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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국제 - 미국 민중 투쟁/ 홍콩 보안법/ 볼턴 회고록/ 콩고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7. 22.

전지윤 


미국의 역사를 바로잡고 있는 투쟁

 

얼마 전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트럼프가 최근의 미국 민중 투쟁을 비난하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역사를 말살하려는 무자비한 캠페인", "미국 독립혁명을 타도하려고 고안된 좌파 문화혁명", “우리는 지금 급진 좌파, 맑시스트, 무정부주의자, 선동가, 약탈자들을 물리치는 과정에 있다”...

 

노골적인 색깔론과 낙인찍기이지만, 그만큼 심각한 위기의식이 느껴진다. 지난 526일 이후 미국 전역에서는 하루에 평균 140건씩 총 4700여건의 시위가 벌어져 총 2600만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이 투쟁은 역사를 말살하는 게 아니라 바로잡으려는 것이고, 미국과 세계를 유린해온 진짜 약탈자들을 물리치는 역사적 과정이라고 봐야 한다. 미국은 원주민들을 학살하면서 만들어진 나라이고, 노예들의 피와 땀 위에서 만들어진 나라이고, 또 제3세계 수많은 민중의 삶과 생명을 파괴하면서 강해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 민중의 투쟁은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인물들과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추악한 이면을 들쳐내고 있고, 역대 대통령의 동상도 끌어내려지는데, 현직 대통령이라고 두고 봐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미국의 독립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지키자는 트럼프는 흑인노예이자 노예해방운동가였던 프레더릭 더글라스가 1852년에 한 독립기념일 행사에 가서 했던 이 연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연설의 정신이 지금 미국의 민중 속에서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우리들이 당신들의 독립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독립선언서에 구현된 정치적 자유와 천부적 정의의 위대한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되는가? 그것은 우리 사이의 헤아릴 수 없는 거리만을 드러낼 뿐이다. 당신들에게 생명과 치유를 가져다 준 햇빛이 우리에게 채찍과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 74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것이다. 당신들은 기뻐하지만 우리들은 슬퍼한다. 족쇄를 차고 있는 사람을 자유의 성전으로 끌고 가 함께 하자고 요청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조롱이자 역설적 신성모독이다. 그 어느 날보다도 심각한 부정과 잔혹함을 드러내는 날이다. 당신들의 모든 찬송과 근엄한 기도와 설교는 사기, 속임수, 죄악, 위선 등을 감추기 위한 얇은 베일이다. 미국보다도 더 충격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학정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은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홍콩보안법과 미국 민중 투쟁

 

홍콩 보안법이 기어이 통과됐다. 한국에서 국가보안법이 저지른 야만과 범죄를 기억하는 우리는(이석기 의원은 아직도 8년째 감옥에 있다!) 홍콩의 민중 앞에 놓인 위험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홍콩 보안법이 통과되는데 큰 도움을 준 사람 중 하나는 트럼프일 것이다.

 

지난해 홍콩 민주화 시위대 속에서 미국이 홍콩의 민주주의를 지켜줄 것이라는 혼란과 기대가 일부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런 입장이 분명했던 홍콩의 일부 사람들은 이번에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과 미국 정부의 대응을 보면서 당혹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도와달라는 말은 나오기는 힘들어졌다.

 

이것은 중국 지배자들에게 이용하기 유리한 정치적 혼란이었다. 트럼프와 시진핑 모두가 민주주의의 적이고 사실은 서로를 돕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그리고 홍콩 민주화 투쟁이 그 일부였던 국제적 반란의 흐름이 이제 미국에 도달해 새로운 투쟁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반면 홍콩에서는 투쟁이 교착상태로 접어드는 모순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투쟁으로 홍콩에서 등장한 새로운 노조들에서 총파업 호소와 찬반투표를 했지만 참가율과 찬성율이 높지 않았다고 한다. 홍콩의 투쟁이 트럼프의 폭주에 갑갑하던 미국 민중에게 영감을 주었다면, 이제는 미국의 민중이 홍콩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줄 차례인 것 같다.

 

그리고 미국의 민중은 그 과제를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지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시위와 행진이 계속 이어졌다. 특히 트럼프 지지자가 많던 백인이 다수인 작은 시골 마을에서까지 시위가 벌어졌다. 트럼프의 집권을 전후로 진행된 인종주의와 파시즘으로의 반동에 강력한 브레이크가 걸렸다. 경찰이 아니라 복지에 투자하라며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핵심에 있는 감옥-산업복합체를 해체하는 투쟁으로도 발전하고 있다.

 

인종, 젠더, 계급을 교차하면서 발전하는 투쟁의 양상과 요구를 보면 안젤라 데이비스는 "이 순간을 목격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아서 너무 행복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투쟁에서 목숨을 잃은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며 이 순간을 보고 있다고 했다. 데이비스는 미국 공산당과 흑표범당에서 활동했던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인 80대 흑인여성 투사로서 미국 민중저항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투쟁은 미국뿐 아니라 유럽으로도 확산되고 있고 특히 가장 인상적이고 흥미로운 것은 투쟁이 우상파괴와 역사와 기억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하는 양상이다.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에 책임이 있는 역사적 인물들의 동상들이 모두 끌어내려지고 있다. 각 지역에서 집회를 열고 그런 동상에 낙서와 페인트칠을 하고, 밧줄을 목에 묶어서 끌어내리고, 무릎으로 깔고 앉거나 발길질을 하고, 바다에 던져버리는 재미있는 퍼포먼스들이 벌어졌다.

 

흥겨운 축제같은 분위기에서 진행된 이런 퍼포먼스들은 사람에 대한 직접적 공격적 폭력이 아니라 물건에 대한 상징적 방어적 폭력이라고 봐야 한다. 강물이나 바다에 동상을 던져버린 사람들은 아마도 그것을, 노예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어간 수많은 흑인노예들을 위한 추모와 복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래처럼 콜럼버스의 동상에서 목이 사라진 채 발견된 사진과 이라고 이름 바뀐 동상 사진 등은 아주 기발하다. 미네소타의 주민들은 콜럼버스의 동상을 없애고 그 자리에 프린스(80년대를 주름잡은 흑인 팝아티스트) 동상을 세우자고 청원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적 반란의 물결은 직선적일 수 없고 불균등하겠지만, 미국 민중의 투쟁이 만들어낸 용기와 영감이 이제 다시 홍콩과 중국으로 전염되고 새로운 유행을 일으키길 기대한다. 한국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도 학살전범을 국립묘지에 안장하자는 이런 이야기나,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가지고 시비거는 목소리들이 좀 사라지고, 인천에 있는 맥아더 동상부터 끌어내리면 좋겠다. 전쟁, 분단, 학살에 책임있는 제국주의 범죄자의 동상을 피해국가의 시민들이 왜 기념해주고 있어야 하는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미국 민중 투쟁 속에서 나온 칙스’(‘딕시 칙스의 바뀐 이름)의 노래를 추천한다. 그래미를 휩쓸었던 실력있는 그룹인 칙스는 2003년에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고 부시를 비난했다가 엄청난 마녀사냥과 보복, 살해위협에 시달렸다. 그래도 용기를 잃지 않던 이 멋진 여성3인조 그룹은 이번 투쟁의 정신을 가득담아 인종정의, 젠더정의, 환경정의, 전쟁반대, 반트럼프의 메시지를 담은 이 노래와 뮤직비디오를 발표했다. ‘올해의 노래라 할만하다. '행진, 행진!'

https://www.youtube.com/watch?v=xwBjF_VVFvE

 


목 부분이 잘려나간 콜롬버스의 동상



볼턴 회고록의 한반도 전쟁 불씨의 구조

 

트럼프 “(선제공격을 하면) 전쟁 가능성은 어느 정도라고 보나. 반반?”

 

볼턴 나는 모든 것은 중국에 달려 있다고 본다. 아마도 반반

 

볼턴 회고록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보다도, 거기에 나왔다는 이 대화 두 줄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위험한 자라는 볼턴은 자리에서 물러나 이런 책을 펴냈고,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자라는 트럼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이런 무모하고 섬뜩한 자들이 한반도 정책을 멋대로 주물러왔다는 것에 놀라고 분노하는 목소리는 별로 없다. 놀랄 일이 뭐 있겠는가. 자기들도 관점과 생각이 다르지 않은데.

 

실제로 조중동은 지난 일주일 동안 대화 무용론, 대북제재 강화론, 북한 선제공격론, 핵무장론 등을 소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금은 볼턴 회고록을 단독’,‘특종으로 보도하면서 문재인 정부가 대화와 평화에 매달렸다고 욕하기 바쁘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이 바탕해 있는 적대와 증오의 논리가 바로 70년 전에 한반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며칠후인 한국전쟁 70년을 맞이해 <한겨레>가 기획한 아래 기사들은 반드시 볼 가치가 있다. 상대방을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불신, 적대, 증오의 대상으로 볼 때 어떤 무서운 일들이 가능한지 보여 준다. 당시에 삽과 곡괭이로 여성, 아이, 노인들까지 끌고가서 찍어죽이고 파묻어버린 사람들, 여성들을 감금해서 집단강간을 했던 사람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돼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간 이들을 방관한 사람들도 무슨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이고 보통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역사적 범죄의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고 청산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전시성폭력에 반대해 반전평화와 인권을 말하던 사람들의 뼈와 살을 발라내고 마지막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밟아버리고 말겠다는 의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들을 향해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막말과 욕설을 퍼붓던 사람이 유튜브로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표현과 집회의 자유를 누리는 이들이 내일부터는 소녀상 옆자리를 차지하고 혐오, 증오 집회를 한다고 한다. 정말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다.

 

http://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950518.html

http://www.hani.co.kr/arti/area/yeongnam/950515.html?_fr=mt2

http://www.hani.co.kr/arti/area/yeongnam/950516.html

http://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950514.html

 

콩고 전시 성폭력과 기쁨의 도시

 

이번에 수구언론들(주저하면서도 그 뒤를 따라가는 많은 기성언론들도)의 정의연 마녀사냥에서 가장 분노하고 기가 막힌 지점 중 하나는 바로 콩고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정의연의 국제적 연대를 공격하고 파괴하려는 시도였다. 수구언론은 가짜뉴스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심지어 정의연의 추천을 받았다고 사기를 치면서 콩고의 활동가에게 전화해, 이간질하고 가짜뉴스 거리를 건져내려고 했다. 이들이 과연 콩고의 전시 성폭력에 대해 손톱만큼의 관심이라도 있었을까.

 

콩고는 내전 과정에서 수만 명의 성폭력 피해자가 나왔고, 마치 한국에 정의연과 윤미향이 있었듯이, 피해자들의 기억과 증언을 돕고 진실과 정의를 세우려고 헌신하는 단체와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본 최고의 다큐멘터리 중 하나였던 <기쁨의 도시>는 그것을 다룬 것이다. ‘기쁨의 도시는 콩고의 부카부 지역에 만들어진 피해자 지원센터의 이름이고,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중 하나는 여기서 피해자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연대한 의사이자 활동가 드니 무퀘테이다.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피해자들의 경험은 매우 끔찍하다. 한 달간 밤낮으로 강간당하고, 심지어 6개월된 여아까지 강간하고, 배를 갈라서 태아를 꺼내서 죽이고, 가족들 앞에서 여성을 강간하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포와 굴욕감을 심어서 가족과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전쟁 무기로서의 강간이었다. 숲으로 끌려가 강간당했던 여성은 더 이상 숲에서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 숲은 폭력과 파괴의 장소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야만을 낳은 원인은 명백하고 단순하다. 콩고는 콜탄, 주석, 텅스텐의 주요 생산지이고 이런 광물은 휴대폰과 컴퓨터 등에 반드시 필요하다. 거의 모든 서방 강대국들과 다국적 기업들(삼성도 이 광물의 주요 구매자였다!)이 이것을 노리고 콩고에 개입했고,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민병대들을 무장시키고 돈과 무기를 대줬다. 그래서 어디에 어떤 광물이 있는지 보여주는 콩고의 광산지도는 조직적 강간이 어느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졌는지 보여주는 강간지도와 일치한다.

 

한국의 위안부피해자들이 그랬듯이, 콩고의 여성들도 단순히 피해자에 머물지 않았다. ‘기쁨의 도시에서 서로의 기억과 증언을 나누고, 고통을 힘으로 승화시켜 변호사, 간호사, 사회복지사가 된다.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지도자가 된다. 다큐에서 피해자들이 두려움을 떨치고 다같이 함께 웃으며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은 그래서 놀랍다. 무퀘테의 초대로 기쁨의 도시에 와서 이것을 돕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브 엔슬러이다.

 

엔슬러는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저자인 페미니스트 활동가이다.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감독도 엔슬러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했던 게 기억난다. 자신도 친부에게 강간을 당했던 엔슬러는 콩고의 자매들에게 폭력이 끝날 때까지, 모두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말하자. 증언과 고발이 또 다른 피해를 막는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피해자들은 침묵을 깨고 계속해서 기억하고 증언한다.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제인의 사례였다. 무장민병대는 강간당하고 나무에 묶여있는 제인 앞에서 삼촌을 죽이고 생식기, , 다리, 목을 잘라서 던져놓는다. 두 달간 나무에 묶여있던 제인은 그 상태로 임신했다가 사산하고 몸과 마음이 완전히 파괴된다. 그런 제인이 기쁨의 도시에서 누구보다 쾌활하고 당당한 햇살같은 사람으로, ‘행복을 전염시키는 전도사로 나온다. 제인은 고통이 우리를 연결시켰다. 나는 타인을 위해서 살겠다고 말한다.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곁에는 무퀘테가 있었고, 그 또한 콩고의 권력자들과 반동 세력에게 증오와 제거의 대상이었다. 암살까지 당할 뻔했던 무퀘테는 결국 콩고를 떠나지만, 피해 여성들은 우리가 당신을 지켜주겠다며 결국 다시 그를 돌아오게 한다. 폭력에 대한 기억과 증언을 가로막으려던 시도를 이겨낸 것이다.

 

이번에 정의연에 대한 마녀사냥과 조리돌림도 결국은 반성폭력 운동의 기억과 증언에 대한 공격이다. 콩고의 피해자와 연대자들이 무퀘테를 지켜냈듯이, 한국의 피해자와 연대자들도 정의와 기억을 위한 연대를 지켜낼 것인가.

 

<기쁨의 도시>를 보면 인종주의, 식민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적 성차별의 결합이 얼마나 잔악한 범죄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어느 하나를 자꾸 나머지와 대립시키며 기각하려 하거나, 콩고의 피해자들과도 연대했던 정의연을 민족주의라고 비판하는 갈피도 못 잡는 사람들은 제발 좀 이 피해자들과 연대자들이 만들어온 역사 앞에서 겸허하게, 그들을 존중하고 배우기부터 했으면 좋겠다.

 

수구언론만이 아니라 <경향신문>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다. 언론들이 빅데이터와 인공지능까지 들먹이면서 이재용 선처 '여론'을 만들어내고 있는 상황에서, <경향신문>마저 지난 1달간 이재용보다 윤미향을 다룬 기사를 두배나 더 많이 쏟아낸 상황에서, 이게 과연 어떻게 돌아가는 판이냐는 의문이 들지 않는 것인지, 언론과 대기업 광고주와의 관계의 역사를 '다시 쓰기'하는 기획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인지...

 

문제는 육식주의다

 

https://www.youtube.com/watch?v=boUm_asEhQ4&fbclid=IwAR0f-GKPsAUuYOsM8uly3qQRruOlLlSScYsFXDatpHU2uo7moHI74Yr7KLI

 

멜라니 조이는 항상 문제의 핵심을 명쾌하게 지적한다. 비건이나 채식이 특별한 신념이라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정말로 단단한 신념체계는 바로 육식주의라는 것이다. 육식이 자연스럽고 정당하며 불가피하다는 신념체계는 아주 오래전부터 체계적으로 계속해서 교육되고 주장되고 전파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코로나 발생 과정에서도 중국 우한의 야생동물 시장이 문제로 지목됐는데, 그런 별의별것을 다 먹는 야만적인 식습관이 문제라는 지적들이 나왔다. 그런데 조금만 다시 생각해보면 과연 소나 닭을 먹는 것은 문명적이고 뱀이나 박쥐를 먹는 것은 야만적인 것인지, 어떤 동물은 혐오음식이고 어떤 동물은 좋은 음식인지, 그것은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정하는 것인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결국, 무언가를 자연스럽고 정당하며 불가피하다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억압, 차별, 혐오, 불평등을 유지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기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존재를 타자화, 대상화하는 것과 연결된다. 그런 타자화와 대상화는 그 존재가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생명체라는 것을 삭제하게 된다. 나는 그 누구도 아닌 개별적 나라고 보면서 상대방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당장 며칠 전에도 산책을 하다가 입마개없는 큰 개를 보고 위축됐다가, 한 동지에게 그런 것은 문제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나 큰 개냐 작은 개냐는 기준이 아니고, 어떤 품종의 개냐도 기준이 아니며 개 한 마리 한 마리의 개별적 특성과 양육과정, 반려자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봐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대상화하지 않을 때 공감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해와 공감은 사회정의를 위한 모든 운동의 가장 강력한 기반이다. 이런 선택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배려해 준 많은 분들이 있었기에 지난 몇 년간 어렵게나마 비건지향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별난 사람처럼 바라보고, 까다로운 채식주의자를 봤던 경험을 말하는 분들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면서 설득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데, 동시에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튀고 충돌해야 되는 것, 이것이 모든 사회운동의 딜레마인 것 같다. 그래도 회피하지 않고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 동영상을 공유하고 권하고 싶다


(기사 등록 202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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