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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한일 갈등 - 미국 이후의 동북아?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7. 10.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이번 일본의 경제 보복이 '대법원 판결 때문'이라고 본다면 이는 큰 오판입니다. 판결로 이어진 강제징용 문제는 하나의 '뇌관'이 됐지만, A국 사법부의 판결 때문에 B국 행정부가 사실상의 경제 제재 조치를 취한다는 것은 극히 비상식적이고 이례적인 일입니다. 일본이 그토록 일본의 장점으로 내세우려는 자유민주주의 구조상으로 사법부가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문재인 정권이 아무리 원치 않아도 어찌 할 수 없는 사법부 판결에 대해 해당 국가 전체를 겨냥하는 '제재'로 맞대응하는 건 결코 자유민주주의를 간판으로 내거는 세계의 국제 관례는 아닙니다. 판결 사태가 '도화선'이 됐지만, 보복/제재 조치들이 오래전부터 검토, 준비되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건 판결 등 1회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전후의 장기적인 한일 관계 흐름의 어떤 본질적인 '전환점'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듭니다.

실은 이 보복조치는 우리가 여태까지 상식적으로 생각해온 '일본'에 대한 기존 관념을 깨뜨립니다. 본래 전후의 일본은 기본적으로 '경제 국가'를 자임해왔습니다. 미국이 미-중 수교로 가면 일본도 같이 중-일 수교로 가고, 1990년에 북-일 수교 준비를 하려다가 미국의 불허로 불발에 그치고, 이라크 파병을 미국이 명하면 파병을 해주는 등 미국의 성실한 '꼬봉'으로 살면서 경제 실익을 키워온 것은 여태까지 우리가 아는 일본이었습니다.

 

그런데...이번에는 보복조치는 실은 한국 기업뿐만 아니고 일본 기업에도 불리합니다. 그래서 닛케이 등 업계의 이해를 표방해주는 일본 언론들마저도 이 제재에 비판적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전자제품 가격 상승으로 중국, 미국 소비자들까지 불이익 당할 것도 불보듯 뻔합니다. 구미권 기업계도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베가 이 모든 반대들을 다 무릅쓰고 한국 때리기에 올인합니다. '실익'을 물리치고 '싸움'에서 얻어지는 민족주의적 '열광', 사실상 일종의 광풍을 노리고... 여태까지 본 전후 일본의 모습과는 좀 다르죠?

 

경제 실익보다 더 큰 것은? 일본의 미래에 대한 어떤 '큰 그림' 같은 것입니다. 아베와 같은 부류의 정객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100년 전의 일본으로서는 대륙이 '먹잇감'이었다면 인젠 대륙은 다 '경쟁자'들입니다. 북한은 (핵 등으로) 일본을 위협할 수 있다 싶은 군사력이 있는가 하면 한국은 이미 기술력으로 따라잡아 추월하려 하는 거고, 중국은 군사력, 기술력, 재력 등등 모든 차원에서 이미 일본을 넘었거나 곧 넘을 셈입니다.

 

아베의 시각으로 본 동북아의 외교, 국제관계판은 '열강각축'이고 이는 '제로섬 게임'입니다. , 이 게임에서는 상대방의 득은 나의 실이 되는 거죠. 그래서 제살깎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 전자산업에 불이익을 주려 하는 것이죠. 결국 그런 일본은 북한을 무역 봉쇄하고 한국을 무역 제재하면서 대중국 관계를 조심스럽게 관리하면서 결국에 올지도 모를 중국과의 결정적인 대대적 대립에 은연중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는 앞으로는 아마도 다시 군수산업을 크게 키울 셈입니다.

 

어차피 세계 시장들이 경향적으로 이윤이 떨어져가는 추세에 관수라는 확실한 시장을 갖고 있는 무기 만큼의 효자 상품도 없으니까요. 물론 동시에 중, , 남도 군비를 계속 올릴 것이고요... 아베 류 정객들의 큰 그림은, 바로 이처럼 서로를 경제적으로 찌를 수 있을 때에 찌르고, 무기 생산을 늘리고 군사력을 키우면서, <삼국지연의>와 같은 치열한 대결을 이어나가는 동북아입니다. 동북아판 열강각축이죠. 1914년 직전의 유럽과 좀 비슷하죠?

 

이 큰 그림에 보이지 않는 것은? 맞습니다. 미국입니다. 이번 조치는 미국과 조율한 것 같지 않고, 한국도 미국에 도움을 호소해봐야 소용없을 셈입니다. 트럼프의 미국은 더이상 과거처럼 동아시아에서의 군사 보호국들 (, 일 등)을 치밀히 관리하려 하지 않습니다. 더이상 과거와 같은 세계 제국을 계속 유지할 만한 여력이 없는 미국은, 인제 일부 '우선 순위 높은 과제'에 집중하고서, 나머지 부분들을 '대충대충' 현상 유지 위주로 관리합니다.

 

예컨대 이란(이라는 이스라엘/사우디 등의 적대국)에 대한 경제적 초토화, 중국에 대한 견제와 제재 등은 우선 과제지만, 한반도 그 자체는 우선 순위에서 빠진 것이고, 한반도에서 트럼프가 원하는 것은 대북 관계를 나름 궤도에 올려놓고 주한 미군을 빼거나 축소시켜 돈을 절약하는 것일 뿐입니다. 일본의 경우 일본 스스로의 군사대국화를 미국이 대체로 허용해주면서 주일 미군 비용 등을 절약하려는 셈이 있는 것 같고요. 미국이 이처럼 천천히 빠져나가는 상황에서는, 아베나 습근평(시진핑) 같은 ()권위주의적인 세습 정객/통치자들이 군사주의적 노선으로 나아가면서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결전'을 준비하기 시작한 셈입니다.

이런 '큰 그림' 차원에서는 아베의 행동은 국내에서의 민족주의적 광풍 조장, 그런 광풍을 배경으로 한 군사 대국화 노선의 지속적 추진 등, 그리고 국외에선 그렇지 않아도 앞으로 어려움이 많을 한국 전자사업 '타격 주기' 등을 목적으로 합니다. '판결'이 아닌 장기 전략의 문제입니다. 결국 이 시점에서는 한-일 양국의 진보 사회는, 우리가 과연 이런 동아시아를 원하느랴고 문제를 강하게 제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동아시아는 과연 군웅할거, 패권싸움의 도가니인가요? --일 군수 기업의 무한 발전을,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고 원하고 있나요? 그런 게 우리의 꿈이 아니라면, 우리가 국경을 넘어 같이 연대해서 투쟁을 해야 합니다. 국경 넘는 연대와 투쟁만이 '열강각축'의 악몽을 막을 수 있습니다.

  


(기사 등록 2019.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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