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이 글은 2019년 5월 ‘맑스코뮤날레’의 ‘마르크스와 대안 민주주의’ 세션에서 필자가 발표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지난 1년 동안의 상황 변화들이 반영돼 있지 않고 결과적으로 일부 어긋난 예측들도 볼 수 있다. 특히 지난해 여름부터 진행된 검찰대란 국면과 그 이후의 총선 결과 등이 그렇다. 그러나 기본적 큰 줄기와 취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글을 더 보강하고 확장해서 올리려고 미루다가 시간만 지나서 일단 올린다. 이 글에 있던 많은 각주들은 편의상 생략했다. 글이 매우 길어서 2번에 나누어 올린다. 이 글은 첫 번째이다.]
2016년 말부터 2017년 초까지 거의 매주 수십~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서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촛불혁명’의 주요한 화두는 ‘민주주의’였다. 그 시기에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이명박근혜’ 정부의 시도에 대한 분노를 거리에서 폭발시켰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상황에서도 민주주의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아직도 반민주적 적폐세력이 기본적 개혁조차 가로막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런 세력이 ‘독재타도 민주수호’를 외치면서 장외 투쟁을 하고 있는 기막힌 상황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도 곳곳에서 극우익 인종주의 우파와 신나치가 등장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한편 미국의 버니 샌더스와 영국의 제레미 코빈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좌파들이 성장하면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말하고 있지만 아직 그 실체는 명확하지 않다.
또 기존의 사회주의적 변혁 시도가 민주주의의 부족이나 결여 때문에 실패했다는 문제의식은 기본적으로 공유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사회변혁 시도는 어떠해야 하고 민주주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함께 고민하고 토론해봐야 한다.
민주주의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는 아테네 등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에서 유래했다. 그리스어인 ‘데모스(demos: 인민)’와 ‘크라토스(kratos: 지배)’의 합성어인 민주주의(democratia)는 ‘인민의 지배’라는 뜻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한계는 분명했다.
그리스의 민주 정치는 노예와 여성, 그리고 대다수가 상인이었던 비(非)시민 거주자들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의 민주 정치는 재산(그리고 노예)이 부자들의 손에 집중되는 것도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제한적인 ‘민주주의’마저 그후 오랫동안 잊혀졌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유럽에서 봉건제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비롯한 것이다. 봉건제 사회의 지배자는 이런저런 황제ㆍ왕 들이었고 이들은 1642년의 영국 혁명, 미국 독립 전쟁, 1789년의 프랑스 혁명, 1848년 유럽 혁명 등을 거치면서 권력을 잃어가게 된다.
봉건제 아래서 조금씩 힘을 키워가던 신흥 부르주아지(자본가)들과 그들을 대변하는 지도자들이 이런 혁명들을 이끌었다. 이들은 봉건 지배자들에 맞서는 투쟁에 기층 민중들의 지지와 동참을 끌어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제도들 ― 법치, 평등권, 언론의 자유, 대의제, 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책임지는 정부 ― 이 탄생했다. ‘자유민주주의’(부르주아 민주주의, 또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는 처음부터 근본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부르주아지들은 결코 일관되고 철저하게 민주주의를 추구하지 않았다. 봉건제에 맞서던 초기에 부르주아지는 혁명적이었지만 낡은 봉건질서가 해체되고 자신들이 새로운 체제의 지배계급이 되기 시작하자 부르주아지는 소심해졌다.
특히 자본주의 발전 속에 “부르주아지의 무덤을 파는 자들”인 노동계급이 성장할수록 부르주아지의 보수성은 커져갔다. 유럽 곳곳에서 봉건적 구체제의 지배자들에 맞선 투쟁이 일어났던 1848년 혁명 때 독일 부르주아지의 배신을 목격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너무도 굼뜨고, 무르고, 느리게 발전했기 때문에 … 프로이센의 부르주아지는 현대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계급이 아니었다. … 모종의 신분 수준으로 전락한 그들은 … 처음부터 민중을 배신할 작정이었다.
낡은 질서의 파괴자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의 수호자가 된 부르주아지에게 자유는 갈수록 상업과 거래의 자유를 뜻하게 됐고 민주주의는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을 배제한 그들만의 민주주의가 됐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1871년 파리 코뮌 당시에, 민주공화정보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독재가 자본가들의 이익과 열망에 더 부합한다고 지적했다.
상대적 후진국의 부르주아지와 민주주의
상대적 후진국에서 뒤늦게 자본주의 발전을 시작한 부르주아지는 훨씬 더 보수적이고 민주주의에 적대적이었다. ‘역사의 무대에 뒤늦게 등장한’ 상대적 후진국의 부르주아지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조바심에 시달렸다.
그래서 이들 나라의 부르주아지는 더 이상 민주주의 수호자가 아니었고 대체로 기꺼이 권위주의나 독재를 지지했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러시아의 부르주아지는 너무나 소심하고 나약해서 유럽의 부르주아지 선조들처럼 민주주의 혁명을 지도할 수 없는 반면 노동계급(프롤레타리아)만이 그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조아지가 한 계급으로서 차지하는 지위 자체 때문에 부르조아지는 민주주의 혁명에서 반드시 일관성이 없게 된다. 프롤레타리아가 한 계급으로서 차지하는 지위 자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는 일관성있는 민주주의자가 된다. 부르조아지는 프롤레타리아를 강화시킬 우려가 있는 민주주의적 진보를 두려워 하여 뒷걸음질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쇠사슬을 빼고는 잃을 게 없으며 민주주의에 힘입어 오히려 온 세상을 얻을 수 있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 혁명에서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노동계급이 민주주의 혁명을 주도하게 되면 단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구들에서 멈출 이유가 없고 멈추지도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동계급의 주도 아래 민주주의적 과제와 사회주의적 과제가 결합되는 연속혁명론을 주장한 것이다.
이후 역사에서도 민주주의적 과제와 투쟁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소심한 태도는 거듭됐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진전은 매우 더뎠다. 주요 국가들에서 성인 남녀 모두에게 보통선거권이 부여된 것은 2차 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미국에서는 1970년대 초에 와서야 흑인에게 투표권이 부여됐다. 이런 민주주의의 진전도 주되게 아래로부터 노동자․피억압 민중의 투쟁에 의해서 가능했다.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은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절실히 필요하다. 자본가에 맞서 개인적으로 싸울 수 없는 노동자들은 결사의 자유가 필요하다.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주장할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필요하다. 집단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집회와 시위, 파업의 자유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부르주아지 자신의 투쟁이나 부르주아지와 동맹한 투쟁을 통해서 얻은 성과이기보다 부르주아지와 독립적인, 심지어 부르주아지와 맞선 투쟁의 성과라는 사실은 한국의 역사에서도 드러난다.
한국 사회와 반민주적 권위주의
일제에서 해방된 이후 한국(남한)이 북한과 달리 민주주의를 도입했다는 지배적 관념은 사실이 아니다. 해방후 미군정 하에서 만들어진 한국 국가는 처음부터 경찰 국가였다. 한국 군대는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던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로 채워졌다. 일제의 잔재와 친일파들을 청산하고 독립을 성취하고자 하는 다수 대중의 열망은 짓밟혔다.
소수 친일파 출신 지주와 부자들은 경찰과 서북청년단같은 우익 깡패들을 이용해 가난한 민중들을 억눌렀다. 1947년 5월에 한국을 여행한 미국시민자유연맹 의장 로저 볼드윈은 친구들에게 “그 나라는 문자 그대로 경찰 통치와 사적 폭력의 손아귀에 쥐어 있다”고 했다.
이승만은 1948년에 제주도에서 3만여 명을 학살하면서 정권을 세웠다. 그리고 제주 4․3 항쟁과 10월 ‘여순반란사건’ 등을 통해 강대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과 분단 시도에 저항하는 민중 저항이 거세게 타오르자 이승만 정부는 일제의 악명높은 ‘치안유지법’을 고스란히 베껴서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최장집 교수는 “이승만 정권은 형식적 서구 민주주의로 포장된 민간독재”였다고 평가한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후원과 지원을 바탕으로 한 억압적 국가기구로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 정권은 4.19혁명으로 붕괴한다. 하지만 4.19혁명 이후 힘의 공백 상태를 뚫고 박정희 군부의 반혁명이 성공했다. 5.16 쿠테타 이후 정치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군부와 관료, 영남에 기반한 정치인, 자본가들이었다.
국가 주도에 의해 강력한 대규모 사적 자본가들(재벌)이 생겨났고 그들이 국가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국가 관료와 사적 자본가 사이의 특혜와 상납, 보호와 후원 등 각종 부패한 유착 관계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은 몇 가지 특징을 보여 줬다. 첫째, 경제와 정치가 외형상으로 크게 구분되지 않고 융합돼 있었다. 둘째, 노동계급 조직들이 극심히 탄압 당했고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셋째, 자유민주주의도 없는 일당 독재였다. 야당 정치인과 일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도 억압받고 자유를 제약당했다.
한국의 부르주아지는 상대적 후진국의 수많은 부르주아지처럼 이런 권위주의에 대해 결코 진지하고 일관되게 반대하지 않았다. 최장집 교수의 지적처럼 한국의 “부르주아지[는] … 오히려 귄위주의 체제가 주도한 경제성장의 중심적인 수혜자들이었다.”
따라서 한국에서 권위주의에 맞서며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투쟁의 동력은 주로 다른 곳에서 나왔다. 그것은 바로 아래로부터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저항이었다.
1987년의 전환점
한국의 권위주의 체제는 1987년 6월 민중항쟁 전까지 큰 변화없이 유지돼왔다. 1972년 ‘유신’때 이 체제는 더욱 폭압적이고 권위주의적으로 재편되었다. 박정희의 암살 이후 1980년 ‘서울의 봄’ 때 이 체제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으나 광주항쟁에 대한 ‘피의 학살’로 다시 가까스로 복원됐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7년 6월의 거대한 민주화 항쟁은 권위주의 체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그리고 그 주역은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청년 학생들이었다. 6월 항쟁에서 전두환 정권의 후퇴를 목격한 노동자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이어서 자신들의 작업장에서 민주노조 건설과 임금 인상을 위한 투쟁에 나섰다. 7ㆍ8ㆍ9월 ‘노동자 대투쟁’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 자유주의 야당과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들도 함께 했다. 군부의 억압에 반발하며 자신들도 정치권력에 접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주류야당 정치인들이 이런 사적 자본가들을 대변하며 군부독재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들은 민주주의 투쟁에서 일관되지 않았다. 특히 노동계급의 투쟁이 분출할수록 이들은 뒷걸음치며 보수성을 드러냈다.
6월 항쟁은 1945년 이래 한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권위주의 체제가 자유민주주의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우선 지배세력은 권력의 안정화를 위해 권력기반을 확대했다. 기존의 군부, 영남 출신 관료와 정치인 뿐 아니라 부르주아 야당과 자유주의 세력에게도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무엇보다 아래로부터 강력한 도전에 직면한 지배세력은 민주노조와 학생회 등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조직 건설과 활동을 어느 정도 허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배전략과 방식의 변화를 보여 준다. 그동안 ‘강제와 폭력’을 통한 지배가 우선시됐다면 이제는 ‘설득과 동의’를 통한 지배가 더 중요해졌다.
이런 변화는 1987년에 시작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단선적이지 않았고 저항과 탄압이 맞물리며 일진일퇴 속에 조금씩 전진한 과정이었다. 학생들의 시위와 노동자들의 파업이 솟구쳤던 ‘91년 5월 투쟁’, 1996년에 전두환․노태우 구속을 강제한 학생들의 거대한 투쟁, ‘50년 만의 정권교체’로 이어진 1997년의 민주노총 총파업...
이런 아래로부터 대중투쟁의 동력이 이 나라에서 결국 일당 독재를 종식시키고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노무현 정권의 등장도 2002년 연말 한국을 들끓게 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항의 시위, 2004년 탄핵 반대 촛불 시위의 결과였다.
그런데 이 과정은 또한 권위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대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들의 타협 과정이었다. 1990년 집권당인 노태우의 민정당과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 간의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이 탄생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1997년 대선 때 김대중의 국민회의와 박정희 군사독재의 후예인 김종필의 자민련이 손 잡은 DJP 연합도 한 사례다.
김대중의 민주당은 노무현 정부 출범 후 열우당이 떨어져 나가면서 분리됐는데, 민주당은 2004년 한나라당․자민련과 손잡고 노무현 탄핵에 동참했다. 이라크 파병, 한미FTA 등을 추진하던 노무현 정부가 “정책적인 차이가 없다”며 2006년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던 것도 타협 시도였다.
이런 타협 과정을 통해서 자유민주주의조차 마뜩치 않은 귄위주의적 지배자들이 계속 권력에 참여하거나 영향을 미치며 반동을 모색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민주정부’ 등장과 10년간의 집권을 평가해야 한다.
‘민주정부’ 10년과 민주주의
‘민주정부’의 등장은 1987년 이후의 변화로 부르주아 야당과 중간계급 일부도 권력을 공유하게 된 결과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일당독재 기간 동안 권력에서 소외돼 있던 지배계급 개혁파(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에 기반한 정부였다. 특히 노무현 정권은 집권 초기에는 지배계급 개혁파와 중간계급 뿐 아니라 일부 시민단체와 노동조합 지도자들까지 아우르는 다계급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
‘민주정부’ 아래서 1987년 이후 지배전략의 변화는 더 두드러졌다. 채찍(‘강제와 폭력’)보다는 ‘동의와 설득’을 통한 통치가 더 중요해졌다. 노사정위원회나 각종 위원회를 만들어서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 지도자들을 지배구조 내로 끌어들이는 데도 더 적극적이었다.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 금지 조항도 없어져 노동자 정당의 성장과 국회 진출 길도 넓혀졌다.
한국에서 ‘민주정부’의 등장과 자유민주주의로의 이행은 대단히 불안정하게 진행됐다. 그 이유는 첫째, 민주개혁의 열망을 한 몸에 안고 선출된 ‘민주정부’가 선출되지 않는 진정한 권력자들의 민주개혁 저항 압력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진정한 권력은 선출된 자들이 아니라 선출되지 않은 자들 - 재벌 총수, 고위 관료, 언론사주, 군장성, 경찰 총수, 법관 등 - 에게 있다. 한국의 정치․경제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이 진정한 권력자들은 귄위주의적 통치 방식에 익숙하기에 민주개혁을 뒤집으려 했다.
둘째, 이 과정에서 지배계급 내 분열과 갈등이 심각했다. 수십 년 간 권력을 독점해 온 지배계급 보수파(귄위주의적 부르주아지)와 새롭게 권력에 접근하게 된 지배계급 개혁파(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사이의 쟁투는 흔히 파괴적인 형태로 진행됐다. 서로 검찰 등 국가기구를 이용해 상대방을 공격하면서 심각한 정치 위기가 발생했다. 노무현의 죽음처럼 그것을 극적으로 드러낸 사건도 없을 것이다.
셋째, 자유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함께 진행됐다. 예컨대 IMF 때 집권한 김대중 정부에서 노사정위가 제일 먼저 통과시킨 것은 정리해고제였다. 노무현 정부에서 노사정위도 비정규직 악법의 통로 구실을 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급속한 속도로 양극화를 벌렸고 이 때문에 계급 타협 시도는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다.
이런 불안정성과 모순, 긴장들 때문에 ‘민주정부’에서도 자유민주주의로의 완전한 이행은 여전히 어려웠고 민주주의는 정체하거나 심지어 후퇴하기도 했다. 결국 ‘민주정부’ 10년의 경험은 자유민주주의의 완성조차 지배계급 개혁파를 지지하거나 의존하는 것을 통해서는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줬다.
‘이명박근혜’ 10년의 반동과 촛불의 반격
‘민주정부’ 10년이 낳은 가장 역설적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박근혜 정부로의 연장이었다. ‘민주정부’의 기대와 약속을 져버린 행보가 기층 민중들에게 커다란 실망과 환멸을 낳았고, 이런 상황에서 “잃어버린 10년” 동안 와신상담하던 우파가 반사이익을 누리며 권력 탈환에 나섰다.
물론 ‘민주정부’들에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반민주적인 우파를 지지할 순 없다고 본 많은 사람들이 당시 대선 때 기권을 택했고 이것은 사상 최저의 대선 투표율을 낳았다. 그래서 이명박은 유권자중 겨우 30퍼센트의 지지를 얻어 당선했다.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곧장 1987년 이후 아래로부터 투쟁에 힘입어 전진해 온 민주주의 성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박근혜 들어서 더욱 본격화됐다. ‘이명박근혜’ 정부는 한국의 전통적인 대자본가 계급과 권위주의적인 부르주아지에 핵심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이명박근혜 정부는 노동·민중 운동이 1987년 이후 투쟁으로 쌓아 온 민주적 성과들을 허물려 했다.
2008년부터 세계를 휩쓸며 아직도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경제 위기는 ‘이명박근혜’ 정부의 민주주의 공격을 더 가속화시켰다. ‘이명박근혜’ 정부는 경제 위기 고통전가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그에 대한 저항을 짓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알다시피 2016년 연말부터 2017년 상반기까지 한국 사회를 뒤흔든 거대한 ‘촛불혁명’ 속에서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우파적인 주류 지배계급의 심각하게 분열했다.
이것은 한국 자본주의와 국가가 경제적·지정학적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관련깊었다. 한국 경제는 계속 침체해 갔고, 지정학적으로도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이 커지면서 갈수록 난처한 처지로 빠져들고 있었다.
우파적 지배자들은 박근혜의 대응이 이런 위기와 불안정을 해결하긴커녕 악화시킨다고 보면서 불만을 키워 갔다. 최순실 세력이 권력과 이권을 독점하면서 지배계급 내부의 불만은 더 증폭됐다. 더구나 박근혜 정권과 정책에 반대하는 아래로부터 저항이 꾸준히 계속됐다.
이미 곳곳에서 인화요인들이 쌓이고 있던 상황과 조건들 속에서 최순실에 관한 폭로가 방아쇠 구실을 하면서 ‘촛불혁명’이 터져나왔다. ‘촛불혁명’ 5개월간 1700만 명이 만들어낸 아래로부터 힘은 대단했다. 서울구치소에 최고의 정치권력자(박근혜), 최고의 경제권력자(이재용), 최고의 공안권력자(김기춘)가 모두 같이 수감돼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모든 것은 그 추운 겨울에, 멀리 지방에서도 주말마다 서울로 올라오던 보통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촛불은 사회경제적 체제를 뒤바꾼 ‘사회혁명’은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권력과 통치방식의 변화를 낳는 ‘정치혁명’에 가까웠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은 탄탄해 보이던 권위주의 정권이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급속하게 무너진다는 역사적 교훈을 다시 보여 줬다.
문재인 정부의 등장과 민주주의
우파와 주류 지배자들은 대대적 후퇴 속에서도 박근혜를 꼬리 자르며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다. 박근혜 탄핵과 조기 대선 등 ‘2보전진을 위한 1보후퇴’로 시간을 번 후,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한 반격을 시도한다는 게 저들의 위기 탈출 방안이었다.
결국 촛불혁명은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탄핵 인용과 조기 대선, 정권교체, 문재인과 민주당 정권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거대한 투쟁은 차츰 가라앉았고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로 나아간 것이다. 체제의 관리자는 교체됐지만, 기존 지배 질서는 근본적인 타격을 피할 수 있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촛불혁명의 성과로 집권하게 됐지만, 처음부터 자유주의 야당이자 중도우파로서의 한계를 안고 출발했다. 따라서 재벌과 기득권 세력의 압력에 일관되고 철저하게 맞서리라고 기대하긴 어려웠다.
집권 3년차인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면 이런 한계는 계속 드러나 왔다. 그리고 지금,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은 정체하고 있다. 주로 진보적 여론의 반발이고, 그 결과 진보좌파가 득세하는 상황이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해석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지지율은 대체로 ‘남북화해가 안보를 무너뜨리고, 최저임금 인상과 소득주도성장이 경제를 망쳤다’는 프레임 속에 떨어지고 있다. 중도층과 영남권, 자영계층 속에서 더 가파르고, 2030에서는 ‘여성이나 양심적 병역거부자만 챙긴다’며 남성들의 이탈이 특히 두드러진다.
당연히 정당한 대중의 현실적 분노와 불만이 이 현상의 뿌리에 있지만, 그것이 진보좌파의 프레임 속으로 담아지지 않고 있다. 반면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탄핵 이전으로 회복됐고 친박이 부활하고 있다.
잊지 말 것은 자유한국당과 기득권 우파는 정치‧행정권력에서 일부 밀려났을 뿐 경제‧의회 권력의 핵심을 놓친 적이 없다는 것이다.(자본주의에서 진정한 권력은 선출된 가관에 있지 않다) 그 힘으로 이들은 문재인 정부가 소극적으로 추진하던 개혁조차 전부 막아왔다.
우파야당들이 국회과반이고, 여당은 지지율도 떨어진 상황에서 적폐세력과 타협 속에 개혁은 계속 중단되고 있다. 제조업 위기에 세계적 경기하락까지 닥치자, ‘소득주도성장’은 사라지면서, 경기침체의 책임을 조직노동에게 떠넘기는 시장주의 해법으로 나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이처럼 적폐세력과 정면대결하기 보다 타협을 거듭 한다면, 소수자 혐오를 선동하는 이언주같은 신우파가 성장해, 여전히 강력한 종북혐오에 기반한 구우파와 힘을 합치며 더욱 강력해져 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반우파 민주연합이 대안인가?
이런 상황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도, 즉 적폐세력과 그것을 청산하려는 민주세력의 대립이라는 구도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누구보다 민주당 자신이 이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미 정의당은 지난 4월 창원 재보선에서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해서 가까스로 승리했고, 내년 총선에서는 더 광범하고 전략적인 선거연합이 예상되고 있다. 단지 사안에 따른 일시적 제휴가 아니라 선거연합이나 공동정부같은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것은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지금 가장 중요하고 이 구도에서 민주당이 일관되게 ‘민주’에 속한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앞서 봤듯이 민주당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들은 1987년 이후 자유민주주의로의 이행 과정에서 일관된 민주화 세력은 아니었다. 특히 ‘민주정부’ 10년 동안 이들은 권력을 잡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노동자․민중을 억압했고 이를 위해 민주주의를 제약하기도 했다.
권력과 명예를 나눠 가졌던 이들은 10년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겠지만, 그때 역시 영광만 있었던 게 아니라, 부패와 무능, 배신이 있었으며 시장의 폭력이 있었고, 많은 서민들의 고통이 있었다.
이것은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낡았다’거나 ‘민주주의 투쟁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여전히 불충분하고 따라서 자유민주적 기본권을 위한 투쟁도 여전히 중요하다.
문제의 핵심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여전히 중요한데 그것이 단지 민주당에 기대하고 의존하는 방식으로 가능할 것이냐다. 민주당에 의존만 하다가는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진정한 동력인 아래로부터 민중의 힘에 주목하거나 발전시키지 못할 수 있다.
대중투쟁은 민주당의 국회 내 활동을 보조하는 수단에 머무르게 되고, 민주주의 투쟁과 생존권 투쟁 등을 연결시키기도 어려워진다. 그러다보면 결국 민주주의 투쟁이 실패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이것은 최근에 선거법과 공수처법의 패스트트랙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이기도 하다. 법안 자체도 민주당이 보수야당과의 절충과 타협 과정에서 알맹이들이 사라졌고, 그것마저 자유한국당은 결사 저지했는데, 통과 자체도 불투명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당과 전술적 제휴조차 말아야 하는가?
물론, 이로부터 민주주의 투쟁 속에서 민주당과의 어떠한 공조도 있을 수 없다는 또 다른 잘못된 결론을 끌어낼 필요는 없다. 이런 또다른 편향적 태도를 견지하는 급진좌파들은 보통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를 자신들의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막상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어떤 것이든 타협 일반의 허용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 그것은 진지하게 고려하기조차 어려운 어리석은 짓”이라고 이런 태도를 비판했다. “볼세비즘의 온 역사가 유연한 대응, 협조, 부르조아지 정당을 포함한 다른 정당들과의 타협의 사례로 가득차” 있다고 했다.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대립 속에 벌어지는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투쟁에 무관심하면서, ‘현장 투쟁’과 ‘노동자 투쟁’만 강조하는 경제주의적 관점은 부적절하다. 레닌도 이런 경제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노동자들이 모든 종류의 압제․폭력․학대 — 어떤 계급이 당했건 간에 — 에 대응하는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더욱이 사회민주주의 관점으로 대응하는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노동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정치의식이 될 수 없다.
진보좌파는 정치개혁과 검찰개혁 등 민주주의를 위한 과제들에 누구보다 앞장서 나서야 한다. 대중적 운동과 기구를 만들어 더 일관되고 효과적인 민주주의 투쟁을 만들어가야 한다. 민주주의 투쟁을 확대하려고 노력하면서, 임금․고용․복지 등을 둘러싼 생존권적 요구들을 민주주의 요구들과 결합시켜야 한다.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과 차별에 반대하는 요구들과도 연결시켜야 한다. 이런 결합은 민주주의 투쟁과 생존권 투쟁, 차별과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 모두의 확대 발전을 가져 올 것이다.
운동은 한 방향으로만 즉,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방향으로도 움직인다. … 정치투쟁이 확산되어 명확해지고 강화됨에 따라, 경제투쟁은 후퇴하기는커녕 오히려 확산됨과 아울러 더욱 조직화하고 강화된다. 이 두 가지 투쟁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 정치 행동의 물결이 고양된 뒤에는 언제나 수많은 경제투쟁의 싹을 틔우는 기름진 퇴적물이 남고, 또 그 역도 마차가지이다.
그래서 어떤 투쟁과 요구가 더 중심이고 우선이다라는 식의 일부 좌파들의 주장은 부적절하다. 투쟁의 결합과 발전은 착취, 억압, 차별을 통해 모든 기층 민중의 삶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사회와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도전이 나아가야 할 대안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그런 도전은 우선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 국가보안법 철폐, 차별금지법 제정, 사형제 폐지, 국정원과 정보경찰 등 보안기구 폐지, 검찰 등 억압기구 개혁, 배심원제 도입과 사법개혁 등을 통해 자유민주적 기본권부터 제대로 보장받아야 한다. 또 국민투표, 국민소환권, 국민발안권 등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의 도입도 필요할 것이다.
선출된 자들이 유권자의 뜻을 거스를 때 그들을 소환할 수 있도록 하고 중요한 정책은 국민 다수의 지지로 직접 발안하거나 투표를 통해 결정하자는 주장은 타당하다. 자본주의에서는 소수의 선출되지 않는 재벌 총수, 고위 관료, 언론사주 등이 정치․경제 권력을 독점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정치인들은 유권자가 아니라 이 진정한 권력자들에게 충성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아무런 결정권이 없거나 결국 이들의 압력에 굴복한다.
그래서 ‘정치적‧형식적 민주주의’에 머무르지 말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는 “민주적 성격을 보다 많이 갖는 정부일수록 보통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권익보다는 …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를 더욱 강력하게 추진”한 결과, 그동안 “절차적 수준에서 민주화와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 사회경제적 수준에서 민주화는 퇴보했고 현재에도 계속 퇴보하고있다”고 평가한다.
어떤 정당과 정치인이 정부와 국회에 들어가도 결국 삼성의 하수인이 되는 현상은 사회경제적 차원의 민주주의 후퇴를 극명히 보여 준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선거나 의회를 통해 정치권력에 영향을 미칠 정치적 민주주의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권력에 접근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도 필요하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뿐 아니라 그것의 뿌리인 자본주의 자체가 실질적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자본주의에서 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생산수단과 권력기관을 소유․통제하는 소수의 지배계급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은 갈수록 소수 거대 기업에게 부와 권력을 집중시키고 정부는 그런 거대기업과 유착해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구실을 한다. 국가 권력과 유착해서 사회경제적 권력을 휘두르는 대재벌 아래서 민주주의는 갈수록 껍데기가 된다.
더구나 첨예한 경제․사회 위기 때 자본주의 사회는 얼마든지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한다는 것을 파시즘과 쿠데타, 독재로 얼룩진 역사가 거듭 보여 주고 있다. 독일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히틀러의 파시즘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오늘날 미국이나 유럽 곳곳에서 나타나는 인종주의적 극우파와 신나치의 급성장은 두려움을 자아내고 있다. 우리의 선택은 파시즘같은 역사의 야만이냐 진정한 민주주의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기사 등록 20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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