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인종적 자본주의"를 넘어

- 자본주의와 인종적 억압의 통일 이론을 향해

 


찰리 포스트(Charlie Post)

번역: 두견


[이 글의 필자인 찰리 포스트(Charlie Post)는 미국의 극좌파 단체인 연대’(Solidarity)에서 오래동안 활동해온 사회주의 활동가이며 학자이다.] 


출처: https://brooklynrail.org/2020/10/field-notes/Beyond-Racial-Capitalism-Toward-A-Unified-Theory-of-Capitalism-and-Racial-Oppression

 



 

미니애폴리스에서 조지 플로이드에 대한 경찰의 살해로 촉발된 봉기는 다시 인종 문제를 미국 정치의 중심에 놓았다. 우파는 인종주의의 존재를 완강히 부정하고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사람들에 대해 더 강력한 탄압을 옹호하는 반면,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포함해 왼쪽에서는 반란을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문제는 단순히 경찰, 중간 계급, 미국 기업들, 정치 기득권층이 전체 인구를 '반영하지' 않는 '다양성의 부족'일 뿐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노동하는 유색인들의 증가하는 가난과 불안감을 해결하지 않고, 그들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그러했듯이 새로운 유색인 중간계급을 장려함으로써 이러한 투쟁들을 탈선시키기를 바라고 있다.

 

아사드 하이더(Asad Haider)가 주장했듯이 신자유주의자들은 '정체성 정치'를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에서부터, 부와 소득의 거대한 불평등을 손대지는 않고 정치 경제적 엘리트들을 다양화하자는 요구로 바꾸어 놓았다.

 

사회주의 좌파도 사태를 따라잡으려 하고 있다. 미국 좌파의 주요 조직인 미국 민주적사회주의자들’(DSA)은 이러한 새로운 투쟁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민주당 선거 정치의 일상에서 인종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는 진행 중인 운동을 조직하는 것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DSA의 일부 사람들은 봉기의 가장 급진적인 요구 즉, 경찰의 예산을 삭감하고, 무장 해제하고, 해체하라는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대신 노동자 임금인상 요구(경찰들의 임금도 포함)와 공공 서비스의 자금 지원을 위한 "보편적인" 요구를 중심으로 계속적인 캠페인을 벌일 것을 주장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정체성 정치와 계급 환원주의를 모두 초월하려는 일부 좌파들은 '인종적 자본주의' 이론을 내세웠다. 자본주의와 인종주의가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은 에릭 윌리엄스(Eric Williams), 올리버 크롬웰 콕스(Oliver Cromwell Cox), 그리고 가장 최근의 세드릭 로빈슨(Cedric Robinson) 등의 작품을 통해서 마르크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오늘날에는 인종적 억압과 계급적 착취 모두에 맞서서 조직하는 정치를 주장하기 위해 전개되고 있다.

 

마이클 월저(Michael Walzer)는 최근 '디센트'(Dissent) 웹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인종적 자본주의"라는 용어에 대해 "어리둥절하다"고 지적한다. 미국에서 자본주의와 인종주의의 역사가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월저는 모든 자본주의가 인종주의를 수반하지는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는 박해받는 무슬림들이 "카프카스인(Caucasians)"이기 때문에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후원하는 자본주의의 형태는 분명히 비인종적"이라고, 그리고 1844년에 맨체스터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연구한 모든 노동자는 백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보편적인 착취자"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종을 가리지 않는다." "이용 가능한 노동자면 누구든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인종주의는 별도로 분석되어야 한다 겹치는 것은 상황과 관련된 것이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월저의 주장은 두 가지 문제를 겪고 있다.

 

첫째, 인종주의 - 한 집단을 본질적으로 우월하게 만들고 다른 집단은 본질적으로 열등하게 만드는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류가 구별되는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관념 - 를 외적형질의 차이로 축소시킨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인 사트남 비르데(Satnam Virdee)가 주장했듯이 인종에 대한 분석은 "색깔 코드 현상을 넘어 [()아이리시, ()유대인 인종주의 같은] 인종주의의 다른 양상들을 관찰해야 한다.“

 

아일랜드인들이 19세기와 20세기에 영국에서 타고나게 열등한 "켈트적(Celtic)" 인종의 일부로 인종화되었듯이, 지배적인 한족과 위구르(Uyghur) 무슬림 사이의 차이도 본질적이고 변화 불가능한 것으로 인종화되었다.

 

둘째,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더욱 심원하게는 월저를 비롯한 다른 "계급 환원론자"들은 자본주의의 출현에 대한 역사적 전제조건과 축적과 경쟁을 통한 자본 재생산의 불가피하고 피할 수 없는 영향을 혼동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종 불평등의 보편적인 지속성을 설명할 수 없다.

 

불행히도 월저 비평가들은 자본주의와 인종주의가 불확정적 관계이기보다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인종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동원하려고 시도하면서 자본주의와 인종주의의 분석적 분리를 재현한다. 왈저에게 힘차게 반박하면서 올루프미 O. 타위프(Olúfẹ́mi O. Táíwò)와 리암 코피 브라이트(Liam Kofi Bright)는 콕스와 로빈슨의 작품을 배치해 자본주의와 인종주의가 어떻게 뒤얽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콕스와 로빈슨 모두 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해 무역의 팽창에서 자본주의가 자연스럽게 등장했다는 문제적인 '상업화(commercialization) 모델'을 고수하면서, 자본주의와 인종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주장을 펼친다. 내가 보기에 정확하게 콕스는 인종주의는 인간을 구별 짓는 뚜렷한 방법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재산 관계와 함께 발전했고 그것이 이 제도의 필수적 특징이라고 단언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로빈슨은 유럽의 봉건주의는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인종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 이론처럼 인종과 계급을 분리되어 있지만 서로 얽혀 있는 억압의 시스템으로 취급하는 로빈슨의 '인종적 자본주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인종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조건부로 간주한다. 만약 자본주의가 유럽 밖에 나타났다면 인종주의는 꼭 필요한 특징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에 유럽에 인종주의가 존재했다는 로빈슨의 주장은 자본주의 이전의 방식과 자본주의적 방식의 인간 구별짓기에 대한 근본적 혼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고전 고대와 봉건제에서 인간은 종교("이교도와 신자")와 친족 공동체("낯선 이와 이웃/친족")와 같은 범주에 따라 서로를 구별 지었다.

 

둘 다 개종, 입양, 결혼 등을 통해 매우 유연하고 변화무쌍한 경향을 보였다. 자본주의 이전의 계급 관계에서는 사회적 불평등이 합법적으로 그리고 사법적으로 정해져있었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 내재되어 있고 변화할 수 없는 분열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농노제, 노예제, 그리고 다른 형태의 법적 강압을 바탕으로 한 생산 방식에서 불평등은 인류의 자연적 조건이라고 가정되었다. 자본주의에 들어서야 우리는 자연적인 인간 평등 관념의 탄생을 보게 된다. 노동시장에서 법률-사법적 평등의 살아있는 경험과 자본주의 생산에서 자본과 노동의 실질적인 불평등 사이의 분리 상태는 인종의 발명을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에 이베리아(Iberian) 반도에서 일종의 원시적 인종주의가 나타난 것은 사실이다.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의 카스티야(Castile)와 아라곤(Aragon)의 절대주의적 군주들은 개종한 유대교도와 무슬림들이 그들의 종교적 의식을 비밀리에 유지한다고 우려하여, 기독교인들만을 오직 재정 사무에 자격이 있는 "순수한 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결정화된 것은 17세기 후반 버지니아에서 아프리카 노예제의 출현과 함께였다. 노예제도는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왔지만, 그것은 수많은 형태의 부자유 노동(농노, 노역 등) 중 하나였으며,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1676년 베이컨(Bacon)의 반란 이후, 유럽인들을 식민지로 불러들였던 계약 노예와 다른 형태의 부자유 노동은 버지니아에서 사라졌고, 18세기 초를 지나서는 아프리카 혈통의 노예화된 사람들만 남아있게 되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법적 자유와 평등은 인간의 "자연적인" 조건인 것처럼 나타났다. , 아프리카인들이 왜 부자유의 상태를 유지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본질적이고 영구적인 차이의 개념이 필요해진 것이다. 인종과 인종주의는 19세기에 신대륙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면서 사라지지 않고 자본주의 세계 전반으로 일반화되었다.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의 구체적인 개념, 즉 어떤 특정한 특성이 일부 집단을 우월하게 하고 다른 집단을 열등하게 만들었는가는 계급 관계의 변화와 차별 속에 발전했다. 인종화된 노예들이 배은망덕하고, 신뢰할 수 없고, 멍청한 것으로 간주되듯이, 인종화된 임금 노동자들은 규율이 없고, 비정상적이고, 불량한 직원이었다. 식민지 세계에서는, 농업을 "향상"시키기에는 원주민들이 "무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식민정착자들에 의한 토지와 자원들의 강탈을 정당화했다.

 

마르크스가 가치 법칙이라고 불렀던 시장의 "지루한 강박"을 통한 자본주의적 사회소유 관계의 재생산은, 자본주의와 인종주의의 관계를 역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조건부가 아니라 필수적으로 만든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간단히 말해서 "비인종적" 자본주의란 없기에 "인종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불필요하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치 법칙의 작동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노동 과정들을 창출하고 산업 간 및 산업 내에서의 이윤과 임금을 균등화함으로써 노동을 동질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필수적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가치, 축적, 경쟁 이론에 대한 이 개념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지만, 마르크스의 성숙한 이론도, 자본주의의 실제 역사도 반영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재생산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동질성이 아니라 이질성을 낳는다. 축적과 경쟁이 생산, 노동 과정, 임금률 등의 조건을 균질화해야 한다는 개념은 궁극적으로 신고전파 경제학의 이상화된 경쟁 비전인 "완전 경쟁"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자본주의적 경쟁은, 이러한 생산 방식의 역사를 통틀어, 결코 "완전 경쟁"이라는 꿈의 세계에 부합한 적이 없다. 생산의 기계화가 증가하는 형태로 끊임없는 기술적 혁신을 통해 진정한 경쟁과 축적이 일어나면서 자본과 노동을 두 가지 방식으로 차별화한다.

 

첫째, 생산의 한 분야에서 기계화 과정을 거치면 노동력의 일부가 자본의 관점에서 불필요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노동 예비군"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이러한 끊임없는 보충, 즉 대량의 실업자와 불안정 노동자는 임금을 수익성의 경계선 안에 둘 뿐만 아니라, 산업 부문간의 불균질적인 노동 과정, 이윤율, 임금 등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자본집약적인 산업은 갈수록 더 높은 이윤과 더 높은 임금 가능성을 누리는 반면, 노동예비군의 지속적인 보충은 더 낮은 이윤과 더 낮은 임금으로 노동집약적인 산업의 지속적인 재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간단히 말해서, 자본주의 하에서의 "초착취(sweated) 노동"은 과거의 생산 방식에서 이어진 어떤 격세유전적인 잔존물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그러나 반드시 불균등하고 결합적인 생산 기계화의 필수적 결과물이다.

 

노동자들이 각기 다른 수준의 불안정성과 자포자기를 경험하고 있는 노동예비군의 끊임없는 세대는 선택지가 적고 최악의 일자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을 양산한다. 노동집약적이고 저임금인 업종은 이러한 절박한 노동자들의 웅덩이를 두드려서 임금 인상을 피할 수 있다.

 

둘째, 산업 내부와 산업 간의 경쟁은 반드시 노동 과정, 이윤과 임금의 비율을 차별화한다. 자본가들은 생산 부문에 들어가거나 새로운 생산 단위를 열 때 가장 선진적인 고정자본을 채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고정자본 투자의 존재"는 이러한 새로운 기술들이 "산업 내의 모든 기업들에 의해 즉시 채택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 따라서 경쟁은 동일한 기업을 만들기 보다는 생산 조건에 대한 지속적인 재구분을 야기한다."

 

간단히 말해서, 축적과 경쟁 모두 노동자들 사이의 차별화, 즉 인종과 인종주의의 생산과 재생산을 위한 사회적 매트릭스를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인종은 자본주의적 경쟁과 축적의 필수적이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물이다: 인종과 계급은 자본주의 아래에서 공동으로 구성된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소유 관계는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모순된 생활 경험을 낳는다. 한편, 자본주의는 노동 시장에서 동등한 교환으로 나타나는 것을 통해 착취가 일어나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회적 노동 형태다.

 

자본가와 노동자들은 개인적인 지배나 다른 형태의 경제 외적인 강압에 의존하기 보다는 독특한 상품의 소유자들로서, 즉 자본가들은 돈과 그에 따라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력을 소유하고서, 노동시장에서 서로 대립한다. 자본가들은 일반적으로 노동자의 능력을 그 가치대로 구매하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의 사회적 조건을 구성한다. 자본가들이 자본의 지휘 아래에 노동자를 노동과정에 일하도록 투입하여 노동력을 소비함에 따라, 그들의 임금 가치를 초과하여 가치를 창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는 착취를 자연스럽게 위장하고 모든 인간의 평등 개념을 촉진하는 살아있는 경험의 매우 구체적인 용어를 낳는다. <임금, 가격, 이윤>(1865)에서 마르크스는 노예제도 하에서는 모든 노동이 무급으로 나타나고, 농노제 하에서는 유급 노동과 무급 노동 사이의 분업이 농작물과 노동의 분배에서 뚜렷이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계약의 개입으로 전체 거래의 성격이 완전히 가려져 있기" 때문에 "무급 노동도 유급 노동인 것처럼 보인다." <자본>(1867)에서 마르크스는 이것이 어떻게 독특한 살아있는 경험을 만들어내는지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 경계 안에서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가 진행되는 순환이나 상품 교환의 영역은 사실상 바로 인간의 선천적 권리에 대한 에덴동산이다. 그것은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공리주의 철학자]의 배타적 영역이다. 자유, 우리가 노동력에 대해 말한다면, 상품의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 오로지 그들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만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 앞에서 평등한 자유인으로서 계약한다. 평등, 왜냐하면 각각은 단순한 상품 소유자로서 마찬가지인 타인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등한 것과 동등한 것을 교환한다. 소유, 왜냐하면 각각은 자신이 가진 것을 처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벤담, 왜냐하면 각자 스스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이상화된 상품 교환의 세계를 떠나면,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 축적, 경쟁의 현실 세계, 즉 착취의 현실 세계로 들어간다. 자본주의는 자본과 노동 간에서, 노동계급 내부에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서로 다른 사회들 간에서 실질적인 불평등을 반드시 야기한다.

 

자본주의 이전에는 불평등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가정했지만,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해야 한다는 관념과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것을 설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류를 변화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진 집단으로 나누어서 어떤 것은 우월하고 어떤 것은 열등하게 만드는 차이의 재자연화’(re-naturalization)가 필요하다. 일부 사람들은 '완성된 인간'이 아니어야지만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가 평등해 보이지만 진정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

 

인종과 젠더의 분화는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가 노동시장에서의 이질성을 이해하고 협상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라는 사회적 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젠더의 차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자연화된다. 다른 방법으로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젠더 차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생물학으로 축소되는데, 이것은 남성들에 대한 여성의 본질적인 열등함을 설명한다고 알려져 있다.

 

인종은 물론 생물학적 실재가 아니지만 사회적, 역사적 현실성을 가지고 있다. 인종주의는 신체적 외형, 종교, 언어 등의 차이를 자연화시킨다. 이와 같이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적 축적과 경쟁이라는 모순된 살아 있는 경험에 강력한 정신적 지침을 제공한다. 노동의 활동군과 예비군, 그리고 비교적 낮은 임금/노동집약적이고 높은 임금/자본 집약적 생산 부문 간의 차별화를 가진 자본주의적 노동 시장의 구조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경제 전반에 걸친 노동력의 분배를 인종적으로 구조화하도록 강제하고 가능하게 한다.

 

또 다른 방법에서, 인간은 인종 차별을 생산하고 재생산하지만, 그들 자신이 선택한 조건 하에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노동시장을 인종적으로 조직하고 노동자들 사이의 인종화된 분열을 의도적으로 조장하는 데 자본가의 역할은 역사적으로 잘 기록되어 있다. 자본은 대부분의 직업에 필요한 기술과 훈련의 평균 수준을 낮추면서 거의 모든 필요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대규모의 노동자들과 직면해 있다. 고용주들은 허구적인 인종적 "특징"을 사용하여 서로 다른 업무들에서 누가 가장 '믿을 수' 있고 '효율적인' 노동자인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노동자들, 특히 노동조합처럼 자본에 대항하는 집단적 투쟁의 조직이 고용주와 국가에 대항할 수 없거나 대항하지 않을 때, 노동자들은 또한 인종적 구분선을 따라 다른 노동자들과의 경쟁을 조직하려고 시도한다. 로버트 브레너(Robert Brenner)와 요한나 브레너(Johanna Brenner)가 주장했듯이 "노동자들은 사회적 생산에 대한 집단적 통제권을 갖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적 생산자인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일자리, 승진 등을 놓고 서로 대립하고 있는 노동력의 개별 판매자들이다.“

 

자본과 국가에 대한 집단적 투쟁이 '비현실적'으로 나타날 때 노동자들은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노동자들은 항상 인종화된 노동 예비군의 압박과 자본이 업무의 단편화와 기계화를 통해 미숙련 노동자들을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백인"으로 사회적으로 구성하려고 시도한다.

 

남북전쟁 이전에 북부의 백인 숙련 노동자들이, “소외에서 벗어나는 것을 여전히 원하고 상상하면서도 흑인 노동자들을 심지어 노예나 '백인의 깜둥이'로 취급하는 굴레를 씌우며그것을 투영하도록 불을 붙이는 것은 이런 형태의 노동시장 경쟁이다.

 

자본가들 간의 경쟁을 반영하는 노동자들 사이의 지속적인 경쟁의 결과는 (실업률, 불완전 고용률, 빈곤율이 지속적으로 높은) 노동 예비군과 노동집약적이고 저연령인 생산 분야에서 유색인종 노동자들이 과대 대표되는 것이다. 백인의 인종적 이점은 근본적으로 이 경쟁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들은 낮은 수준의 실업과 빈곤, 더 안전하고 더 나은 보수를 받는 일자리에 대한 접근을 추구하고, 그것은 백인 노동자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더 나은 주거와 교육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축적과 경쟁을 통한 인종의 지속적이고 자발적인 재생산은 자본의 요구에 저항하는 노동자의 집단적 능력을 약화시켜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의 하향 곡선을 만든다. 놀랄 것도 없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백인의 임금"도 다소 빈약해졌다.

 

하지만, 다인종 노동계급의 단합은 자동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 그것은 연대의 문화와 조직을 재건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높은 임금, 더 큰 고용 안정, 건강 관리 및 고용에 얽매이지 않는 연금 등 보편적이고 전계급적인 요구를 위한 투쟁은 다인종 노동자 운동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일 것이다.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줄이는 모든 조치는 백인 우월주의의 매력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보편적' 요구만을 둘러싼 투쟁을 통해 다인종 노동계급 운동이 구축되지는 않을 것이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산업별 노조 운동의 주류가 만든 노동자에 대한 '인종초월적'(color-blind) 호소는 노동자들 간의 인종적 분열을 심화시키고 남부에서 조직화에 실패하는 데 기여했다.

 

따라서 경찰의 예산 삭감과 무장 해제, 주택과 교육 분리의 종식, 공장 및 산업 전반의 연공서열, 고용 및 승진에서 차별 방지 조치, 미등록 이민자에 대한 시민권 획득과 합법화 등과 같은 인종 고유의 요구는 다인종 노동계급의 연대를 구축하는데 필수적일 것이다. 불가피하게 인종적으로 이질적인 계급 간의 노동계급 통합을 구축하기 위한 단순하고 효과적인 계급 조직과 정치는 반드시 반인종주의적인 조직화와 요구를 포함해야 한다.

 

 (기사 등록 2020.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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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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