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너무 슬픈 세상과 너무 슬픈 사람들
정말 너무나 슬픈 세상이고 슬픈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인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큰 충격 속에 불안과 걱정에 시달렸고, 제발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반나절이 넘는 시간 동안 ‘제발..’을 되뇌었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결국 비극이 전해졌을 때 느꼈을 비통함도 마찬가지다.
동시에 고인의 실종과 죽음이 성폭력 피해호소와 연관돼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많은 사람이 느꼈을 혼란, 당혹감도 마찬가지다. 그 피해자가 겪었을지 모를 고통과 상처에 대한 걱정과 공감도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더구나 이 커다란 비극이 그 피해자에게 가할 엄청난 후폭풍과 새로운 피해를 걱정하는 마음도 절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인의 마지막과 가족들의 심정을 상상하면서 감정이입하는 것이 극히 인간적인 것이라면, 피해를 호소한 사람이 그 반나절과 지금 얼마나 엄청난 지옥 속에 빠져있을지 상상하면서 감정이입하는 것도 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경우, 누구도 비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이고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에서 그런 반응들을 하게 됐을 것이다.
누군가의 잘못에 무조건 돌 던지기보다, 그의 변명과 사정도 살펴보려는 자세가 인간적이라면, 누군가의 피해호소를 무작정 의심, 외면하는 게 아니라 귀 기울이고 공감하려는 자세도 인간적인 것이다. 가해자로서 잘못을 누군가의 인격을 구성하는 다양한 측면과 요소 중의 하나로 보고 다른 장점과 공로도 같이 보는 게 맞다면, 피해자 또한 다양한 측면과 요소를 지닌 전인격적 존재로서 존중해야 마땅할 것이다.
따라서, 너무 과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로의 반응과 입장을 너무 납작하게 만들면서 상처주고 등을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들을 내가 속한 집단과 내가 속하지 않은 집단으로 나누어서 한쪽에는 사랑과 결속만을, 한쪽에는 분노와 혐오만을 던지는 그런 ‘구별짓기’의 회로 작동은 아니면 좋겠다. 그것은 서로 크게 달라 보이지만 결국 동전의 양면과도 같을 수 있다.
고인은 실제로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진보에 여러 기여와 헌신을 한, 많은 이들에게 고마움을 남긴 사람이 분명하다. 하지만, 만약 피해호소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그런 사람도 가부장제와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젠더적 위계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따라서 고인에 대해 단순히 애도만 할 수는 없다는 반응에 대해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이 이렇게 인간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없는 것이냐’라는 비판들은 좀 오해가 있고 설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주 오랜 역사 동안 그 인간적 존중과 공감에서 제외돼 왔던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들도 동등한 인간이고 존중과 공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 페미니즘이기 때문이다. 오래 동안 지워져 왔던 피해자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그 눈으로 세상을 보려는 시도가 반성폭력 운동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은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기에, 누구든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해 왔다.
아무리 인권과 페미니즘적 가치를 중심했던 사람도 얼마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어떤 문제에서는 피해자였던 사람이 어떤 문제에서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주변 사람은, 내가 믿었던 저 괜찮은 사람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보는 것은 위험하다. 나아가, 설사 가해가 드러났다고 해서 누군가에 대한 인간적 존중이 사라질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내가 지지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을 한 사람이라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보는 ‘인류애의 정치’를 말했다. “어떠한 나쁜 행위에 대한 분노는 가해자의 인권에 대한 존중과 양립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를 주의 깊게 구분해서, 그들이 저지른 나쁘거나 유해한 행위를 비난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으로서 그들에 대한 존중은 유지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는 계속 이런 가해와 피해를 만들어내는 사회구조와 문화, 규범을 직시하고 그것을 고쳐나가야 한다. 단지 가해자만 악마화하고 도려내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이런 피해가 재발하지 않을 수 있는 구조, 문화, 규범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 강간’, ‘강간문화’라는 인식에 담긴 문제의식이었다고 이해한다.
가해자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거듭나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 피해자는 치유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화해가 이뤄지고 공동체는 더 건강한 공간으로 발전하는 것... 지금 우리 사회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기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방향보다는 그 반대 방향으로 문제를 끌고 가면서 불신과 갈등을 부추기고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 세력들, 언론들만 많이 보인다. 그래서 더 슬픈 세상이고 슬픈 사람들이다.
● 검찰개혁·언론개혁은 진보 좌파 핵심 의제 돼야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7992
기고한 글이 <미디어오늘>에 실렸다. 이 문제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법무장관의 지휘감독권, 검사의 이의제기권 등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005년에 강정구 교수를 마녀사냥하고 국가보안법으로 구속수사하려던 검찰과 언론에 맞서서 법무장관이 불구속을 지휘한 것은 그것이 정의였기에 지지할만 했다. 거기에 항의하고 사퇴한 검찰총장은 수구기득권의 편에서 불의한 ‘이의제기’를 한 것이었다.
만약에 이번에 검찰이 한명숙 사건조작과 채널에이-한동훈 검언유착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다가 법무장관에게 수사 중단의 지휘를 받았고, 그것에 윤석열이 이의제기를 했다면, 나는 무조건 윤석열의 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윤석열은 수구기득권의 편에서 더러운 조작과 유착을 방어하고 있다. ‘오로지 조직에 충성한다’는 윤석열의 그동안 모든 언행은 오로지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검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우병우 사단에서 윤석열 사단으로 이어져 온 그 검찰수뇌부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아래 글에서 언급한 내란음모사건 조작만이 아니다. 서울시공무원간첩조작 사건을 저지른 것도, 용산참사에서 피해자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도, 그 두 가지 문제에서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고 사과도 거부하고 있는 것도 검찰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덮은 것도 검찰이었는데, 한명숙 사건을 조작한 검사가 지금 세월호 진상규명을 맡고 있는 것도 기막힐 일이다.
그래도 검찰이 공안과 특수는 문제가 많지만 형사는 잘하지 않냐고? 이춘재 사건에서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조작해 20년간 가두고, 그것이 드러난 지금도 사과를 거부하고 있는게 검찰이다. 평범한 서민은 그럴 일이 없으니 ‘검찰개혁은 노동자들이 관심가질 필요가 없는 중산층 개혁과제’라고? 노동조합 투쟁과 산재 사건을 공안검사가 맡아서 재벌기업들을 봐준 게 검찰이다. 온갖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중심적 수사와 기소를 한 것도 검찰이다. 그리고 지난주 <PD수첩>의 ‘검찰과 의사 친구’를 봐라.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이 그것을 멋대로 휘둘러 누구에게 어떤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있는지.
검찰 문제에서 내가 가장 신뢰하는 것은 <PD수첩>과 <뉴스타파>이고, 검찰 출신이지만 내부고발자 구실을 해온 양심적 검사들(대부분 여성들)이다. 그리고 뉴스타파를 볼 때마다 맨 마지막에는 고 리영희 선생의 육성이 나온다. ‘내가 목숨을 걸어서 지키려는 것은 국가, 애국 이런 게 아냐. 오로지 진실이야.’ 모든 것을 떠나서 오로지 진실과 정의의 잣대로 봐야만 한다.
● ‘인국공’ 논란이 보여준 노동운동의 현주소와 갈 길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7872
“이 상황의 뿌리에는 대기업/공공부문의 정규직 일자리라는 ‘좁은 문’을 놓고서 벌어져온 줄 세우기와 극심한 경쟁이 놓여 있다. 이 무한경쟁은 ‘능력이 좋거나 노력을 많이 해서’ 그 울타리 안에 있거나,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배타성을 키웠다. 울타리 밖의 사람들은 ‘머리가 나쁘고 뭔가 뒤떨어진 루저들’이라는 낙인과 열등감의 상처가 깊고, 울타리 안의 사람들은 언제든 밀려날 수 있다는 불안감과 자기 욕심만 채운다는 시선에 대한 수치심이 깊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불신과 갈등은 커지고 ‘좀비언론’과 ‘혐오정치’는 그 틈을 파고든다...
“노동운동이 지금의 위기를 벗어날 사회적 방안을 제시하면서 무엇보다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위해 단결하고 투쟁하며, 실질적 개선을 쟁취할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별 기업에서의 임금과 고용만이 아니라 주택, 교육, 보건, 사회복지와 공공서비스를 위한 투쟁을 통해서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일자리라는 좁은 문을 둘러싼 무한경쟁’을 벗어날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노동운동은 그럴 준비와 능력을 만들어 왔는가? 인천국제공항 논란은 노동운동에게 결코 강 건너 불이 될 수 없다.”
● 수요집회와 정의연을 지키자
얼마전 수요집회에 참가했고 연대 발언 기회까지 얻었다. 너무나 고맙고 소중한 기회를 주신 정의연에 감사드린다. 어제 집회에 참석하고 상황을 살펴보면서 ‘역시 정의연의 지난 30년은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궂은 날씨에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대학생들의 결기에 찬 투쟁 속에 극우혐오세력들은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녀사냥의 몰이꾼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는 것은 정의연에 대한 언급이 부쩍 줄어든 요즘 조중동의 지면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안심하긴 이르다. 저들은 지금 대북전단 문제, 볼턴 회고록 등을 이용해 한반도에서 전쟁을 부추기고, 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 문제를 이용해 청년구직자들의 불만을 선동하고 계급적 분열을 부추기느라 눈에 벌개질 정도로 바빠서 정의연을 공격할 여유가 부족한 것일 수도 있다.
여전히 낙인찍고 혐오하고 마녀사냥할 자유는 넘쳐나고, 그런 몰이꾼들이 더 많은 인기와 클릭수와 돈을 얻지만, 그것에 고통받고 상처받는 사람은 피할 곳이 별로 없고 온몸으로 그것을 다 받아내야 하는 사회에서 앞으로도 또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걱정을 거둘 수 없다. 아래는 수요집회에서 내가 한 발언문이다.
#힘내라정의연 #지키자정의연
참담한 순간입니다.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정의와 기억과 인권과 반전평화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밀려나고, 그것을 파괴하려는 세력이 저 공간을 차지하려 합니다. 온갖 막말, 욕설, 혐오를 배설하는 자들이 소녀상의 옆자리를 침탈하려 합니다.
지난 두 달 동안의 악몽같은 순간들을 돌아봅니다. ‘위안부’ 피해자들과 정의기억연대가 만들어 온 고귀한 시간과 역사적 성과들이 송두리째 짓밟혔습니다. 저들은 구정물과 쓰레기로 가득 찬 늪을 만들어 정의연과 윤미향 의원과 위안부 피해자들을 빠뜨리려고 했습니다.
그 두 달 동안 얼마나 가슴 아프셨나요. 좀비언론의 무릎에 목이 짓눌려 숨이 막힌다는 흐느낌이 들렸습니다. 온 몸이 아프다는 비명과 아우성이 보였습니다. 영혼에 피멍이 들어서, 억울함이 사무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눈물 흘렸을 순간들을 생각합니다. 결국은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고 손영미님을 떠올립니다. 누가 손영미 님을 우리 곁에서 빼앗아 갔습니까.
죄송합니다.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희망을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30년 동안 그렇게 꿋꿋이 역사를 만들고 세상을 바꾸는 동안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였는지, 얼마나 힘을 보태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와서야 그 분들의 땀과 눈물 위에 우리가 여기 서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벌어지는 이 모든 일들은 정의연의 탓도, 윤미향 의원의 잘못도 아닙니다. 오로지 정의와 기억과 인권과 반전평화를 파괴하려고 기회만 노리던 사람들, 좀비언론들, 검찰의 탓이고 책임입니다. 정의연은, 윤미향 의원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정의연의 진심을 믿습니다. 윤미향 의원의 용기를 믿습니다. 믿고 지지하고 함께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주십시오.
지금 정의연을 괴롭히는 진짜 파렴치한 사기꾼 집단에게 경고합니다. 당신들은 정의연과 윤미향 의원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조선일보는 화장실 휴지로도 못쓸 쓰레기가 된지 오래고, 곽상도는 공안조작과 고문수사의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가야 할 사람입니다. 정의연을, 윤미향 의원을, 고 손영미 님을, 김복동 선생님을, 길원옥 선생님을, 이용수 선생님을 더 이상 그 더러운 지면과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아베와 함께 사죄하고 처벌받아야 할 역사의 범죄자들입니다.
정의연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성폭력에 맞서서 힘겨운 투쟁을 해 왔습니다. 이미 누구보다 피해자들에 공감하며 스스로 성찰하고 혁신하면서 전진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 힘으로 반세기 침묵의 벽을 무너뜨리고 세계를 움직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지금의 위기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최근에야 주말에 등산도 가게 됐는데, 출마하면서 그 시간도 사라졌다’는 윤미향 의원의 인터뷰를 봤습니다. ‘의원이 돼도 매주 수요집회에 나오겠다’고 했습니다. ‘일본정부의 사죄를 받고, 고향에 가고싶다는 길원옥 할머니의 소망을 이루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꿈이 이뤄질 때까지, 정의연의 고마운 분들이 웃음과 희망을 되찾고, 다시 사랑과 우정을 나눌 수 있을 때까지, 결국 아베의 사과를 받아낼 때까지, 전쟁없는 세상이 올때까지 기억하고 함께 하겠습니다.
● 정의연 마녀사냥 속에 돌아보는 박유하 논란
요즘 정의연에 대한 마녀사냥과 조리돌림에 숟가락을 얹고, 쏟아지는 돌더미 속에 작은돌 하나라도 같이 던지려는 비겁한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특히 부당하고 사실과도 안 맞는 주장이 있다. ‘몇년 전 박유하 씨가 집중공격당할 때 그것을 도운 정의연과 윤미향이 이제와서 무슨 자격으로 괴롭다며 반발하냐’는 것이다.
일단, 당시에 박유하 씨에게 쏟아진 비판을 지금 정의연과 윤미향 의원에 대한 공격과 단순비교하는 것은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당시에 박유하 씨는 2차가해성 표현들을 담은 책과 주장 때문에 ‘위안부’ 피해당사자들로부터 명예훼손 고소를 당했다. 그러면서 일부 누리꾼들에게 과도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 정의연과 윤미향 의원처럼 수많은 의혹이 쏟아지면서 전사회적 마녀사냥과 조리돌림의 표적이 됐다고 볼 수는 없다.
당시의 수구보수언론들은 박유하 씨를 비난하는 편이 당연히 아니었고, 개혁언론들도 대체로 양쪽의 주장을 다 소개하며 논란으로 접근하는 스탠스였다. 무슨 괴상한 시민단체가 박유하 씨를 고소하고 검찰이 대대적 압수수색에 돌입하고, 기성정당들이 한목소리로 사퇴를 촉구하면서 인생전체와 존재 자체가 탈탈 털리고 부정당하는 그런 일은 없었다.
문제가 된 것은 단지 책과 주장뿐이었고, 박유하 씨의 주장은 당시 수구보수언론이나 박근혜 정부의 입장에서도 동조하고 이용하고 싶은 편에 가까웠다. 물론 피해자들의 고소를 검찰이 기각하지 않아서 기소가 이뤄졌다. 그리고 성범죄 피해자들이 2차가해에 법적소송으로 대응하는 것은 단순하게 잘못이라고 탓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당시에 이용수 님을 포함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박유하 씨를 고소한 것은 부적절했다고 본다. 정의연은 그 고소에 관여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고소를 지지하는 입장도 아니었다고 한다. 고소를 주도한 것은 정의연이 아니라 요즘 내부고발로 문제가 드러난 '나눔의 집'이다. 실제로 박유하 씨에게 매우 비판적인 지식인들(윤정옥, 양현아, 이나영, 강성현, 박노자 등)도 당시에 고소는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발표했었다.
2차가해적 표현에 대한 피해자들의 분노에 공감하면서도 학문적 비판보다 엉뚱한 쟁점으로 번지는(실제로 그렇게 됐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당시에 고소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박유하 씨를 비판하는 글을 따로 쓰지는 않았고, 비판하는 글을 쓰는 동지에게 표현을 좀 완화하자고 제안했던 것도 기억난다.
이미 많은 비판들이 있는데 굳이 덧붙이고 싶지 않았고, 비판을 넘어서 막말과 여혐적 욕설까지 담은 댓글들은 심해 보였기 때문이다. 분명 그런 악성댓글들은 박유하 씨에게 상처가 됐을 것이고, 그 심정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 경험이 공감과 역지사지가 아니라 ‘너희도 한번 더 크게 당해봐라’로 나온다면 기막힐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앞서 말했듯, 지금 정의연과 윤미향 의원은 당시 박유하 씨처럼 정제된 학문적 비판 속에 일부 악성댓글을 겪고 있는 게 아니다. 거의 전 언론이 합심해 온갖 무책임한 의혹들을 쏟아내며 파렴치한 사기꾼 집단으로 낙인찍고 있다. 상식적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상대방을 비판하다가도 일단 멈추고 다음 기회를 보는 게 맞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숨이 넘어가는 사람의 머리를 물 속으로 지그시 눌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박유하 씨는 최근 몇몇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 반대 태도를 취하며 ‘옳다구나’하듯이 정의연과 윤미향 의원에 대한 공격에 가담하고 있다. 씁쓸한 태도가 아닐 수 없는데 그 주장조차 매우 모순적이다. 지금은 박유하 씨가 더욱 분명하게 이 사회 강자와 다수파의 편에서 더 큰 마이크를 잡고 있으니 부담없이 비판하고자 한다.
먼저 박유하 씨는 정의연이 콩고의 피해자들과 연대해 온 것도 비판했다. “'내전 성폭력'과 '위안부'를 같은 것처럼 이해하도록” 했기에 “어떻게 보면 '기만'”이라는 것이다. 정의연이 ‘민족주의’라고 비판해 오더니, 국제적 연대를 한 것은 또 ‘기만’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여기서 박유하 씨는 ‘위안부’를 전시 성폭력의 하나로 보지 않는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또 박유하 씨는 “일본도 잘못을 인정하고 완벽하지 못했을지 모르나 두 번에 걸쳐 사죄하고 보상했다”고 말한다. 진정성이 없어서 피해자들 스스로가 거부한 사과를 ‘두번이나 한 사죄’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처럼 성폭력 피해당사자가 인정하고 받아들인 적이 없는 사과를 계속 ‘이미 사과했다’고 우기는 가해자들을 많이 봐왔고, 그것이 얼마나 피해자들을 고통스럽게 하는지도 봐 왔다.
이같은 박유하 씨의 주장은 ‘정의연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기존 입장과 연결된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정말 침묵을 강요당해 온 것은 일본의 전시 성범죄를 고발하고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목소리였다. 위안소가 국가의 제도적 강간이자 전쟁 무기였다는 고발이다. 그 목소리는 피해자들의 용기와 연대자들의 투쟁 끝에 반세기 넘게 강요당했던 침묵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입을 다물 것을 강요받고 있다.
반면, ‘강제로 끌려간 소녀는 없었고 대부분 자발적으로 돈벌러간 성매매 여성이었다’는, ‘일본은 이미 사과와 보상을 했고 법적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이제는 한일간 화해로 가자’는 목소리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고 보기 어렵다. 떳떳하지 못하거나, 설득력이 없어서 스스로가 위축됐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한국사회의 주류세력에게는 항상 그들의 내심을 반영하는 환영할만한 목소리였다.
따라서 “현재 한일관계 악화 배경에는 위안부 문제가 있다”는 박유하 씨는 과연 누구의 관점에서 어떤 목소리를 삭제하고 어떤 목소리를 복권하려는 것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한미일 동맹과 한일화해의 관점은 보이지만 피해자의 관점은 잘 보이지 않는다. 만약 베트남에서 어느 학자가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과 전시 성폭력에 대해 한국 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면 그게 피해자의 관점이겠는가.
덧붙여, 요즘 정의연 마녀사냥에 동조하는 '노동자연대' 동지들에게도 한마디하고 싶다. '노동자연대'는 거의 특집 수준으로 정의연 비판글과 동영상 강연까지 계속 쏟아내고 있는데, 그 근거는 대부분 수구언론들이 제기하는 의혹들을 기정사실화하는데 바탕하고 있다. 정의연 활동가들의 연봉 수준을 거론하더니, 심지어 고 손영미 소장님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하고 검찰을 변호하는 주장까지 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정의연만이 아니라 고 노회찬 의원도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아니라 부정이 문제였다고 우긴다. 이것이 과연 반자본주의 급진좌파가 취할 태도란 말인가? 90년대, 정치적 차이점을 뛰어넘어 누구보다 앞장서 한총련 마녀사냥에 반대하던 모습으로 나에게 커다란 매력을 줬던 극좌파 조직이 왜 이렇게 급변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재정과 회계의 철저하고 투명한 보고와 공개를 말하며 정의연을 비난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그런 잣대를 적용해 보면 어떨지 의문이 들지도 않는가.
#힘내라정의연
● 사회주의 대중정당 건설의 희망
어제 민주노총에서 ‘사회주의 연합정당 건설의 경로’에 대한 토론이 있었고, 나도 패널 발제자로 초대받아 참석했다. 과거에 사노위(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공동실천위원회)에 대해서 평가하며 교훈을 끌어내는 일종의 논문을 쓴 바 있어서 패널 초청을 받은 것 같다.
이 문제로 오랜 시간 깊이있게 고민, 실천해 온 분들과 토론하면서 고민과 생각을 나눌 수 있어서 의미있는 자리였다. 많은 흥미롭고 검토해볼만한 주장과 지적들이 나와서 자극과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내 생각도 10년 전과는 또 많이 달라져 있어서 더 토론할 지점이 많았다.
그때도 서로 정치, 문화, 전통이 다른 좌파들이 무리하게 정치사상적 통일을 추구하고 행동통일과 규율을 강요하면 분열만 생길 것이라고 봤다. 어제는 나아가 강령과 규율로 무장한 사회주의 정당에 대한 고정관념부터 돌아보자는 이야기를 했다.
그 모델의 기원이라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부터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다양한 좌파들이 토론하고 협력하면서 대중적 노동자 정당을 추구했고, 자율성과 정치적 이견, 토론이 보장된 느슨하고 열린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실은 잊혀지고 오늘날에는 러시아 혁명의 후퇴와 변질 속에서 나타난 모델이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져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00년전 러시아의 활동가들도 대중 속에 함께하며, 다양한 모순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과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선거와 의회에도 개입했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노력이 훨씬 부족하다.
그래서 어제 토론 현장에서는 더욱 그 점을 강조했다. 2010년에도 민주노동당의 분당, 2008년 세계경제위기 상황에서 급진좌파에게 기회가 왔다며 좌파 결집이 성과를 낳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지금도 총선 결과와 코로나 위기를 보면서 급진좌파의 기회라고 하지만, 단순한 좌파 결집으로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 기본소득, 전국민고용보험같은 의제마저 민주당이 가져가는 상황이다. 영국의 코빈이나 미국의 샌더스를 보면 전국민의료보장, 학자금부채 탕감, 최저임금 15달러같은 개별 의제를 넘어서 그것을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담론으로 통합시키며 헤게모니를 얻어갔다.
코로나 이후에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바로 그 일상이 문제였으니’라고들 한다. 오늘날 급진좌파가 직면한 상황도 비슷하다고 본다. 소수파로 주변화되던 상황에 자족하지 않고 대중정치를 향한 발상의 전환, 급진적 상상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순간이다.
(기사 등록 20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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