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지난 번에 서강대에서 제9차 맑스 코뮤날레 참가했습니다. 발표자 중의 한 분은 일본에서 맑스의 환경론을 전공해오신 선생님이었습니다.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현재의 기후 참사를 분석한 그는, 아주 재미있는 지적을 남겼습니다:
“기후 위기는, 실은 부유한 나라들의 자본가들에게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바다의 수면은 오른다 해도, 살인적 폭염이 잦아진다 해도, 그들과 그 가족들이야 어차피 거기에 노출될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환경 위기는 대체 에너지 등에 대한 수요를 늘리게 돼 있는데, 대자본이 얼마든지 진출하여 상당한 이윤을 볼 수 있는 부문입니다.
더불어 환경 참극은 수백, 수천 만명의 기후 난민들을 발생시킬 터인데, 이것도 구미권 등지 대자본 입장에서는 횡재입니다. 자국에서 비싼 인구 재생산 비용(아동 수당, 유치원 및 학교 관련 사회적 비용 등)을 들이지 않고 이미 타지에서 성인이 다 된 노동자 내지 기술자를 공짜로 얻어 싼 값에 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어차피 글로벌 자본주의의 주요 특징인 엄청난 지역적 불평등을, 기후 참극이 심화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러다가 지구 전체가 언젠가 인간이 살 수 없는 황무지가 되겠지만, 대자본의 계획은 이렇게 멀리 미치지 않는 것이고, 그렇게 된다 해도 그들만큼 인위적인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이 확신하는 듯합니다"
참 현명한 판단인 듯하고, 자본주의의 어떤 속성에 대해서는 아주 적절히 지적한 듯한 말씀이었던 것 같습니다.
러시아 속담에는 "кому война, кому мать родна", 누구에게는 전쟁이지만 또 누구에게는 어머니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전쟁 같은 현상은 누구에게는 그야말로 참사일 뿐이지만, 누구에게는 자비스러운 어머니처럼 필요하고 좋단 이야기죠. 대부분의 정상적인 인간들은 살상에 대해 끔찍하다는 생각 밖에 못하지만, 자본주의적 성장은 늘 전장에서의 살상을 포함한 각종 참극들을 그 밑바탕으로 합니다. 굳이 공업화 시절의 초기, 즉 영국의 산업혁명을 촉진시키고 초기 산업자본인 방직업자들에게 군복 제조 등 '특수'의 기회를 제공한 나폴레옹 전쟁기로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립국인 스웨덴과 노르웨이 등)을 엄청나게 살찌우고 전세계적 채권자 국가로 만든 제1차 세계대전으로도 갈 필요 없고, 미국 대자본의 세계적 패권을 가능케 한 제2차 대전으로도 갈 필요 없습니다. 일단 세계 자본주의의 황금기, 즉 오늘날의 세계를 낳은 1945~73년이라는 시기를 보지요. 더군다나 트럼프부터 스웨덴의 극우들까지 "1950년대의 황금 시절로 돌아가자"고 아우성이고, 또 다른 쪽에서 코빈 같은 진정한 사민주의자들도 50~70년대의 복지국가를 하나의 지향점으로 삼으니까 그 시기를 한 번 상상 속에서 가보죠.
네. 트럼프의 말대로 1950~51년의 미국 경제는 환상적이었습니다. 8%의 연간 성장률이었는데, 그게 오늘날의 중국도 아니고, 약 10년전, 아직도 잘나갔을 때의 중국 수준이었죠. 그런데 그 8%가 나올 수 있는 비결은? 짐작하신 대로, 북조선을 황폐화시키고 25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의 생명을 앗아간 폭탄, 고엽제 등의 생산은 1950년대 초기 붐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었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자본에게 "신의 도움"이었던 조선 전쟁은 끝나자 1954년에 미국은 마이너스 성장에 빠져 - 0.6%의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더이상 사람을 죽일 수 없었다는 것은 미국 자본주의로서는 엄청난 '문제'이었습니다. 그런데 열전은 끝나도 냉전은 남아 있었습니다. 사실 냉전이라는 현실적 배경을 빼고는 복지 국가의 운영을 가능케 할 만큼의 세입을 냈던 그 당시의 기술적 발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군수기업들과 직결돼 있는 하이텍에의 국가적 투자, 그리고 하이텍의 발전에 의한 세입 증가는 바로 황금기/복지국가 시대의 기본적 경제 메카니즘이었습니다.
최초의 폐쇄회로(칩, 1958)부터 최초의 레이저(1960), 최초의 컴퓨터 네트워크 (ARPANET, 인터넷의 원형, 1969), 최초의 전자우편 (1971)까지, 황금기의 가장 중요한 모든 발명들은 거의 다 군사적 목적을 염두에 둔 국가로부터의 지원금을 받은 연구자들이, 대개는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한 것입니다. 일반인들이야 핵전쟁 불안에 전전긍긍하고 폭발이 터지면 대피소로 달라가는 훈련을 거듭했지만, 군-산-학 복합체로서는 냉전은 그야말로 "축복 중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참, 우리도 얌전한 척하지 맙시다. "월남특수"라는 말이 상징하는 월남전에서의 전쟁 폭리 행각도 있었지만, 대개는 냉전적 상황을 빼고 한국 대자본의 세계적 "굴기"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미국은 이승만 노인네나 다까끼 소위가 특별히 예뻐서 1945~71년 사이에 대한민국에 130억 달러를 퍼부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들에게는 한국이란 대북, 대쏘, 대중 관계에 있어서는 "전략적 자산"이었기에 재벌들에게 특혜 대출로 들어갈 차관들을 국가 레벨에서 주었고 또 한국 재벌들의 서방 시장에의 접근을 편리하게 한 것이죠. 박정희의 국가 주도적, 중상주의적 정책들도 내부 시장에의 외국 자본 접근 통제, 관세 장벽 등도 미국 대자본으로서 좋아 보일 리가 없었지만, 냉전이라는 상황 차원에서는 국가주의적인 한국 개발주의를 허용해야만 했습니다. 사실 자본 대국으로서의 대한민국도 냉전의 산물이죠.
지금 한 손으로 기후 협약을 파괴하고 다른 손으로는 중국과의 본격적인 장기적 갈등의 패턴을 만들고 대중국 군사 경쟁을 제도화시키는 트럼프는 미치광이로 보이죠? 보이는 건 그렇지만, 실은 전혀 아닙니다. 정확하게 계산된 행동들입니다. 기후 참극은 미국 자본에 '문제'보다 차라리 '기회'로 보이며 신냉전은 성장 동력으로 보입니다. 이는 어떤 '단절'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의 합법칙적인 '지속'에 더 가깝습니다. 단, 우리 지구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과연 인간과 지구를 파괴하면서 작동되는 이런 시스템이 우리에게 맞는 것인지 우리가 스스로 질문을 던져봐야 할 셈입니다.
(기사 등록 2019.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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