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이석기 의원을 반드시 석방하라
무려 8년째 감옥에 있는 이석기 의원, 그 동생을 석방하라고 청와대 앞에서 무려 1000일 넘게 1인농성을 해온 누나 이경진 님. 그 이경진 님이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말기암에 걸리셨다고 한다. 그럼에도 동생에게 ‘너가 나올 때까지 무조건 살아있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참혹한 현실에 그저 한없는 슬픔과 분노만 차오른다.
혐오와 차별이 극심한 한국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법이 차별금지법이라면, 반드시 없어져야 하는 법은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은 특정한 사상과 견해를 마음껏 혐오하고 차별할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다양한 혐오를 거부하고 벗어날 자유를 보장해야 할 차별금지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나라에 살면서 홍콩 보안법에 대해서만 뭐라고 하는게 온당한 일일까? 정치적 입장이 다르더라도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짓밟는 것은 잘못이기에 홍콩 보안법을 반대할 것이다. 그런데 홍콩 보안법을 정당하게 비판하며 연대하는 목소리보다 한국의 국가보안법 폐지와 이석기 의원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작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바다 건너의 홍콩 보안법을 비판하는 것은 뭔가 의미있고 멋진 행동처럼 보이는 부담없는 일인데 반해서, 이석기 의원 석방을 요구하는 것은 낡은 좌파나 ‘종북’으로 보일 수 있다는 부담감을 감수해야하는 바로 눈 앞의 일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녀사냥을 핵심 통치수단으로 악용하던 박근혜 정부가 무너지고, 이제 종북몰이도 한물갔다는 상황에서도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것은 ‘혐오감정’의 끈질긴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언론과 국가기구와 거의 전 사회가 달라붙어 만들어낸 낙인과 편견이 ‘혐오감정’을 만들어 냈고 그것이 8년째 남아서 우리 사회와 감옥의 이석기 의원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는 그 끔찍한 경험과 아픔을 녹여서 얼마 전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라는 책을 펴냈다. 깊이있는 탐구와 고민 속에서 나온, 혐오표현과 그것을 규제하고 탈피할 다양한 방안을 담은 이 책을 읽다보니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마지막에 나왔다.
거기서 이정희 전 대표는 종북 혐오표현의 피해자들이 그 마녀사냥을 묵인, 방관했던 다수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탓하기보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까지 비난하고 책임을 물으려 해서는, 이들을 ‘공존할 권리’가 인정되는 사회로 함께 가는 동반자로 만들 수 없다. 새로운 사회로 함께 갈 사람을 모으지 못하면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억울하고 화난다는 감정의 토로에서 벗어나, 그들이 그렇게까지 하도록 만든 힘겨운 시절이었으니 이제 함께 세상을 바꾸자는 결론으로 가볼 수는 없을까.”
상처를 딛고서 더 넓고 높은 곳으로 나아가려는 안간힘이 느껴져 미안하고도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사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 시절 그 대대적 종북몰이의 쓰나미에 직면해 위축되면서 선을 긋고 거리를 뒀던 나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 속에서 내란음모 조작은 성공했고 이석기 의원은 구속됐고 통합진보당은 강제해산 당했다.
그래서 더 이상 이석기 의원의 지지자와 친한 동료들과 입장이 비슷한 정치세력과 일부 종교인, 인권단체들만이 외롭게 ‘이석기 의원 석방’을 외치는 그런 장면은 그만보고 싶다. 그 외롭고 오랜 외침 속에 사무치던 서러움이 결국 이경진 님에게 말기암을 가져다 줬을 것이다.
이제, 이석기 의원과 가깝지 않았던 사람들, 입장이 다른 사람들, 종북몰이의 직접적 표적이 아니었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사람들이 앞장서서 ‘이석기 의원 석방’을 외쳐야 한다. 특히 종북몰이가 휘몰아치는 과정에서 서로간에 큰 상처와 불신, 갈등이 남게된 정의당 등에서 먼저 그런 목소리가 나오길 기대한다.
그 아픔과 트라우마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이것저것 따지기보다 거침없이 나서는 장혜영, 류호정 의원같은 새로운 세대가 앞장서주길 기대한다. 그것 또한 정의당 혁신의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용기있는 한걸음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정치적 견해와 사상에 따른 가장 극심한 형태의 차별에 반대하는 것은 정의당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의 정신에도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이다.
민주당의 진보개혁적 의원들이나 민주당 지지자들 속에서도 그런 목소리가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저 강고한 보수카르텔(언론-검찰-우파)의 대대적인 낙인찍기, 몰아가기와 ‘죽을 때까지 찌르기’는 사실 조국몰이 때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명박근혜 시절의 종북몰이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고 더욱 더 대대적이고 악랄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무기력하게 방관하거나, 비겁하게 동조한 결과가 지금 상황일지 모른다.
아마 ‘그보다 먼저 노무현, 한명숙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 나타난 양상들이고 그때 좌파들도 동조한 거 아니냐’고 되물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먼저였고, 누가 더 서운하고 상처받았을까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론, 검찰, 국정원, 사법부, 정부, 거의 모든 정당이 합심해서 낙인찍고 마녀사냥하고 심지어 시민사회와 일부 진보진영까지도 방관한 속에서 감옥에 간 사람이 8년이 지난 지금도 갇혀있다는 것이다. 동생을 석방하라고 절규하던 누나는 말기암에 걸려서 살 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 나서서 그의 석방을 요구해야 하고, 문재인 정부는 당장 이석기 의원을 사면하고 석방해야 한다. 물론 이번 8.15 때 이석기 의원을 사면하고 석방하면 수구언론, 미통당과 보수적 여론은 하늘이 무너진 듯이 난리칠 것이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더 한층의 대대적인 공격을 할 것이다. ‘역시 적과 내통하는 사회주의 정권’이라고 우길 것이다. 하지만, 총선에서 180석의 거대여당이 되고도 그런 공격이 무서워서 눈치보고 타협하면서, 도대체 무슨 개혁을 한다고 믿어달라고 한 것인가.
● 박원순의 비극과 성폭력 사건 - 누구의 눈으로 볼 것인가
다시 돌아봐도 고 박원순 시장 실종과 사망 과정에서 많은 언론과 유튜브 방송들이 보여준 모습은 끔찍했다. 당시 충격 속에서도 복잡하고 애타는 심경으로 언론 보도를 찾아보며 느낀 것은 ‘조회수를 높일 좋은 기회가 열렸다’는 흥분과 기대였다. 속보와 단독 경쟁 속에 8시간 동안 2천400건의 관련기사가 생산됐고, 온갖 자극적인 기사와 오보들이 쏟아졌다. 특히 사망 오보들은 실제로 사망을 기대하는 듯한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자살과 성폭력에 대한 보도준칙들은 지켜지지 않았고,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이게 살을 붙이고 제목을 달아서 클릭장사에 나섰다. 자살의 구체적 방법과 주검의 상태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과 시신의 운반 장면까지 생중계로 나왔다. 그런 기사들에 달린 수많은 광고들과 방송 도중 유튜버들의 슈퍼챗 홍보는 잔인하게만 보였다.
특히 심각한 것은 많은 언론과 기사들이 양극단의 반응이나 발언들을 부각하고 불필요하게 세부적인 내용을 보도하면서 논란과 대립, 2차피해들을 유발하며 진영간 갈등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양태였다. 그것은 이 사안을 지나치게 정쟁화하면서 피해자(고소인), 고인(피의자), 유가족 모두를 존중하지도, 도움이 되지도 않는 방식이었다.
지금도 수구언론과 우파 정치세력들은 죽음과 성폭력 사건까지 클릭장사와 정적 공격의 수단삼는 태도가 노골적이다. 이들이 ‘피해자 중심주의를 수호하고 2차가해를 철저히 방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에서 진정성보다는 기가 막힌다는 생각만 드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그저 고인과 민주당을 괴물로 만드는데 열심이다. 자신들이 그 중요한 일부인 성폭력적 사회구조,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별 고민과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성폭력을 일부 괴물같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문제로, 따라서 그들만 단죄하고 도려내면 되는 문제로 보는 것은 저들만이 아니다. 그 정반대편에서 고인을 적극 옹호하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이들도 사실은 같은 늪에 발을 걸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성푹력 가해자는 괴물인데, 우리가 존경하던 고인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태도가 느껴지는 것이다.
성차별적 사회구조,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에서 아무리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던 진보적 정치인도 얼마든지 가해자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미투운동 초기에 안희정 사건에서 특히 반발과 백래시가 심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미투에 호응하여 위드유를 외치던 사람들도, 진보적이고 성평등을 주장하던 안희정이 가해자로 드러나자 총격과 혼란을 느끼는 듯 했다.
피해자(김지은)가 박근혜 정부 시절부터 공무원이었던 것을 근거로 보수진영의 정치적 음모라는 제기도 나왔다. 이것은 타인이나 경쟁진영(세력)의 잘못과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진영(세력)의 잘못과 문제를 객관화해서 직시하고 엄격하게 비판하는 게 훨씬 더 어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준다.
남을 욕하기보다 자신을 성찰하는 게, 멀리있는 가해자를 비난하기보다 가까이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가해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언제나 더 어렵다. 그래서 운동사회 내에서도 성폭력 사건은 항상 해결이 어렵고 불신과 갈등으로 연결돼 온 것이 사실이다. 나 자신도 성폭력 사건에 대한 노동자연대 지도부의 잘못된 대응을 강하게 비판해 왔지만,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사건이 벌어질 때 항상 잘 대처해 왔고, 대처할 것이라고 자신하진 못한다.
그럼에도 그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지금, 일부 사람들이 보이는 부적절한 태도에 대해 지적할 수 있는 것들은 있다. 피해자의 변호인과 지원 여성단체들을 비난하고 이 사건과 상관없는 과거 전력까지 끌고 와 문제삼는 것은 피해자의 입을 막는 것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변호인과 여성단체들이 불순한 의도로 피해자를 이용한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피해자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성폭력 사건의 해결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들은 대부분 2차피해를 주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다. 1차피해가 확실하지 않은데 무슨 2차피해냐는 반론은 옳지 않다. 대부분의 2차가해가 바로 ‘그게 무슨 성폭력이냐, 당신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논리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 호소를 무조건 불신하며 불순한 의도로 몰고 신상을 파헤치는 것이 바로 전형적인 2차가해다. 내가 맞서온 노동자연대 지도부의 잘못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들은 피해자의 호소를 불신하면서 거짓말쟁이, 정신이상자, 불순한 의도와 공작으로 몰았고 평판과 행실을 문제삼았다. 노동자연대 지도부를 비판한 많은 여성단체들도 피해자의 주장만을 근거로 원사건 자체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하지는 않았다. 피해자를 괴롭히고 공격하는 것 자체가 가해이고 잘못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따라서 2차피해를 일으키는 모든 사람을 가해자로 단죄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우리 모두가 2차피해를 주의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또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2차가해를 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 변호사와 지원 여성단체들이 피해자의 말만 믿고 고인을 가해자로 몬다고 불평하는 것도 억지스럽다. 피해 사실과 증거를 갖고 찾아온 사람의 말을 듣고 변호를 맡은 사람들이 피해자의 편에서 주장하고 피해가 사실임을 입증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경찰 조사 등이 진행 중인데 피의사실과 증거를 공개하라고 압박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동안 우리가 언론-검찰의 피의사실 유포를 비판했던 것에 비추어도 그렇다.
또 검찰개혁, 언론개혁 문제에서 오래동안 그것을 연구하고 투쟁해 온 여러 (남성)전문가들의 분석과 주장을 신뢰하듯이, 성폭력 문제에서도 오랜 경험과 연구를 해 온 여성단체들을 신뢰하는 게 합리적이다. 이 여성단체들이 충분한 근거나 확인도 없이 성폭력 사건을 판단하고, 나쁜 의도를 가지고 고인과 민주당을 공격하기위해 이 사건을 이용하고 있을까? 전혀 설득력도 없고 상상도 가지 않는 이야기이다.
물론, 수구언론과 미통당 등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이 사안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고, 어떤 인간적 존중도 없이 고인을 괴물과 악마로 만들어버리면서 불신과 갈등을 부추기려 애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피해자의 변호인과 여성단체들도 그것을 돕고 있는 허수아비들로 몰아갈 이유나 불신과 갈등 조장에 호응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것은 마치 검찰이 라임, 옵티머스 사태를 정부 공격의 카드로 이용하려 한다는 이유로, 그 사건들에 실제 연루된 민주당 인사의 비리와 잘못을 부정하는 것처럼 잘못된 일일 것이다. 서울시와 민주당도 ‘2차가해는 안 되고 피해자에 공감하고 위로를 전한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그런 태도는 전혀 바람직하지도,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미투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큰 변화가 없는 현실을 함께 돌아보고 성찰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왜 여전히 성폭력 사건에서는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더 많은 의심과 질문이 쏟아지는지, 피해자는 무엇이든 다 답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지, 여성의 고통과 상처보다 남성의 명예와 커리어가 더 중요시되는지 물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생을 걸 각오 없이는 누구도 쉽게 피해를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성폭력 사건을 신고율, 기소율, 유죄 판결 비율도 가장 낮은 범죄로 만들고 있는 이유이고, 범죄 신고라는 상식이 ‘(미투)혁명’으로까지 불리게 된 이유다. 그리고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왜곡된 비판들을 쉽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의 경험과 성과로부터 배우려고 해야 한다. 예컨대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 절대주의’라는 노동자연대 지도부 식의 왜곡과 곡해가 대표적이다.
“사람들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다음과 같이 오해하고 있다. 첫째, 피해자에게 사건에 대한 판단기준 전체를 위임하기. 둘째, 피해자에게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 셋째, 피해자에게 피해 경험을 해석할 수 있도록 하기. 세 가지 모두 사실이 아니다.” “피해자의 주관적 느낌이 유일한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피해자는 당연히 자신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해석할 권리가 있지만 그 경험을 공론의 영역으로 가져올 때는 정당화의 의무를 지게 된다. 페미니즘은 그 정당화 과정에서 해석 투쟁에 연대하는 언어이지, 무조건 편을 들어주는 언어가 아니다.(<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피해자 중심주의는 다만 어떤 불편함과 위력은 젠더위계와 사회적 직위가 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거나 별개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이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 잘 보인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서울시 최고위직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말단 하급직원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고 있는가.
“피해자의 말이 무조건 옳다거나 어쨌든 여자 편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역사 속에 피해 경험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왔으므로, 성희롱 피해에 대한 판단은 남성에 비해 여성의 위치에서, 상사에 비해 신입 직원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편이 더 정의롭고 합리적일 것이라는 뜻이다.”(위의 책)
그러한 관점에서 진상을 규명하고, 더 나아가 왜 이러한 위계와 위력이 나타났는지 그 구조를 드러내 더 이상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도 왜 공직사회에서 ‘상사의 심기보좌와 의전’이 하급(여성)직원들의 업무로 고착해 돼 왔고, 문제제기와 시정조치는 가로막혔던 것인지를 밝히고 개선해야 하는 것이다.
성폭력은 그 어떤 사안보다도 더 단지 악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이고 따라서 “가해자 처벌로만 갈등을 다룰 때, 가해자의 처벌이 끝난 자리에는 또 다른 가해자가 들어올 것이며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위의 책)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를 괴물로 만들어 잘라내는 것은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의 관심도 목표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나같은 피해자가 없었으면 한다’는 희망은 ‘더 이상 당신같은 가해자가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는 희망이기도 하다. 남성중심적 가부장제 사회를 변혁해서 우리 모두를 위한 신뢰와 정의를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지금 더욱 더 많은 페미니즘, 반성폭력 운동, 미투와 위드유가 필요하다.
● 필요한 것은 의심과 비난이 아니라 존중과 경청이다
피해자(고소인)의 입장을 다시 읽는다. “긴 침묵의 시간, 홀로 많이 힘들고 아팠습니다... 그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힘들다고 울부짖고 싶었습니다.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인간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와 제 가족의 보통의 일상과 안전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피해자는 고인을 저주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고통을 말하고 싶었고, 오히려 사과받고 용서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용서할 기회를 얻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수많은 피해자들이 절실히 바라는 바다. 누군가를 계속 미워하는 것처럼 힘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또 힘든 것은 자신의 피해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물어야 할 것은 왜 4년 동안 침묵했냐가 아니라, 4년 동안이나 얼마나 힘들었느냐, 무엇이 침묵을 강요했냐는 것이다.
레베카 솔닛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발언할 권리는 우리의 생존과 존엄과 자유에 기본이 되는 조건”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남성중심적 가부장제에서 여성들은 이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기 어렵다. “여자들은 지금도 그들이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믿음직한 증인이 못 된다는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며, 현재는 물론이거니와 미래에도 영영 진실은 그들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는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솔닛은 나아가 침묵을 구성하는 3가지 동심원을 지적했다.
“첫 번째는 말하기를 어렵게 만들거나 심지어 불가능하게 만드는 내면의 억제, 자기의심, 억압, 혼란, 수치심, 말하면 행여 처벌이나 추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다음 원은 기어이 말하고 나선 사람을 침묵시키려는 세력들이다... 마지막으로 제일 바깥을 둘러싼 원에는, 설령 이야기가 말해지고 화자가 직접적으로 침묵을 강요당하지 않은 경우라도, 이야기와 화자의 신빙성을 깎아내리려는 세력이 있다. 여성이 성범죄에 대해서 입을 연 순간이야말로 그녀의 말할 권리와 말할 능력이 가장 심하게 공격당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남자의 비행에 관해서 뭔가 불편한 말을 할라치면, 사람들은 으레 그녀를 망상에 빠진 인간, 사악한 음모론자, 병적인 거짓말쟁이, 혹은 그 모두에 해당하는 인간으로 묘사한다.”
아주 어렵고 힘겹고 고통스럽게 이 침묵의 동심원이 일부라도 깨진 이 순간, 필요한 것은 의심과 비난이 아니라 존중과 경청이다. 검증, 사실 확인, 진상 규명도 이런 자세를 바탕으로 할 때 가장 효과적이고 협력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무조건적인 의심, 불신과 비난은 반발과 갈등만 낳으며 이 모든 과정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여러번 목격해 왔다. 대표적으로 최근에 나를 명예훼손 역고소한 ‘노동자연대’ 지도부는, 안타깝게도 처음부터 성폭력 피해호소를 불신하고 비난하며 새로운 가해를 끝없이 쌓아올려 왔다.
물론, 피해자도 완벽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제기 과정이 서툴렀고 부족했고 아쉬운 부분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완벽하게 준비해서 빈틈없고 딱 떨어지게 문제제기하는 피해자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불쌍하고 무조건 믿어주고 도와줘야 하는 사람으로 피해자화하고 타자화하자는 게 아니다. 적어도, 우리 사회의 어디서 무엇이 곪고 있는지 일깨워준 사람으로 존중하고 그 커다란 용기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찰과 연대를 통해서 이것을 새로운 전환의 계기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따라서 피해자에게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내 자신부터 돌아보면서 우리 사회를 함께 바꿔나가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답해야 한다. 특히 고인과 가까웠고 고인을 존경하던 사람들일수록 더욱 앞장서 그래야 한다. 피해자의 호소를 보면, 믿었던 그들에게 기대에 어긋난 반응을 접하고 상처받은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상처는 신뢰의 회복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또, 누군가를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약점과 잘못이 드러나더라도, 그것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직시하고 그것을 넘어서려고 노력해야 한다.
지금은 거친 말로 공격하고, 상대가 아파하는 것을 보면서 헛된 승리감을 느끼려 할 때가 아니다. 신이 나서 ‘클릭수를 올리고 경쟁자를 공격할 장이 열렸다’는 자세로 온갖 자극적인 글들을 쏟아내는 언론, 댓글들에 휘둘릴 때도 아니다. 지켜보고 기다려주면서 무엇이 힘들고 아팠는지 귀를 기울일 때다. 말하기보다 들어야 하고, 말을 할 때도 최대한 섬세하게 이것 저것을 따져서 입을 열어야 한다. 그것을 포기할 때 말은 칼이 되곤 한다.
나와 생각이 많은 부분 다를 수밖에 없고, 크게 엇갈릴 때도 있지만, 결국은 우리가 함께 이 세상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역사는 차별과 혐오와 편견에 물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결국,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번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상처를 겪었다. 그것은 기쁨과 행복만큼이나 인간적인 것이고 우리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소설가 김비 님은 “어떤 감정과 고통도 그 순간은 결국 지나가고 한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인간을 성장시킨다”고 했다.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 더 평등하고 해방된 사회를 향해 조금씩 나가는 것처럼 숭고한 일도 없을 것이다.
● 누가 부동산 불패 신화를 지키려 하는가
요즘 부동산 이슈에 대한 조중동과 미통당의 주장들을 보면 기괴한 갈등과 모순이 드러난다. 한편으로 이 문제로 분노하는 무주택 서민들의 입장에서 선동하며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고 공격하면서, 동시에 땅부자, 집부자들이자 다주택 투기꾼의 대변자로서의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모습 말이다. 그래서 문정부 고위인사들의 2주택을 비난하다가 자기들의 2주택을 지적하면 ‘사유재산을 부정하냐’고 화내는, 집값 폭등을 잡으라고 호통치다가 종부세 인상에는 세금폭탄이라고 난리치는 이율배반을 보여 준다.
물론 이들의 본심은 부동산 폭등이 계속되고, 투기적 이익이 보장돼야 한다는 데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총선 때 미통당의 핵심 공약은 주택담보 대출 완화와 부동산 세금 인하였다. 조선일보는 ‘땅집고’라는 부동산포털을 운영하면서 지금도 투기를 조장하고 부동산으로 돈 버는 법을 알려주는데 열심이다. 즉 문정부 3년간 집값 폭등으로 자신들의 불로소득이 늘어난 것이 즐겁고, 그 때문에 문정부가 욕먹는 것도 기분 좋지만, 투기를 규제하거나 세금을 올리려는 시도는 싫다는 것이다.
상위 1%가 50%의 토지를, 상위 10%가 95%의 토지를 소유하고, 매년 400조의 부동산 불로소득을 얻고 있다는 이 ‘부동산 불패’ 공화국에서, 이 진짜 권력자들이 언론, 정부, 의회, 국가기구들에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이명박근혜 때는 이들을 위한 ‘부동산 투기와 돈벌기 좋은’ 정책이 아주 노골적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와 경기침체 때문에도 두 정부는 건설경기 부양에 매달렸다. 재벌과 부자들 지갑에 돈은 넘쳐나는데 초저금리에 예금 유인은 적고, 경제위기로 투자는 꺼려지고, 부동산 투기는 실패할 리 없고, 정부과 의회가 나서서 규제를 완화하고 길을 열어주니 거품이 커지는 것은 당연했다.
돈많은 자들만 ‘줍줍’하면서 투기적 이익을 즐긴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는 이 소용돌이에 수많은 보통 사람들도 끌어들였다. 저임금, 저복지, 노후불안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들이 주택담보대출, 신용대출, 사금융, ‘부모 찬스’까지 그야말로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이 흐름에 올라탔다. 문정부의 정책들이 다양한 측면의 반발과 불만에 부딪히고, 잘 먹히지 않는 것은 이 때문도 있다. 더구나 문정부는 거품이 더 커지는 것을 걱정하면서도, 그렇다고 너무 갑자기 꺼지는 것도 피하려고 했다. 재벌, 부자, 관료들과 타협도 했다. 정면돌파보다는 ‘핀셋규제’로 비켜가면서, 풍선효과가 나타났고 규제가 늘어날수록 관료들의 권한과 장난질도 늘어났다. 더구나 미통당은 부동산 투기를 규제하는 어떤 법과 제도의 도입도 막아섰다.
부동산 투기와 불로소득을 없애는 여러 방법은 이미 다 나와있다. 관련 세금 인상/ 분양원가 공개/ 분양가 상한제/ 공시지가 인상/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 임대차보호3법 통과/ 임대사업자 특혜 폐지/ 대출 회수 ... 물론 이것은 거품을 꺼트리며 주택담보 대출, 가계부채라는 뇌관을 건드릴 것이고 은행, 기업, 경제에 연쇄적인 충격과 타격을 가할 수 있다. 그러면 단지 집,땅부자들만 아니라, 빚내서 집을 사고 힘겹게 이자를 갚고 있던 사람들과 무고한 서민들까지 피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최배근 교수는 이런 피해와 역풍도 방지할 대안이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은행이 주택금융공사를 통해 그러한 가계부채들을 인수하고 장기임대주택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돈없는 사람도 당장의 파산을 면하고 낮은 임대료를 내면서 주거를 유지할 수 있다. 일종의 ‘민중을 위한 양적완화’라 할 수 있다. 이런 더 급진적 방안들을 채택하며 부동산을 사유재산과 시장논리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코로나 기간에 마스크에 대한 공적공급과 통제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나 필요하고 생존에 필수적인 마스크를 돈벌이에 맡길 이유가 없다는 게 명백했다. 집과 주거에 이것이 적용돼지 말아야 할 어떤 이유가 있을까.
노동운동은 부문의 경제투쟁을 벗어나 이런 방향과 요구를 위해 힘을 모으고 투쟁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사회적 합의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 코로나 시대 노동운동이 이처럼 사회정치적 요구와 투쟁에 나서야 하고, 노조 울타리 밖의 더 열악한 이들을 위해 앞장서 싸워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바인 것 같다. 자본과 정부가 알아서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리가 없다는 것에도 모두 공감하고 있다.
협상을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지만, 투쟁이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논의는 생산적 방향이 아니라 서로를 불신하고 비난하는 파괴적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어떤 결정이 나오든 코로나 시대에 또다시 부문별 경제투쟁과 각개약진으로 대응하면서 노조 울타리 밖의 사람들이 외면받는 결과만은 절대 피해야 한다. 논쟁 속에서 어떤 방안이 옳다고 주장했어도, 결정 이후에는 이것을 위해서 모두 힘을 모으고, 투쟁과 실천 속에서 그 진정성을 입증해 나가길 기대한다.
● 백선엽을 애도하기 어려운 이유
그것이 누구이든 죽음 앞에서는 조심스럽고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한때 독재자나 악명높은 우익 정치인의 죽음에는 기뻐하고 축하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예컨대 레이건이나 대처의 죽음에 대해 그랬다. 전두환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타고난 악마나 괴물은 아니고 그저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된 요즘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결국은 인간이고 생명이니 말이다. 어떤 생명도 함부로 끊어져서는 안 된다고 보기에 많은 사람이 사형제에 반대할 것이다. 죽어 마땅한 자들은 다 사형시키고, 억울한 사람만 구하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악랄한 살인범이 사형수로 나오는 영화 ‘데드맨 워킹’은 그것을 고민하게 한다.) 더구나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사랑하던 가족과 지인들이 있을 수 있기에, 누구든 그 죽음을 기억하고 슬퍼할 수 있다. 그 슬픔을 무조건 비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죽음을 애도하고, 예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너무 많은 이에게 너무 많은 고통을 주었던, ‘공’보다 ‘과’가 많았던 이의 죽음은 그러기가 어렵다. 백선엽의 경우가 그렇다. 그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는 사람들과 그 감정을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 애도와 추모가 진실에 대한 외면, 백선엽이 남긴 고통과 상처에 대한 외면에 바탕해 있다면 그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선엽은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일제시대에 독립군을 토벌한 책임자로서 커다란 ‘과’를 쌓았다. 그런 ‘과’가 있지만 한국전쟁에서 그것을 넘어설 큰 ‘공’을 세웠다는 반론에 대해서도 동의하기 어렵다. 한국전쟁에서의 ‘활약’은 그의 ‘공’이 아니라 ‘과’로 포함돼야 한다. 반전평화의 관점에서 전쟁에서의 ‘활약과 공로’는 결국 많은 인명살상을 뜻한다는 것만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전쟁에서의 ‘공로’를 말하려면 먼저 그 전쟁의 성격부터 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첫째, 한반도에서 계급적 내전이라는 측면, 둘째, 민족해방 전쟁이라는 측면, 셋째, 냉전의 시작과 함께한 강대국들의 국제 대리전이라는 복합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백선엽은 피억압 민중, 피억압 민족, 약소국의 편에서 전쟁을 수행한 게 아니라 그 정반대편에 있었다. 더구나 엄청난 민간인 학살을 수반한 이 불의한 전쟁에서 백선엽의 부대는 양민 학살과 전시 성범죄들까지 저질렀다.
따라서 백선엽이 ‘한국군의 뿌리이고 아버지’라는 것도 결코 그의 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 폭력기구(군대와 경찰)의 뿌리가 일제시대 억압기구에서 비롯돼 한국전쟁에서 구체적 골격을 갖추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이것은 나중에 백선엽이 군사독재 정권들에서 승승장구하며 독재를 뒷받침하고, 동시에 사학비리나 부동산 투기에 적극 관여해 수천억 원의 자산가가 된 과정과도 긴밀히 연결돼 있다.
백선엽은 이런 과에 대해서 한번도 반성하거나 그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적이 없다. 최근 노영희 변호사는 이런 측면의 아주 일부를 지적했다. 그래서 엄청난 비난과 악플, 괴롭힘에 시달리다가 결국 라디오 진행까지 하차하게 됐다. 수구언론들은 백선엽과 박원순에 대한 철저한 이중잣대와 선택적 정의를 보여주며 백선엽 영웅 만들기에 열심이다. ‘영웅을 이렇게 성의없이 보낼 수 있냐’며 정부를 욕하고, ‘대전이 아니라 서울 현충원에 모시라’고 난리다.
그러나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결국 역사의 정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니, 고인의 주변인과 후손들에게도 이들은 못할 짓을 하는 셈이다. 문제는 신전대협, 나라지킴이고교연합 등의 청년(신)우파들이 광화문에 백선엽 분향소를 차리고 ‘자발’적으로 참배하며 ‘구국의 영웅’, ‘장군의 뜻’을 말하더라는 것이다. 1만 명이 넘었다는, 젊은 남성들이 드물지 않게 보이는 그 참배 대열을 보면서 박원순 애도 논란에서와는 달리, 큰 우려와 불길함을 느끼게 된다.
(기사 등록 202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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