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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중대재해처벌법/ 트럼프의 난동/ 영화 ‘55스텝’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1. 17.

전지윤

 

중대재해처벌법 통과를 돌아보며

 

자본주의가 임금노동에 대한 착취에 주로 중심적으로 의존한다고 보는 것은 대표적 오해다. 자본주의는 유급노동에 대한 착취만이 아니라 돌봄과 가사노동같은 무급노동에 대한 강탈에 의존하고, 무엇보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대가없는 약탈에 의존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진보와 생산력 발전은 자연과 생명을 강탈하는 기술의 진보이다.

 

특히 자본주의의 이러한 야만적 본질은 노예무역, 공유지 약탈, 농민과 식민지 수탈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시초축적 과정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모든 털구멍과 땀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며 탄생했다고 했다. 시초축적이 자본주의 탄생 초기에만 있었다고 보는 것도 대표적 오해다. 시초축적(강탈적 축적)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계속 동반돼 왔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자본주의에서 특히 더 진실이다.

 

후발 자본주의로서 한국 자본주의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희생시키며 그 피와 죽음 위에 압축성장하고 한강의 기적을 거쳐 오늘날 G11에까지 추격 진입할 수 있었다. “자본은 사회에 의해서 강요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에 대해서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마르크스) 법이지만, 한국 사회와 국가는 그런 강요를 한 적이 없다. 이것은 일제식민지 시대에 그 토대가 형성돼, 군부독재 시대에 본격적 축적의 궤도에 오르고, 오늘날로 이어진 한국 자본주의의 핵심 특징이었다.

 

이번에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이 비록 통과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들이 후퇴하고 반쪽짜리가 된 점이 있더라도 역사적 전진과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윤 추구와 자본 축적을 위해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침해하는 것은 불법 범죄이고 처벌받아야 한다는 선언이고,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 드라이브가 직면한 중요한 브레이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법안 통과 이후 한국경총은 유감스럽고, 참담함과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했고, 자본가 기관지로 유명한 <한국경제신문>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중대 시장경제 파괴처벌법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많이 부족하고 아쉽지만 역사적으로 매우 뜻 깊은 성과’(이용관)이며,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힘을 모아서 만든 끝이 아니라 시작. 용균이에게 할 말이 조금 생겼다’(김미숙), 가장 앞장선 투사로서 한겨울 장기단식까지 벌인 유가족들의 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나는 이분들이 하나도 이룬 게 없다고 말할 생각도 없고 그건 사실도 아니라고 본다. 물론 아쉬움과 한계를 더 크게 보고 이 법을 없는 게 나을 쓰레기라며 반대하는 분들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예컨대 지난 연말에 아르헨티나에서 14주 이내 낙태 합법화가 통과됐을 때, 그것이 거대한 역사적 승리라는 목소리뿐 아니라, ‘14주 이후는 처벌이 가능한 또 다른 차별과 배신이라는 목소리도 있었듯 말이다. 근본적 변혁에 이르지 못한 모든 운동은 요구의 100% 성취가 아닌 어느 선에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그럴 때 평가의 기준은, 그 운동이 얼마나 폭넓은 지지와 연대를 구축하고, 어떤 정치적 효과를 이루며, 다음 투쟁을 위한 디딤돌을 놓았는지에 있다.

 

그 점에서 이번에 구축된 지지와 연대가 2016년 촛불 국면과 비슷할 정도였다는 게 두드러진다. 유가족이 앞장서고, 민주노총과 정의당을 비롯한 원내외 진보정당들이 모처럼 힘을 모았고, 시민사회의 전폭적인 응원이 있었다.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과 열린민주당, 민주당 지지 시민과 그룹들에서도 광범한 지지와 연대가 나타났다. 한겨레, 경향 등의 개혁언론과 친민주당 성향의 유튜브들도 목소리를 보탰다.

 

이것이 중도층을 움직였고 민주당을 압박하고 우파 정치세력과 언론들도 노골적으로 막아서지 못하게 만들었다.(물론 국힘당은 막판 표결에서 거의 모조리 반대, 기권했다.) 조중동 등은 간간히 태클거는 기사들을 내보냈지만, 대대적인 여론몰이와 주도자들에 대한 마녀사냥, 신상털이 등은 감히 시도하지 못했다. 예컨대 <조선일보>이제 기업경영이 범죄가 됐다고 한탄하며 그 법으로 동부구치소 방치한 추미애부터 처벌하라고 짜증냈다.

 

이것은 검찰개혁과 공수처 개정안 통과 국면과는 대조적이었다. 총선 직후로 돌아가 복기해보면, 여름부터 윤미향 마녀사냥, 의사파업, 8·15를 정점으로 한 태극기부대의 진격 속에 반전을 꾀하던 우파의 시도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에 민주당은 180석을 기반으로 임대차3, 공정경제3, 공수처 개정안 등을 강행하는 개혁 드라이브를 거는 듯 했다.

 

그러나 우파 정치세력과 언론은 -윤 갈등으로 프레임을 비트는데 성공했고, 개혁 주도자들의 신상털이와 마녀사냥을 지속했다. 검찰개혁 지지자들은 비이성적 광신도들로 매도당했고, 결국 3년을 끌던 공수처가 겨우 출범할 때는 야당의 비토권을 무시한 여당의 독주=폭정=전체주의라는 프레임까지 형성됐다. 진보 정치인과 홍세화, 강준만같은 지식인도 여기에 목소리를 보탤 정도였다.

 

아직 촛불의 여파가 남아있고, 아래로부터 압력이 존재했기에 가까스로 개혁법안들이 통과되긴 했지만, 알맹이가 빠지거나 반쪽짜리가 되는 일들이 반복됐다. 이 과정에서 개혁을 지지하는 광범한 연합은 구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축소, 와해됐다. 법조기자단을 고리로 개혁언론들도 대체로 검찰 편에 섰고, 기득권 카르텔의 일부인 사법부에서도 편향적 판결들이 쏟아졌다.

 

이제 민주당의 보수적 주류와 문재인 정부의 상층부는 더욱 더 기득권 카르텔에 길들여져 눈치를 보면서 타협과 양보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의사국시 구제, 이명박근혜 사면론, 검사출신의 민정수석, 김앤장 출신의 공수처장 등이 그 신호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과정에서도 민주당 주류, 산자부와 법무부와 중기부 관료들은 국힘당과 함께 기업이익의 전달벨트로서 구실을 했다.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위기가 심화할수록 민주당의 주류는 더욱 더 타협과 양보로 기울 것이다. 관료들은 더욱 더 개혁을 사보타주하고 복지부동할 것이다. 기재부는 복지확대와 재정확장을 한사코 막을 것이다.(홍남기는 개각 대상으로 아예 거론도 되지 않았다.) 검찰은 개혁정책을 직권남용으로 걸고, 사법부는 보수적 판결로 막아설 것이다. 주류언론은 민주당에서도 친기업적 보수파인 양향자 등을 띄워주며 기층운동과 연계가 있는 개혁파(박주민, 이탄희, 윤미향 등)를 계속 물어뜯을 것이다. 진보정당과 지식인들의 민주당 비판을 반개혁의 맥락에서만 이용할 것이다.

 

기득권 카르텔의 정치적 경험과 자원은 풍부하고, 상대편의 틈과 약점을 노리는 교묘한 전술은 오랜 세월 속에 갈고닦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좌파는 다시 한번 힘을 모아내면서 시민사회뿐 아니라 민주당 지지층까지 파고들면서 광범한 지지와 연대를 구축하고, 우리의 의제를 정치적 중심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우파의 부활을 막으며 민주당을 넘어선 왼쪽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을까? 그러려면 우리도 원칙과 선명한 구호만이 아니라 시의적절한 판단과 전술이 필요하다. 최근에 한 인터뷰에서 노엄 촘스키의 조언은 귀담아 들을만하다.

 

전술은 단지 주변에 두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어떤 활동가나 조직자도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두 번째 본성이어야 한다. 그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그들이 여러분이 말하고자 하는 것, 그들과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이해하게 할 수 있을까? 구호를 외친다고 되지 않는다. 이것은 작업, 조직화와 활동을 필요로 한다.”

 

트럼프주의자들의 난동이 보여준 재앙의 맹아

 

선거에서 패배한 극우 세력이 선거 부정과 사기가 있었다며 음모론과 거짓선동을 펼치며 세력을 결집한다, 우익 지지자들이 거리에서 증오를 표출한다, 선거 결과를 뒤집고 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바로 1년 전에 볼리비아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지난 수년간 베네수엘라에서 반복됐던 일이고, 트럼프가 후원하거나 사주했던 일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역사적으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일이고, 항상 그 배후에는 미국 정부와 CIA의 개입이 있었다.

 

그런데 엊그제 그 일은 이번에는 미국으로 역수출돼서 작은 규모의 블랙코미디처럼 반복돼 일어났다. 물론 단순한 해프닝 취급하기는 어렵다. 엊그제 트럼프 지지 극우 시위대의 반란은 미국 15개 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수만 명이 참가해 벌어진 일이었다. 특히 충격을 준 것은 워싱턴 국회의사당을 장악한 극우 시위대의 기괴한 행태였다.(아래 사진은 이들과 한국 태극기 부대의 비슷한 멘탈리티를 보여 준다. 실제 위 시위에 참가한 한 한국인이 한국도 미국도 공산화되고 있다고 인터뷰한 영상이 나왔다.)

 

선거를 도둑맞았다.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우리는 강해져야 한다. 포기하지 말자는 트럼프의 선동에 고무받은 인종주의자, 백인우월주의자, 극우음모론자, 신나치들은 백인노예주들의 힘을 상징하는 남부연합기를 휘날리며 무장까지 하고 국회의사당으로 난입했다. 의원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거나 공포에 떨며 의자 밑으로 숨었다.

 

극우 시위대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극우경찰의 태도였다. 경찰은 사실상 방관했고, 심지어 시위대에게 길을 안내하거나 같이 셀카를 찍는 장면까지 목격됐다. 만약에 흑인 좌파 시위대였다면 경찰의 반응이 전혀 달랐을 것이라는 지적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경찰의 압도다수가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했고, 경찰노조는 공식적으로 트럼프 지지 선언을 했었다.

 

경찰은 역사적, 구조적 이유로 미국 자본주의 국가기구에서 지배와 억압의 핵심고리이다. 경찰 예산 삭감과 개혁이 운동의 핵심 요구가 된 이유다. 마치 한국에서 검찰이 기득권 카르텔의 핵심고리이고 검찰개혁이 중요한 요구가 돼 온 것과 비슷하다.

 

물론, 이번에 미국에서 극우의 어설픈 반란은 실패했다. 트럼프의 포퓰리즘 선동을 돕던 자본가와 고위정치인들도 등을 돌리고 있다. ‘미천하고 무식한 야만인들이 감히 신성한 장소에 난입하고 더럽혔다는 위기의식이 민주당과 공화당을 단결시키고 있다.

 

자신감과 힘을 느끼며 돌아갔을 극우 행동대들과 지지자들은 궁지에 몰려 선긋는 트럼프의 모습을 보면서 배신감을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에서 나치의 23맥주홀 폭동은 엉성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결국 10년후 히틀러는 권력을 잡았다. 상하원까지 모두 민주당에게 빼앗긴 상황에서 극우익들은 더욱 더 선거나 의회보다 거리에서 행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트럼프주의자들은 공화당의 성격을 변화시키며, 기층 지지기반을 더 넓고 깊게 만들었다. 지난 4년은 트럼프주의자들이 경찰, 법원 등 국가기구 내에 뿌리를 내린 시기이기도 하다. 행정부에다가 상하원까지 장악한 바이든과 민주당이 신자유주의적 본질과 한계를 드러낼수록, 코로나와 경제위기의 고통과 분노가 심해질수록, 백인 남성 하층민들 속에서 극우 인종주의와 포퓰리즘적 선동은 더욱 먹혀들 것이다.

 

샌더스나 코르테즈 등이 민주당의 안팎을 포괄하고 넘어서는 대안을 건설하지 못하고, 바이든과 민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배신감에 실망하면서 냉소에 빠지고, 많은 사람이 극우익의 성장에 위축과 공포를 느낄수록 상황은 악화될 것이다.

 

이것이 1930년대의 유럽에서 제1물결 파시즘에 이어서 새로운 형태의 제2물결 파시즘으로 발전할 지는 정해져 있지 않을 것이다. 1930년대 유럽에서 좌파는 그래도 강력하고 거대한 정당과 노동조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분열과 혼란 속에 반동을 막아내지 못했다. 오늘날 좌파는 그때보다 훨씬 더 작고 힘도 약해져 있다.

 

더구나 영국의 브렉시트를 노동자의 승리라고 환영하거나, 트럼프나 바이든이나 다를 것이 없다며 선거에서 기권하거나, 민주당 내부의 좌파도 결국 민주당이니 다를 게 없다거나 등의 폭넓은 대중운동 건설을 가로막는 혼란과 분열상은 비슷하다.

 

거짓선동과 음모론, 마녀사냥을 반복하는 족벌언론들이 언론시장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고, 코로나 직전까지 광화문에서 매주 복음주의적 극우들이 온갖 혐오발화를 쏟아내며 행진을 했고, 그런 혐오선동을 주도한 리더에게 법원이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이념을 검증할 자유를 인정하며 무죄 판결을 내린 나라에 사는 우리가 미국을 보면서 한심하게 여길 처지일까?(적어도 미국사회는 트럼프의 트위터를 중지시켰다.)

 

한국의 권위주의적 우파가 과연 포퓰리즘적 우파로 변신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부패하고 위선적인 민주당 엘리트들이 미국을 망치고 훔치고 있다는 트럼프의 선동과 부패하고 위선적인 586주사파들이 나라를 망치고 훔치고 있다는 한국 우파의 선동이 비슷하게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민주당이 한계를 드러내며 실패로 가면서, 좌파가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이런 우파의 권력 탈환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 ‘55스텝과 정신장애인에 대한 낙인과 편견

 

동부구치소에서 벌어진 코로나 집단감염을 보면서 과거 감옥생활이 떠올랐다. 그 매우 열악하던 조건이 아직도 별로 바뀌지 않았던 것일까 싶다.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들 사연이 있었고, 감옥 밖에서 만난 사람들보다 꼭 더 별나지도 더 나쁘지도 않았고, 심지어 더 나은 사람도 있었다. 보안법으로 감옥을 두 번 갔다 오면서, 가장 큰 범죄자들은 감옥 안이 아니라 감옥 밖에, 사회의 밑바닥이 아니라 꼭대기에 있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감옥의 재소자와 전과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은 뿌리깊다. 그리고 그런 편견과 낙인이 감옥 인권 개선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지금 법무부와 정부를 욕하고 있는 주류언론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 범죄자와 전과자에 대해서 악마화, 괴물화하는데 앞장서 왔던 장본인들이다.

 

라임 김봉현 등에 대해 보도하면서 범죄자는 입만 열면 거짓말’(검찰이 더 그런 것 같던데?)인 존중할 가치도 없는 존재로 취급했고, 조두순에 대해서도 개인만 악마화하는데 매달렸다. 그것이 클릭수와 기사 장사에 도움이 되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랬던 주류언론들이 그 분위기의 끝물에 올라타 잔돈이라도 챙기려고 조두순 집 앞에 몰린 유튜버들을 비난하는 걸 보니 참 아이러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범죄자도 아닌데 존중받지 못하고 강제로 격리, 감금당하고 인권이 짓밟히는 존재가 또 있으니 바로 정신장애인들이다. 그리고 여유생기면 보려고 미뤄오다가 새해 첫날 주말에 본 영화 ‘55스텝은 바로 정신장애인들의 삶과 투쟁을 다룬 것이었다. 정신병원의 비인권적 대우와 강제 약물 투입에 맞서 법정 투쟁을 벌인 정신장애인과 인권변호사의 실제 사건을, 믿고 보는 빌어거스트 감독이 영화화한 것이다.

 

첫 장면부터 강제로 독방으로 끌려가서 옷이 벗겨지고 주사를 맞는 엘레노어 리즈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 자체가 폭력이지만 더구나 정신과약물의 과다한 복용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독방에 감금된 리즈는 대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강제로 주사를 놓는 간호사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나중에 법정에서 똥오줌도 못 가리고 간호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심각한 정신병 증상으로 둔갑해 버린다. 반면 리즈를 헌신적으로 대변하는 인권변호사 콜레트 휴즈는 정신병원의 행위가 화학적 강간에 다름 아니라고 규탄한다. 리즈는 정신장애인을 인간으로 존중하고 대우해 달라고 주장하고, 휴즈는 치료 과정에서 당연히 그들과 소통하고 선택권을 주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심에서 판사는 노골적 거부감을 드러내며 리즈나 변호사의 이야기를 잘 듣지도 않고, 낙인과 편견 속에 만들어진 예단을 가지고 병원의 손을 들어준다.(주로 언론과 여론에 의해서 만들어진 편견과 낙인을 미리 찍어두고, 모든 증언과 증거들을 거기에 끼워 맞춰서 답정너의 판결을 내리는 판사, 요즘 우리가 너무 많이 보고 있는 판사의 모습 아닌가?)

 

그러나 리즈와 휴즈는 이것은 단지 법조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존중에 대한 문제라고 이야기하며, 포기하지 않고 항소한다. 리즈는 이것이 정신장애인 수십만명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휴즈는 병원이 짓밟은 것은 리즈의 표현의 자유이기도 하다면서 수정헌법도 무기로 이용해서 싸운다. 법적 투쟁은 항소에 상고까지 이어지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승리한다. 법조문과 법기술이 아닌 진정성의 승리였다.

 

영화는 따뜻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리즈를 통해서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낙인을 벗겨낸다. 또 단지 리즈의 변호사가 아니라 동지이자 친구인 휴즈를 통해서 우리가 서로 존중하며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이런 변호사를 만날 수 있다면 어떤 검사나 판사와 맞서도 외롭지 않을 것 같다) 역시 믿고 보는 배우들인, 헬레나 본햄 카터(리즈), 힐러리 스웽크(휴즈)의 명품 연기가 이 모든 것을 아주 설득력있고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고 소수자의 인권을 위한다고 하면서 누군가를 정신장애인, 정신질환자라고 낙인찍고 편견을 부추기고 괴롭히던 어떤 사람들도 이런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부끄러움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새해 첫날을 의미있게 만들어 준 영화였다.

 

 (기사 등록 20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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