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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레닌: Yes! 레닌주의: No?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4. 11. 15.

[ ] 안은 역자의 주. 편집자의 주일 때는 따로 ‘편집자’라고 표시함. 편집자의 것이든 역자의 것이든 주석이 가독성을 해칠 정도로 길어질 때는 각주로 달았다. 번역을 맡아 준 윤경준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출처는 아래.

http://rs21.org.uk/2014/08/02/leninism/


필자 이언 버철(Ian Birchall)은 역사가이자 사회주의자이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그리고 그 전신인 조직들)에서 50년 이상 활동했으나 최근 탈당했다. 국역된 저서로는 <혁명의 현실성>(공저), <서유럽 사회주의의 역사>가 있다.이 글은 SWP에서 집단 탈당한 활동가들이 만든 RS21 웹사이트에 기고한 글이다(버철은 RS21을 비롯해 어떤 조직에 가입하지 않은 채 개인으로 남아 있다).



이언 버철

2014년 8월 2일

번역: 윤경준


레닌주의가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은 좌파와 유사 좌파 모두에게 최근에 흔한 일이다. 어떤 이는 레닌주의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지 의아해 할지 모른다. 어느 누구도 연금술이나 사회신용설이 죽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기사들을 쓰지 않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럴만하다. 레닌주의를 묻어 버리려는 이 열광은 사람들이 레닌주의가 죽어 있기를 바란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이 진정으로 무덤으로 보내고 싶어 하는 것은 1917년의 경험과 그 여파이다. 1917년 이후 수년간 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었다.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혁명은  1914년에서 1918년 동안의 대량 살육을 낳은 체제를, 공공의 이익을 위한 협동과 계획에 기초한 세계로 대체할 수 있다는 커다란 희망을 일하는 사람들에게 불러일으켰다.

 

시장경제를, 일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운영하는 사회로 대체하길 원하는 우리들 중 몇몇은 1917년의 레닌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는 소위 “상류층” 즉 부자들, 그리고 부자들의 학교를 나온 이들만이 국가를 통치하고 사회주의 사회의 조직적인 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낡고, 불합리하고, 야만적이며, 비열하면서도 역겨운 편견을 깨부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을 노동자들이 운영할 수 있는지에 관한 논쟁에 뛰어든다면, 우리는 파리 코뮨, 1936-37년 스페인, 1956년 헝가리, 또는 1974-75년의 포르투갈을 인용할 것이다. 그러나 곧 우리는 1917년 10월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혁명의 친구들과 적들은 유사하게도 레닌이라는 이름을 러시아 혁명의 성취의 상징으로 여긴다. 혁명 없이 레닌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러시아 맑스주의 조직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작은 존재감이 있는 연구자 정도? 지도자, 혁명의 권위, 위대한 스승”의 모습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레닌이 러시아에 없었다면 1917년에 러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지를 묻는 일은 비록 부질없는 짓거리지만 흥미롭기는 하다. 특히 세 가지 요점을 강조할 수 있다.

 

1. 2월 혁명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국면을 포착해내는 레닌의 능력, 그리고 4월 테제에서 그가 논했던 대로 노동계급 권력으로 바로 나아가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 


2. 이전 20년 이상 일관된 활동 덕에, 새로운 전망을 입증할 수 있게 만든 당이 존재했다는 사실. 당이 없었다면 레닌의 말들은 헛되이 사라졌을 것이다.


3. 마지막으로, 레닌은 정치적으로 너무도 강한 자기확신이 있어서 그는 그의 오랜 정치적 라이벌이던 트로츠키처럼 언제고 그를 밟고 올라설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도 당 지도부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레닌은 당이 자체적으로 봉기를 호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비에트[민주적 노동자 평의회]에 관하여 레닌보다 더 많은 경험이 있었던 트로츠키는 당의 지지만으로는 충분히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 힘들므로 그 요구는 소비에트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레닌을 설득해야 했다.

 

그럼에도 레닌에게 혁명은 노동계급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느 정치 세력이 노동계급을 대체할 수 있다는 어느 제안도 단호하게 거부했다.


혁명적 봉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음모나 당이 아닌 계급의 선진부위에 의거해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조건이다. 봉기는 민중의 혁명적 궐기에 의거해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조건이다. 봉기는 민중의 선진적인 부위의 활동이 그 정점에 이르고, 적들의 우월적 지위가 흔들리고,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혁명의 심정적 지지자들이 강력한 혁명적 지지를 보내게 되는, 혁명이 무르익어가는 역사의 전환점에 이르러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세 번째 조건이다. 그리고 봉기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 필요한 이 세 가지 조건들은 맑스주의와 블랑키주의를 구분한다.

 

“당이 아닌”이란 문구는 레닌주의”와 “당 건설”을 동의어로 생각하도록 길들여진 사람들에겐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





  자유 VS 국가

 

혁명가로서 레닌을 가장 두드러지게 한 요소는 국가에 대한 이론이었다. 봉기가 일어나기 겨우 몇 주 전에 쓰인 <국가와 혁명>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다. 이 저작에서 그는 노동계급으로의 권력 이양이 현존 사회질서 안에서 달성될 수 없음을 명확히 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는 국가통제 경제와 등치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레닌은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가 존재할 때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에 대한 레닌 관점의 독창성과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는, 그가 그의 동시대인들에 의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유용하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매우 상이한 정치적 전통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게 되었다.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는 1914년 이전까지 엘리트주의적이며 심지어 반(反 )노동계급적인 강경 아나키스트였다. 그 이후 그는 바르셀로나 봉기 시기에 스페인 신디칼리스트들과 함께 활동했다. 러시아에 도착하자 마자 그는 볼셰비키의 대열에 합류했다. 비록 그는 이질적인 정치적 입장을 견지했지만 혁명 대열의 중심에 섰다. 1924년 레닌의 사망 직후에 그는 전 아나키스트의 관점으로 레닌의 국가에 대한 견해를 요약한 <1917년의 레닌>이라는 팜플렛을 썼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볼세비키와 아나키스트 사이의 차이는 그 수단에 대한 것이지 그 목적에 대한 것이 아니다. …… 부르주아 국가를 깨부수는 것은 필수적이다. …… 근본에서부터 새로운 혁명적 국가를 창조하는 것은 필수적이며 그 맹아를 파리 코뮨에서 우리는 엿볼 수 있다. 

 

알프레드 로스머(Alfred Rosmer)는 신디칼리스트 언론인이었다. 그는 파리에서 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트로츠키를 만났지만 그가 1920년에 러시아에 올 때까지 볼셰비키들과의 접촉은 전혀 없었다. 그는 유럽 사회주의 운동에 당시 새로 출판된 <국가와 혁명>이 끼친 영향력에 대해 기술했다.


<국가와 혁명>이라 불리는 레닌의 책 몇 부가 1919년 초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이 책은 탁월한 저작이었으며 특이한 운명을 가졌다. 맑스주의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각주:1]인 레닌은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회주의 정당의 이론가들에게 일종의 이단아로 취급받았다. “이건 맑스주의가 아니야,” 그들은 발끈했다. “이건 아나키즘과 블랑키주의의 잡탕이야.” 그들 중 한 명은 심지어 장난스러운 구절 바꾸기를 발견하고 이것을 “타타르[러시아인 비하의 표현] 양념을 친 블랑키즘”이라 불렀다. 반면에 정통 맑스주의 주류 밖에 위치한 혁명가들과 신디칼리스트들과 아나키스트들에게 이 양념에 버무려진 블랑키주의는 아주 유쾌한 깨달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맑스주의자들에게서 이러한 언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리더십, 실수, 분열

  

로스머와 세르주 모두 우리에게 레닌의 리더십 스타일에 관한 환상적인 묘사를 보여 준다. 로스머는 그의 레닌과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가 갑자기 내던진 한마디가 그가 그의 당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독보적인 지위의 비밀을 알려주었고 그가 그곳에서 행사하는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서도 알게 해 주었다. 우리가 프랑스 사회당 내 찜머발트 소수파[제2 인터내셔널에 반대하고 제3인터내셔널 건설을 지지했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그가 내게 말했다. “이제 그들이 당을 떠나 프랑스 공산당을 세울 때가 됐습니다. 그들은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나는 이것은 그 지도부의 견해에 반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이전에 그들은 때때로 집단 탈당을 하려 했지만 최근 스트라스부르[프랑스의 소도시 - 편집자] 당대회 결과가 그들에게 우호적인 관계로 그들은 이제 탈당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만간 [프랑스 사회당의] 다수파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내 테제들에 헛소리를 쓴 게 틀림없군요. 코민테른(Comintern)[각주:2] 서기국에 그 테제들을 한 부 요청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주장하는 내용으로 정정해서 내게 보내 주시지요.”

 

이와 같이 기꺼이 배우려하며, 자신이 실수했음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가 레닌을 그토록 탁월한 지도자로 만들었다. 세르주는 레닌의 집단적으로 일하는 능력, 동지들로부터 배우는 능력에 대해 증언한다.


레닌, 트로츠키, 칼 라덱, 그리고 부하린은 의심할 여지없이 혁명의 뇌수가 되었다. 그들은 같은 맑스주의 언어로 이야기 했고 같은 유럽과 미국 사회주의 경험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서로를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잘 이해해서 마치 집단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당이 그 힘을 집단적 사고로부터 이끌어낸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레닌의 리더십 수완을 보여주는 또 다른 목격자는 원로 독일 사회주의자인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이다. 1921년 독일 공산당은 재앙에 가까운 인적 손실을 초래한 좌경 모험주의적 파업 폭동을 일으켰다. 당의 리더 중 한명인 파울 레비(Paul Levi)는 공개적으로 당을 비판했고 징계를 당했다.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3개월 뒤에 열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3차 총회의 핵심 사안이 되었다. 

 

체트킨은 레비의 분석에 동의했지만 여전히 당의 골간체계에 남아있었고 그는 레닌과의 토론과, 타협의 필요성에 대한 레닌의 주장을 기록했다. 그에게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3월 폭동”에 대한 총회의 예상되는 태도를 고려해 보면, 당신은 타협의 여지를 남겨 두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당신은 총회 성과물 중 알짜배기를 차지하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정치방침이 승리할 것이고 이것은 아주 찬란한 승리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3월 폭동”의 재발을 방지할 것입니다. ……

 

총회는 철저하게 그 유명한 “공세 전략”을 폐기할 것이고, 당신 생각과 일치하는 전술을 채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총회는 공세전략 지지자들에게도 약간의 위로를 해 주어야만 합니다. “3월 폭동”을 비판하는 중에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개들의 도발에 넘어가 싸웠다는 사실을 우리가  강조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일정 부분 자애로운 “역사적” 자비를 베푼다면, 이건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클라라 당신은 계속해서 이 문제를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총회에서 결정될 전술들이 가능한 빨리 큰 충돌 없이 합의된다면, 그 전술들은 각국 공산당들의 실천을 위한 행동지침이 되어 우리 사랑하는 좌파 동지들은 너무 패배적이지 않게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너무 심하게 의기소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고 실제로 그 무엇보다도 우선, 당 안팎 모두의 진짜 혁명적 노동자들의 정서를 고려해야만 합니다. ……

 

“글쎄요. 우리는 좌파 동지들을 너무 심하게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대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줍시다. 그러면 그들은 금세 우리 인터내셔널의 3차 총회에서 결정된 정책을 이행하면서 행복하고 열정적으로 다시 당신과 함께할 것입니다.”

 

레닌은 그의 생애에서 그때까지 수많은 분열들을 조직했지만 이때 그는 독일공산당과 코민테른을 분열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열은 통합을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리고 이것이, 레닌을 흉내 내려는 추종자들이 분열을 통해 그를 흉내 내는 게 훨씬 더 쉽다고 느끼는 이유이다.


  레닌은 레닌주의자였나?

 

우리들 대부분처럼, 레닌은 나약함과 한계를 지닌 복합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우아하지 않은 미적 감각을 가졌고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라면 재미도 없을 남자들 술자리 농담들을 해댔다. CLR 제임스(James)가 이야기하듯 레닌은 “신神도 스탈린도 아니었다.”

 

레닌은 중요한 혁명 지도자였고 그의 삶과 그의 업적이 다시 주목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레닌주의”란 무엇인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맑스는 자신이 맑스주의자가 아니라고 강변했었다. 레닌은 자신을 레닌주의자라 선언했을까? 그가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

 

세르주는 <레닌 저작선집> 초판을 편집했던 카메네프의 말을 인용한다. 레닌은 오래 전에 쓴 집필 의도도 모호한 자신의 저작들을 모을 이유가 없다고 믿으면서 이 저작선집 출판 계획에 반대했었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1922년에 그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마지막으로 연설했을 때, 레닌은 총회 대의원들에게 조직문제에 대한 결의문이“너무 러시아적이며, 러시아의 경험만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 결의문을 외국인들이 전혀 알아먹을 수 없는 이유이다. 또한 그들은 이 결의문을 우상처럼 구석에 매달아 놓고 그것을 향해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할 리 없다.” 그는 진심어린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들이 들은 연설내용은 아주 색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닌 사후에 “레닌주의”라는 용어는 지노비에프에 의해(코민테른 5차 총회에서의 연설에서), 또한 스탈린에 의해(‘레닌주의의 기초’라는 일련의 강연에서) 급속하게 퍼졌다(1924년). 레닌의 저작들을 사실상 읽기 어렵게 만들 정도의 투박하고 진부한 문체로 스탈린은 세상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 레닌주의란 무엇인가? 레닌주의는 맑스주의의 러시아적 상황과 조건들에 맞춰진 변용이라고 혹자들은 이야기한다. 이러한 정의는 부분적으로는 진실이지만, 절대로 전체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사실, 레닌은 맑스주의를 러시아적 상황에 적용시켰고 아주 탁월한 방식으로 적용해냈다. 그러나 만약 레닌주의가 오직 러시아에만 적합한 조건들에 대한 맑스주의의 적용이라면 레닌주의는 순전히 일국적이고 순전히 러시아적인 오직 러시아적인 현상일 테지만 우라 모두가 잘 알다시피 하지만 레닌주의는 단지 러시아적인 현상이 아니라 국제적인 발전과정 전체에 뿌리를 둔 국제적인 현상임이 분명하다.

 

1917년 10월 혁명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1928년에 출현한 새 지배계급에 정통성을 부여하려고 레닌의 상속자임을 주장하는 것이 스탈린주의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반대자들에게도 레닌의 상속자들이라는 주장은 똑같이 적용되며 훨씬 더 정통성이 있었다.


한 지지자가 트로츠키에게 “레닌만 살아 있었다면! 당신은 지금도 모스크바에서 그와 함께 있을 텐데요!”라고 말했을 때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터무니 없는 소리요. 그랬으면 레닌도 나와 함께 멕시코[각주:3]에 있을 거요.” 1930년대 중반에 초기 영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영국 볼셰비키-레닌주의자”라 불렀다. 이것은 마치 어떤 농부가 자신을 “농업적인 농부”라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의 엄청난 거짓말과 중상모략에 맞서 방어하기에 급급한 신세가 되었다. 그들이 레닌 정치사상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주장은 필수적이며 정당한 대응이었다.

 

1960년대 초 러시아와 중국의 분열 시기에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났다. 마오주의자들은 다시 한번 “맑스-레닌주의자들”을 자처하며 정통성을 주장했다. 마오주의는 트로츠키주의만큼이나 분열되기 쉽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지만, 만약 ‘가상의 나라’[각주:4]에 맑스-레닌주의자들의 공산당이 있다면 그 당은 ‘가상의 나라’ 안에서 가장 스탈린주의적이며 베이징에 충성스러운 집단일 것이다. 1980년대에 영국 공산당 내 한 비주류 분파는 <레닌주의자>(The Leninist)라는 신문 - 오늘날의 <위클리 워커>(Weekly Worker)의 전신 - 을 발간했다.

 

1968년에 SWP의 전신인 국제사회주의자들[IS - 편집자]은 룩셈부르크주의에서 레닌주의로 전향했다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이는 과도한 단순화의 오류이다. “룩셈부르크주의”는 레닌주의보다 훨씬 더 실체가 불분명한 개념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IS가 스스로를 개입주의적 조직으로 바꾸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 결정은 다음 몇 년 동안의 일련의 사건들(샐틀리Saltley 파업감시대, 펜튼빌Pentonville의 5인, 광부 파업이 히스Heath 정부를 무너뜨린 일[각주:5], 칠레 쿠데타, 포르투갈 혁명)에 의하여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 시절을 회상해보면 우리는 레닌에 대해서는 참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도 “레닌주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어쨌든 클리프와 우리가 레닌에게 영감을 얻고 인도되었다면 상황은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1968년에 선택된 조직형태가 2014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주장은 내게는 명백히 “비非-레닌주의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조직 문제의 공리: 과제를 최우선으로

 

너무나 많은 정통 “레닌주의” 계승자들이 존재하고, 누가 가장 정통성 있게 이를 주장할 수 있는지에 관한 너무나 많은 주장들이 있다. 그러나 “레닌주의”라 정의될 수 있는 어떤 일관된 사상의 흐름이 존재하는가? 토니 클리프가 지적했던 바와 같이, “인용에 의한 권위는 레닌의 경우에 정당화 될 구석이 거의 없다. 어떤 전술적인 혹은 조직적인 문제에 관하여 레닌을 인용하려면, 운동이 그 당시에 직면하고 있던 구체적인 문제들을 아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클리프가 자신의 경고를 항상 유념하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레닌이 조직 문제를 중심에 두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레닌주의”를 “우리는 조직되어야만 한다”라는 진부한 명제 수준으로 격하시킬 근거는 다소 빈약하다.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조직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에서 그는 아주 유연한 입장이었다. 레닌에 관한 클리프의 연구 전체는 “레닌주의적 당”이라는 신화에 맞선 지속된 논쟁이다. 애초에 그런 것은 없었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형태적으로 레닌의 당은 엄청나게 다양했다.


냉전의 종식 이래 엄청난 역사적 연구가 우리가 새로운 관점으로 레닌을 이해하도록 해주었고, 전통적인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라스 T 리(Lars T Lih)의 연구에 대해 누군가 그 무슨 의심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내가 보기에 리는 레닌의 [사상과 실천에서의 - 편집자] 연속성을 과장하고, 계급으로부터 배우는 그의 능력은 충분히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레닌에 대한 이해의 폭을 의심할 여지 없이 풍부하게 해 주었다. 피에르 브루에(Pierre Broué)의 <코민테른의 역사>(Histoire de l'Internationale communiste 1919-1943)와 존 리델(John Riddell)에 의해 세심하게 편집된 코민테른 초기 4번의 총회의 진행 기록은 오랜 고정관념들 중 상당수를 버리거나 재고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에릭 블랑(Eric Blanc)의 최근 연구는 ‘민족해방 투쟁을 지지하는 데 대한 모든 지혜의 근원으로서의 레닌’이라는 관점에 도전하고있다. 


따라서 나는 “레닌주의”라는 용어가 우리가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전략과 조직노선을 발전시키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1세기에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 기본적인 명제들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a) 사회구조가 협동과 평등의 방향으로 급진적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야만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b) 이런 변화를 위해서는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 중 다수의 능동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c) 이 변화의 과정은 한계를 넘어서서 최종적으로는 기존 사회의 정치 구조를 전복할 것이다.

 

위의 어느 것도 레닌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 없다(비록 그가 너무 일찍 죽어서 야만주의의 잠재적 위험을 온전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해명되지 않은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남겨져 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으며 모든 혁명은 불시에 일어난다. 미래는 미리 기록되지 않으므로 혁명정당이 해야 할 일은 바로 혁명의 전조들을 이해하고 때가 이르렀을 때 역사의 전면에 그것이 등장하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 시대에 혁명 조직 건설에 매진하고 있는 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많은 공개적 질문들 가운데서 나는 세 가지를 언급하려 한다.


1. 최대한의 민주주의(구성원들의 경험을 조직이 흡수할 수 있게 만드는)와, 현안에 대한 기민하며 잘 조직화된 대응을 가능케 하는 조직구조를 결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2. 조직이 오래된 구성원들의 지식과 경험을 끌어내어 새로운 동지들을 교육시키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동지들의 진취성과 상상력을 발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3. 가능한 한 가장 폭넓은 단결과, 캠페인의 목표에 대한 최대한의 정치적 명확성을 결합한 공동전선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외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다. 이 문제들은 과학이 아니라, 균형 잡기, 기예에 관한 것들로서, 깔끔한 공식이나 고전 저작들의 인용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훨씬 더 광범위한 역사 연구의 일부분으로서 레닌의 연구는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중요하지만, 이것에서 현실에 바로 적용 가능한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는다.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국가 - 자본가 권력의 가장 집중화된 형태 - 에 맞서는 모든 다양한 형태의 투쟁에 초점을 맞출 중앙집중적 정치 조직이 우리에게 분명히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면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훨씬 더 기본적인 것으로, 이 어려운 시기에 혁명적 좌파를 재건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레닌이 아니라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마칠까 한다(모리스는 그가 디자인 한 벽지에 감탄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레닌과 공통점을 훨씬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주의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의 특별한 사명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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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편집자 주] 새로 만들어진 ‘공산당’들이 ‘사회민주당’들로부터 분리해 나가기 전까지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용어가 혁명적 사회주의까지 포괄했다. [본문으로]
  2. [편집자 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the Communist International)의 약자. ‘제 3 인터내셔널’이라고도 부른다. [본문으로]
  3. [편집자 주] 트로츠키의 마지막 망명지. 트로츠키는 1940년 멕시코의 코요아칸에서 스탈린의 하수인에게 암살당했다. [본문으로]
  4. [편집자 주] 원문은 ‘Ruritania'. 앤서니 호프의 소설 <젠다 성의 포로>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왕국. [본문으로]
  5. [역자 주] 1972년 51년만의 영국 탄광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말함. 보수당 히스 내각이 실각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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