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사회 변혁과 민주주의 - 2

전지윤

 

 

[이 글은 20195맑스코뮤날레마르크스와 대안 민주주의세션에서 필자가 발표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지난 1년 동안의 상황 변화들이 반영돼 있지 않고 결과적으로 어긋난 예측들도 볼 수 있다. 특히 지난해 여름부터 진행된 검찰대란 국면과 그 이후의 총선 결과 등이 그렇다. 글을 더 보강하고 확장해서 올리려고 미루다가 시간만 지나서 일단 올린다. 이 글에 있던 많은 각주들은 편의상 생략했다. 글이 매우 길어서 2번에 나누어 올린다. 이 글은 2 번째이다.]


 



 

<1편에서 이어짐>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이상과 혁명의 필요성

 

착취 억압받는 민중이 정치권력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권력까지 통제하는 것, 그것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이상이다. 2011년에 중동을 뒤흔들었던 아랍혁명, 2016년 연말에 한국에서 폭발했던 것과 같은 거대한 대중 반란은 이러한 사회로 발전에 대한 희망을 보여 준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자본주의 국가와 억압기구들은 단지 수동적으로 지켜보지 않는다.

 

특히 대중의 반란이 단순히 정권 교체에 머물지 않고 더 근본적인 사회변혁으로 나갈 여지가 높을 때는 폭력적으로 개입해 기존체제를 수호하는 구실을 한다. 2011아랍의 봄겨울로 바뀌는 과정은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 줬다. 이집트에서는 군부가 개입해서 반혁명이 일어났고 학살이 저질러졌다.

 

레닌은 피억압 계급의 해방은 혁명없이는 불가능할뿐 아니라 지배계급이 만들어 낸 국가권력기구의 파괴 없이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로 나가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국가 기구를 새로운 대중자치의 민주주의 기구로 대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불가분하게 결합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마르크스는 혁명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민주주의자 쁘띠부르주아지가 되도록 빨리 혁명을 마무리짓기를 바라는 반면에 우리의 이익과 임무는 많든 적든 재산을 소유한 모든 계급들을 지배적인 위치에서 쫓아낼 때까지,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그리고 결정적 생산력이 노동자들의 손에 집중될 때까지 혁명을 연속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착취억압받는 민중이 거대한 반란 속에서 기존체제를 뛰어넘는 대중자치의 민주주의와 생산의 자주관리를 건설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이룩해낼, 마침내 발견된 정치적 형태라고 1871년 파리꼬뮌의 경험을 환영하며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내용과 형태를 일반화했다.

 

코뮌의 첫번째 포고령은 상비군을 폐지하고 그것을 무장한 민중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코뮌은 파리의 각 구에서 보통선거로 선출된 자치위원들로 구성됐고, 그들은 [코뮌에] 책임을 지고 언제라도 소환될 수 있었다. 코뮌 성원의 다수는 당연히 노동자들이거나 노동계급이 인정한 대표들이었다. 코뮌 의원들 이하 모든 공무원들은 노동자 임금을 받고 일해야 했다. 고위 공직자들이 누리던 특권과 특혜는 고위 공직 자체와 함께 사라졌다.

 

이런 모습은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 때 등장한 노동자 소비에트(평의회)에서 더 발전됐다. 소비에트에서는 직장과 지역에서 열리는 대중 집회에서 선출되고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대표자들의 기구가 중요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결정했다.

 

이러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서는 정치적 민주주의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노동자 권력 기관과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기구는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거대한 대중 투쟁과 반란 속에서 등장한다. 레닌은 소비에트가 그 누구의 고안물도 아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이 보다 확산되고 치열해지면서 그 투쟁으로부터 성장해 나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런 노동자 국가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서도 억압은 여전히 필요하겠지만, 이제는 착취당하는 다수가 착취하는 소수를 억압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다수가 소수의 착취자를 억압하는 것은 비교적 아주 쉽고 간단하 므로 억압을 위한 특별한 기구의 필요성도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실제 역사적 현실은 순조롭거나 단순하지가 않았다.


러시아 혁명이 보여준 가능성과 변질

 

러시아 혁명의 의의와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100년도 전에 기층 민중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거대한 혁명을 일으키고 오랜 전제왕조를 무너뜨리고 전쟁을 끝냈다. 그래서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들이 스스로 민주적 자치와 자주관리를 통해서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줬다.

 

보통 많은 역사가와 심지어 좌파들조차 이 과정에서 레닌같은 지도자와 볼셰비키의 구실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의 핵심적인 동력과 주축은 기층 민중 자신들이었다. 먼저 짜르를 무너뜨린 2월혁명은 특정한 지도자나 당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 자생적 대중 반란의 폭발이었다.

 

보통 레닌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오해되는 ‘4월테제는 이미 2~3월부터 거리의 대중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온 구호였다. 또 결정적 고비였던 8월에, 코르닐로프 장군이 주도한 반혁명 쿠데타를 막아낸 것도 자발적으로 행동에 나선 기층 민중들의 힘이었다. 당시에 트로츠키는 감옥에 있었고, 레닌과 주요 지도자들은 도피중이었기에 여러모로 볼셰비키는 사태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웠다.

 

이 속에서 기층 민중의 분노와 요구를 적극 수용하고 지지하면서 볼셰비키는 급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보통 말하듯이 광범하고 느슨한 독일식 사회민주당과는 달리 중앙집중적이고 철의 규율을 가진 직업혁명가들로 구성된 볼셰비키가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면서 대중이 그 지도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레닌은 충실한 카우츠키 노선의 지지자였고, 자신들이 러시아에서 독일사회민주당과 같은 모델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혁명 과정에서도 볼셰비키가 대중의 분노와 요구를 잘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율성과 정치적 이견, 토론이 보장된 느슨하고 열린 구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혁명을 통해서 임시정부를 무너뜨린 볼셰비키는 이제 모든 권력은 기층 민중의 자치지구인 소비에트에 있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전러시아 소비에트 2차 대회를 며칠 앞두고 비밀스럽게 추진된 무장봉기는 소비에트 내에서 민주적으로 논의되고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소비에트 대회는 이것을, 그것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항의하며 퇴장한 상황에서 사후 승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볼셰비키는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전쟁 중단, 노동자 생산관리, 토지개혁, 소수민족의 자결권, 여성의 권리 등에 대한 의미있는 포고령들을 발표해나갔다. 하지만 소비에트의 다수 대중이 기대했던 사회주의 정당들의 연립정부는 구성돼지 못했고, 사실상 볼셰비키의 단독정부가 계속됐다.

 

이어진 제헌의회 선거에서 사회혁명당이 볼셰비키의 두 배가 넘는 지지를 얻었지만 방향을 바꾸지 못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신문 검열, 당원 체포, 선거 입후보 금지에 직면하며 소비에트에서도 밀려나갔고, 결국 볼셰비키만이 유일 합법정당이 돼 갔다.

 

소비에트는 갈수록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했다. 19181월부터 공장위원회는 사실상 해체의 압력에 놓여졌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게 규율을 부과하고 생산성 증진을 강요하며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징벌을 가하는 기구로 변화해 갔다. 1919년부터는 여성, 아동노동에 대한 보호들이 폐지되고, 야간노동과 초과노동이 합법화됐다. 12시간 노동제가 도입되고 강제노동 징집이 시행됐다. 경쟁을 촉진하기 위한 불평등한 성과배급제가 도입됐다.

 

이제 소비에트는 노동자·농민의 아래로부터 요구와 의견이 분출하는 민주적 자치기구로서 성격이 사라져 갔다. 모든 결정권을 볼셰비키로만 구성된 인민위원회가 독점했고, 인민위원회는 소비에트에 보고하거나 승인받지 않고 법령을 공표했고, 지방소비에트는 중앙소비에트가 하달한 명령을 집행하는 기구로 성격이 변해갔다.

 

노동자 자주관리는 파괴됐고 1인경영이 도입됐다. 반대당만 금지한 것이 아니라 볼셰비키당 안에서도 지도부에 이견을 제시하는 분파는 금지됐다.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는 해고되고 배급권이 몰수됐고, 멘셰비키 당원은 파업의 배후로 몰려 체포됐다. 1921년에 수도에서 식량 공급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와 파업이 벌어지자 시위를 금지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의 아래로부터 요소를 환영했지만, 볼셰비키의 집권초기를 직접 경험하고 커다란 실망을 하게 된 반전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은 이렇게 돌아본다.

 

공산주의 정당은 정부 실권을 충분히 잡았다고 느끼자마자, 대중 운동의 범위들을 제한해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독재 전부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모든 정당과 모임은 사라져야 했다. 아나키스트들과 좌파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첫 번째 대상이었고, 그 다음은 멘셰비키와 우파에 속한 다른 정적들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자신만의 의견을 갖고자 갈망했던 모든 사람이 대상이 되었다. 모든 독립적인 단체들의 운명도 비슷했다. 그들은 새로운 국가의 욕구에 복종하던지 아니면 다 같이 파괴되었다. 소비에트가 그랬고 노동조합들과 협동조합들이 그랬다. 이 세 가지는 혁명의 희망을 실현할 위대한 요소였다.

 

이와같은 러시아 혁명의 변질과 타락은 스탈린 시대로 넘어가면서 더욱 극심해졌고, 하나의 모델로 굳어졌다. 이 모델은 이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로 확산돼 갔고 1989~1991년에 그 나라들이 몰락할 때까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모델로 유지됐다. 오늘날 중국과 북한에서도 그 모델은 여전히 기본적 틀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모델들에서 대개 생산은 국유화돼 있고 공산당 관료들의 통제를 받았다. 권력은 공산당 일당에게 독점돼 있고 민주주의와 자유는 짓눌렸다. 권력의 독점과 세습, 권력을 둘러싼 암투와 숙청, 이것이 이들 나라를 상징하는 이미지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기대됐던, 사회주의적 변혁의 시도가 왜 이런 결과를 낳게 됐을까? 그 원인을 밝혀내고 실패로부터 교훈을 끌어내는 것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여전히 대안으로 보존하기 위해 필수적 과제이다.

 

국가자본주의론의 설명력과 한계

 

사회주의적 변혁의 시도가 소련, 중국, 북한같은 사회와 체제를 낳은 이유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설명 시도가 있어 왔다. 사회주의적 변혁의 시도는 필연적으로 독재와 전체주의를 낳을 수 밖에 없다는 주장, 그런 사회는 타락한 노동자 국가’, ‘관료집산주의’, ‘국가사회주의등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었다는 주장 등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설득력있고 이론적으로도 엄밀한 주장은 그런 사회가 사회주의가 아니라 또다른 자본주의, 즉 국가자본주의였다는 주장과 이론이다. 이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가장 앞장서서 주장한 사상가는 토니 클리프이다.노동자들의 자기해방 활동도 없고, 노동자 민주주의도 존재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생산을 통제하지도 않는 그런 사회가 사회주의라면 도대체 마르크스주의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토니 클리프가 던진 의문이었다.

 

클리프는 중요한 것은 국유화나 계획경제같은 법적 형식이 아니라 계급적 내용과 성격이라고 봤다. 이에 따라 소련같은 사회는 소수의 관료집단이 생산수단을 소유·통제하며 노동계급을 억압·착취하는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했다. 이는 국유화가 사회주의라면 비스마르크의 담배 전매도 사회주의냐라던 엥겔스의 문제의식과 같다.

 

국가자본주의론에 따르면 소련의 국가관료들은 서구 시장자본주의와 군사적 경쟁의 압력 속에서 노동자들에게서 더 많은 잉여가치를 짜내기 위해 행동했고, 또 잉여가치의 더 많은 부분을 확대재생산에 다시 투자했다. 즉 인민의 필요를 위한 생산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생산, 축적을 위한 축적이었던 것이다.국가를 소유하고있으며, 축적 과정을 통제하고 있는 러시아 관료는 전통적 자본가 계급의 부분적 부정인 동시에 자본가 계급의 역사적 사명의 가장 진정한 인격화라는 게 클리프의 주장이었다.

 

이처럼 국가자본주의론은 마르크스주의적 틀과 방식을 이용해 소련 사회의 성격과 동력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이런 분석은 특정한 형식과 제도가 아니라 노동계급 대중 스스로가 투쟁 속에서 주체가 돼서 사회를 바꾸고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하게 해 준다.

 

하지만 이 이론은 과연 소련을 하나의 거대한 공장으로 보는 게 맞는지, 주되게 군사적 경쟁 속에서 작동하는 동학을 어떻게 시장경쟁과 교환가치의 문제와 연결시킬 것인지 등에서 몇 가지 이론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가치법칙이 작동하지 않고,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를 추구하는 체제가 과연 자본주의일 수 있냐는 반론이 제기돼 왔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변혁을 위한 시도가 실패하면서 이 같은 체제로 변질된 원인이 무엇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변질의 시점과 원인, 과정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불충분할 뿐 아니라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클리프와 그 지지자들은 대체로 스탈린주의와 스탈린이 주도한 1928년 반혁명에 책임을 지우면서, ‘레닌주의적 이론과 실천을 신화화하기 급급했다. 스탈린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변질과 후퇴의 조짐들은 보통 외면하거나 엄혹한 상황이 강요한 불가피한 타협으로 정당화하기만 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금기나 성역도 없이 의문을 던져야 한다. 스탈린의 반혁명만이 문제였을까? 스탈린 이전의 후퇴가 그 길을 닦았던 것이 아닐까? 오늘날 많은 좌파에게 여전히 신화로 남아있는 레닌과 레닌주의에 변질의 요소가 있었던 것 아닐까? 191710월 혁명과 볼셰비키의 실천은 단순 반복돼야 할 모범답안일까?

 

레닌주의의 신화와 그것이 낳은 문제들

 

스탈린주의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대변한다고 가정된 당이 독재적 권력을 행사하면서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사상이다.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파괴, 인간적 희생 등은 부수적 피해로 간주되고, 노동계급은 사회주의적 인간형으로 계몽돼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레닌과 볼셰비키의 전통 자체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지식인 엘리트들의 주도하는 변혁에 대한 사상은 20세기초 레닌의 저작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부터 발견된다.

 

사회민주주의 의식은 노동자들 외부로부터만 도입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은, 자신들의 노력만으로는, 단지 노동조합 의식만을 발전시킬 수 있다. 사회주의의 이론은 교육받은 유산 계급의 대표자들, 지식인들이 정교화한 철학, 역사 및 경제이론으로부터 생겨났다.

 

이런 경향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아직 권력을 잡기 전에는 뚜렷하게 발전하지 않았다. 앞서 봤듯이 볼셰비키는 상당히 활동가들의 자율성이 보장된 조직이었고,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이 어느 정도 허용됐기에 17년 혁명 과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권력을 잡고 나서부터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레닌과 트로츠키같은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민주주의를 부차적인 수단으로 취급하고, 기층 민중을 변혁의 주체라기 보다는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과 태도를 갈수록 분명히 해갔다.

 

이 당시 레닌은 노동계급의 능력을 불신했다. “너무나 분열되고 타락하고 부분적으로 부패해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포함하는 조직으로는 직접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행할 수 없다. 그것은 전위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1920)

 

이에 따라서 레닌은 자주관리는 환상이고 유해하다. 과도기에는 1인경영이 더 유리하다고 주장했고, “민주주의에 관한 모든 헛소리들은 쓸어버려야 한다”(1920)거나 반대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1921)고 주장했다. “공장 경영자의 뜻에 대중의 무조건적 복종이 요구된다. 독재자가 노동계급의 의지를 대표할 수 있다는 게 레닌의 생각이었다.

 

트로츠키도 비슷했다. “우리는 인간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칸트적, 종교적, 채식주의적 지껄임에 관심없다. 문제는 피와 강철로만 해결될 수 있다.” “국가는 소멸하기 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가장 무자비한 형태를 거친다.” “당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임무를 위한 역사적 도구이므로 항상 옳고 누구도 당에 대항해서 옳을 수 없다.”

 

이런 분명한 관점 속에서 1917년 혁명이 이룩한 성과들의 후퇴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혁명의 고립에 사기저하되고 계급의식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던 노동자들이 스스로 원했던 방향이 아니었다. 레닌과 볼셰비키가 앞장서서 채택한 노선이고, 아래로부터 반대와 저항이 있었지만 볼셰비키는 그것을 억누르고 추진했다.

 

일부 좌파들은 엄혹한 상황에서 불가피했다며 당시의 이런 실천들을 변호해 왔다. 안으로 반혁명 세력이 노동자 국가를 위협하고, 밖으로 제국주의·자본주의 국가들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소련, 중국, 북한 등에서 나중에 스탈린주의를 정당화한 논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히틀러가 집권하고 전쟁을 확대하던 30년대의 스탈린 정권처럼 엄혹한 상황을 핑계대기 좋은 상황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 논리를 비판해 온 좌파들이 레닌과 볼셰비키가 비슷한 논리로 권력을 독점해 나간 것에 대해 불가피한 상황을 말하며 변호한다면 그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

 

한때 볼셰비키로서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던 빅토르 세르주는 이렇게 돌아 본다. “볼세비키는 자신들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자신했고 다른 생각은 반동적이라고 보면서 이단 심문관처럼 변해 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권위주의가 탄생했다.” 그런데 스탈린의 박해를 당하며 추방당한 트로츠키와 지지자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게 세르주의 탄식이다.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가 박해자들의 태도와 똑같았다. 그들이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다 가루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얄궂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인터내셔널의 서클들에서는 트로츠키의 입장에 반대하면 누구든 쫓겨났다. 소련의 관료들이 우리를 겨냥해 사용하던 것과 동일한 언어로 비난이 퍼부어졌음은 물론이다.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 또한 스탈린이 추진한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산업화 정책들을 기본적으로 지지했던 게 사실이다. 트로츠키는 그런 방향을 사회주의의 강화라고 봤고, 이에 대한 저항과 파업은 불법이라고 비난했다. 민주집중파와 노동자반대파는 분명 달랐고 더 나은 입장이었지만, 이들 모두는 볼셰비키의 권력 독점을 동의했다는 점에서 같았다.

 

결국 이런 변질은 권력 장악 이후 내전과 경제위기라는 조건 속에서 발아한 것이지만, 이데올로기 속에 이미 씨앗이 담겨 있었다고 봐야 한다. 권력을 잡기 전에는 대중정당을 건설하고 지지를 얻기 위해서도 다른 의견을 허용하고 민주주의를 수용했지만,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는 사회주의라는 목적을 위해서 민주주의라는 수단은 제한되거나 포기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이것은 대개 부르주아적 세력과 시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반면 이에 대한 거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적 잣대라고 비난받았다. 정치적 다원성을 허용하고 민주주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인식과 이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문제점은 권력 장악 이후에 부각되기 시작됐고, 열악한 상황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것이 하나의 이론으로 확립돼서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악순환은 더욱 심화돼 갔다.

 

좌파의 뒤틀린 전통: 러시아 혁명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이처럼 러시아 혁명의 후퇴와 변질 속에서 나타난 모습들이 레닌주의라는 하나의 전통으로 만들어져서 오늘날의 좌파들에게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1917년 직후부터 시작된 문제다. 당시 국제적 좌파들은 자연스럽게도 1917년의 모범을 자신들의 지역에서 반복 적용하려고 했다. 여기저기서 좌파조직들은 조건과 상황을 충분히 살피기보다는, 시급히 무장봉기를 조직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고자 조바심을 보였다.

 

그런데 그 모범은 혁명 초기에 자유롭고 민주적인 분위기의 볼셰비키가 아니라, 권력 장악 이후에 다른 정당과 당내 이견들을 억누르기 시작한 볼셰비키였다. 이것은 1920년 여름에 코민테른 가입 승인을 위한 “21개 조건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현 정세에서 공산당은 가능한 한 중앙집중주의적인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어야만, 거의 군대의 규율과 같은 철의 규율이 그 안에서 승리해야만, 그리고 당 중앙이 광범위한 권력을 행사하는 위엄 있고 권위 있는 기관이어야만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민주적 절차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고, 독점적인 강조점은 중앙집중주의에 있다. 1921년 봄 제10차 당대회에서 통과된 분파 금지결의안에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당에서 추방할 권리가 더욱 분명해졌다. ‘무장봉기과 권력 장악이라는 도식이 독일공산당의 공세이론과 ‘3월 행동이라는 재앙을 낳은 이후에 치러진 1921년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서도 문제가 드러났다. 이 사태에 분명히 큰 책임이 있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에 대해 솔직한 비판은 나오지 않았다.

 

192310월 독일 혁명의 패배 직후에는 문제가 더 악화됐다. 코민테른 지도부는 이 패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회피한 채 독일공산당(KPD)이 철의 규율과 이데올로기적 동질성을 갖추지 못한 게 패배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볼셰비키화캠페인이 시작됐다. 상명하복의 규율, 견해의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풍토가 볼셰비키화민주집중제라는 이름으로 확산돼 갔다.

 

17년 혁명의 절정까지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와 다양한 좌파들이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이라는 하나의 당 안에서 협력하고 토론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잊혀졌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모든 나라에서 기존의 사회민주당에서 공산당이 분리해 나오는 것이 당연한 정답처럼 요구됐다. 이것은 카우츠키적관점의 계급 전체의당이라는 개념에 반대하여 새로운 유형의 당을 도입했다는 레닌주의로 정당화됐다. 정작 레닌 자신은 그런 말을 쓰거나 주장을 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국제적 사회주의 운동 속에 하나의 전형적 모델과 경직된 전통이 계속 굳어져 갔다.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레닌과 볼셰비키가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답을 제시했고, 좌파의 임무는 그 원칙과 강령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며, 이에 대한 거부는 배신이라는 관점이었다. 대부분의 조직들이 레닌주의의 진정한 전통을 이은 순혈인가, ‘이단인가로 구분됐다. 그런 좌파들은 1917년 혁명도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낳은 위대한 성과보다는, 레닌이 얼마나 놀랍도록 뛰어나고 현명하게 시의적절한 전략전술을 펼쳤는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 이런 레닌주의조직일수록 분열할 가능성이 높았다. 조직 안에서 이견과 토론이 잘 허용되지 않으니 노선 차이는 분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강령적 순수성을 고집하다보니 불순한 이견을 솎아내서 추방하는 일들이 반복됐다. 결국 서로 비슷한 강령을 가졌지만 여러 개로 나누어진 레닌주의조직들이 서로 자신을 정통이라고 자처하면서 상대를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누가 진정한 계승자인지를 다투면서 서로 기회주의’, ‘개량주의’, ‘멘셰비즘’, ‘부르주아적 일탈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레닌주의 조직들의 공통점은 대중적 기반의 취약, 내부적 민주주의의 부족, 통제나 교체되기 어려운 지도부, 엄격한 내부규율에 대한 집착 등이었다.

 

결국 조직은 갈수록 경직되고 열린 토론도 어려워졌다. 그것은 사회와 현실의 변화에 따라 구체적 분석을 하며 새로운 혁신을 시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왜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대부분의 레닌주의조직들이 결코 볼셰비키와 같은 대중적 정당으로 성장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답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주변화될수록 이런 소규모 좌파조직들은 더욱더 이데올로기적 정통성과 선명성에서 자신들의 존재 의미와 자신감을 찾으려 했고, 그 결과 그들의 사상은 더 경직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새로운 혁신과 재정립을 위한 고민의 단초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 새로운 대안적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해결되지 않는 불평등, 계속되는 전쟁과 전쟁 위험, 환경파괴와 기후변화가 예고하는 대재앙,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극우익 인종주의자들의 득세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등은 위기의식을 더욱 높이고 있다.

 

더구나 착취, 억압, 차별은 어느 하나가 우선이고 중요하다고 볼 수 없을만큼 유기적으로 교차돼 있고 자본주의는 가부장제, 인종주의, 제국주의와 구조적으로 얽혀 있다. 따라서 가부장적이고 인종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모든 피억압 민중과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 식민주의, 계급 착취를 같이 끝내야 한다.

 

이러한 사회주의적인 변혁을 향한 길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는 매우 핵심적이다. 착취와 억압에 고통받는 사람들은 민주적 과정과 토론을 통해서만 현재 체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강력한 공동의 투쟁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적이고 열린 방식을 통해서만 연대를 건설하고 투쟁에서 승리하며 혁명적 대안으로 함께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주의적 이상이 민주주의에 대한 무시와 잘못된 관점 때문에 심각하게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 줬다. 따라서 오늘날 사회주의는 원래 그 자체로 민주주의적인 것’, ‘민주주의가 없다면 그 사회는 사회주의가 아니다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런 실패가 반복되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아가야 한다.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이론과 실천을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노동계급 스스로의 자기 해방’,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해서 변혁의 전략과 전술, 이론 모두를 재구성하고 혁신할 수 있어야 한다.

 

1917년 혁명에서 등장했던 아래로부터의 요인들을 더욱 강화·발전시키는 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기층 민중을 혁명의 주체로 만들고, 그들 자신의 자치기구에 권력이 쥐어져야 한다. 생산과 사회의 민주적이고 자주적 관리는 어떤 이유로도 가로막히지 말아야 한다. 민주적이고 열린 조직만이 현실과 투쟁 속에서 배울 수 있고 대중과 함께 혁명적 대안으로 나갈 수 있다는 통찰에 기반해야 한다. 착취억압받는 대중이 미래에 우리의 지도를 따라서 변혁에 나설 것이라고 믿을 게 아니라, 무엇보다 지금 현실에 존재하는 대중 속에서 그들의 경험과 주장을 듣고 거기서 함께 배우려 해야 한다.

 

이것이 의식성에 대한 포기이고 결국 개혁주의에 타협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틀렸다. 영국의 사회주의자인 루크 쿠퍼는 중앙 집중화된 통제(지도부에 이상주의적인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하는)가 개혁주의를 막아 준다고 상상하지만 그 정반대가 진실이라고 지적한다. “, 엘리트가 아니라 구성원들에 의해 운영되는 완전히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조직만이 개혁주의적 유혹을 성공적으로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은 어떻게 참여적이고 다원적인 형태의 조직과 운동을 통해서 혁명적 투쟁으로 나아가고 사회를 변혁할 것인지 고민하고 이론화시켜야 한다. 어떤 조직에서든 아래로부터 통제와 민주주의가 우선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개방적이고, 다원적이며, 비위계적인 조직을 만들어야하고 민주적 선출과 통제, 투명한 보고와 공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마르크스나 레닌이든 전술, 전략, 심지어 원칙까지도 성역이나 금기가 없는 열린 토론과 혁신적 재구성의 대상이 돼야 한다. 이견을 제시할 자유와 열린 토론이 가로막히지 않아야 투쟁하는 대중들 속에서 듣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적 대안이 진정으로 대중적 설득과 동의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설득되거나 동의되지 않는 상황에서 행동통일의 강제가 없어야 하며, 결정에 따르지 않을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

 

사상적으로 단일한 당이 혁명을 지도한다는 관념, 특정한 집단만이 혁명의 주체라는 관념도 벗어나야 한다. 혁명은 아래로부터 기층 민중이 협력과 토론 속에서만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또 착취억압받는 대중들 모두가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들 중에서 특정 집단만이 주체가 되고 나머지는 보조적 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세력이 더 많은 권한과 권력을 갖게 됐을 때,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자본과 권력에 적용했던 엄격한 잣대를 자신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게 아니라 대중에게 돌려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엄혹하고 힘든 상황일수록 불가피하다며 후퇴하지 말고 이런 방향에서 답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그런 상황일수록 상층의 소수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 다수 대중의 집단적 지혜와 민주적 자치에 문제를 맡겨야 한다.

 

러시아 혁명의 변질에 대해 당대에 가장 날카롭게 비판했던 로자 룩셈부르크도 이 점을 강조했다. ‘혁명적 이상주의는 자유와 민주주의 속에서만 발현될 수 있기에 그것을 제한하는 것은 진보의 원천을 차단하는 것이라는 비판이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는 훌륭한 사람이 가져다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니다.

 

친정부 인사와 집권당을 위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다. 어떤 당도 현명함을 독점할 수 없고, 답을 서랍 속에 가지고 있을 수 없다. 끝없는 실험과 시행착오, 토론 속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어떠한 순간에도 인간적 가치와 인간에 대한 존중, 고통에 대한 공감이 유지돼야 한다. 인간은 혁명이라는 역사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재료가 아니라 그 자체가 스스로 해방돼야 할 주체이고 목적이기 때문이다.

 

(기사 등록 202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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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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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다시보기 2020.08.21 16: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