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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어떤" 통일인가가 중요하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5. 8.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최근 구주한국학대회 (AKSE) 참가 건으로 이태리에 잠깐 갔다온 일은 있었습니다. 저는 자국에 대한 개탄의 소리가 가장 많이 들리는 나라는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평소 생각했는데, 로마에서 며칠 보내다 보니 이태리는 우리와 호형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유럽에서 최악의 부정 부패 수준, 정치인과 정부에 대한 최저에 가까운 신뢰, 총국민생산의 7% 정도를 갖고 노는 마피아, 그리고 무솔리니 이후에는 가장 극우적인 금일의 이태리 내각...

 

시국에 대해 담론해보면 자연히 개탄의 소리밖에 안나는데,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바로 '지역 문제', 그러니까 사실상 실패한 19세기말 이태리 통일의 문제입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통합이야 됐지만, 통일은 안됐습니다. 사회, 경제적 의미에서의 통일 말입니다. 지금도 명목상의 1인당 총국민생산을 보면 북부 이태리의 '롬바르디아' 지역은 독일과 엇비슷하지만, 남부의 '칼라브리아''시실리'는 그리스나 에스토니아, 우루과이보다 더 어렵게 사는 셈이 됩니다. 같은 나라에서 최북단과 최남단 사이의 2배 이상의 소득격차...사실 많은 면에서 과연 '같은 나라'인가 라는 게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가장 부유한 '롬바르디아' 지방으로 가면 한 때 아예 부유한 북부 이태리의 독립, 즉 이태리 통일의 '취소'를 주장했던 "북부동맹"이라는 우파정당은 전체 표의 3분의 1이나 득하는데 말입니다. 북의 주류인 우파는 '통일 세금', 즉 남으로 들어가는 지원금 내기를 거부하려 하는 거고, 남은 남대로 차별에 지칠대로 지치고... 명목상의 통일은 인제 거의 150년이나 되었지만, 실은 '시실리' 주민은 이태리 국민이기 전에 '시실리' 주민이고 밀라노 주민은 이태리 국민이기 전에 먼저 밀라노 주민입니다. 그러니까 정치적 통합은 쉬워도 통일의 ''을 거두는 것은 절대 쉬운 건 아닙니다.

 

"이태리 삼걸" (가리발디, 마찌니, 카푸르)이 한 때 단재 신채호 선생이 크게 주목한 구한말 지사들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만큼, 이태리의 '지역 문제'는 우리에게 절대 '남의 일'만은 아닙니다. 신채호 선생 같은 분들이 이태리를 - 독일과 함께 - 추격형 근대화의 '모범'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자국의 근대 통일국가 발전을 '성공작'으로 보는 이태리인들은 드뭅니다. 아주 드뭅니다. 사실 그들 중에서는 많은 이들은 "도대체 지역 평준화 정책의 효과는 왜 이토록 없었는가"라고 자꾸 자문을 합니다. 1945년 이후에는, 민주화된 탈파시즘 시대의 이태리에서는 역대 정권들은 "남부 우선 개발"의 구호 하에서는 나름의 재분배 정책을 실시하여 남부에서의 인프라 구축 등의 과제를 실행하기도 했습니다.

 

남부 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성장시대에, 1990년대 초반 이전까지 상당히 올라간 것도 엄연히 사실이죠. 그런데 아무리 '남부 개발'에 정책적 배려는 있었다 해도 격차는 그렇게까지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북부도 성장을 거듭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아무리 '정책적 개발'이라 해도 자본주의 국가인 이상 민간 자본으로 하여금 강제로 남부에서 공장을 건립하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북부에 그대로 있는 공장으로 남부 출신들이 몰려가 자본에 이용당하는 꼴이 되고, 남은 가족들이 그 송금으로 살거나 미국 등지로 이민가는 꿈이나 키우고... 남부의 상대적 박탈감은 그냥 그대로, 여전해왔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저는 '통일' 자체를 부정하거나 의심하지 않습니다. 평화공존레짐을 공고화시키기 위해, 이산가족들의 결합을 실시하기 위해, 쌍방 군인 머리수를 줄이기 위해, 나아가서 징병제의 악몽을 벗어나기 위해 당연히 통일을 향한 '과정'은 절실히 필요합니다. 탈분단은 우리에게 생명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한데 문제는 통일이냐 아니냐 라기보다는 '어떤' 통일인가 라는 것인 듯합니다. 통일은 꼭 걸어야 할 길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만병통치약은 결코 아닙니다. 통일이 돼도 남한의 자본주의는 그대로, 즉 그 신자유주의적 형태로 남아 있다면, 통일 코리아의 나날들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에 대해 저는 심각하게 회의합니다. 일단 이태리의 경우와 달리 적어도 초기에는 남한 자본의 공장들은 분명 북으로 갈 것입니다. 북의 임금 수준이 여전히 중국 동백 삼성에 비해 낮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놓칠 자본가들은 아닐 것이죠.

 

그런데 이 자본가들이 북에 들어가서 만들 일자리들은 과연 정규직일까요? 남한에서도 제조업 공장에서까지 불법 파견 노동이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과연 양질의 일자리일까요? 과연 그런 일자리들이 좀 생긴다고 해서 지금 20배 정도 되는 남북/북남 소득 격차는 빨리 줄어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와 같은 소득격차가 부추기는 남쪽 사람들의 북쪽에 대한 차별과 무시는 과연 어느 수준일까요? 북쪽 사람들이 이를 과연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까요? 사실, 남한에서 살인적 차별에 시달리는 탈북민들의 상황만 봐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레짐 하에서의 통일 코리아의 모습은 그대로 보입니다. 과연, 특히 북쪽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적에 바람직한 모습일까요?

 

통일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만큼 우리가 원하는 통일이 '어떤' 통일인가에 대한 고민부터 먼저 필요하기도 하죠. 세계적 수준의 참극인 남한의 신자유주의를, 우리가 북쪽 동포들에게까지 수출하고 싶은가요? 약자에 대한 차별, 일년에 약 1700명의 노동자를 죽이는 최악의 산재사 현황, 만연돼 있는 과로사, 8할 이상의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이 당하게 돼 있는 성추행을 통일과 함께 수출하고 싶은가요? 통일을 지향하고 북쪽 동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인 이상, 그런 고민부터 정말로 필요합니다. 오늘날의 남한은, 북쪽 동포는 물론이거니와, 남한 사람들도 하루도 편하게 살 수 없는, 그야말로 유사 봉건적인 개인예속과 신자유주의적 과도착취의 중첩이기 때문입니다.

 


(기사 등록 20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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