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경제정책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미완성으로 남겨놓았는가?
사무엘 파버(SAMUEL FARBER)
번역: 두견
러시아 혁명은 반자본주의적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 성과와 한계를 돌아봐야 할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이 글은 러시아 혁명의 후퇴와 부패 과정을 다루는 논쟁이다. 앞서 존 에릭 마로(John Eric Marot)가 사무엘 파버(SAMUEL FARBER)의 책을 서평하면서 비판적 문제제기를 시작했고, 이 글은 그것에 대한 파버의 반박글이다.
논쟁은 주로 러시아 혁명이 낳았던 내전이 종료된 이후에 볼셰비키가 도입했던 신경제정책(NEP)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파버는 신경제정책(NEP)은 소비에트 연방이 경제적으로 회복하는 것을 도왔지만, 그것의 정치 개혁의 부재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스탈린주의의 시작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방해했다고 주장한다.
이 글의 필자인 사무엘 파버(Samuel Farber)는 쿠바에서 나고 자랐으며, 쿠바를 다룬 여러 저서들과 논문의 저자이다. 사회주의 정치에 50년 넘게 관여했고, 논쟁의 상대방인 존 에릭 마로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이다. 둘 모두 러시아 혁명에 대한 많은 탐구와 글을 남겨왔다.
출처:
https://www.jacobinmag.com/2019/12/new-economic-policy-nep-stalinism-soviet-democracy
나의 책 <스탈린주의 이전: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부상과 몰락>에 대한 ‘자코뱅’에 실린 그의 서평에서 존 마롯(John Marot)은 내가 책에서 다룬 대부분의 자료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레닌의 1921년 신경제정책(NEP)문제에만 배타적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롯의 주장은 농민과 소상인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제공한 정책인 NEP가 스탈린주의의 대안이었다는 것이다. 내 책에서, 나는 NEP가 비록 환영할 만한 정책이었지만, 결국 스탈린주의에 대한 저항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노동자와 농민의 독립적인 조직을 허용하는 정치적 개방이 수반되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마롯은 그러므로 내가 NEP에 반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 책에서 나는 신경제정책이 전시공산주의라는 끔찍한 경제 정책에서 벗어난 좀더 이성적이면서 대중적인 열망에 부응하는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볼셰비키 지도부는 1920년에 트로츠키가 제안한 그것의 이전 버전에 반대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분명히 주장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2018년 11월 ‘자코뱅’ 기고문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재고찰"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농업, 산업, 서비스 생산과 유통에서 알맹이들이 거대하고 산업화된 자본주의 기업들에 의해 수행되지 않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어떤 급진적인 사회주의적 변화도, 만약 그 사회주의가 민주적이고 인간적이라면, 많은 수의 소규모 생산자들, 특히 개인과 가족들의 가능성과 요구를 수용하기 위한 NEP의 어떤 버전을 불가피하게 필요로 할 것이다.”
마롯이 NEP에 대한 나의 견해를 왜곡하는 것은 두 가지 이슈, 즉 경제정책 그 자체와 그것에 수반된 정치적 조치들을 혼동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 이전'에서 내가 주장했듯이, NEP의 채택은 내가 말하는 신정치정책(NPP)과 함께 이루어졌어야 했다. 본질적으로, 1917년 10월에 집권한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근원적 형태를 기꺼이 지키려는 모든 집단을 위한 평화적인 정치적 조직화의 자유 말이다.
불행하게도, 내가 언급했던 정치적 개방은 1921년 레닌과 주요 볼셰비키 지도자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NEP가 경제적 양보와 문화적 자유를 허용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똑같이 제한되어 있는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고 구분되는 일이었다. 내 책에서 지적했듯이, 내전의 종료는 러시아에서 정치적 자유의 정도와 범위에서 개선이 아닌 악화를 가져왔고, 내전 시기의 매우 광범위하지만 여전히 다소 잠정적인 억압에서 전쟁의 종식 이후에는 반대파 야당과 정치집단의 완전하고 체계적인 억압으로 옮겨갔다.
예를 들어, 1922년까지, 마지막 야당 신문과 저널은 폐간되었고, 다시는 재발간되지 않았다. 정치적 자유의 거대한 축소는 경제적 양보의 제공과 인과관계가 있었다. 레닌이 1922년 제11차 당대회(그가 참석한 마지막 당대회)에서 정치와 경제의 문제를 분명히 연계시켰듯이 말이다.
“그 관계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대승적 진격 후에 후퇴하는 것은 끔찍하게 어렵다. 승리하며 진군하는 동안에는, 비록 규율이 느슨해지더라도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밀고 나간다. 그러나 퇴각하는 동안에는 기강이 더욱 의식되어야 하고 백 배는 더 중요한데, 왜냐하면 전체 군대가 후퇴할 때는 그것이 멈춰야 할 곳을 모르거나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후퇴만을 본다. 그런 상황에서 공황상태에 빠진 몇몇의 목소리들은 때때로, 궤멸적 상황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것의 위험은 엄청나다.”
내가 <스탈린주의 이전>에서 주장했듯이, 소비에트 사회의 저항력을 상당히 약화시킨 것은 NEP 기간 동안 소비에트 지도부가 증가시킨 정치적 자유 제한과 제약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스탈린주의의 확립이 촉진되었다. NEP에 대한 나의 견해를 왜곡하는 핵심에서 마롯은, 그것이 스탈린주의의 패배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처럼 극도로 단순화하면서 정치적 개방의 필요성에 대한 나의 주장을 희화화했다.
내 책이 1920년대의 노동조합 투쟁을 무시했다는 마롯의 다른 주장과는 달리, 나는 그 기간 동안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파업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생산의 지점에서 파업에 주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마롯이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이 사회 전체에서 노동계급의 힘을 반드시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조셉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의 유고슬라비아는 1921년 이후 러시아보다 생산 지점에서 더 많은 노동자 통제를 허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정치적 독점, 대중매체에 대한 독점, 비밀경찰의 권력에 견주어 볼 때 노동계급의 권력과 통치를 확립하기에는 매우 충분하지가 않았다.
20년대의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파업 활동과는 별개로, 점점 더 관료화되고 비민주적인 공산당의 테두리 밖에서 여전히 노동조합이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남아 있다.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노조들은 스탈린주의화의 맹공격에 저항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비록 마롯이 내 주장을 희화화한 의도와 달리, 나는 그것이 스탈린주의에 저항하는 데 성공했을지 아닐지 어느 것도 장담할 수 없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공산당으로부터 독립된 농민들의 정치적 자기 조직화도 스탈린주의의 출현에 대항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존 마롯은 내가 1년 전 내 책과 ‘자코뱅’의 기사에서 주장했던 것과는 정확히 정반대로, 내가 소수파인 노동계급의 자유와 민주주의에만 전적으로 집중하면서 다수파인 농민들을 무시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1920년대의 러시아 농민이 상대적으로 경제적 자치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 중심의 정당 조직화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진술함으로써 농민의 독립적인 정치 조직화와 그것에 수반된 공산당의 정치적 독점에 대해서 그가 암묵적으로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의 강제집단화와 같은 학살은 아니더라도 잔혹함에 직면했을 때, 공산당의 정치적 독점은 그러한 잔혹한 캠페인을 크게 촉진시키지 않았는가? 만약 이러한 수단들이 이용 가능하거나 심지어 모두 상상 가능한 것이었다면 농민들은 그것에 저항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을 고려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논평에서 쓴 것에서 일부는 우리가 동의한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그 중 하나는 20년대 후반의 트로츠키의 정치에 대한 그의 비판인데, 그는 트로츠키의 교조주의가 "부하린이나 [상대적] 우파와의 동맹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스탈린의 승리를 위한 길을 닦았다"고 지적한다.
내가 ‘자코뱅’ 기사에서 썼듯이, 부하린과 트로츠키의 프로그램들은 모두 신경제 정책을 변경한 두 가지 다른 버전을 추구했고 서로 간에 더 가까웠다. 스탈린이 이끄는 소위 "중앙파"의 노동계급의 초착취와 강제적인 집산화로 농민들 수백만명의 죽음을 낳을 무시무시한 노선이 비교하면 말이다. 거기에는 1932년과 1933년에 우크라이나에서 의도적으로 기근을 만들어낸 것도 포함된다.
마롯은 역사 발전의 중요한 요소로서 정치와 정치사상에 대한 어떤 고려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으로 축소시키는 마르크스주의 학파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전시 공산주의’ 정책은 오로지 객관적인 상황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전시 공산주의는 1918년 중반에 시작된 내전으로 야기된 극심한 고난과 경제적 혼란에 대한 "상황적 대응"일 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볼셰비키 지도부의 대다수가 "공산주의"라고 정의하는 것을 객관적인 경제적 사회적 여건에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추진하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드라이브의 결과였다. 레닌은 '전시공산주의'의 어리석음에 대한 그의 뒤늦은 냉정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1919년에 이렇게 주장했다. "이제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 활동의 조직화와 공산주의자들의 전체적 정책이 최종적이고 안정된 형태를 완전히 획득했으며, 나는 우리가 올바른 길에 서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것이 부하린이 다름 아닌 바로 "자본주의 사회가 공산주의 사회로 변모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인 <전환기의 정치와 경제>에서 찬양의 노래를 부르면서 '전시 공산주의'에 대한 최고의 이론적 옹호자가 된 이유다. 확실히, '전시 공산주의' 동안 채택된 많은 정책들 뒤에는 매우 강력한 객관적인 요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정치 지도부가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들을 혁명적 미덕으로 돌리지 않고 전시 상황에서 불가피하고 일시적인 대응으로 인식했더라면 큰 차이를 만들었을 것이다.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미덕으로 바꾸는 것은 노동조합의 민주주의와 독립성에 대한 심각한 제약, 법적 자유와 사회주의적 반대파에 대한 억압과 더불어 소비에트에서 다당제에 대한 억제, ‘적색 테러’의 정치 문화를 결정짓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1920~21년에 탬보프(Tambov) 지역에서 "녹색"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것과 같은 '집단적 처형'을 채택하게 된 것은 이 새로운 정치 문화였다.
그것은 반혁명적 활동에 관여하지는 않았더라도, 정부가 반혁명적이라고 의심하는 특정 민족, 지역, 계급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해 정부가 취하는 의도적인 처벌 방법이었다. 이 관행이 정부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인구 주요 부문에서 혁명 정부에 대한 지지를 빼앗아 갔다.
‘적색 테러’는 그 억압적인 정치 문화의 또 다른 결과였다. 그것은 처음에 주요 볼셰비키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의 대응으로 페트로그라드와 같은 곳에서 레닌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다. 그것의 표적은 부르주아적 배경 때문에 박해를 받지만 실제로 볼셰비키 정부와 협력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처럼 실제로 그들이 한 일보다는 계급적 출신에 기초하여 정해졌다.
역사가 알렉산드르 라비노비치(Alexander Rabinowitch)가 그의 저서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 The Bolsheviks in Power>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페트로그라드의 무분별한 '적색 테러'는 지역 볼셰비키 지도부의 상당 부분으로부터 반대에 직면했는데, 이는 당시 '전시 공산주의'의 억압적 문화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지도부는 여전히 스탈린 지배하에서 만들어질 일괴암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일부 독자들은 존 마롯과 나 자신 사이의 이러한 공방을 지금의 현실과는 무관한 역사적 문제에 대한 모호한 논쟁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민주주의와 독립적인 정치조직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좌파들에게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안다.
(기사 등록 20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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