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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민족해방과 볼셰비즘의 재검토: 변경에서의 관점 - 1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5. 31.

에릭 블랑(Eric Blanc)

번역: 두견

 

이 글은 오랫동안 정설로 굳혀져 있던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중요한 신화에 도전한다. 그것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소수민족의 억압과 민족해방의 문제에서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며 이론과 전략을 발전시킨 선구자라는 주장이다. 이 논문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러시아 변경지대의 사회주의자들이 그런 구실을 했고 레닌과 볼셰비키는 그것에 많은 부분 대치되는 입장을 취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통해서 오늘날 좌파가 계급, 민족, 인종, 젠더 등을 교차적이면서도 통합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한 고민의 단초를 던져주고 있다.  

이 글의 필자인 에릭 블랑은 미국 민주적 사회주의자들(DSA) 소속의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활동가이며, 역사사회학자로서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다양한 신화를 해체하는 논문과 저작, 글을 써 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아가 적극적인 활동가로서 미국에서 교사파업에 연대하고 새로운 좌파적 정치대안을 건설하는 문제에도 매우 활발하게 개입하고 있다. 분량이 길어서 2번에 나누어서 싣는다. 이 글은 첫 번째이다.

 

출처:

https://johnriddell.com/2014/05/20/national-liberation-and-bolshevism-reexamined-a-view-from-the-borderlands/

 


 1905년에 오데싸에서 포그럼 희생자를 기리는 분트 회원들

 

 

짜르 제국의 변경지대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민족해방, 농민 투쟁, 연속혁명, 여성해방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접근 방식의 발전뿐만 아니라 1905년과 1917년의 혁명에 대해 오랫동안 지켜져온 많은 가정들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다음 논문은 1914년까지의 민족 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논쟁을 분석한다. 나는 반식민적 마르크스주의의 효과적인 전략은 볼셰비키가 아니라 변경지대의 사회주의자들이 먼저 내세웠다고 주장한다. 레닌과 그의 동료들은 내전에서도 중요해진 이 이슈에 대해 비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뒤쳐졌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약점은 지배당하는 민족들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볼셰비키에 대한 설명에 도움이 된다.

 

결과적으로 볼셰비키들은 변경지대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에는 수적으로 너무 약하거나 민족적 열망에 무관심하여 러시아 노동자 정부의 고립과 그에 따른 스탈린주의의 상승을 촉진시켰다. 오늘날 활동가들이 자본주의에 성공적으로 도전하는 방법에 대한 교훈을 얻기 위해 러시아 혁명을 계속 돌아본다면, 이 역사와 함께 하는 것은 동시대의 정치적 실천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변경지대의 마르크스주의자는 누구인가?

 

러시아 내 혁명 운동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제국에 지배당한 민족의 사회주의 정당들에 대한 역사기록학적인 주변화로 인해 왜곡되어 왔다. 러시아 민족이 인구의 최대 42%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의 대다수가 민족(비러시아) 정당에 속해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사실,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를 합친 것은 러시아 제국 마르크스주의자의 약 22%에 불과했다. (1 참조) 그러나 민족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학계와 사회주의 역사기록 둘 다에 의해 무시되어 왔다. 수십 년 동안 서구의 역사가들이 변경지대를 언급한다면 대개 그들을 볼셰비키 지배의 희생자로 묘사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해석은 마르크스주의가 본질적으로 민족적인 억압을 무시한다는 가정을 반영했기 때문에 변경지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영향과 영향력은 편리하게 배제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나 스탈린주의자인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의 관점을 진지하게 분석하면 볼셰비키가 일관되고 선구적인 민족해방의 지지자라는 교리를 붕괴시킬 것이기 때문에 변경지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슷하게 일축해 왔다.

 

이런 점에서 전형적인 영국 사회주의자인 앨런 우즈(Alan Woods)"민족 문제에 대한 명확하고 원칙적인 입장이 없었다면 볼셰비키는 결코 노동계급을 권력의 장악으로 이끌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각각의 해석은 훨씬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주변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간과해 버린다.

 

1: 짜르 제국의 주요 마르크스주의 조직(1890~ 1914)

 

조직 이름 - 창립 년도 - 최대 회원수

 

폴란드 사회주의당 (1892) 55,000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1893) 4만 명

그루지야 사회민주당 "메사메 다시(Mesame Dasi)" (1893) 2

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1896) 3,000

러시아와 폴란드의 일반 유대인 노동 분트 4만 명

핀란드 사회민주당 (1899) 107천 명

혁명적 우크라이나당 (1900) 3,000

라트비아 사회민주연합(1903) 1,000

아르메니아 사회민주노동기구 "특정주의자(Specifists)" (1903) 2,000

RSDLP(1903)의 볼셰비키 분파 - 58,000

RSDLP(1903)의 멘셰비키 분파 - 27,000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1904) 23,800

무슬림 사회민주당 "허밋(Hummet)" (1904) 1,000

우크라이나 사회민주연합 "스필카(Spilka)" (1904) 1

 

민족 문제에 대한 첫 토론

 

20세기 초에는 주로 러시아 및 러시아화된 사회민주당 분파인 '이스크라'(Iscra)가 전 영토에 걸쳐 중앙집권적인 혁명적 당을 건설하려고 추진하면서 비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정당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스크라의 조직 계획은 종종 단순히 인민주의(populist) 전통의 지속으로 잘못 묘사된다. 그러나 사실 '인민의 의지'(People’s Will)는 제국의 초기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Polish Proletariat)와 파트너로 협력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조직적 합병을 명시적으로 거부하였다.

 

모든 국민의 독립과 자유로운 발전을 존중하면서 [인민의 의지 집행위원회는] 러시아와 폴란드 민족 간의 사회적 조건의 차이가 러시아와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의 준비작업에서 동일한 수단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양당]의 완전한 통합은 러시아와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억제하며 가장 적절한 조직과 투쟁의 방법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자유를 제약할 것이다.”

 

이러한 접근에 대한 선례는 1897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사회민주주의가 6개 민족 정당의 연합을 형성하면서 더욱 굳어졌다. 러시아 사회혁명당원들(SRs)이 그랬던 것처럼, 짜르 제국 변경지대의 대부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러한 조직적 관점을 지지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LSDSP) 창립총회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제국에 대해 연방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 정당을 요구했다.

 

모든 민족의 삶은 서로 다른 경제적 조건에서 역사적으로 확립되고 발전하기 때문에, 각 민족은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고, 심지어 계급적 집단화에 관해서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에, 따라서 오직 그들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사회민주주의 조직만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익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이스크라'의 관점은 이러한 광범위한 연방주의적 정서에서 벗어나고, 러시아가 민족국가가 아닌 제국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하는 것을 반영했다. 그것은 1905년 혁명을 통해서도 중앙보다 주변부 지역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훨씬 더 강했다는 점에서 특히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유대인 분트(Bund)1903년까지 3만 명의 회원을 모집한 반면,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최대 몇 천 명을 모집했다.

 

중앙 러시아의 사회주의 운동이 세기가 바뀔 무렵에 약하고 원자화돼 있었던 반면, 많은 번경지대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미 단절된 서클을 넘어 지역적 차원에서 중앙집권화된 강력한 정당을 구축했다. 그들의 반대는 그런 '중앙집권화'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중앙집권화'가 제국을 가로질러 확대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분트가 1903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과 결별한 것은 '이스크라'와의 조직적 차이뿐만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 차이도 드러냈다. 1902년 크즈스토코와(Częstochowa) 포그롬[유대인 인종학살]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레닌은 반유대주의가 노동자 대중들 속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분트의 주장을 "유아적"이라고 묵살했는데, 반유대주의가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레닌, 트로츠키, 마르토프 등의 '이스크라'주의자들은 모두를 위한 법적 평등을 지지했지만, 언어 평등을 당 강령에 명시적으로 포함시키자는 분트의 제안에는 반대했다. 나아가 그들은 강압적이지 않은 동화만이 유태인 억압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라트비아 LSDSP의 지도자인 피테리스 스투치카(Pēteris Stučka)는 러시아 관료와 자유주의자들도 공유한 "작은 민족을 동화시킬 필요성(즉 러시아화할 필요성)"이라는 이스크라의 주장이 "[마르크스주의적] 반민족주의의 가면 뒤에 분명히 나타나는 진정한 민족주의"라고 결론내렸다.

 

정부 차원에서의 자치주의와 연방주의에 대한 레닌의 일반적인 반대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었다. 1903년 당대회에서는 '지역 자치정부'를 지지하는 결의안에 반대하면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국가 전체를 분열시키려 한다는 뜻으로 해석될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폴란드 사회주의당(PPS)이 요구한 '러시아[제국]의 해체'"경제 발전이 정치 전체의 다른 부분들을 점점 더 긴밀하게 결합시키고 있기에 공허한 문구로 남아있고 앞으로도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그가 유럽의 지도적인 마르크스주의자 칼 카우츠키의 반복적인 인용으로 이 입장을 정당화했지만, 레닌의 구체적인 정치적 제안은 민족적 열망에 대해 훨씬 덜 수용적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레닌은 카우츠키나 마르크스와는 달리 폴란드 독립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반면 인민주의 성향인 '땅과 자유'(Land and Freedom)에서 활동하던 이스크라의 선배들은 "현재의 러시아 제국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주장했었다.

 

민족 평등에 대한 이스크라의 진심어린 지지와 가능한 가장 넓은 영토적 틀을 보존하려는 욕구 사이의 긴장은 민족의 자결권에 대한 애매하고 어정쩡한 해석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구호는 1896년 제2인터내셔널 런던 총회에서 채택되면서 마르크스주의 "정통"의 일부가 되었으나 그 의미는 불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실제로 1896년 결의안의 영어와 프랑스어 버전에서는 "자율"이라는 개념의 사용에서 용어상의 혼란 정도가 설명되었고, 한편 독일어 텍스트에서는 "자율적 결정"(Selbstestimungsrecht)을 언급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그녀의 지지자들을 제외하고, 짜르 제국에 있는 거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적 자결을 지지했지만, 어떻게 이 개념이 구체적인 정책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지(혹은 할 것인지)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레닌과 다른 이스크라주의자들은 이 구호의 확인은 정치적 의미로도 충분하다고 보았지만, 대부분의 민족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것이 민족 자치주의, 연방주의 또는 독립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로 해석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자의 경우는 변경지대의 사회주의자들의 수많은 팸플릿과 기사로 정교화돼서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들의 러시아 동지들의 접근을 능가했다. 더 개척자적인 노력 중 하나는 폴란드 사회주의당의 주요 마르크스 이론가인 카지미에즈 켈레스-크라우즈(Kazimierz Kelles-Krauz)가 프롤레타리아 투쟁에서 민족해방을 뿌리내리는 전략을 수립한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짜르를 타도하기 위한 투쟁에서 협력을 표방하면서도 입헌 러시아도 비러시아인들에 대한 억압을 끝내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제국의 해체를 요구했다. 켈레스-크라우즈는 이스크라주의자들과 달리 폴란드인들의 진보적인 "방어적이고 억압받는" 민족주의와 러시아인들의 "공격적이고 억압하는" 민족주의를 구별했다.

 

그러나 그는 계급협력을 옹호하기는커녕, 노동자들을 두려워하는 토착 부르주아 계급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독립은 프롤레타리아의 자기 조직화와 동원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폴란드 독립을 위해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독립 폴란드’"가 그의 좌우명이었다.

 

사회주의가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멀고 흐릿한 목표로 남아 있던 시대에 켈레스-크라우즈는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을 당장의 과제로서 사회주의 혁명에 직접 결속시킨 20세기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였다.(반면에 1906년 트로츠키의 유명한 연속혁명 이론은 억압받는 민족의 자결을 위한 투쟁에 대해 전적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1902년에 켈레스-크라우즈는 "짜르의 군대와 정부에 쫓겨나는 모든 도시와 지역에서 우리의 신성한 의무"는 모든 주요 산업이 "국가의 재산"이 되는 "사회주의 공화국을 즉각 선포하는 것"이라고 썼다.

 

폴란드 혁명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로 진척될 것인지, '봉기의 사회적 이익'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권을 복원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실패할 것인지'에 대해, 그는 이것이 서유럽의 혁명 투쟁의 동역학에 "상당 부분 좌우되기" 때문에 "분명히 예측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폴란드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완전히 전례없는 일은 아니었다. 1891년 초에 '민족 사회주의 코뮌'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었다.

 

폴란드를 외국의 멍에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정치혁명과 폴란드 프롤레타리아를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사회혁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전자는 후자가 없다면 효과적일 수 없기 때문에, 후자도 전자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러시아 혁명이 즉시 자본주의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 시대 최초의 제국 포괄적 조직도 상당 부분 변경지대의 산물이었다. 사회혁명당 최대주의자들’(Maximalists)은 제국 북서부의 유대인 지배적 도시인 비아위스토크(Białystok)를 기점으로 1904년에 등장했고 "노동자 공화국"의 즉각적인 창설을 요구했다. , "도시와 지역의 노동자들에 의한 권력의 장악""공공의 이익을 위한" 공장, 광산, 지주들 사유지의 징발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 혁명은 "자본에 맞서는 노동의 세계적 반란"을 불러오게 되는데, 이 때문에 "서방의 노동자들"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를 지켜보았고 "세계 부르주아지"들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증오했다. 민족문제에 대해서 사회혁명당 최대주의자들’(SR-Maximalists)는 연방주의, 지방분권화, 그리고 분리 독립의 권리를 지지했지만, 많은 사회혁명당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민족해방 그 자체보다는 "전체 러시아"적인 투쟁을 더 강조했다.

 

변경지대들에서 1905년 혁명

 

1905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본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변경지대에서 특히 민족적, 사회적 불만이 폭발적으로 뒤섞여 있었다는 점은 강조돼야 한다. 사실 혁명은 중앙보다 주변부에서 훨씬 더 진전되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영향력도 훨씬 더 컸기에, 볼셰비키가 러시아 민족을 넘어서 기반을 건설하지 못한 것의 심각성을 잘 봐야 한다.

 

바쿠(Baku)에서는 세계 최초의 무슬림 및 사회주의 정당인 허밋’(Hummet)이 아제르바이잔과 페르시아의 석유와 수산업 노동자들을 이끌고 전투적인 파업에 나서며 1909년 이란의 샤(Shah: 왕조)를 전복시킨 혁명에서 주도적 역할을 계속했다. 허밋의 매혹적인 역사는 무슬림들이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받지 않아 왔다는 일반적인 가정을 반박한다.

 

그것은 또한 다민족적 본토 조직과 구분되는 허밋이나 분트같은 특정 민족 집단의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노동자 계급을 통합하려는 싸움에서 본질적으로 장애물이었다는 볼셰비키의 주장과도 배치된다. 실제로 허밋 조직원들은 무슬림 노동자들과 그들의 아르메니아 또는 러시아 동료들 간의 (흔히 미약하던)단결을 구축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1906~1908년 무슬림 노동자들 사이에서 볼셰비키의 짧게 끝난 영향력도 허밋과의 협력과 내부적 참여와 동시에 일어났다.

 

핀란드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여성 노동자 연합과 연계하여 대규모 시위와 파업을 주도하여 핀란드의 자치권을 성공적으로 회복하고 완전한 여성 참정권을 가진 세계 최초의 국가 정책으로 그것을 발전시켰다. 미국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상호교차성"에 대한 이론이 나오기 이미 수십 년 전에 핀란드 사회주의자들은 여성의 권리, 민족적인 억압의 종식, 계급 착취의 철폐를 위해 동시에 싸웠다.  


<2편으로 이어짐>  


(기사 등록 202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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