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민족해방과 볼셰비즘의 재검토: 변경에서의 관점 - 2

에릭 블랑(Eric Blanc)

번역: 두견

 


이 글은 오랫동안 정설로 굳혀져 있던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중요한 신화에 도전한다. 그것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소수민족의 억압과 민족해방의 문제에서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며 이론과 전략을 발전시킨 선구자라는 주장이다. 이 논문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러시아 변경지대의 사회주의자들이 그런 구실을 했고 레닌과 볼셰비키는 그것에 많은 부분 대치되는 입장을 취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의 필자인 에릭 블랑은 미국 민주적 사회주의자들(DSA) 소속의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활동가이며, 역사사회학자로서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다양한 신화를 해체하는 논문과 저작, 글을 써 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아가 적극적인 활동가로서 미국에서 교사파업에 연대하고 새로운 좌파적 정치대안을 건설하는 문제에도 매우 활발하게 개입하고 있다. 분량이 길어서 2번에 나누어서 싣는다. 이 글은 두 번째이다.

 

출처:

https://johnriddell.com/2014/05/20/national-liberation-and-bolshevism-reexamined-a-view-from-the-borderlands/

 


폴란드 사회당(Polish Socialist Party)의 메달

 

 

<1편에서 이어짐>

 

클라라 제트킨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모두와 긴밀히 협력했던 핀란드의 사회주의 및 여성 노동자 운동의 중심적 지도자, 힐자 페르시넨(Hilja Pärssinen)이 지적했듯이 핀란드 여성들이 사회주의자들의 주도 아래서 참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1899년에 시작된 러시아화에 맞선 민족적 투쟁과 1905년 혁명의 총파업에서 그들의 핵심적인 역할 때문이었다.

 

폴란드는 1905년 말에 광산 지역에서 일어난 6월의 로지(Lodz) 반란과 노동자 통치의 확립에서 드러났듯이 제국 안에서 가장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보여줬다. 무엇보다도 극적인 것은 조지아와 라트비아의 사건이었는데, 이 사건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노동자, 농민, 농장 노동자들의 대규모 격변을 주도했고, 그 해 말까지 시골의 많은 지역과 많은 작은 마을에서도 권력을 장악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변경지대에서 1905년의 급진주의와 그 깊이는 볼셰비키들이 농민들의 혁명적 잠재력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사상과 같은 주요 역사적 신화에 도전한다. 사실, 지방의 혁명에서 그루지야와 라트비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도성은 심지어 러시아 사회혁명당보다도 더 멀리 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볼셰비키들은 1917년 이전 어느 때보다도 농민이나 농장 노동자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루지야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스필카’(Spilka) - 비록 우크라이나 변두리에서 다소 더 작은 범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 모두 토지 "시유화"에 대한 멘셰비키의 요구를 지지했다.

 

그러나 내가 그 근거를 읽은 것에 따르면, 농업 혁명에서 이러한 정당들의 성공은 그들의 공식 강령(라트비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공식적인 농업 강령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의 결과가 아니라 변두리에서 조직하려는 헌신의 결과였고, 지역의 요구를 유연하고 비교조적으로 표현한 결과였다.

 

변방의 격변은 더 나아가 1905년 혁명의 패배가 짜르 정부의 우월한 군사적 힘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역사학적 합의에도 도전한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190512월에 스스로 저지른 오류가 아니라 농민군의 총검이라는 실질적인 힘에 의해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내가 앞으로 쓰게될 논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 해석은 중요한 역사적 증거와 모순된다. 그리고 혁명적 리더십이라는 "주관적인 요소"의 방어될 수 없는 묵살을 전제로 한다.

 

190510월 말과 11월에 전제정치는 대체로 마비돼 있었고 전복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짜르의 '10월 성명'의 선언은 변경지역(전부는 아니었지만)에서 특히 광범위한 병영 반란들을 촉발시켰지만, 제국의 모든 주요 도시의 사회민주당과 사회혁명당 조직들은 무장 봉기를 조직하기 위한 어떤 심각한 조치도 취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대규모 시위를 불러들여 군대를 이기기 위한 도전과 시도를 하지 못했다.

 

라트비아 사건의 한 참가자가 회상했듯이, "군대까지도 당신 편"에 서 있었기에 "아마 가능했을 텐데" 그러나 "그 순간을 놓쳤다." 철이 뜨겁게 달아오른 순간에 혁명가들이 타격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권은 결국 주도권을 되찾고, 군대에서 어느 정도 기강을 재정립하고,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지도자를 체포할 수 있었다.

 

정부의 주도권 회복은 사회주의자들이 봉기에 대한 준비가 가장 덜 된 제국의 주요 도시인 모스크바에서 12월에 조율되지 않은 거리 싸움을 유발했다. 그 결과, 모스크바 전투의 격퇴는 제국을 가로지르는 반란 운동의 사기가 저하시켰고 혁명은 사라졌다. 1905년의 각성 이후에 사회주의자들의 보다 긴밀한 협력에 대한 열망이 유대인 분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왕국 사회민주당(SDKPiL), 라트비아 LSDSP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과 통일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당은 민족 조직들이 그들의 구분되는 조직, 지도력, 정책을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중앙주의적이기보다 연방주의적이었다.

 

조직들 간의 근본적인 차이점들은 해결되기보다는 옆으로 치워졌다. 따라서 1906년의 통합대회는 RSDLP 강령과 전체적으로 모순되더라도, 중앙집권화 원칙을 확인하면서도 동시에, 변경지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위해 서로 구분되는 정책과 조직구조의 보존을 승인했다. 예를 들어, 분트와 채택한 통합 협정은 그것이 "지역적 틀에 의해 그 활동에 제약이 없는... 유대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민주주의적 조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비영토적 정당조직에 대한 RSDLP의 일반적인 반대를 확인했다.

 

볼셰비키들은 일반적으로 멘셰비키의 왼쪽에 있던 민족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내부 파벌 싸움에서 핵심 동맹이었기 때문에 이 느슨한 틀을 수용했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민족적 기반은 여전히 좁았다. 1907RSDLP 당대회 대표자의 78%가 러시아인이었다.

 

문제가 된 것처럼, 그들은 민족 강령의 업데이트를 자제했고 심지어 1907년 당대회에서 이 주제에 대한 토론을 여는 것조차 반대했다. 레닌과 그의 동지들은 "정통"이라는 그들의 모든 주장에도 불구하고, 1905년에 러시아가 "연방국가, '러시아 합중국'“으로 변모할 것을 분명하게 요구한 카우츠키에 뒤쳐졌다. 연방주의에 대한 볼셰비키의 계속되는 적대감을 감안할 때, 카우츠키의 글을 러시아어로 처음 출판한 것이 분트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전쟁 이전의 토론

 

1912년 이후에야 레닌과 그의 동지들 중 몇몇은 그들의 민족 정책을 재고하기 시작했는데, 분파적 발전이 이 문제를 다시 논쟁의 중심으로 밀어넣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민족적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특히 평당원들 사이에서는 멘셰비키 청산주의자들의 개혁주의를 거부하고 "비분파적"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계속 지지했다.

 

그러나 이들 조직들 중 어떤 조직도 1912년에 열린 청산주의자들과 결별을 위한 볼셰비키와 당-멘셰비키의 프라하 당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몇 달 뒤 주요 변경지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트로츠키, 멘셰비키들이 주도한 비엔나 "8월 블록" 회의에서는 민족-문화적 자치권(영토를 불문하고 모든 민족을 위한 자율적 문화기관 설립 요구)이 당 강령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결의했다.

 

이러한 전개에 대응하여 레닌은 그루지야 출신의 조셉 스탈린을 포함한 비교적 소수의 변경지대에서 온 볼셰비키 간부에게 정치적 반격의 일환으로 민족문제에 관한 글을 쓰도록 했다. 1913년과 1914년에 레닌은 그 시기에 대부분의 민족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포함한 민족-문화적 자치권의 지지자들과 룩셈부르크 지지자들을 직접적 대상으로 해서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첫 번째 이론적 논문을 발표했다


레닌의 전쟁 이전 논문들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발전이었다. 20년 동안의 상대적인 묵살 끝에, 지역적 자치, 언어권리의 증진, 러시아 우월주의와의 투쟁에 대한 그의 새로운 지지와 함께 민족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의 큰 변화였다. 그러나 레닌의 새로운 입장이 모든 동료들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는 사실과 결합된 정치적 약점들은 그들의 기반을 넓히려는 볼셰비키들의 시도를 계속해서 약화시켰다. 특히 세 가지 이슈가 두드러진다.

 

첫째, 이 시기의 볼셰비키 저술은 '자본주의의 발전'이 민족적 분열을 체계적으로 해체한다는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스탈린은 "사람들의 민족적 차이와 반목은 매일 점점 사라지고 있다"<공산당 선언>의 주장을 찬성하며 인용했다. 레닌도 비슷하게 강조했다. "민족간 장벽을 허물고, 민족의 구분을 없애고, 민족들을 동화하려는 자본주의의 세계사적 경향은 매 10년마다 점점 더 강력하게 나타나며,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바꾸는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이다."

 

이러한 근거로 레닌은 우크라이나 노동자들의 러시아 짜르 체제로의 지속적인 동화는 자본주의 성장의 "의심할 바 없이 진보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레닌은 우크라이나 민족국가의 탄생이 역사적 가능성임을 인정하면서도 "대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노동자들의 '동화'의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성격은 미국에서 민족들을 분쇄하는 것의 진보적 성격만큼이나 확실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분석과 연계하여 레닌과 스탈린은 지배받는 민족이 민족 문화를 방어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반동적 발현이라고 비판했다. 이 몇 년 동안에 결국 볼셰비키 편에 서게 된 유일한 변경지대의 조직으로서 라트비아 LSDSP에 있는 볼셰비키의 동맹자들조차도, 레닌이 1914년 당대회를 위해 작성한 강령 초안에서 민족 문제에 대한 레닌의 모든 공식들을 잘라냈다


민족 문제에 대한 전쟁 이전 논쟁의 역사학은 대개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자인 오토 바우어의 이론에 대한 지지나 반대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짜르제국 변경지대의 가장 중요한 기여가 뚜렷한 지향점을 형성했다는 점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바우어나 볼셰비키 모두와 달리, 많은 민족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영토적 민족 해법과 탈영토적 민족 해법을 결합할 필요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본주의로 인해 민족적 분할이 해소되었다는 볼셰비키의 주장은, 사회주의가 출현함으로써 민족은 더욱 굳어질 영구적인 실체라는 바우어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거부되었다.

 

볼셰비키의 두 번째 주요 약점은 그들의 1905년 이후의 지점으로 되돌아가서 민족 사회민주주의자 조직들의 사실상 연방적 지위를 본 것이다. 조직적 연방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되돌아간 레닌은 한때 비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제국 전체 정당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전러시아'적 사회민주노동자당은 비러시아 민족이 없어도 정당한가? 그렇다. 1898년부터 1903년까지는 폴란드인과 발트해 사람들이 없는 전러시아 정당이었고, 1903년부터 1903년까지는 폴란드인과 발트해 사람과 분트가 없는 전러시아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레닌은 계속해서 연방적인 국가에 반대하면서, 큰 국가들은 진보적이며 예외로서만 해체되어야 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연방의 원칙이나 분권화를 옹호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중앙집권적 국가는 중세적 분열을 넘어서 전 세계가 미래의 사회주의적 통합으로 나아가는 엄청난 역사적 진보를 이루고 있으며, 그러한 국가(자본주의와 분리되지 않고 연계되어 있는)를 통해서만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있을 수 있다.”

 

제국과 민족국가 사이의 차이점을 회피하는 이러한 입장은 정치적 분리의 권리로서 자결권에 대한 그의 정의에 대한 신뢰를 상당히 약화시켰다. 우크라이나 사회민주주의 지도자 레프 유르케비치(Lev Yurkevich)는 큰 국가에 대한 일반화된 지지와 민족자결권은 "상호 배타적인 원칙"이라고 반박했다. 폴란드 독립의 결정적 문제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어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도 폴란드의 분리독립에 반대한다고 폴란드 사회민주당을 비난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이들 사회민주당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강령에 자기결정권의 인정을 포함시킬 필요성을 부인하려고 할 때에만 잘못을 저지른다.”

 

이러한 접근법은 볼셰비키가, 되살아나는 대중적 노동자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훨씬 건강한 폴란드 사회당-좌파(PPS-Left: 그 이름은 폴란드 사회당PPS 다수파가 1906~1907년에 민족주의 분파를 추방한 이후에 채택되었다) 대신에 룩셈부르크 지지자들과의 지속적인 동맹을 맺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볼셰비키파는 정당하지 않게도 그들을 "민족주의자"라고 비난하며 폴란드와 리투아니라 왕국 사회민주당(SDKPiL) 투사들의 한 날개(칼 라덱Karl Radek )와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망명 지도부인 로자 룩셈부르크-레오 요기헤스의 종파주의와 반민주적 압박에는 반대하면서도 민족 문제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지지했다. 폴란드와 보다 일반적으로는 민족해방에 대한 볼셰비키들의 접근방식은, 변경지대들에서 그들의 지지가 주로 반애국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제한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결론

 

제국의 모든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비러시아인들 속에서 볼셰비키의 뿌리, 그리고 그들을 향한 그들의 정책은 1917년의 전야에 현저하게 취약했다. 이것은 분명 중앙 러시아 밖에서 혁명이 패배한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요소였다.

 

볼셰비키들은 독립을 선언한 그루지야에서 권력을 위한 진지한 도전을 하기에는 너무 고립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핀란드에서도 1918년까지 분쇄된 혁명의 과정에서 볼셰비키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사실상 원주민의 지지를 받지 않는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어서 곧 권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실패는 주로 변경지대에서 일어난 장기적이고 파괴적인 내전을 촉진시켰다. 소비에트화는 결국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적군의 개입을 통해 대규모로 수립되었으나 1920년에 폴란드에 대한 적군의 침공은 파멸적인 역효과를 낳았다.

 

유럽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수십 년 동안 예외 없이 짜르 제국의 비러시아 지역을 혁명의 국제적 확산을 위한 중심지로 보아왔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독일(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공동으로 점령한 폴란드의 중요성은 특히 오랜 주제였다. 1904년에 카우츠키가 썼듯이:

 

폴란드 문제도 다시 첨예해질 것이다폴란드인들은 총검을 러시아가 아닌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겨누게 될 것이며, 폴란드가 혁명을 섬기는 범위 내에서 러시아에 맞서는 혁명의 방어막이 되기 보다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으로 운반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러한 투쟁들이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통치를 초래하지 않을까? 아무튼 그것은 유럽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그 정반대의 동역학이 일어났다: 변경지대에서의 패배, 특히 폴란드에서의 혁명의 실패는 전후 혁명 물결의 핵심적 전환점이었다. 1923년 말, 소비에트 정부는 자신들이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좌절의 경험, 그리고 비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소비에트 세력을 구축하려는 노력, 그리고 변경지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이 공산당과 코민테른으로 유입된 경험은 민족 문제에 대한 볼셰비키 접근법의 주요한 수정을 가져왔다.

 

변경지대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처음 주창한 많은 입장들, 변경지대의 연방제 국가와 또는 독립적인 사회주의 공화국에 대한 지원, 동화주의의 거부, 민족문화와 민족학교의 적극적인 추진, 변경지대에서 별도의 마르크스주의 정당 설립 등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정책들은 1930년대 스탈린주의 반혁명 때까지 지속되었던 비러시아인들의 주목할 만한 "민족적 르네상스"를 가능케 했다.

 

요컨대 전체로서 볼셰비키는 초기에 제국의 변방에서 노동자들의 혁명이 패배한 후에야 민족 문제에 관한 심각한 약점을 극복했다. 레닌과 그의 동료들은 결국 민족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많은 접근방식들을 채택했지만,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지연은 혁명을 크게 희생시켰다.

 

볼셰비키가 더 일찍이 이 지향점을 채택했다면, 사회주의 혁명이 비러시아 영토들에서 성공하여 거기서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며 전진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역사적 기록은 스탈린주의의 발흥이 근본적으로 혁명의 고립에 의한 것이라는 트로츠키의 주장을 뒷받침하지만, 그 증거는 이러한 고립이 상당한 정도로 변경지대에서 볼셰비키의 정치적 약점들의 결실임을 시사한다.

 

더욱이,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좌익 반대파를 패배시킨 데 기여한 요소는 후자가 비러시아인들의 요구를 옹호하지 못한 데 있었다. 1923, 트로츠키는 그루지야의 자치권과 관련해 스탈린에게 공세를 가하라는 레닌의 제안을 끝까지 따르지 못한 것으로 유명하다.

 

같은 해, 트로츠키는 변경지대에서 러시아의 지배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저항 운동을 조직한 무슬림들 속에서 볼셰비키들의 주요 지도자인 미르사이드 술탄 갈리예프(Mirsaid Sultan Galiev)가 자신에게 제안한 스탈린에 맞선 동맹 제안을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스탈린의 수많은 비러시아 반대파(그루지야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하면)들은 일반적으로 좌익 반대파를 동맹으로 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게오르기 파타코프(Georgy Pyatakov)와 같은 룩셈부르크 지지자들이 그 안에서 쟁쟁한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며, 1927년까지 민족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과 더 일반적으로 변경지대 마르크스주의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오늘날 계급적, 민족적, 젠더적 지배에 맞선 투쟁에서 사회주의적 실천을 날카롭게 하는 데 상당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기사 등록 202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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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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