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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독성 물질 마시고 죽도록 일해서 일본을 이기자고?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8. 2.

이상수(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상임활동가)

 

 

[<변혁정치>에 실렸던 글(http://rp.jinbo.net/change/61643)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감사드린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생소한 반도체 소재 이름이 연일 언론에 거론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들리는 게 불화수소. 좀 더 익숙한 말로는 불산이라고 부른다. 여러 번의 누출사고로 노동자들을 죽게 했던 바로 그 화학물질이다. 2012년 구미에서 불산 누출로 노동자 5명이 죽었고, 18명이 부상당했다. 지역 환경까지 훼손해서, 농작물과 가축 피해는 물론이고 수백 명의 지역주민이 치료를 받아야 했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도 20131월 불산 누출사고로 4명이 다치고,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 당시 삼성은 작업자를 대피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사고를 은폐해서 사회적 공분을 샀다. 삼성은 불산 외부 유출은 없다고 주장했지만, 대형 송풍기를 돌려 불산을 공장 밖으로 빼내는 장면이 CCTV에 담겼다. 이 영상이 공개되면서 다시 한번 삼성의 거짓말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 사고에 대해 노동부가 근로감독을 실시한 결과, 무려 2천 건이 넘는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위반사항을 적발했다. 이후 작성된 안전보건진단 보고서 내용을 보면 더욱 심각하다. 흡입하면 사망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인 온갖 화학 가스를 다루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가스누출을 감지할 기구가 부적절한 위치에 달려있거나 수시로 오작동했다. 심지어 감지기나 누출 시 배출장치가 아예 없는 경우도 있었다.

 

불산뿐만 아니라 암모니아, 소화용 이산화탄소 등 가스 누출사고는 반복됐고, 여지없이 노동자들이 다치고 죽었다.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은 이렇게 반복적인 화학 가스 누출사고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제정됐다.

 

포토레지스트’, 가습기 살균제, 화평법

 

일본의 또 다른 수출규제 대상인 포토레지스트는 벤젠, 포름알데히드 같은 발암물질을 부산물로 발생시키는 게 확인된 유해물질이다. 포토레지스트를 사용하는 공정은 반도체 공장에서도 직업병 위험이 가장 높기로 손꼽힌다. 1980~90년대 미국 반도체 산업에서 유산을 비롯한 직업병 문제가 처음 불거진 계기도 바로 포토레지스트 때문이었다. 당시 유산의 원인으로 드러나 1995년부터 미국에서 사용을 금지했던 성분이, 2009년 한국의 삼성과 하이닉스 공장 포토레지스트에서 그대로 검출되기도 했다.

 

반도체 산업은 사용하는 화학물질 종류가 많은 대표적인 업종이다. 발암성, 변이원성, 생식독성 등을 유발하는 독성화학물질만 해도 수백 가지에 이른다. 하지만, ‘기업의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정보를 감춰 그 위험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위험은 공장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화학물질을 엄격하게 관리하지 않을 때 얼마나 큰 피해를 끼치는지 뼈아프게 알려줬다. 피해 제보만 수천 건에 이른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사에 따르면 피해자 숫자는 2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광범위하게 사용한 화학물질에 대해서 가장 기초적인 위험평가조차 이뤄지지 않을 정도로 기업들은 안전에 관심이 없다. 화학물질을 도입할 때 어떤 위험이 있는지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이런 참사를 막기 위해 꼭 필요하다. 화학물질등록평가법(화평법)은 바로 이런 참사를 막기 위해 만든 법이다.

 

자본과 친기업 언론은 화관법과 화평법을 반도체 소재 국산화의 걸림돌이라고 비난한다. 이미 하위법령으로 누더기가 된 개정 산안법에 대해서도 규제를 완화하라고 요구한다.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등록하고 영업비밀을 심사하도록 규제한 것을 지적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법 하나하나가 모두 사람들이 죽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법들을 없애거나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반도체 생산을 위해 안전과 생명을 희생하겠다는 말에 불과하다.

 

게다가, 정부는 소재 국산화를 명분 삼아 특별연장근로까지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재난을 수습할 때 제한적으로만 허용하는 조항을 이번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특별연장근로는 최대 근로시간 상한이 없어 무제한 노동이 가능하다. 적용대상도 소재 개발 업무에 국한하지 않고 적용 테스트 등의 업무까지 포괄하고 있어, 거의 모든 반도체 노동자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을 상담해보면, 예외 없이 과로에 시달렸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과도한 생산과 품질 경쟁으로 노동강도가 높아 스트레스 또한 엄청나다. 반도체 위기가 과장된 것과 별개로, 도대체 왜 이미 과로로 피폐한 노동자들이 무제한 노동으로 내몰려야 하는가? 정말 개발이 시급하다면, 고용을 늘리면 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쌓아놓은 수백조 원의 돈을 사용하면 된다.

 

이 나라 반도체 산업에서 축적한 천문학적 이익이 노동자와 국민들에게 돌아오지 않은 지 오래다. 그 이익은 노동자들이 안전하지 못한 공장에서 화학물질에 노출되며 직업병으로 고통받고 죽어가면서 쌓인 것이다. 노동자 덜 죽게 하자고 만든 법을, 반도체 생산하자고 훼손할 수는 없다. 너무 많은 이들이 이미 반도체 때문에 죽었다.



(기사 등록 20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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