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린디스판(Nancy Lindisfarne) & 조나선 닐(Jonathan Neale)
번역: 두견
'왜 남성과 여성은 불평등할까?' '왜 성소수자들은 억압당하는가?' '왜 많은 남성들이 폭력적인가?' '성폭력이 왜 그렇게 흔한가?' 이것들은 오래되고 매우 중요한 질문들이다. 오랫동안 이에 대한 강력한 대답은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그 대답은 언제나 전쟁, 불평등, 성폭력은 자연질서의 일부분이라는 것이었다.
스티븐 핑커, 재러드 다이아몬드, 유발 하리리의 인기있는 책들도 더 현대적인 방식으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남성의 공격성은 인간본성의 불가피한 일부라는 것이다. 남성들은 여성들을 성적으로 소유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싸운다고 말한다.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트랜스젠더인 조안 러프가든(Joan Roughgarden)은 이것을 '과학적인 척하는 환상'이라고 했다. ‘얄팍하게 감추어진 강간서사’라고 말이다.
그런 서사는 가부장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사회에서는 억압받는 취약한 사람들도 항상 정치적 투쟁을 벌이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 왔다. 여기서 하는 말은 그 저항의 일부분으로서, 성폭력의 뿌리를 계급과 젠더 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설명하고자 한다.
이 글의 필자인 미국의 독립적 사회주의자인 낸시 린디스판(Nancy Lindisfarne)과 조나선 닐(Jonathan Neale)은 제국주의, 기후정의, 젠더 억압 등에 대한 많은 글을 써왔고 조나선 닐의 <미국의 베트남 전쟁>, <두 개의 미국> 등은 국내에도 출판돼 있다. 글이 길어서 두 번에 나누어 연재한다. 이것은 1편이다.
출처:
계급과 젠더의 통일된 이론
우리는 "성적 폭력의 뿌리"라는 책을 쓰면서 계급과 젠더에 대한 통일된 이론을 정리해 왔다. 야심만만한 일이지만 그것에 적합한 새로운 재료가 많이 생겼다. 화학적 미시분석, DNA 샘플링,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고고학 덕분에 계급이 생기기 전이나 초기 계급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많은 사람들의 놀라운 연구들이 있었다.(Christopher Boehm, Frans de Waal, R. Brian Ferguson, Sarah Hrdy, Martin Jones, James C. Scott, Richard Lee, Joanna Overing, Laura Rival, Kirk and Karen Endicott) 이들의 작업은 인간의 진화 및 역사의 연구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남성, 남성성, 그리고 성적 폭력의 근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의 출발점은 놀라움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평등해지면서 인간이 된 것 같다. 이것은 놀랍고 귀중한 통찰이다. 초기 인간은 보잘 것 없는 영장류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기, 견과류, 채소를 나누어 먹고, 보육과 성적 기쁨을 나누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약자를 괴롭히려는 사람들을 징계하고 영장류 조상들에게 지배적이던 위계체계를 초월해야 했다. 그리고 20만년 이상, 그들은 남성과 여성이 모두 평등하게 사는 평등주의적 사회에서 살았다.
그 후, 약 12,000년 전에 시작된 농업의 발명은 계급사회를 가능하게 했다. 엘리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재배한 음식의 자기 몫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엘리트들이 있는 곳이면 여남도 불평등하게 됐다. 그래서 계급의 불평등과 함께 가부장제, 성적 폭력과 남성 폭력의 추종들이 생겨났다. 계급과 경제적 불평등, 성차별과 성폭력 사이의 일관된 연관성은 특별하다. 젠더 이론이 반드시 대답해야 하는 핵심 질문은 '왜?' 그런 것인지, 그리고 '계급사회와 남성 지배의 관계는 무엇인가?'이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출발해야 할 곳은 영원한 긴장감과 함께 있다. 한편에는, 수렵-채집자로서 우리의 오랜 역사 동안 선호되었던 성별 평등과 협력의 습관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 우리의 영장류로서 유산의 일부인 남성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남성 지배와 계급 사회 사이의 연관성이 어디에서나 발견되고 있고, 매우 강하기 때문에, 기울어진 균형과 성별화된 불평등이 계급사회에서 표준이 된 이유들로 계급을 보는 것은 타당하다. 그래서 우리가 이데올로그로서 핑커와 그의 동료들을 무시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왜 남성들이지?"라고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 해답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의 영장류적 유산과 계급사회의 특성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왜 남성들은?
긴팔원숭이, 개코원숭이, 고릴라, 침팬지, 보노보와 비교해 보면, 우리의 영장류적 유산에 대해 네 가지를 가장 잘 말해준다. 일단 크기다. 종으로서 인류는 보통 수준의 성 이형성(성분은 같은데 형태는 다른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대부분의 남성들이 평균적으로 그들의 어머니나 자매나 아내들보다 다소 크고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큰 사냥에서 남성 매복 사냥꾼들도 우리의 오랜 인류 역사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공동체에서도 소수의 재능있고 유능한 사냥꾼들이 무기와 살인을 이해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또한 계급사회의 도래와 함께 사냥도 중단되지 않았다. 농부들은 세계 여러 곳에서 사냥을 계속했고, 여전히 한다. 우리는 수렵-채집 공동체에 대한 최신의 상세한 설명을 통해 몇몇 재능 있는 선수들이 큰 사냥감의 대부분을 죽일 수 있는 손과 눈의 조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성공적인 사냥으로 얻은 고기는 우리의 큰 두뇌에 영양을 공급하는데 필요한 여분의 단백질을 제공했다.
하지만 큰 사냥감은 위험했고, 사냥은 종종 실패했다. 큰 사냥감의 살육은 식량의 원천으로서 중요하지만 안정적이진 않았고, 아이들과 모든 어른들이 번성하려면 나눔이 필수적이었다. 매복에는 침묵이 필요하기 때문에 숙련된 사냥은 젖먹이던 여성들을 제외시켰다. 수렵-채집인의 주된 영양분은 작은 생물체에서 나온 고기였고, 과일과 채소는 여남 노인들에게 아이들을 돌보도록 맡겨두고 자유롭게 수렵을 할 수 있는 여남 모두가 수확한 것이었다. 조부모가 아이를 돌보는 것도 우리의 인간 적응의 일부였고, 다른 암컷 영장류와 달리 여성은 가임기가 끝나고 폐경 후에도 오래 살았다.
셋째, 영장류의 위계제가 있다. 우리의 영장류 사촌들은 두 가지 패턴을 보여준다. 하나는 긴팔원숭이처럼 평화롭게 짝을 짓는 젠더적 평등, 또는 보노보스처럼 성적으로 열정적이고 때로는 다투는 집단이다. 다른 패턴은 종속적인 수컷과 암컷들에 대한 수컷의 지배이다. 이것들은 실버백 고릴라와 날뛰는 침팬지들의 사회다.
프란스 드발(Frans de Waal)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 영장류에 대해서 놀라운 것은 우두머리 수컷의 공격성이 아니라, 모든 수컷과 암컷이 일생 동안 보여주는 복종이다. 인간은 순종적인 동물이라고 그는 말한다. 사실, 인간 영장류의 적응은 서로 평화롭게 사는 것과 공격적인 수컷이 지배하는 것 사이에 있다. 어느 쪽이든 갈 수 있다.
넷째,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한 고도로 성적인 영장류이고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의 해부학적 상태와 성적 습관은 다른 영장류와 다른 점이 대단히 흥미롭다. 우리는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이 적응과 변화의 범위가 새로운 종류의 성정치에 인류를 끼워 맞추면서 확립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범위에는 남성과 여성의 크기의 차이가 포함된다. 그것은 약 15%에 불과하다. 이것은 침팬지나 보노보스와 거의 같은 것으로, 우리가 보노보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적인 평등으로 가거나, 침팬지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성적인 불평등으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영장류들 사이에서 음경과 고환 크기의 변형이라는 수컷 생식기에 대한 질문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수컷 영장류는 암컷이 다른 수컷과 짝짓기를 할 것 같지 않을 경우에 몸집에 비해 음경이 작다. 다른 영장류의 것과 비교하면 인간의 음경은 침팬지나 개코원숭이보다 길지만 보노보스보다는 짧다. 인간의 성기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주변이 크고 질 안에서 더 부드러워지면서 동시에 더 단단해진다. 로레타 코미에와 샤린 존스가 인상적인 제목의 책 '길들여진 성기'에서 설득력 있게 논했듯이, 이것은 오랜 진화의 기간 동안 여성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질에도 변화가 있었다. 인간은 음순을 발달시켰다. 소음순과 대음순은 질을 덮고 보호하며 촉촉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질도 길어졌다. 클리토리스는 민감한 끝부분을 보호하는 덮개를 획득했다. 그리고 클리토리스는 질에서 멀어져 앞으로 나아갔다. 균형 있게 보면, 진화적인 변화는 클리토리스를 출산 중의 피해로부터 지켜주고, 여성에게 수반되는 성적 즐거움을 보호하기 위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모든 이차적인 성적 특징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 여성의 젖가슴은 다른 유인원에 비해 크다. 침팬지, 고릴라 그리고 다른 영장류들은 큰 젖가슴 없이 완벽하게 젖을 먹인다.
다만, 우연히도, 인간의 여성보다는 젖가슴이 작지만 다른 유인원들 보다는 젖가슴이 큰 암컷 보노보스는 예외이다. 그래서 커다란 젖가슴 역시 성적 선택의 지표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번에는 오래된 보노보스와 남성들에 의한 것이다.
인간은 또한 성인이 된 이후 내내 성적으로 활동적이다. 배란기를 전후해서만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과 다른 영장류의 엄청난 차이점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일년 내내 성적 만족이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 오르가즘의 유사점을 찾게 한다.
첫째, 음경과 클리토리스의 해부학적 유사점이 있다. 음경과 클리토리스는 둘 다 덮개에 가려진 끝이 있다. 여성에게는 클리토리스 바로 위에 매우 많은 양의 세포조직이 있다. 저 내부적 클리토리스와 외부적 남성기는 발기할 때 거의 같은 크기다. 성적 자극과 함께 이 모든 세포조직은 피가 몰리게 되고, 오르가즘이 갑자기 발산되기까지 긴장이 쌓이게 된다. 더구나 모든 인간의 오르가즘은 비슷한 방법으로 몸 전체를 관여시킨다.
정확하게 인간의 성행위는 주로 번식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많은 종류의 성행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것은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다 – 이성애만이 아니라,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도 함께 할 수 있다. 각각의 경우에, 이 동등한 오르가즘적 잠재력은 모든 사람들을 더 평등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남성과 여성을 더 잘 평등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욕망은 평등하고, 장비도 평등하며, 실천도 평등할 수 있다. 우리는 큰 사냥감을 사냥하고 육류와 채소를 나눌 필요성이 먼저 생겼는지, 아니면 육아의 분담으로 이어진 식생활상의 필요, 또는 공감적 사랑이나 인간의 성적 열정의 확대가 먼저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시너지 효과가 있다. 인간관계가 성적으로 충만해지면서 인간의 성생활도 사랑으로 충만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자위를 통해 즐거움을 느끼는 영장류다. 우리는 우리의 성적 파트너들을 서로 즐겁게하려 하고 성적인 기쁨을 나누는 것을 통해 기쁨을 느낀다. 아기를 만들기 위한 선택 또한 즐거움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아이들을 잘 기르고, 그들의 귀여운 행동을 보고 웃고,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섹스를 생각하거나 사랑을 나누지 않을 때에도 우리의 일상은 성적 이미지와 존중, 애정,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성적인 사랑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런 재능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있어 중심적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들은 또한 우리가 가장 취약한 장소들이다. 사랑은 우리를 해치는 사람들에 의해 쉽게 왜곡되거나 더럽혀지거나 빼앗겨질 수 있다. 20만년 동안 수렵-채집인들은 그들이 협력했기 때문에 살아남고 번성했다. 그런 협력은 여성과 남성이 평등할 것을 요구했다. 여성과 남성은 식량과 육아를 나누었다.
그리고 보노보스처럼, 그들은 섹스를 즐기고 지배적인 남성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함께 일했다.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는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잘라낸다는 이야기들이 많다. 이 이야기에서 골목대장은 항상 오만한 남성들이다. 이것은 실제로 모든 수렵-채집인들이 문화적으로 동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그들은 엄청나게 다양했고, 다른 언어를 말했으며, 매우 다양한 문화적 스타일과 관습과 함께 매우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수렵-채집인들의 공동체와 여남 간의 불평등 사이에는 고정된 연관성, 즉 단일한 배치가 없었다. 그러나 그 후 계급사회의 발달과 함께 상황은 달라졌다.
계급 사회와 남성 폭력
인간이 농업을 발명하면서, 약탈적 엘리트들이 식량의 과잉 부분을 통제하는 게 가능하게 되었다. 그들은 계급적 불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휘두르고 성차별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도입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계급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수천 년이 걸렸다.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이 말해준 대로 많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다른 사람들은 숲이나 산으로 도망쳤다. <불평등의 창조>에서 켄트 플래너리(Kent Flannery)와 조이스 마커스(Joyce Marcus)는 우리에게 때때로 농부들이 어떻게 평등한 공동체를 일시에 다시 복구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다가 아마 100년, 200년 후에 같은 장소에서 엘리트 집단이 들어와서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이 긴 역사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은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남성 폭력과 전쟁은 불가피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은 인간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 새로운 작업은 우리에게 계급 권력의 행사와 관련된 남성 폭력과 전쟁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하도록 해준다. 매복 사냥, 여남간 평균적 신체 크기의 약간의 차이, 그리고 괴롭힘과 위계제에 대한 오랜 영장류부터의 영향은 일부 남성들이 다른 이들을 지배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려는 마음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전 계급 사회에서는 계급구조와 젠더 불평등이 억제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계급 질서가 왔다.
모든 불평등한 사회에서, 우리는 부유하고 강력한 사람들이 공포와 폭력을 사용하여 사람들과 식량을 통제하는 것을 본다. 화약이 발명되기 전에, 폭력은 크기, 힘, 그리고 타인들을 괴롭히고 창피주는 성향을 필요로 했다. 계급사회에서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또한 엘리트 권력을 집행하기 위한 그들의 심복으로 크고 강하고 공격적인 남성들을 찾았다. 호전적인 남성들이 집행자가 되었고 다른 남성들과 여성들을 종속시켰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폭력의 위협에 직면했고, 대부분의 여남들은 대부분의 삶을 폭력적인 남성들에게 복종하도록 강요당했다.
이 과정에서 폭력과 권력은 남성에게 성별화됐다. 고문, 거세, 강간, 살인은 궁극적인 위반이었다. 그들은 또한 엘리트들이 타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했던 가장 강력한 계급 규율의 한 형태에 속했다. 그것들은 독특하게 강력한 방법으로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두려워하도록 만드는 길이었다. 지배계급이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고, 인류가 모든 생명체들에게 무엇을 하는지를 비유하는 말로 이러한 형태의 폭력들(고문, 거세, 강간, 살인)이 자주 사용되어 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강간은 특히 남성 지배, 가부장제, 그리고 젠더적 억압의 상징적 표현이 되었다. 강간을 당하는 여자와 남자들은 평생 무력감과 공포를 지니고 사는 경우가 많다.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그 폭행을 형상화할 것이다. 자녀, 부모, 애인이 강간당하는 것을 목격할 수밖에 없는 남자나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없었다는 이유로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
(기사 등록 2019.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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