을 향상시키기는커녕 유지할 능력도 없다는 점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가까운 미래에 대규모 호황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으며—역설적으로—이 모순 속에 바로 희망이 있다.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입장에서 생계는 점차 불안정해지고, 정치는 점차 무의미해지며, 사회는 점차 파편화되고, 문화는 점차 질이 떨어진다. 신자유주의자들의 관점과는 반대로 인류는 유효수요로 무장한 탐욕 덩어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저항하고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공격에 맞설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모든 면에서 1970년대 후반의 출발점으로 회귀하지는 않았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를 훨씬 나은 것으로 개조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생활조건들을 일시적으로 저하시키는 여러 조치들을 받아들이도록 설득당한 사람들 중에서 적어도 일부는 다시 속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희생으로 점철된 지난 30년간 이득을 본 사람들은 오직 사회의 꼭대기에 있었던 이들 뿐이며, 이들이 더 큰 침체를 막지도 못했다는 것이 입증된 상황에서는. “부유한 자들을 향한 내 친구들의 증오는 이제 분명해졌다”라면서 앨런 비셋은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그들 자신이 부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체제 자체가 줄곧 조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뒤로 줄곧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노동계급의 존재조차 부정하던 그들은 지금 이 체제, 능력 본위로 작동한다고 주장했지만 현실에서는 그들에게 적대적인 체제를 향한 분노로 타오르고 있다. 그들의 “중간 계급”으로의 상승은 환상이 되었다. 쉬운 신용대출에 의해, 그리고 환상 그 자체를 유지하려면 과시적 소비가 불가피한 경제 구조에 의해 떠받쳐지는 그런 환상이.


이러한 사태 전개의 이면에는 끔찍한 경험들이 있었지만, 이것은 어쩌면 [계급]의식의 긍정적인 변화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혁명적 좌파가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면.


(번역: '변혁 재장전' 강독모임,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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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높아짐)함에 따라 이윤율이 갈수록 저하하는 경향. ‘자본의 유기적 구성’ 및 ‘이윤율 저하 경향’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각주(역주) 9번을 보시오. [본문으로]
  2. 상시 군비 경제 이론(the theory of the permanent arms economy): 2차 세계 대전 이후 장기 호황이 4반세기 동안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한 가지 이론.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1) 냉전 때문에 군사비용이 대폭 늘었다. 2) 따라서 생산된 가치 중 막대한 양이 군비에 투입되었다. 3) 생산재나 소비재 생산에 투입된 가치와 달리, 군비에 투입된 가치는 새로운 가치를 전혀 생산하지 않거나, 혹은 무기 산업은 가치를 생산하지만 무기 산업조차도 다소 복잡한 이유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높이는 효과는 내지 않는다(사실, 이 부분에는 이론적 난점이 조금 있다). 4) 군비에 투자된 가치가 만약 생산적(가치를 생산하는) 부문에 투입되었다면 그만큼 더 많은 기계와 설비들이 생산되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더 빨리 높였을 것이고, 이것은 이윤율이 더 빨리 저하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5) 따라서 이 시기의 막대한 군비 지출은 ‘이윤율 저하 경향’에 대한 중요한 상쇄 요인이 되었다. ‘상시군비경제’ 이론은 ‘국가자본주의’ 이론 및 ‘일탈한 연속혁명’ 이론과 함께, 국제사회주의 경향(IST)을 여타 트로츠키주의 경향과 구별 짓는 세 가지 핵심 이론 중 하나이다. 주로 토니 클리프, 마이클 키드런 등이 발전시켰다. [본문으로]
  3. 2차 세계 대전 이후 1950~60년대 이탈리아 경제의 고도 성장기를 가리킴. [본문으로]
  4. 하트와 네그리에 의하면, 노동계급의 구성은 ‘대공업’시기의 첫 번째 국면(1848~1914)의 “직업 노동자” (professional worker)에서, ‘대공업’ 시기의 두 번째 국면(1차 세계대전~1968)의 “대중 노동자” (mass worker)로, 그리고 1968년 혁명 이후의 “사회적 노동자” (social worker)로 변모했으며, 결국 “다중” (multitue)으로 진화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이후 <소련 국가자본주의>(책갈피)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된 책의 바탕이 된 논문. [본문으로]
  6. ‘transitional program'은 트로츠키의 주도로 설립된 ‘제4인터내셔널’의 1938년 창립 강령의 별칭이다(정식 제목은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 흔히 ‘이행기 강령’으로 번역되는데, 노동자 국가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transitional period)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번역은 아니라고 본다. ‘최소 강령’과 ‘최대 강령’ 사이, 개혁주의적 의식과 혁명적 의식 사이의 연결 고리로 제안된 과도적 요구들(transitional demands)를 중심으로 하는 강령이라는 점에서 ‘과도 강령’이라 번역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7. 화폐의 가치를 금(金)에 연동시키는 제도. 애초에 미국 ‘달러’화는 (맑스에 의해 가장 발전되고 본질적인 형태의 화폐로 규정된) 금에 대한 증서(‘금태환 화폐)였다. 은행에 수표를 제출하면 현금을 내어 주는 것처럼, 연방준비은행에 달러를 제출하면 1달러당 일정량의 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1944년 성립된 ‘브레튼 우즈 체제’에서는 35달러가 금 1온스였다. [본문으로]
  8. 브레튼 우즈 체제는 미국 연방준비은행만이 ‘금태환 화폐’(금에 대한 증서인 달러)를 발행하고 주요국의 화폐 가치는 미국 달러에 연동시키는(따라서 궁극적으로 금에 연동되는) 일종의 고정환율제였다. 1960년대부터 국제수지 적자에 직면한 미국이 금 보유량을 넘는 달러를 마구 찍어 내면서 달러 가치는 하락했고, 금본위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여기 달러 갖고 왔으니 금 내 놓으라’는 일부 국가들의 움직임에, 결국 1971년 닉슨이 금태환 중지를 선언함으로써 브레튼 우즈 체제는 붕괴했다. 그 결과로 등장한 변동환율제는 신자유주의의 주요 특징 중 하나, 즉 고삐 풀린 금융 자본이 전 세계를 무대로 미쳐 날뛸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냈다. [본문으로]
  9.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생산수단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비율. 맑스주의 ‘노동가치 이론’에 따르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노동뿐이다. 생산수단은 자신의 가치를 상품에 이전시킬 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런데, 시장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개별 자본들의 경쟁적인 투자는 대체로 더 많은 양의 기계, 설비 등 생산수단을 갖추면서 더 적은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자본가들의 수중에 있는 생산수단 가치의 양이 고용된 노동력 가치의 양보다 상대적으로 점점 더 많아지게 된다. 즉 생산수단의 가치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진다(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이 현상이 체제 전반에 낳는 효과는, 갈수록 같은 가치를 투자했을 때 더 적은 가치만이 생산되는 경향이다(이윤율 저하 경향). [본문으로]
  10. 레오나드 제임스 캘러헌(Leonard James Callaghan), 당시 노동당 대표이자 총리. [본문으로]
  11. 1978년~79년의 겨울 동안 벌어진 공공 부문 노동자들의 거대한 파업 투쟁. 이 결과로 캘러헌의 노동당 정권이 무너졌고, 뒤이어 보수당의 마가렛 쌔처가 집권했다. [본문으로]
  12. 1982년, 아르헨티나 바로 옆에 붙은 영국령 ‘포클랜드 섬’을 둘러싸고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전쟁을 ‘포클랜드 전쟁’이라 부른다. 경제 위기에 직면한 아르헨티나의 군사 독재 정부는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포클랜드를 침공해 점령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자신의 해외 영토로 몰려 간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 사이에 벌어진 2개월간의 전쟁은 해군력이 우세한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영국군 전사자는 250여 명, 아르헨티나군 전사자는 600여 명.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영국의 군사력—특히 항공 전력—해외 투사 능력의 한계 때문에 실제 동원된 전력은 영국이 마냥 압도적이지도 않았다는 점이나, 전장이 아르헨티나의 홈그라운드였다는 사정 등을 감안하면, 닐 데이비슨의 주장처럼 영국의 승전이 기정사실이었다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본문으로]
  13.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총파업처럼 승리했다면 신자유주의에 제동이 걸렸을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본문으로]
  14. 원문에 소련(USSR)이라 써 있는데, 당연히 러시아를 잘못 적은 것이 확실하다. 이 해에 옐친이 푸틴에게 권좌를 넘기고 사임했다. [본문으로]
  15. 일정 연령 이상의 주민 개인마다 일률적으로 부과되는 세금. 인두세는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조세 제도로 여겨져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대부분 사라진지 오래다. 1989년 쌔처 정권이 도입한 인두세에 대한 격렬한 전국적 저항은, 이듬해 쌔처가 자진 사임하게 만든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영국의 인두세는 1993년 폐지되었다. 참고로 한국의 모든 성인이 납부해야 하는 ‘주민세’가 바로 인두세의 일종이다! [본문으로]
  16. 사회주의적 또는 사회민주주의적 수사로 치장된 신자유주의. [본문으로]
  17. 대략 '(이미 가치가 실현되어 있는) 자산 자체를 헐값에 취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축적'으로 이해된다. 생산 과정을 통해 노동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하여 이루어지는 착취에 의한 축적과 대비된다. [본문으로]
  18. ‘연합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thern Ireland)을 구성하는 네 개의 자치 국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본문으로]
  19. 시드니 웹(Sydney webb)과, 베아트리스 웹(Beatrice webb). [본문으로]
  20. 150만 조합원을 가진 일반노조. 영국 최대 규모의 노동조합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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