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요즘 몇 가지 쟁점들에 대한 생각들
한국사회처럼 수많은 쟁점들이 매일매일 쏟아지는 곳도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것에 관심을 두고 추적하며 입장을 정리해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선택하게 되는데 최근 뭔가 다루고 싶었던 3가지 문제가 있었다. ‘저널리즘토크쇼J’(저리톡)와 김어준 비판 논란/ 연관해서 피해자의 기억과 증언에 대한 관점/ 민주당의 금태섭 징계 논란이 그것이다.
먼저 저리톡은 얼마전 정의연 마녀사냥 문제를 잘 다루었는데, 그러면서 이에 대한 김어준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그러자 시청자들의 비판이 쏟아졌고, 일종의 해명을 하게 됐다. 일단 나는 시청자들의 비판이 너무 과하다고 본다. 왜냐면 저리톡은 지금의 언론 환경에서 없어서는 안될 보석같고, 애청자로서 보자면 훌륭한 패널들이 내실있는 방송들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날 방송도 정의연에 대한 언론의 조리돌림과 몰아가기를 조목조목 잘 폭로하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이용수에게 오염된 정보를 전달한 것이 누구인가’라는 김어준의 주장에 대해서도 나름 쓴소리를 한 것이다. 따라서 저리톡 방송 전체에서 그 부분만 떼어내 과하게 비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물론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왜 조중동이 아니라 김어준을 까느냐’는 유치한 수준의 진영론 때문에 반발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보다는 비판의 내용이 설득력이 없고 기계적 균형처럼 보였다는 지적이라는 것이다. 그 지적도 일리는 있지만, 굳이 지적하자면 핵심은 저리톡이 비판을 풀어가면서 뭔가를 빼먹은 것에 있다고 본다.
그것은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모든 언론이 검증하지 않고 무책임한 의혹만 쏟아내는 상황에서, 거의 유일하게 다른 목소리를 내며 검증을 시도한 김어준’에 대한 인정이었다. 이것은 김어준에 대한 정치적 호불호나 다른 쟁점에 대한 김어준과의 동의 여부와 무관한 것이다. 이런 인정을 바탕으로 비판을 시도했다면 뭔가 공정하지 않다는 시청자들의 느낌은 더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본다.
둘째, 연관해서 ‘피해자의 기억과 증언을 문제삼는 방식은 위안부 운동의 존립근거도 흔들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어느 정도 일리 있다. 특히 역사부정론자들이 바로 피해자의 기억과 증언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더 그렇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 ‘피해자중심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이자 일면적 해석이라고 본다.
피해자중심주의는 과연 피해자의 기억과 증언을 무조건 신뢰하고 의심하지 않고 문제제기 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그러면 기억력이 좋고 일상에서도 신뢰할만한 사람만 피해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게 될 수 있다. 피해자가 이후 살아가면서 기억의 오류를 드러내거나 인격적 결함과 문제점을 드러내면, 과거의 피해증언도 의심받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기억력이 좋지 않거나, 인생을 통해서 많은 잘못을 범하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도 얼마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그 피해증언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심지어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나아가 일본정부의 문제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기억과 증언을 무조건 수용하지 않는데 있지 않다. 기억과 증언만이 아니라 기록과 증거로 뒷받침되는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게 진짜 문제다.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한 책 <아주 특별한 용기>에서도 ‘사람의 기억은 부정확하고 왜곡, 편집, 망각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으로 피해자를 공격할 이유도, 피해자가 스스로 자책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억과 증언을, 기록과 증거, 구체적 정황과 맥락에 비추어 검증하고 종합하는 것이다. 그 검증과 종합이 가해자보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이뤄져야 하고, 피해자를 의심하기보다 존중하면서 주체로 인정하자는 게 피해자중심주의의 합리적 핵심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김어준의 문제는 이용수님의 주장을 그 자체로 비판하는 게 아니라 ‘오염된 정보를 전달한 3자’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이라는 데 있었다. 그것은 입증할 수 없는 문제였고, 진정한 쟁점을 흐리며 엉뚱한 논란만 낳았다.
셋째, 마지막으로 금태섭 의원 징계 논란이다. 먼저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금태섭 의원에 대해서도 평가는 단순할 수 없다. 퀴어파레이드에 참석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에 적극적이던 금태섭 의원의 장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수사과정에서 묵비의 중요성’에 대한 금위원의 과거글은 공안탄압에 맞서던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됐었다.
다만 검찰개혁과 공수처에 대한 금의원의 입장은 동의할 수 없다. 검찰 출신이라 그렇다는 식의 인신공격이 아니라 논리적, 정치적으로 비판이 가능하며, 모순과 허점이 너무 많은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역사적 맥락 때문에 검찰개혁과 공수처는 민주당에게는 거의 강령에 가까운 문제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꽤 오랫동안 토론과 공방이 진행됐다.
그 결과로 이것은 민주당에서 아주 드물게 정해진다는 ‘강제당론’(모든 당론이 그렇진 않다)이 됐다. 금의원은 이것을 어겨서 당원들의 징계 요구가 많았고, 결국 가장 낮은 징계를 받았다. 즉 지도부가 위에서 찍어누른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당원들의 제기였다는 설명이다. 공수처에 대한 다수 당원과 다른 의원들의 ‘소신’도 존재했고 작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소신과 당론의 대립’으로만 보는 기성언론들의 관점은 부정확하고 부실하다. 특히, 민주적 토론과 건강한 공론장을 파괴하기만 해온 수구언론 등이 그럴 때는 참고 들어주기 어렵다. 상당한 토론 끝에 결정된 문제에서는 행동통일이 중요하고, 그것을 어기는 것은 징계, 제재받아 마땅하다는 게 좌파의 오랜 견해기도 했다.
일부 좌파는 이것을 ‘레닌주의적 민주집중제’라며 옹호해 왔다. 좌파조직의 회원이 외부에서 자신의 조직과 결정을 비판하거나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게 금기시돼 왔다. 형식적 토론과 다수결 이후에는 이견을 입막고 징계, 축출해버리는 경직성도 나타나 왔다. 이견과 토론을 허용하는 수준이, 기성정당들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결국 이런 ‘민주집중제’에 동의하지 않기에 나는 금의원 징계에도 반대한다. 이것은 결국 이견에 대한 제기와 토론을 가로막는 효과를 낼 수밖에 없다. 이견 제시와 토론은 어떤 순간에도 제한되지 말아야 한다. 민주적 토론만이 무엇이 더 효과적인 길인지 알아내고 검증할 최고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토론 끝에 다수결로 결정된 것이라도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그에게는 따르지 않을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진정으로 동의할 때 행동할 수 있고, 그럴 때만 효과적인 행동통일도 가능하다. 내가 오늘도 기사를 올리고 번역을 하는 것은, 내가 속한 단체에서 다수결로 결정해서도, 징계를 피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내 스스로가 그것이 필요하다고 설득됐고 동의하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검찰개혁과 공수처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더 많은 주장과 토론이다. 그런 토론만이 더 나은 답을 찾게 해 줄 것이고, 더 많은 사람을 설득해서 그 길에 동참하게 할 것이다. 징계는, 그것이 아무리 가벼운 수준이라도 그 토론을 어렵게 하고 ‘소신과 당론의 대립’이라는 식의 엉뚱한 쟁점으로 시선을 돌리게만 할 것이다.
● 악의에 찬 이들의 고함과 선한 이들의 침묵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7567
<미디어오늘>에서 실어주셨다. 수구언론과 그들을 따라가는 언론들의 정의연 죽이기 보도는 양상이 바뀌고 있다. 이제 시민사회단체와 사회운동이 전반으로 비리와 부정으로 뒤범벅인 것처럼 몰아가는 시리즈 기획들을 여기저기서 시작했다. 정의연 죽이기에서 효과를 본 틀과 논리를 이제 다른 단체들로 일반화하고 확대하고 있다. 사회운동 활동가들은 긴장해야 할 상황이다. SNS에 어디서 뒤풀이하는 사진도 올리는데 조심해야 할 것이다. ‘술잔치, 삼겹살 파티’가 될터이니.
진보개혁언론과 기자들에도 부탁하고 싶다. 지금은 새로운 의혹을 발굴해서 ‘단독, 속보’ 경쟁에 뛰어들기보다, 수구기성언론들이 쏟아내는 의혹들을 검증해서 진실을 밝혀주는데 주력해주면 좋겠다. 정의연 활동가들이 힘든 속에서도 매일같이 올리는 해명과 반박자료들이 계속 묻히지 않도록 더 많이 소개하고 널리 알려주면 좋겠다.
기자라면 사실도 맥락에 따라 정의되고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 것이다. 예컨대 지금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의 전과기록과 범죄전력이라는 ‘사실’을 취재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는 언론은 지금의 맥락에서 잘못된 방향을 택하는 것이다.
사실마저도 제발 검증하고 또 검증해 달라. 예컨대 진보개혁언론들의 기사나 칼럼들에도 가끔 기정사실처럼 말하는 ‘남산 기림비에 정의연 눈밖에 난 할머니 이름은 뺐다’ 논란을 보자. 정의연 자료를 보면 남산 기림비에는 명단 자체가 없다! ‘누구만 진성 위안부’라는 식의 명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꾸 댓글까지 다 찾아서 소개하며 ‘윤미향 편이냐 이용수 편이냐’는 식으로 편가르고 서로 상처주고 그러지 말아달라. 어디나 과도하게 막가는 사람들은 있고, 더구나 그런 허구적 구도는 틀렸다. 지금 댓글이 아니라 언론과 방송과 유튜브와 검찰을 통해서 위안부 운동을 파괴하려는 수구언론/공안세력이 진짜 문제다.
나아가 왜 윤미향과 정의연같은 사람들만 계속 언론과 방송에서 먼지털이를 당하면서, 지난 1년간 한국사회 불평등, 부정의, 비리의 진짜 핵심이며, 의혹이 아니라 명백한 증거로 범죄가 드러난 삼성 이재용은 왜 언론과 방송에서 계속 지워져 왔는지, 결국 구속을 면하게 된 것인지,이게 과연 '공정'인 것인지 의문을 가져 봤으면 좋겠다.
이렇게 계속 글을 올리는 나에게 ‘진영논리’이고 ‘민주당편’이라는 사람들을 본다. 그럼 지난 봄에 내가 신천지 마녀사냥에 반대해 계속 글을 올리고 기고했던 것은 ‘신천지 진영’이고 ‘이만희 편’이었던 건가? 나는 그가 누구든 부당하고 과도한 공격과 몰이의 대상이 된다면 방어할 것이다.
더구나, 수구언론/공안세력 대 (이용수와 윤미향을 포함하는) ‘위안부’ 운동의 생존자와 연대자들의 대립이라는 구도에서 누구 편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후자 옆에 설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이 말했듯이 역사는 악의에 찬 이들의 고함보다 선한 이들의 침묵을 기억할 것이므로.
● ‘조지 플로이드를 위한 정의’를 요구하는 투쟁의 전진
‘조지 플로이드를 위한 정의’를 요구하는 투쟁이 승리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다. 다인종적이고, 다세대적이고, 다계층적이며, 분노로 넘치고 자신감이 느껴지는 시위와 행진이 미국 전역으로 번져서 지속되고 있고, 국제적 연대도 확산되고 있다.
이미 많은 성과들이 나타났다. 처음에 3급 살인으로 기소됐던 데릭 쇼빈은 2급살인으로 격상됐고, 이어서 그 자리에 있던 경찰관 4명 모두가 기소됐다. 오랜 세월 흑인들을 모독해온 로버트 리(노예제를 지지한 우익 장군)의 동상도 철거하기로 했다.(아래 사진처럼 이 동상은 이번에 분노에 찬 낙서들로 뒤덮였다.)
경찰과 제휴를 중단하겠다는 기업과 기관들, 경찰 예산을 삭감하고 병력을 축소겠다는 주정부들이 이어지고 있다. 경찰을 줄이거나 없애고 사회복지사와 상담사를 늘려야 한다는 요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투쟁에 대한 지지여론은 70% 가까이로 높아졌고, 오바마만이 아니라 조지 부시까지 투쟁 지지를 표방하고 있다.
폭동진압법을 적용하고 군대를 투입하겠다던 트럼프의 협박은 오히려 악수가 됐다. 그 이후로 투쟁의 불길이 더욱 확산되면서, 군대 투입은커녕 백악관에 배치했던 군대마저 철수하고 있다. 백악관 옆 도로는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도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시위대 차단용 백악관 철조망은 항의 선전물과 예술품들의 거치대가 됐다.
트럼프의 군대 투입 추진은 전현직 국방장관의 반대에 직면했는데, 트럼프는 이번에는 ‘너 해고’ 트윗을 날리지도 못했다. 군인중 40%가 흑인 등 다인종인 상황에서 권력자들은 투입된 군대가 시위대에 합류하는 상황을 걱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일부 경찰들도 시위대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공감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그런 명령 불복종과 시위대 합류가 나타났던 것은 베트남 반전운동이 미국을 뒤흔들던 시기였고, 그러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재 트럼프의 대응 전략은 붕괴하고 있다. 초기에 트럼프의 전략은 92년 LA폭동 때와 비슷해 보였다.
당시 아버지 부시 정부는 투쟁을 LA에 가둬두면서, 부유층과 백인거주 지역을 철벽 방어해 분노한 시위대가 ‘한인타운’으로 향하도록 유도했다. 거기서 약탈과 방화가 벌어지자 한인들의 무장을 고무해 서로간에 총격전이 벌어지도록 방치했다.
언론과 우파 정치인들은 ‘한-흑’ 갈등을 부추겼다. 나중에야 한인들은 ‘당신들의 분노와 투쟁을 공감한다’며 흑인들과 연대했지만 이미 투쟁은 가라앉고 있었다. 공은 민주당과 연말 대선, 빌 클린턴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도 공화당 우익들은 시위대를 ‘폭도’로 매도하면서 강경대응과 사살을 촉구하고, 백인 극우단체들은 무장 자경단을 꾸려서 시위대 근처를 얼쩡거렸다. 트럼프는 ‘안티파’를 희생양삼으며 초동 무력 진압을 추진했다. 그러나 투쟁이 초기 혼란을 벗어나 인종, 젠더, 세대를 뛰어넘는 전국적 파도와 거대한 바다로 발전하면서 저들은 속수무책이 돼 갔다.
이것은 지금의 투쟁이 하루아침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트럼프 4년 동안 벌어진 투쟁들의 성과 위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미투운동, 여성 행진,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총기난사 항의 시위, 난민 연대 운동, 교사 파업, 샌더스 선거운동 등이 그것이다.
지금 거리로 나선 사람들은 플로이드를 찍어누르며 웃고있는 데릭 쇼빈의 모습에서 트럼프를 보고, 숨이 막혀 죽어가는 플로이드의 모습에서 코로나와 경제위기 속에서 삶이 망가져가는 자신을 보고 있다. 처음에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던 사람들도 이제는 차차 무엇을 할 것인지 방향을 잡아나가고 있다.
이것은 지난해 칠레, 레바논, 홍콩, 알제리, 수단 등을 뒤흔들었던 국제적 투쟁 물결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 투쟁들은 주로 세계체제의 주변부에서 터져 나왔고, 권위주의 정부와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투쟁들이었고, 기성좌파 조직 밖에서 자발적 대중투쟁의 분출이었다.
이제 세계체제의 핵심부에서 비슷한 패턴이 등장했다. 트럼프라는 네오파시스트적 정부와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는 투쟁이며, 또한 민주당이나 기존 노동조합들이 조직한 투쟁이 아니다. 민주당 소속 주지사들의 일부는 오히려 경찰 폭력에 책임이 있고, 조 바이든은 ‘저항하는 용의자는 심장이 아니라 다리를 쏘라’는 망언으로 욕이나 먹었다.
이것은 코로나 팬데믹과 인종주의 팬데믹, 경제위기 팬데믹이 낳은 자발적 대중투쟁의 팬데믹(전세계적 감염과 유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투쟁의 초기 국면에 시위대 낙서와 방화의 표적중 하나가 미국 노동총동맹(AFL-CIO)의 워싱턴 본사였다는 소식은 결코 달갑지 않다.
미국의 조직노동은 경찰노조의 조합주의(노동조합주의의 최악의 형태)에 타협하고, 소수인종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는 오명을 벗어나야 한다. 미국의 조직좌파는 자신들이 인종, 젠더, 계급을 교차하는 불평등과 부정의에 대한 일관된 반대자라는 것을 입증하며 신뢰를 얻어야 한다. 이 투쟁이 트럼프의 조기 퇴진과 근본적 정책 전환보다는 공을 연말 대선으로 넘기는 선에서 사그라들기 바라지 않는다면 말이다.
#BLACKLIVESMATTER #GEORGEFLOYD #ICANTBREATH
● 위안부 운동의 역사를 다시 써 보겠다고?
https://www.facebook.com/kija.choi.7/posts/3279911508731604
이 분이 지적한 것들에 크게 공감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의연이 정형화된 피해자 이미지에 들어맞지 않는 목소리들은 외면했다/ 강제로 끌려간 소녀라는 틀에 끼어 맞추려 했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로만 접근했다/ 피해당사자들과 괴리돼 왔다/ 따라서 위안부의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 이게 과연 맞는 진단인가?
그렇지 않다. 이 분의 글은 오히려 정의연이 수많은 피해자들을 계속 찾아다니고 기억과 증언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그것과 전혀 다른 일들을 해 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이라는 타이틀을 과감하게 버리’고, ‘민족담론 틀에서 배제된 여성, 개인의 경험을 역사화하려는 시도를 과감하게 앞세우’고... 이런 방향을 주도하는데 윤미향 의원도 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30년간의 운동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연구자와 활동가들의 치열한 논쟁의 역사가 언론과 한마디 거들어보려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삭제되고 그야말로 납작해지는 현재의 상황들에 숨이 막혀”서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그 갑갑하고 억울한 심정을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그래서 유독성 기사들을 쏟아내서 용서하기 힘든 조중동만이 아니라 ‘진보언론’들(한겨레와 특히 경향 등)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물론 그나마 정의연을 변호, 해명해주는 좋은 칼럼이나 기사들도 아주 안 실었던 것은 아니고, 그것들은 반갑고 유익하게 잘 봤다.
그런데 왜 그렇게 확인되지 않은 의혹 제기와 낚시성 선정적 제목 장사, 단독과 속보 경쟁에 자꾸 끌려가는 모습을 보이는지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 ‘기계적 균형’과 중립론에 휘말리는 모습과 아래 기사와 같이 편견과 낙인 속에 형성된 잘못된 프레임 속에서 쓰여진 기사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조중동이 쏟아내는 우박과 돌덩이들을 우산도 없이 온몸으로 맞고 있는 사람들은 옆구리와 뒤에서 날아오는 그런 작은 돌들이 더 아프게 느껴질 수가 있다. 왜 굳이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숨이 넘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지난 30년을 반성하고 돌아보라’고 다그치는 방식이 좋은지 모르겠고, 지금이 과연 가장 좋은 타이밍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러고 싶다면 몇 가지는 당부하고 싶다.
먼저 한국사회에서 그 누구보다 먼저, 정형화된 피해자 이미지에 들어맞지 않는 목소리들을 발굴하고 수집해 온 것도,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려고 노력해 온 것도, 피해당사자들과 같이 울고 웃고 다투기도 하면서 가까이해 온 것도, 위안부의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한 기초를 놓은 것도 바로 정의연이었다는 공로부터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정형화된 피해자 이미지만 떠올리며, 다른 목소리들은 외면하고, 강제로 끌려간 소녀라는 틀에 갇혀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로 해석해 온 것이 바로 한국사회와 우리 자신이고, 무엇보다 언론이 거기에 큰 책임이 있다는 자기반성이 우선돼야 한다.
이미 진작부터 위안부 역사를 다시 써온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서 입도 떼기 어려울 때, 갑자기 그 앞에 내려다보고 서서, 그들이 이뤄놓은 성과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이제부터 우리가 위안부 역사를 다시 써 보겠다’고 속편하고 오만하게 말할 때가 아니란 말이다.
● ‘정의연 대 수구언론과 공안세력’이 본질적 구도이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7297
<미디어오늘>에 실렸다. 현재 윤미향과 정의연은 뭘 해도 욕먹는 구도가 만들어져 있다. 반박을 해도, 침묵을 해도, 집에 있어도, 밖을 나가도, 다시 입을 열어도 다 공격의 빌미가 된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지금의 언론과 공론장 구도가 매우 기울어져 있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댓글에서라도 이용수 선생님을 욕하고 비난하거나, ‘정의연을 비판하면 친일파나 토착왜구’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정의연이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호소하는 상황에서 계속 그러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수구언론들의 ‘정의연을 옹호하면 문빠이고 진보적폐’라는 말처럼 폭력적이고 잘못된 말이다.
그처럼 ‘정의연 대 이용수’의 구도를 일부러 만드려는 사람들은 사실상 ‘정의연 대 수구언론과 공안세력’이라는 본질적 구도를 굳이 흐리려는 의도로 보이기도 한다. 일부, 아주 심하게 그런 언행을 하는 사람을 타고 들어가 보면 가계정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윤미향과 정의연도 당연히 비판과 지적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정말 비판하고 토론하고 싶은 이들일수록 방어에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겠다. 압수수색, 소환 조사, 보수언론의 조리돌림을 당하는 사람은 토론에 성실하게 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사실과 논거를 통해서 논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최상의 컨디션과 조건에서 논쟁에 나서기를 원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윤미향과 정의연 방어가 ‘진영논리’라는 지적에 한마디하고 싶다. 복잡한 세상을 살다보면 뜨거운 문제에서 침묵하거나 양쪽 다 문제라고 하는게 편할 때가 많다. 실제로 양쪽 다 문제는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예컨대 나는 중국의 국가자본주의도 미국의 시장자본주의도 문제가 많다고 본다. 홍콩의 복잡한 정치지형과 정치세력은 더욱 단순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홍콩보안법 문제에서는 단호하게 그 반대 ‘진영’에 설 것이다.
마찬가지다. 윤미향과 정의연에게 어떤 문제가 있고 내가 어떤 이견을 가지고 있든 지금처럼 함부로 낙인찍고 동네북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달리는 기차를 하늘 위에서 바라보면서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하기보다, 기차 속에서 사람들과 같이 티격태격하면서 방향을 잡아나가길 택하겠다.
● 코로나19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향한 꿈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무엇이 문제였고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서 고민과 논의가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에게 많은 영감과 통찰을 제시해왔던 급진적인 학자나 활동가들은 여기에 도움이 될만한 분석과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고 있다. 그런 것들을 계속 찾아보고 모으는 것도 요즘 의미있는 일로 여겨진다.
먼저 생태사회주의자인 이안 앵거스(Ian Angus)는 지금의 재앙이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지만, 이 체제는 대비를 가로막았고 지금도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3년 전 세계보건기구(WHO)는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 X’의 세계적 전염 가능성에 대비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에 응답하지 않았고, 공공의료 예산과 투자를 삭감하면서 신자유주의적 긴축 정책을 지속했다. 질병 X가 도래한 지금도 각국 정부는 인명 구조보다 은행과 석유회사 구제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다.”
역사학자이며 좌파 활동가인 닐 포크너(Neil Faulkner)는 지금의 위기를 야만적인 방법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극우 파시즘적 세력의 등장 가능성을 강력하게 경고한다.
“자본, 국가, 파시스트 폭도들은 소수민족, 이주민, 무슬림, 페미니스트들, 사회주의자들, 외국 정부, 진보 엘리트 등 '타자'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종주의 사상과 음모론, 경찰과 정보기관의 무제한적 권력, 무장단체와 민병대가 추진하는 거리 동원에 자극받은 전체주의적이고 종말론적인 광경 속에 신자유주의가 붕괴하는 과정은 그 폭력과 부조리가 디스토피아적 공상과학 소설과 비슷할 것이다. 극우 정당들은 민족주의, 인종주의, 여성혐오, 동성애혐오증, 제노포비아를 부추기며 점점 더 권위주의적인 경찰국가로 나가고 있다. 그 길은 파시즘을 향해 있다.”
사회주의 이론가이며 활동가로서 특히 자본주의 경제 위기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제시해 온 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는 이미 야만에 맞선 투쟁들이 분출하고 있고 그 투쟁 속에서 희망이 자라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이미 식료품점 직원, 버스 운전사, 아마존 창고 직원, 건강관리 직원, 자동차 회사원들의 와일드캣 파업을 목격했다. 그들은 보호 장비, 위험수당, 존엄성을 요구하고 있다. 제너럴 일렉트릭의 직원들은 그들의 공장에서 인공호흡기를 생산하자고 요구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캔자스주에서 노동자들은 그들의 공장에서 마스크와 의료장비를 생산할 것을 요구했다. 빈집을 점거하고, 임대료 파업을 건설하고, 노숙자들을 수용하고, 감옥과 유치장문을 열자는 운동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 주위에서 싹트고 있는 새로운 사회를 위한 요소들이 있다. 그람시의 말대로 새로운 것은 여전히 ‘태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우리의 가장 큰 희망은 연대, 투지, 비전의 명확성을 구축하며 그러한 투쟁들을 돕는 것이다. 자본주의보다 삶을 우선하는 사회주의적 대안이 그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선구적 분석을 제시해온 마르크스주의 지리경제학자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지금이야말로 대안사회의 창조를 생각할 순간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단순히 2600만 명[이번에 미국에서 해고된 사람들]의 사람들을 다시 일하게 하면서 이 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아니면 모든 사람이 먹을 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살 만한 적당한 장소를 가지고, 모든 사람이 기본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생산을 조직할 수 있는가? 이 순간이야말로 대안사회의 창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순간이 아닌가? 전혀 다른 종류의 사회질서를 만들어 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떨까. 이미 그 가능성은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우파와 지배계급은 ‘정상상태’로 되돌아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역시 누구보다 더 가슴에 와닿는 말로 우리의 행동을 촉구하는 것은 소설가이자 반자본주의 활동가인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인 것 같다.
“이제 누가 낯선 사람과 키스하거나, 두려움없이 아이를 학교에 보낼 생각을 하겠는가? 바이러스는 이윤이 아니라 확산을 추구하고, 따라서 무심코 흐름의 방향을 역전시켰다.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의 엔진은 중단에 이르게 됐다. 우리가 그것을 고치는 데 도움을 줄 것인지, 아니면 더 나은 엔진을 찾을 것인지를 결정할 시간이다... 이것이 끝나고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만큼 나쁜 일은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행병은 인간들로 하여금 과거와 결별하고 그들의 세계를 새롭게 상상하도록 요구했다. 우리는 편견, 증오, 탐욕, 죽은 생각, 죽은 강과 소모그 자욱한 하늘을 뒤로 시체처럼 끌고다니며 계속 걸어가길 선택할 수 있다. 아니면 가벼운 짐을 들고 다른 세상을 상상하며 가볍게 걸어나갈 수도 있다. 우리는 싸울 준비가 돼 있다.”
● 코로나19와 벼랑 끝의 이주민과 난민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4862
<참세상>에서 글을 부탁하고 실어주셨다. 이 글을 기고한 것이 몇 주도 더 지나서 일부 사실이 변화한 것이 보인다. 먼저 내가 ‘여전히 우한코로나라고 쓰고 있다’고 비판한 것과 달리 조선일보는 드디어 ‘우한코로나’라는 용어를 슬그머니 안 쓰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안 쓰기 시작했는지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슬그머니다. 당연히 자기반성과 해명도 없다. 나는 기본으로 기성언론을 많이 불신하지만, 조선일보는 그중 최고다.(여담이지만 내가 과거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을 때 문제가 됐던 ‘이적표현’글 중 하나가 ‘조선일보는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사라져야 한다’는 글이었으니 뿌리깊은 불신이다.)
두 번째로 정부가 미등록 이주민에 대해서도 추방 걱정없이 코로나 검사를 무료로 해주기 시작했다. 이것은 잘한 일이고 안내문자를 받았을 때 참 반가웠다. 이것도 이주민들과 연대단체들의 항의한 덕분이겠지만 재난지원금 등에서 여전한 차별을 해소하는 데까지 더 나가야 한다.
사실 정부가 미등록 이주민에게도 무료 검사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우리 모두는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아픔은 모두의 아픔"이라는 오래된 구호는 지금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진실이다.
“중동의 시리아, 예멘, 리비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의 국가에서는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이 개입한 폭격과 전쟁이 계속돼 왔다. 그래서 학교, 병원 등 사회기반시설들이 파괴됐고 빈곤과 실업이 만연해졌다. 수많은 이재민, 피난민들이 열악한 공간에서 밀집 거주하고 있고, 기초적인 공중보건과 위생 관리도 부족하다. 영양실조와 기타 질병이 널리 퍼져있는 이런 지역은 바이러스에도 취약하다....
“이주민과 난민이 직면한 더욱 커다란 위협은 코로나 재앙 속에서 혐오의 타깃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감염병에 취약하고 생계도 위협받는 피해자들이 오히려 바이러스를 퍼트린 가해자로 낙인찍혀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보수적 기성언론과 혐오에 기반한 우익 정치 세력이 여기에 앞장서고 있다.”
● <21세기 마르크스 경제학>과 포스트 자본주의의 꿈
<21세기 마르크스 경제학>. 몇 달 전 정성진 선생님이 새로 펴낸 이 책을 선물로 보내주셨다. 책 안쪽에 직접 서명까지 해서 보내주신 책을 받아보니 감사한 마음이 더했다. 진작 책을 다 읽고서 나름의 감상을 적어본다는 것이 이런저런 일들이 겹치면서 계속 미뤄지다가, 이제야 타자를 두드리게 된다.
정성진 선생님은 한국사회와 학계에서 별로 많지 않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다. 그런데 선생님의 관점은 단지 경제학에 머물지 않는다. 좌파 정치학, 역사학, 페미니즘, 생태주의 등 다방면에 걸친 관심과 탐구, 저술은 나같은 사람에게 항상 큰 자극과 도움을 준다.
더구나 경제학에서도 단지 기존에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이라고 여겨져 온 이론과 해석을 반복하면서. 현실을 그것에 끼워 맞추는 흔히 보이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찍부터 세계체제론, 장기파동론, 사회적 축적구조 이론 등을 넘나들며 세계경제와 한국경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던 선생님의 시도들이 기억난다.
치기어린 시절에는 그런 모습을 ‘마르크스주의적 정통에 대한 믿음과 충성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 별로 긍정적으로 보지 않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내가 속해있던 정치단체에서 정치적 이견 제시를 이유로 입을 가로막히고 징계까지 당하게 되면서, 그런 나를 위해 징계는 안 된다며 방어하는 서명을 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깨달았다.
세계를 제대로 해석하고 변화시키려는 사람이 정말로 충성해야할 것은 비교조적이고 열린 관점과 태도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의심하고 비판해야 하는 것에서는 어떤 성역도 경계도 없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 책에서도 선생님은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를 답이 정해진 무엇처럼 신성시하는 좌파와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교조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들과 거리를 두며 어떤 성역도 인정하지 않는 과감한 ‘신성모독’을 수행하고 있다. “이단으로 폄하되었던 다양한 비마르크스주의 급진 사상들과의 접합·상호작용을 통한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발전”을 추구하겠다는 의지가 책 전체에 넘쳐난다.
당연히 레닌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예외는커녕 가장 엄중한 검증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레닌은 기여와 장점도 많았지만, 동시에 많은 문제점도 있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과 통제, 국유화와 동일시’ 했고, 1915년에 일국사회주의 개념을 처음 제시했으며, 전위당에 의한 권위주의적 일당독재를 옹호했다. 무엇보다 이런 방향에 대한 반대와 비판을 강압적으로 억눌렀다.
따라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의 옹호자로서 레닌”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는 게 이 책의 지적이다. “소비에트의 쇠퇴, 유명무실화는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1924년 레닌 사후가 아니라 이미 레닌이 생존했던 시기부터 진행되었”고 “스탈린주의의 이론적 자원은 레닌의 모순적 사회주의 개념으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를 바탕으로 볼셰비키가 러시아에서 시도했던 사회주의의 실험과 모델에 대한 돌아보기와 이론적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나아가 “21세기 혁명”은 “러시아 혁명을, 혹은 레닌주의를 유일한 진리의 모델로 절대화하여 재현·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거역하고 넘어설 때에야 비로서 가능하다”는 대담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이 교조적 ‘레닌주의’ 전통에서 이단으로 여기거나 배격해 온 페미니즘, 생태주의,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개념, 참여계획경제론 등에 대한 개방적인 검토와 이론적 결합과 확장 시도로 채워진 것은 자연스럽다.
노동가치론을 기반으로 1970년대 가사노동 논쟁을 검토하면서 쟁점들을 재구성하고 마르크스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고찰을 기반으로 자본축적이 낳은 모순에 대한 시공간적 조정의 문제점과 생태사회주의적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 등은 흥미롭고 유익한 생각거리들을 남긴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을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레닌이 제2 인터내셔널의 기계적 유물론과 단절해서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받아들였다는 가설도 이제는 의심해 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레닌의 사상과 실천에서 발견되는 여러 오류와 약점들이 과연 마르크스 자신에게는 그 여지가 없었던 것인가? 등의 의문이 남는다.
또 가사노동이 생산하는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재생산 과정을 생산 과정과 종합해서 설명하려는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상호교차성 이론과 결합시키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며, 그것을 교조적 정통 이론과 이중체계론 모두를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고민들도 이 책이 담고 있는 여러 사상적 자원들의 자극과 도움을 얻은 덕분이며, 이런 의문의 제시는 어떤 경계에도 머물지 않고, 성역도 인정하지 않으며 과감하게 도전과 혁신을 시도해 온 정성진 선생님의 문제의식에도 충분히 부합하는 것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지금 존재하는 그 어떤 이견이나 앞으로도 더 발전할 수 있는 그 어떤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제시하는 포스트자본주의 사회를 상상하기 위한 핵심 요소들 - 연속혁명, 국제주의, 국가 소멸, 소외된 노동의 폐지, 참여계획경제, 여성해방, 생태사회 등 - 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공감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나쁜’ 자본주의도 ‘좋은’ 자본주의도 아닌 마르크스주의적 포스트자본주의 대안사회에 대한 꿈은 계속 더 구체화되어야 한다.
● 더 위험하고 반동적인 청년우파가 등장하고 있다
얼마전 삼성해고자 고공농성과 삼성피해자들에게 연대하는 집회와 행진은 이태원거리를 행진해서 이재용 집 앞까지 갔다가 다시 강남역으로 돌아와서 마무리되는 강행군이었다. 1년가까이 고공농성중인 해고노동자, 16년 동안 투쟁해온 과천 철거민, 130일 넘게 삼성생명 로비를 점거중인 암보험 피해자들에게 연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다. 김용희 해고자가 암보험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울면서 발언하던 장면은 참 가슴 아팠다.
그런데 강남역으로 돌아오는 행진을 하면서 보니 저쪽에서 또 우파들이 반문재인 집회를 하고 있었고 신나게 정의연을 욕하고 있었다. 경찰에게 물어보니 이들의 집회는 강남에서 벌써 몇 달째 매주 주제를 바꿔가면서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기억을 돌아보니, 저들이 얼마 전에는 ‘중국인 입국금지’를 요구하며 집회를 했고, 바로 지난주에는 ‘반페미니즘’을 내걸고 집회를 했었다. 지난주 저들의 집회 장면을 페북에서 본 것이 기억나 유튜브를 찾아봤더니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제 1회 안티페미니즘 집회’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즘 아웃’, ‘페미니즘은 정신병’, ‘양예원을 구속하라’라는 구호를 쉴새없이 외치는 집회였다. 극우익 유뷰버들과 지난해 인헌고 사태의 주역이었던 전국학생수호연합 고교생 대표 등이 주요 연사였다. ‘페미니스트들과 문재인 정부가 남성을 적대하고 자유시장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적 주장을 통해서 중국식 사회주의로 나가려고 한다. 저출산을 조장하고 그 빈자리를 외국인, 중국인, 조선족으로 채우려고 한다’ 이런 식의 내용들이었다.
사회자와 연사들은 ‘개같은 *’, ‘*같은 *’, ‘*발*’, ‘쌍*’ 등의 욕설을 계속해서 퍼부었다. 이어서 ‘메갈*, 웜퇘지*들이 문제’라고 하면서 진짜 돼지 머리고기를 해머로 박살내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 퍼포먼스가 뿜어내는 살기와 혐오의 기운은 아주 강력했다. 또 ‘진짜 성상품화를 보여주겠다’며 젊은 여성 3명이 나와서 ‘섹시댄스’를 췄고 참가자들은 환호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300여명의 집회 참가자 대부분이 젊은 남성들이었다는 것이다.
태극기부대나 극우 집회하면 떠올려지는 고령의 노인들이 전혀 아니었다. 극우파가 재구성되면서 청년우파들이 등장하고 거리로 나서는 이 현상은 지난해 검찰대란 국면에서 조금씩 시작되더니 이제는 더 구체화되고 있고, 그들의 이데올로기도 발전해 가는 것 같다. 미통당에서 젊은 남성들 속으로 들어가자는 말이 나오고 하태경, 이준석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반페미니즘을 내걸고 그 방향을 제시해 왔다. 며칠전 진중권 씨는 그런 하태경과 이준석이 후보라면 반드시 미통당을 찍을 거라고 했고...
(기사 등록 202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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