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리(Lars T Lih)
번역: 두견
좌파의 많은 사람들은 레닌이 1917년에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라스 T 리는 이 신화와 대결하면서 어떤 면에서 트로츠키와 수렴하면서도 여전히 다른 전략을 가지고 있는 레닌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또한 카우츠키가 레닌에 가한 영향도 존재한다. 이 글에서 라스 리는 또다시 역사적 기록을 치밀하게 살펴보면서 정설에 도전한다. 라스 리는 러시아어 원자료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입각한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혁신적 재해석으로 주목받아 왔고, 수많은 책과 논문을 쓴 역사학자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러시아에서 빵과 권위: 1914~1921>(1990), <레닌 재발견: 맥락에서 본 ‘ 무엇을 할 것인가’>(2006) 등이 있다. 이 글은 얼마 전에 번역 소개한 라스 리의 또 다른 글 ‘4월 테제: 1917년 4월의 이전과 이후’(https://www.anotherworld.kr/880)와 같이 보면 더 유용할 것이다.
출처:
https://weeklyworker.co.uk/worker/836/april-theses-myth-and-reality/
1917년 4월에 레닌이 했던 생각을 알리는 데 있어서 칼 카우츠키의 기사가 한 역할에 대한 나의 잠재적 발견부터 시작해보자, 그것은 상당히 의외이면서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나는 그 당시의 주요한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 기사의 역할을 설명하겠지만, 그 기사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레닌이 다른 출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더라도 나의 요점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4월 테제'에서 소개한 내용과 그에 대한 그의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1905년과 1906년으로 돌아가서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트로츠키의 연속혁명과 레닌의 사상과의 차이점에 대해 쓸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매우 강력하고, 잘 지지되고, 그럴듯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나는 그 시기의 레닌과 트로츠키의 차이점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1917년 봄에 레닌이 만들어낸 용어로서 내가 좋아하는 연구 대상인 '옛 볼셰비즘'의 역할도 논할 것이다. 옛 볼셰비즘과 나중에 생긴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러나 나는 4월 테제의 실제 본문을 너무 자세히 검토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이야기이다. 레닌의 생각의 변화는 무엇이었는지, 그가 왜 그것들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지?
우선 나는 이 시기의 사회민주주의의 기본적 목표를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분파 모두를 포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민주주의 혁명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 구절은 다소 흥미로운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어떤 낡은 부르주아 혁명만이 아니라 군주적 절대주의의 절대적 파괴(나는 여기서 옛 볼셰비키를 인용하고 있다)와 급진적 민주공화국의 수립이다.
여기 작은 각주가 있다. 나는 이러한 번역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끝까지'라는 용어는 결코 레닌의 <선집>에서는 제대로 번역되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의식적인 결정으로 특정한 한 가지로 번역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게 나올 때마다 그들은 다른 의역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예를 들면 '혁명의 완전한 승리', '혁명의 완성' 등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다소 불행한 결정이다. 첫째로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것이 어떻게 같은지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 구절의 중요성은 완전히 상실된다. 둘째로 나는 그 구절이 더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끝까지'라는 이 구절을 풀어보자. 우선 러시아에서 다가오는 민주주의 혁명이 다양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최상의 결과를 보장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한 입헌군주제에서 급진적 민주공화국에 이르는 광범위한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로서 우리의 일은 가장 급진적인 것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세기 중반의 독일 혁명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이 독일에 매우 제한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을 세우는 것에 그쳤을 뿐이며, 이것이 노동자와 농민 운동을 후퇴시켰다는 매우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기회를 망쳐 놓았고 우리는 기회가 왔을 때 기회를 망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분간 그것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옛 볼셰비즘의 첫 번째 요소 - 즉, 가능한 최고의 부르주아 공화국을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야심적이었다. 때때로 우리가 이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것은 그다지 야심적이지 않고, 야망을 가지고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짜르 통치의 러시아라는 맥락에서 그것은 매우 야심적이었다.
두 번째 포인트. 혁명이 '끝까지' 가는 것을 어떤 세력이 막을 것인가. 그것은 부르주아지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특별한 혁신이 아니다. 부르주아지는 완전한 민주주의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진다. 사실 <공산주의 선언>이 작성된 후 거의 즉각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이 너무 멀리갈까봐, 부르주아 계급이 그것을 끝까지 짊어지는 데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짜리즘은 그야말로 혁명이 시작되는 것을 막는 것이지만, 그것이 '끝까지' 가는 것을 막는 것은 부르주아 계급이다. 이는 민주주의 혁명 내부의 최소 2단계 과정을 암시한다. 첫 번째 단계는 짜르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그러면 부르주아 계급은 '이제 그만하면 됐어, 우리가 필요한 걸 얻었어, 이제 그만하자'고 말하려 할 것이다. 사회민주당은 그것을 이겨내야만 한다.
그렇다면 세 번째 요점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농민은 민주주의 혁명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농민 전체를 (부유한 농민이나 가난한 농민 모두) 참여시킴으로써 이렇게 할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농민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었고, 그들이 그만둬야 한다고 설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는 농민에 대한 헤게모니를 둘러싼 싸움이 있다.
옛 볼셰비즘의 네 번째 요점은 운 좋게 마지막 단계에 이른다면 임시 혁명정부를 세우기 위한 무장봉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와 농민들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가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회주의 정부가 아닐 것이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러한 정부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는지, 적절한 것인지, 쓸모있는 것인지에 대한 분열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4가지 요점이다. 다양한 결과, 2단계(하나의 부르주아에 맞서는 것), 그들의 영향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 농민들을 동참시키는 것, 그리고 임시 혁명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의 상황은 이 시나리오를 쓸모없게 만들었는가?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보기엔 그것은 옛 볼셰비키가 예측한 것이다. 1917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짜르가 퇴진했으므로 부르주아지는 정부를 세워서 '좋아, 이제 우리는 정부가 생겼어, 그만해'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정부와 함께로는 가능하지 않은, 러시아의 완전한 급진적 민주적 변혁을 얻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들은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농민들에 대한 영향력을 얻기위해 싸워야 했고, 그렇게 했다. 당시 옛 볼셰비즘이 제시한 전략은 부르주아지를 내쫓고 러시아의 급진적인 민주적 변혁을 밀고 나갈 계급정부를 세우기 위해 농민에 대한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옛 볼셰비즘은 만약 당신이 그들에게 땅을 주고 지주계급을 청산한다면, 농민들은 어떤 반혁명에도 맞서 노동자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어느 정도는 이런 일이 벌어졌고, 그런 의미에서 내전은 옛 볼셰비즘을 크게 입증한 것이었다. 마이크 맥네어(Mike Macnair)는 이 시기에 노동자들과 농민들 사이에 이해충돌이 있었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는 곡물 압박, 곡물 징발에서 알 수 있다. 나는 그것이 모순이었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나는 그것이 진정한 공통 이해관계 내부의 모순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공통의 이해관계는 지주들이 돌아오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군대를 유지하고, 황폐화된 경제를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오래 지속되는 농민-노동자 관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일시적인 것이었다. 나는 이 문제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지만, 이것이 농민과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근본적인 공통의 이해관계였고, 그것이 그들이 내전에서 승리한 이유라는 것을 강조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1917년은 옛 볼셰비즘의 승리였다; 아마도 '옛 볼셰비즘 더하기'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옛 볼셰비즘이다.
그렇다면 레닌과 카메네프의 이런 견해 차이는 어떨까? 여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잭 콘라드(Jack Conrad)는 카메네프가 1917년 내뱉고 있던 것이 옛 볼셰비즘이 아니라 그로부터의 멘셰비키로의 후퇴라는 주장을 펴왔다. 글쎄, 이런 관점의 문제점은 카메네프가 말하는 것을 옛 볼셰비즘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한 사람이 레닌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1917년 봄 내내 '옛 볼셰비즘을 지옥으로'라고 말했다고 나는 비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카메네프는 레닌의 분노를 일으키면서 정확히 무엇이라고 말한 것인가? 그는 "동지들, 레닌의 일반적인 계획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완성된다는 가정으로부터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제 카메네프는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 글쎄, 나는 그가 우리가 방금 말한 것을 의미한다고 확신한다. 의제에 오른 급진적인 민주주의 혁명은 아직 진행되지 않았고, 우리가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전체적으로 모이게 하는 옛 볼셰비키의 조리법을 적용하지 않는 한 그것은 실행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그렇다면, 레닌이 그것이 옛 볼셰비즘이고, 옛 볼셰비즘처럼 보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옛 볼셰비즘일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질문이 나온다. 나는 그 문제를 여기 남겨둘 것이다. 왜 레닌은 그것을 비난했고, 누가 옳았는가? 우리는 이것을 제쳐두고 나중에 그 퍼즐에 대한 답을 찾을 것이다. 어느 정도, 그것은 '4월 테제'의 퍼즐, 그 작은 교환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나는 지금 1905~06년으로 돌아갈 것이다. 왜 레닌은,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노동자 정부나 다른 정부들이 그 당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탐탁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농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문구로 요약되는 레닌의 입장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두 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내가 말하고 싶은 두 가지 요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레닌이 임시 혁명정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장기적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구절은 '프롤레타리아와 소농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이다. '혁명적'이라는 부분이 혁명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1905년 봄에 쓴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농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와 '사회민주주의와 임시 혁명정부'라는 두 가지 글이 있다. 이것들은 그가 마르티노프(Martynov)를 반대해서 주장하는 두 개의 직설적인 기사들이다. 그는 이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공식을 직접적 반박으로 소개한다.
마르티노프는 그들이 반대 정당(야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레닌이 대답한다. "우리는 정부를 구성하는 정당이 아니라 미래의 야당을 준비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올바른 생각에서부터 마르티노프는 현재의 혁명에 대해 우리가 꽁무니 쫓는 반대파를 형성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다른 많은 증거들이 있지만 나는 이것이 아마도 가장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레닌은 미래의 야당을 준비하고 있다. 1905~06년에 볼셰비즘에 맞선 트로츠키의 비판들을 보면, 그것이 그가 말하는 요점이다. '여러분들은 혁명 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다가 그냥 떠나버리는 것인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두 번째 요점은 레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배척했다고 하는 것은 좀 단순하다는 것이다. 그는 소농들을 소부르주아로, 그러나 급진적인 민주주의 혁명가로서 소부르주아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는 그들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혁명적인 능력에 매우 감탄하고 있으며 그의 모든 미사여구는 여기에 달려 있다. 나는 여기서 그의 말을 인용한다.
“소농은 구체제와 상비군, 관료제를 폐지하지 않고는 농업 혁명을 수행할 수 없는데, 이 모든 것이 수천 가닥의 끈에 의해 이 체제에 묶여있는 지주들의 토지 재산의 가장 믿을 만한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계급동맹의 공리
그렇다면 레닌이 말하는 것은 농민의 농업 혁명을 통해 우리가 급진적인 민주주의 공화국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그가 원하는 것의 급진적인 본질과 또한 소농의 역할에 대한 감각을 둘 다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들은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혁명적이며, 어떤 유럽 국가보다 더 민주적이고 진보적으로 러시아를 변화시킬 것이다.
이것은 왜 그들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나는 레닌의 1905년 기사 중 하나에서 또 다른 인용구를 가지고 있다: "마르티노프는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 … [그리고] 민주주의 혁명을 지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현재까지는,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할 능력은 없는 거대한 소부르주아 인구의 존재를 간과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나는 이것을 '계급 동맹의 공리'라고 불렀다. 레닌과 트로츠키 둘 다 열광했다는 '러시아 혁명의 원동력과 전망'(1906년)이라는 글에서 카우츠키는 매우 분명한 개념으로 이렇게 말했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다른 계급의 도움 없이 프롤레타리아트를 통해서만 사회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두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소농이다. "승리한 당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을 지지해주는 계급의 이해관계가 허용하는 것을 넘어서 그 이상의 강령을 시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당신에게 필요한 계급의 동맹들이 준비되는 것 이상으로는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로 어떻게 갈 것인가? 그것은 의제가 아니다. 생산력 부족 등 다른 이유도 있지만 농민들이 준비가 안 된 것이 주된 원인이다. 레닌이 말한다. "대부분의 인민이 지지하는 혁명적 독재만이 지속 가능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엄청난 다수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데, 농민들은 사회주의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은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있다면, 당신은 사회주의 강령과 사회주의 정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거의 자동적으로 뒤따른다.
그래서 우리가 이 농민 민주주의 아래 어떤 정부가 존재할 것인가 물었을 때, [좌파가] 정부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오래된 금기가 다시 작동되었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상황에서 정부 안에 있다면, 사회주의적 강령을 가지고 있는 당신은 그것을 실행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신용을 스스로 떨어뜨릴 것이다. 당신은 파업을 진압하고, 재산 소유자들을 보호하는 등을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레닌과 다른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트로츠키와 연속혁명 이론으로 가게 된다. 그렇다면 연속혁명의 이론은 무엇일까? 그 개념을 생각하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트로츠키가 생각해낸 전체적 이론이다. 다른 하나는 트로츠키를 다른 모든 사람들과 분리하게 만든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다. 트로츠키의 이론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었고, 특히 국제 혁명 부분이 그러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과 공유되었고 아마도 그의 이론에서 가장 독창적이지 못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트로츠키가 혼자서 주장했던 부분은 - 그리고 아주 자주 우리는 ‘트로츠키-파르부스(Parvus)’ 이론에 대해 듣게 되지만, 파르부스는 이것을 비난했고, 레닌과 파르부스는 이 원래의 질문에 더 가까웠다 - 임시 혁명정부가 오래 지속될 것이고 고정된 정부가 될 것이라는 그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그가 취한 입장으로서 다른 사람들은 그것과 거리를 뒀다. 그것이 그가 볼셰비키들을 비판한 이유다; 그는 임시 혁명정부가 잠정적으로만 머무를 것이라는 그들의 생각이 공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계급 동맹의 공리'를 다루었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장벽으로 보이는 것을 헤쳐 나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농민들이 사회주의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텐지만, 그것은 바로 그가 하지 않은 말이다. 포퓰리즘 전통에서 나온 ‘사회주의혁명가당’(Socialist Revolutionaries)은 농민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덧붙여, 그들은 트로츠키가 그 개념을 사용하기도 전인 1905년 7월에 이미 사회주의로 가는 "연속 혁명"을 주장했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그 길로 가지 않았다. 트로츠키와 레닌은 민주주의 혁명에 대해서 이견을 보였을지 모르지만(그리고 거기에서도 강조점의 문제였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농민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상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내 느낌으로 보자면 트로츠키는 문구에 충실하면서도 계급 동맹의 공리에 따른 정신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 혁명의 1막에서는 농민들이 당신을 지지하고, 2막에서 당신이 사회주의로 넘어가면 농민들이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국제 혁명을 하지 않는 한 '농민과의 내전'이 있을 것이다(그리고 이것은 그 자신의 문구이다). 그는 당신이 다수의 지지 없이는 사회주의 정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좀 특이한 방법으로 그는 농민과 내전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주의로 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임시정부를 오래 지속시키지 않는다면 신용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게는 농민과의 내전이 상당히 신빙성이 없어 보이고, 사회주의 정부가 농민과 내전으로 끝난다는 생각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신성모독이었다. 나는 레닌의 반응 중 하나를 읽고 싶다. 레닌이 트로츠키의 이론에 대해 특별한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그가 어떤 말을 했을 때는 대개 다른 사람이 트로츠키를 인용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인용문이 진짜 이슈가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1909년 마르토프(Martov)는 트로츠키의 말을 인용했다.
“보통 부르주아 체제를 지지하는 것보다, 그들 [노동계급 정부를 지지하는] 농민들이 더 많은 정치적 이해는 없지만“ 그래서 그는 농민들이 그들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다지 진보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부르주아 체제를 지지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지지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 작동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레닌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정권 하에서, 그들의 의지하고 있던 힘으로서 농민들의 무지와 편견에 의지할 수 없다. 또한 혁명의 시대에는 농민들이 평소처럼 정치적 무지와 소극성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고 가정할 수도 없다."
나는 그것이 일반적으로는 아니지만, 트로츠키의 1905~06년 이론과 레닌 사이의 진정한 차이를 요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트로츠키는 농민의 지원에 대한 생각을 둘러싸고 요령있게 그의 길을 찾으려 하지만, 반면에 레닌은 우리가 의식적인 다수 농민의 지원을 신뢰할 수 없다면 전진할 수 없다고 말한다.
1917년으로 가기 전에 보충설명 하나를 하겠다. 여기서 논점 중 하나는 1917년에 레닌에게 누가 영향을 미쳤는가, 트로츠키인가, 카우츠키인가 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잘못된 이분법일 수 있다. 트로츠키가 1906년 카우츠키의 기사를 번역하면서, 그는 카우츠키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짜증을 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 다른 한편, 정신적인 게으름에 의해 이끌린 완전히 어리석은 농담은, 러시아 혁명의 문제에 대한 카우츠키의 권능을 부정하려는 시도다."
그는 특히 변증법에 대해 카우츠키를 칭찬한다.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아주 잘 함축하고 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 카우츠키의 기사가 있다. 독자가 나의 글 '성과와 전망'(Results and prospects)을 숙고할 시간을 가진다면, 그는 이 두 글에서 우리의 사고의 발전이 동일하기 때문에 카우츠키를 번역한 글에서 정식화된 한 가지 입장이라도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트로츠키에 따르면 '성과와 전망'에 나오는 그의 이론은 카우츠키의 이론과 동일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여기서 약간 희망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다수의 지지가 없이도 임시 혁명정부를 사회주의 정부로 만들겠다는 그의 생각을 카우츠키가 지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15년 10월의 테제
레닌은 1915년 10월에 이 문제에 대한 토론에서 결코 언급되지 않는 일련의 테제들을 고안했다. 그것은 옛 볼셰비즘과 짐머발트(Zimmerwald) 좌파의 정치가 합쳐진 것이다.(짐머발트 좌파 그룹은 1915년에 시작되었지만, 나는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그의 입장에 대해 이 용어를 사용한다. 그것은 논란이 있는 문제이지만, 나는 그의 입장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짐머발트 좌파의 입장은 국제적 시나리오와 관련이 있다. 이 '10월 테제'는 러시아의 민주주의 혁명에서 서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 촉발될 수 있음을 핵심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가 사용한 문구는 이렇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직면한 과제는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을 촉진하기 위해 러시아의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을 완성하는 것이다."('완성'은 러시아어로 '끝까지'라는 또 다른 말로 번역될 수 있다.) 그렇다면 10월 테제에서 암시하는 전략은 무엇인가?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핵심 아이디어를 찾아볼 수 있다.
* '2단계' 혁명
*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에서와 같이 소비에트 형태의 혁명적 권력
* 러시아의 완전한 민주주의적 변혁
* '혁명적 방위주의'에 대한 완전한 반대
* 다른 나라들에서의 혁명에 대한 공격적 추구
레닌의 나중의 입장은 대부분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무엇이 빠진 것일까? 확실히 제시되지 않은 것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 이전에 러시아가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좀 더 일반적으로, 그는 러시아의 혁명 정부가 하루하루 정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의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는 국제적인 혁명 시나리오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정책을 세워야 할 정부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다.
카우츠키의 X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레닌의 첫 반응은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하! 1915년 10월에 우리가 예측한 그대로의 상황이다. 정확히 맞췄다!" 그는 10월 테제로 돌아가서, ‘먼 곳으로부터의 편지’에서 그것들을 길게 인용한다.
완성되지 않은 다섯 번째 편지는 우리가 정말로 새로운 것을 보게 되는 첫 편지다. 그는 앞선 네 편지에서 쓴 글들을 요약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처음으로 우리는 '사회주의로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과 같은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조치들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으로, 전쟁이 만들어낸 조건들에 의해 지시되는데, 많은 면에서 전후 시기에는 훨씬 더욱 첨예해질 것이다. 그 전체와 발전 과정에서 이러한 단계는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나타내게 될 것인데, 이는 과도기적 조치 없이는 러시아에서 직접, 한 번에 달성될 수는 없지만, 그러한 과도기적 조치의 결과로서 상당히 달성 가능하고 시급하게 필요하다.”
또한 그는 처음으로 농민 전체와는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층의 빈곤한 부분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1917년 4월 칼 카우츠키는 월간지 <신시대Die Neue Zeit>에서 러시아 혁명의 전망을 평가했다. 레닌은 스위스를 떠나 러시아로 가기 직전에 그 기사를 읽었다. 레닌은 카우츠키의 기사를 비판하기 시작하며, 카우츠키가 "사회배외주의자들과 혁명적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동요하는... '중도', '늪' 경향"의 리더라고 비난했다. -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드러운 카우츠키에 대한 비판인 것 같은데, 이는 그가 여전히 국제주의적 입장을 취할 여지가 있음을 시사한다. 불행히도 5번째 편지에서는 이런 지적이 사라진다. 아마도 레닌은 카우츠키의 기사를 무엇으로 봐야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촉발시켰다고 믿는 주장에 관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가 단순히 카우츠키가 말한 것을 읽고 나서 그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말하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무엇이 그를 이런 방향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만약 정황 증거가 있다면 우리는 그 기사를 봐야 한다. 그 안에 내가 특히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다.
카우츠키의 주장은 무엇인가? 첫째로 농민에 대해: 1905년, 그는 농민들이 평화로운 존재에서 벗어나 민주적 변혁과 계급적 이익을 위한 투사들로 변모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와 레닌이 마음이 통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제 10여년이 지난 지금, 스톨리핀[1905년 혁명 이후 짜르 정부의 총리] 아래에서의 거대한 개혁과 변화는 농민들을 변화시켰고, 유산자와 무산자 사이의 농촌 인구의 '한없는 분할'을 촉진시켰다고 말한다. 즉, 농민은 이 기간 내내 분열되어 왔고 농민 내부의 양극화 과정이 가속화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가 러시아 농민들의 사고방식에 어떻게 침투해서 영향을 미쳤는지 예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러시아 농민은 "러시아 혁명에서 알려지지 않은 수치인 미지수 X"이다. 그는 러시아의 다른 모든 계급에 대해서는, 우리가 서유럽의 계급을 보면서 그들이 어떻게 될지 대체로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적이고, 부르주아들은 반혁명적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것으로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러시아 농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일까? 왜냐하면 "그들의 물질적 환경과 역사적 전통은 상당히 독특하며, 동시에 30년 동안 엄청난 변화의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러시아로 돌아오기 직전이었므로 어떤 정책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 나는 레닌이 이 기사를 보고 자기 자신에게 혼잣말을 했다는 의견이다. '옳다!' 예를 들어, 카우츠키는 러시아 농민들이 부르주아지와의 전투에서 노동자들을 지원하면서 어디까지 갈지는 모른다고 말한다. 서유럽에서 그들은 아마도 그들의 땅을 가지고 행복할 것이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들을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러시아에서는 같은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의 가설은 그러한 것들이 레닌을 '우리는 이제 농민들을 지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더 급진적인 결론에 도달하도록 자극했다는 것이다. '4월 테제'를 보면, 우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좀 더 불분명하다. 딱 꼬집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가 조금 더 어렵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로 자주 인용되는 곳에서 그가 실제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회주의로의 ‘즉각적’ 전환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그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점진적인 이행을 위한 조정을 원했음을 나타낸다. 나는 그가 1905년에서 1906년 사이에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것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임시 혁명 정부는 장기간 지속될 것이고, 그것은 그 정책을 실행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는 트로츠키의 위치로 움직인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추론은 다를 뿐 아니라 반대라고 생각한다. 레닌은 농민들이 사회주의 조치를 지지할 것이며, 사회주의가 가능한 다른 이유가 있다고 스스로 확신해 왔기 때문에, 우리에겐 다수의 지지와 물질적 배경이 필요하다는 옛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마르크스주의를 재고하지 않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트로츠키의 것과는 다른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1905년, 레닌은 우리가 사회주의적 조치에 대해 다수의 지지를 가질 수 없으며 따라서 사회주의 독재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한 반면, 트로츠키는 어쨌든 다수의 지지가 없더라도 사회주의 독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7년에 레닌은 그들이 이제 사회주의적 독재에 대해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내가 만들고 싶었던 요점이다.
이제 에필로그의 일종으로 한 가지 요점을 짚고 넘어가자. 그가 예전의 입장을 넘어서 사회주의가 의제에 올랐다는 것을 보게 된 생각은 어떤 것일까. 내 생각에 그는 거의 즉시 그것으로부터 후퇴하기 시작한 것 같다.
카메네프에 맞서서 그는 소부르주아지는 방위주의적(defencist)이고 그렇게 머물 것이며, 따라서 소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지와 결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옛 볼셰비즘을 쓸모없게 만들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부유하고 재산이 있는 농민들도 부르주아지와 결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의지할 수 없다. 왜 그럴까? 나는 그가 가난한 소농의 지원을 받아 사회주의 혁명을 향해 재빨리 다가가고 싶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는 틀렸다.
여름이 끝날 무렵 농민들은 임시정부 전체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고, 그래서 10월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레닌 자신은 다른 많은 곳에서 이것을 지적했다. 즉 1917년 10월은 민주주의 사회혁명이었다고 말이다. 내가 보기에 레닌이 이러한 공식을 만들면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카메네프가 옳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1917년 4월에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레닌이 틀렸고 카메네프가 옳았다는 것은 아마도 다소 충격적인 결론일 것이다!
레닌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위기는 사회주의를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계급에 기반을 둔 혁명적 정부만이 일관성있는 정권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레닌의 말은 전적으로 옳았다. 연합정권은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 계급에 기반을 둔, 급진적이고 민주적이며 사회주의가 깃발에 적힌 정권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레닌은 그 입장을 받아들이려고 했고, 왜 그런지에 대해 어떤 '불가피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당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 당이 레닌의 바로잡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해 나섰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레닌의 일부 사상을 너무 강조하지 않고, 한 가지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노동자-농민 권력만이 러시아의 문제를 해결하고 혁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기사 등록 20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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