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
번역: 두견
2018년 11월 4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신사회주의자들’(New Socialists )을 위한 공개토론에서 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는 극우 테러 공격이 계속되고 있는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미국에 걸친 정치 및 사회 발전에 대해 조망했다.
맥낼리는 오늘날 극우파의 발전을 부채질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이 동시에 젊고 열정적인 좌파로부터 반격의 새로운 물결을 촉발시켰다고 주장한다. 위험과 가능성 둘 다로 특징지어지는 이 순간, 맥낼리는 기존 좌파가 억압에 맞선 해방이라는 급진적 약속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오랫동안 거리가 멀어져있던 새로운 대중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우파의 진군 속에 잃을 것이 너무 많고, 이토록 많은 새로운 지지층이 우리가 이겨서 얻어야 할 세계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된 때, 좌파는 역사적 창조성과 야심을 되찾아야만 한다.
영국에서 노동당은 거리에서 반나치 조직화와 새로운 페미니스트 반란의 신호와 지구환경을 위한 투쟁의 새로운 물결이 나타나는 동안, 새로운 활동가들이 대열에 물밀듯이 합류하는 것을 경험했다. 미래에 좌파가 어떻게 발전하느냐는 현재 직면한 도전과 기회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결정적으로 달려 있다.
그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전통들과 그들의 분석들, 주도권들, 반응들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의 말을 바꾸어 말하자면, 사회주의가 그 시대의 사회운동 안에서 "활기있는 믿음"으로 경쟁하기를 원한다면,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시대의 투쟁에 의미있게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맥낼리는 캐나다 ‘뉴 소셜리스트’(New Socialist)의 주요 활동가이면서 세계 경제, 여성 억압, 변혁운동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많은 책과 글을 쓴 학자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자본주의와 위기, 사회재생산 이론 등에서 마르크스주의의 혁신을 위한 많은 이론적 기여를 해 왔다. 현재 휴스턴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출처: https://www.rs21.org.uk/2018/12/19/fighting-for-socialism-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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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파시스트 록 콘서트에 참가중인 독일 시민들
위험한 시대
나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전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함께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기에. 그것은 우리가 엄청나게 위험한 시기에 살고 정치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걸 증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위해서, 당신들은 특히 미국이나 브라질 대통령 선거에서 지난 10일 정도에 벌어진 사건들만 보면 될 것이다. ‘생명의 나무’ 유대교회당에서의 대학살[미국 피츠버그에서 극우주의자의 총기난사로 11명이 사망]이든, 켄터키의 크로거 매장에서 두 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인종차별적으로 처형된 것이든, 또는 금요일로 북적거리는 플로리다의 요가 스튜디오에서 여성 혐오자 남성이 저지른 살인 광란이든.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모든 이들이 직면하는 위험의 정도는 지금 우리에게 매우 강력하고 날카로운 경각심을 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전제된 출발점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굳이 많은 시간을 들여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지난 금요일에 스티브 배넌에 항의했듯이, 이 방에 있는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이 모든 것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 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적 퇴보, 절망, 분노, 정치적 양극화 속의 상호연결성이라는 측면에서 고전적인 “어떻게 될 것이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답하며 나의 발언을 틀 지우려 한다. 내가 사회적 퇴보, 절망과 분노, 그리고 정치적 양극화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설명하겠다.
긴축의 시대
10년 전에 일반적으로 “세계 금융 위기”라고 불리는 전환점이 있었다. 2008년과 2009년의 그 위기와 함께, 몇 가지 일들이 매우 빠르게 연속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모두 여러분이 이미 봐왔던 경향이지만, 가속화되고 강화되면서 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왔다. 그 변화들은 더 이상 점진적이고 분산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빠르고 질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한편으로 지배계급이 20조 달러가 넘는 금액을 통해서 중앙은행과 정부들이 세계 금융 시스템을 구제하도록 대규모로 개입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사회적 지출과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삭감해서 은행 구제금융을 효과적으로 지불하도록 고안된 긴축정책을 의도적으로 시행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10년간 긴축정책을 겪어왔다. 2010년 토론토의 헌츠빌에서 G10과 G20이 모였을 때, 이들이 그들의 문서에 처음 사용한 첫 용어는 “긴축의 10년”이었다. 그들은 10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최종 공식발표에서 그들은 그것을 빼버리고 “긴축의 시대”라고 썼다. 그들은 다시 말해서 10년은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빈곤층에 대한 전쟁, 노동계급에 대한 전쟁 선포는 정치적으로 중도에 있는 많은 전통적 정당들에 의해 우선적으로 수행됐다. 예를 들어, 그것은 미국에서는 오바마에 의해, 독일에서는 앙겔라 메르켈 통치 하에 수행되었다. 처음이 경우에, 우파 정당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긴축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흔히 전통적인 중도 정당이 필요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분노와 분개가 끓어오르면, 배수가 필요한 늪을 이야기하면서 전통적인 정치적 중도파나 정치 엘리트들을 표적으로 삼아 악마화하는 것이 아주 매우 쉬웠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위 “포퓰리스트”들의 모든 수사학은 - 그리고 나는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매우 조심스럽다 - 긴축의 시대에 책임이 있는 엘리트들을 겨냥했다. 트럼프는 이것에 아주 능숙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오늘 <가디언>에서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노동계급 유권자들이 말하고 있는 기사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 일자리는 어디있지? 우리는 진심으로 믿었고, 그래서 우리는 그 자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일자리를 되찾고 싶어서 투표했다.”
그렇게 중도파를 겨눠서 공격하는 것은 우파에 의해 가장 성공적으로 정치 자본화되었다. 독점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중요하게 우파에 의해 정치 자본화되었다는 그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양극화로 해석되었다. 왜냐하면 그만큼 오바마의 민주당, 앙겔라 메르켈의 기독민주연합같은 중도파가 긴축을 주도한 정당으로 인식됐기에, 정치적 우파 정당들은 깊은 소외감과 절망에 호소할 수 있었다.
양극화 - 우파와 좌파로
우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항상 유리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강령과 이데올로기가 고기를 결과 같은 방향으로 자른 것처럼 들어맞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주의, 여성혐오, 가부장적 가족에 대한 찬양, 호모포비아와 트랜스포비아, 이슬람포비아, 반유대주의. 그 모든 것은 지배적인 사회의 결과 같은 방향으로 자른 것 같은 것이다.
좌파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즉 그렇게 쉽지 않은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자, 그 점에서 우리는 유리한 뭔가가 있다. 나는 곧 이 문제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나는 우파와 좌파로의 이 양극화에 대해 강조하며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단지 판을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질주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트럼프가 있었지만, 또한 버니 샌더스도 있었다. 버니 샌더스가 없었다면, 오늘날 미국에서 스스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 그 선거 운동의 가장 중대한 정치적 결과는 ‘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이 대규모로 정치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물론 민주당 기득권세력은 샌더스가 후보를 지명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고, 그들은 그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비열한 속임수를 썼다. 다시 한번, 왜?
샌더스의 정치에는 본질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마라.
나는 “버니 샌더스는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라거나 그 비슷한 거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아니다. 그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이다. 그러나 고전적 사회민주주의는 고기를 결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자르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회에 내재된 것과 같은 계급적 거부의 일부 개념을 요구한다.
영국의 경우, 물론 노동당을 둘러싸고 중요한 급진화가 있다. 그것은 제레미 코빈이 당대표로 선출된 것과 약 20만 명의 당원이 영국 노동당에 밀려든 것으로 대표된다. 그것은 코빈이 샌더스의 그것과 매우 비슷한 종류의 정치적 지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더욱 고전적인 사회민주주의이다.
지난 40년 동안 세계적 사회민주주의의 경향은 신자유주의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사회민주주의 틀 내에서조차 신자유주의로부터 탈피하려는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을 확보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덫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 대통령 선거의 마지막 주기에서 이와 같은 것을 보았다.
그렇다, 르펜의 국민전선이 약 700만 표까지 득표가 올라간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무섭고 위험한 일이지만, 장 뤽 멜랑숑의 왼쪽 입후보는 또한 내가 샌더스와 코빈을 묘사하는 것과 거의 같은 종류의 독립적인 좌파 대통령 후보로서 약 700만 명을 끌어 모았다.
전부는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정치적 효과를 지속시켜 왔다. 나는 오늘날 노동당 내부에 있는 20만 명의 사람들을 언급했는데, 본질적으로 그 정당의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노동당의 오래된 블레어식 신자유주의자들을 물리치려고 노력하고 있다.
미국 DSA의 회원이 5만2천명 이상으로 성장한 것도 그 자체로 같은 종류의 현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나는 주장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우파가 가진 유리한 점은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잘라내는 방식에 있다.
상식(Common Sense)과 양식(Good Sense)
이렇게 보자. 우리 모두는 지난 금요일 밤에 스티브 배넌이 토론토 대학 부속 문크(Munk) 센터에서 연설하도록 초대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자신에게 강경좌파 인사가 문크 센터에서 연설하도록 마지막으로 초청된 게 언제인지 물어봐야 한다. 글쎄, 그걸 답하려면 하루 종일 여기 있어야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도 생각해내지 못할 테니까.
우리 모두는 그가 ‘브레이트바트’(Breitbart: 미국의 극우매체)를 통한 '대안우파'(alt-right) 조직과 미국에서 백인우월주의를 부채질하고 네오나치를 조직하는 중심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은 많은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잘라져 있기에 그는 거기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런 종류의 초대장을 전혀 받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우리의 과제는 더 힘들게 느껴진다.
동시에, 나는 사회주의적 좌파도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노동계급의 의식은 결코 균등하지 않다. 그것은 결코 단순히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그람시는 1930년대에 무솔리니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쓴 그의 유명한 <옥중수고>에서 우리에게 말한다. “봐라, 노동계급의 의식은 항상 모순돼 있다.” 그것은 받아들여진 지배적 사상들의 혼합이다. 이 사회에서 지배적인 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의식은 또한 반대의 요소들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람시가, 부르주아지의 상식의 요소에 반하는 “양식의 요소”라고 묘사한 것이다. 상식의 요소는 이웃, 지역사회, 작업장 및 학교의 노동계급 사람들이 앞서서 서로의 눈을 긁기보다는 실천을 만드는 모든 방식의 연대와 저항의 실천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협력하고, 서로를 지원하고, 도움을 주고, 함께 조직하고, 그들 자신에게 더 많은 힘을 주는 집단적 반응을 만들어낸다.
노동계급의 의식 속에 있는 이런 모든 양식은 그런 종류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러나 지배계급의 사상과 같은 수준의 체계적 표현을 가진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지배계급은 그들의 사상에 대한 조직적 표현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관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여기에서 정치조직, 대중정당, 그리고 사회운동의 필요가 제기된다. 이들은 노동계급의 양식을 체계화하여 지배적 사상에 대응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실험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나는 좌파에 대한 몇 가지 토론을 하고 싶다.
일어나라 - 나가라!
여러분 중 몇몇은 내가 지난 가을 초 독일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나는 한번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만족스럽게도 좌파당(Die Linke) 내부 사람들과의 토론 중에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일어나라’는 의미인 ‘아우프슈텐’(Aufstehen)이라 불리는 경향을 형성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현재 약 20%의 지지율을 얻고 있는 ‘독일을위한대안’(AfD)이라는 극우세력의 성장에 대응하고 있었다.
AfD는 이슬람 혐오, 반이민, 극우정치에 바탕을 둔 대중정당이 되고 있고 매우 심각하게 위험하다. 아우프슈텐 사람들은 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좌파들은 이민자들에 대한 우리의 지지를 강조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한다. 우리는 열린 국경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빵과 버터의 경제적 이슈에 관해 독일을위한대안에 이끌리는 노동자들에게 매력을 줄 필요가 있고 그들과 싸우지 말아야 하고, 이민과 같은 문제들을 둘러싸고 논쟁하지 말아야 한다.”
아마도 좌파당 소속으로 가장 잘 알려진 국회 부의장은 아우프슈텐의 지도자 중 한 명일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매우 큰 유명인을 가지고 있다. 10~12일 전에 좌파당에 있는 이 경향의 리더와 <자코뱅(Jacobin)>이 아주아주 무비판적으로 인터뷰를 한 것을 보고 나는 불쾌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자코뱅> 편집자와의 일대일 토론을 통해 이것이 매우 여러모를 고려한 정치적 입장이라는 것을 알게됐고, 그래서 더욱 심각한 문제적이라고 본다. 나는 이 사람들과 나의 논쟁이 단순하거나, 도덕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정답이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독일에 있을 때, 전략적 논쟁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예를 들어, 독일을위한대안이 성장한 도시들 중 하나는 켐니츠(Chemnitz)다. 켐니츠는 구동독 지역에 있다. 그곳은 백인이 아닌 사람들과 이민자가 거의 없는 산업 노동계급의 마을이다. 독일로 이민가는 사람들은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 그리고 그와 비슷한 곳으로 가고 있다. 켐니츠로는 가지 않는다. 그러나 우파 반이민주의자들의 주장은 수천 명의 사람들을 AfD의 배너 뒤로 불러모으며, 켐니츠에서 조직을 건설할 수 있었다.
내가 베를린에 도착하기 6, 7일 전에 켐니츠에서는 대규모 반인종주의, 반파시스트 축제가 열렸고 대부분 젊은 6만명의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오, 우리는 이민 문제를 뒤로 돌리고 경제적 요구를 앞세워야 해”에 대한 내 우선적 질문들은 이것이다.
“누가 거기에 있었나? 6만 명은 누구였나? 그들은 어떻게 그곳에 갔을까? 누가 그들을 조직했는가? 당신은 그들을 어떻게 따라가고 있는가? 반인종주의적이고 반파시즘적인 콘서트에서 나타난 그들의 행동주의를 켐니츠에서 진행중인 거리를 되찾으려는 운동으로 어떻게 바꾸려고 하는가?”
물론, 만약 당신의 모든 초점이 선거라면, 당신은 그런 질문들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독일에는 다른 단체들도 있고, 그들 중 일부는 좌파당 안에 있다. 나는 스스로를 ‘마르크스21’이라고 부르는, 지역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좌파당 내부의 정치경향 활동가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요점은 6만 명의 사람들이 밖에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젊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독일을위한대안으로 옮겨가는 나이든 백인 유권자들이었나?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보통 그들의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과거의 사회적 급진화로부터 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젊은이들이 급진화될 때 매우 자주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모를 상대하고, 이모와 삼촌들을 상대하며, 그들의 오른쪽으로 향하는 그들의 이동에 대해 논쟁하고,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는 정치적 장벽을 세웠다. 왜냐하면 그들은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고, 사회운동의 일부가 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논쟁에 대한 그들의 자신감은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물론, 여러분 중 일부는 2주 전, 그 주말에 24만 명의 사람들이 대규모 반인종주의 동원을 위해 베를린 거리에 나왔고, 최근에 <자코뱅>이 나왔던 아우프슈텐의 리더들은 의도적으로 그 집회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거기에 지금 좌파에게 놓인 위험이 있다.
노동계급의 몇몇 부분이 오른쪽으로 이동했는데, 트럼프에게 이끌렸고, 독일을위한대안에 이끌렸고, 프랑스에서는 국민전선(NF)에 의해 당겨졌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운동에 적응하고 우리의 정치에서 칼날과 비판적 날들을 빼야 한다는 개념이 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재앙적이고, 당신은 시작부터 땅을 내주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은 또한 켐니츠의 6만 명이나 베를린 거리의 24만 명같은, 이러한 경향에 맞서서 결집할 수 있는 바로 그 실제적 힘을 무시하는 것이다.
영국의 트랜스포비아
나는 최근에 영국에 가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나는 이 토론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는데, 그러나 영국 좌파 일부에서 진행된 논쟁에도 원칙적으로 같은 것이 적용된다. 영국에서 새로운 형태의 트랜스젠더 평등을 창출하기 위해 고안된 입법에 반대한 초기 사회주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나온 사람들도 일부 포함해서 말이다.
지금, 영국 좌파의 일부에서 노골적으로 트랜스포비아적인 주장들이 나오고 있고, 당신은 이면에서 그와 같은 종류의 요소들을 많이 듣고 있다. “음, 당신이 만약 이걸 내세우면 노동계급의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게 될 것이야.”
자,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 중 하나는 노동계급이 모든 가능한 측면에서 엄청나게 다양하다는 겁니다. 노동계급의 삶과 노동계급 가정을 특징짓는 단일한 사회적, 문화적 규범이 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1950년대식의 진부한 관점에서 소위 “포드주의” 적인 노동계급의 가정을 제안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집에 있는 어머니와 노동계급의 아버지와 항상 아버지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함께 사는, 그것은 심지어 1950년대에도 현실이 아니었다. 당신이 이것이 1950년대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한다고 해도, 오늘날의 사회는 매우 근본적으로 다르기에,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이 사회는 가장 마지막에 있었던 엄청난 급진화 물결로 인한 모든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성과들을 완전히 되돌리지 못하고 있다. LGBTQ의 권리, 여성의 권리,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반인종주의적 시민권에 있어서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지금, 그것은 우파의 의제이다. 이 모든 사회적 문화적 성과들을 제거하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당신이 우파의 문건을 본 적이 있다면,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는 허구적 실체가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고 그들이 믿는 걸 볼 수 있다. 그들은 어쨌든 “문화적 마르크스주의”가 대학 등을 지배하고 있다고 실제로 생각한다. 완전히 뒤돌아가거나 없어지지 않은 일련의 문화적, 사회적 변화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 또한 이해할 필요가 있고 노동계급의 다양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지지자들
좌파에게는 새로운 지지자들이 있다. 그 새로운 지지자들은 어떤 경우에는 측정 가능하다 – 손으로 만져서 알듯이 측정가능하다. 나는 내가 이미 쓴 몇 가지 예를 사용할 것이다. 블레어주의적인 제3의 길에 맞서서 코빈을 지지해 영국 노동당에 입당한 20만 명이 있다. 미국의 DSA는 버니 샌더스 선거운동 초기에 약 6천명의 회원이 있었다. 그들은 현재 5만2000명을 넘어섰다.
나는 3~4주 전에 휴스턴에서 휴스턴 DSA 공동의장 중 한 명과 함께 몇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휴스턴에 온전한 일련의 운동단체와 함께 500명의 회원이 있다. 거기에는 인종정의 운동 단체가 있고, 특히 도시에서 감옥 문제 등을 중심으로 일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바로 지금 휴스턴의 몬트로즈 도서관에서 “드랙 퀸 스토리 타임”을 옹호하기 위한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왜냐하면 매달 토요일 오후에 드랙 퀸들이 와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읽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동안 계속돼 왔고 이제 우파는 그것에 맞서서 동원하고 있다. 그리고 DSA는 “드랙 퀸 스토리 타임”을 옹호하기 위해 다른 단체들과 힘을 합쳤다.
여러분 중 많은 수가 이민세관단속국(Immigration, Customs and Enforcement: ICE)에 맞서는 반ICE 행동에 많은 DSA 그룹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발전이다. 내가 독일에서 본 두 가지 사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하고 싶다. 대부분 청년이었던 켐니츠의 6만명과 베를린 거리의 24만 명 말이다. 이들은 새로운 청중들이고 그들은 좌파들이 아주 오래 동안 가져 왔던 것보다 매우 훨씬 크다.
이것이 좌파에게 의미할 도전 중 하나는, 여러분이 성장하는 청중이 없었던 시기에 정말 빠지기 쉬웠던 주변성에 대한 모든 찬양을 벗어나는 것이다. 성장하는 청중이 없을 때, 여러분은 익숙한 사람들과 편안하게 지내기가 정말 쉽고 매우 주변화된 사회 집단에 익숙해지고 그것에 안주하게 된다.
나는 15달러를 위한 투쟁 캠페인[온타리오 전역에 걸쳐 15달러의 최저 임금과 향상된 노동조건을 얻기 위한 캠페인]이 달성한 거대한 성과를 말하고 싶다. 이 캠페인은 지역 사회로 퍼져나가고 있고, 집집마다 방문하며, 지하철역으로 가고, 사람들에게 서명을 받고, 청원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팀 허튼’ 식당[최저임금을 거부한 식당 체인]에서 있었던 지난해 행동은, 다시 한번 15달러를 위한 투쟁이 주도적으로 앞장서, 모든 새로운 지지자들과 연계한 것이었다.
지난 금요일 밤 스티브 배넌 반대 시위의 가장 큰 성과는 지난 1년 동안 시청에서 극우에 맞서던 아주 작은 행동에서, 이제 거리에 나선 천여 명의 사람들을 맞이한 것이다. 그런 종류의 행동의 핵심은 단지 우익에 도전했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배넌의 말을 듣기 위해 온 사람들중 일부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 핵심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그들을 더 불편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우리의 메시지가 지금 당장 가질 수 있는 호응에 대해 우리가 희망에 가득차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 큰 도전이 있다. 나는 조직자들과 이야기를 통해 토론토의 노동위원회 집행부가 의도적으로 배넌 반대 행동을 지지하기를 거부했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앞장서 조직하는 조직 중에 하나가 ‘누구도 불법이 아니다’(No One Is Illegal: 이주민 지원 단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돌아가 “그건 재앙이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들이 2010년 토론토에서 ‘누구도 불법이 아니다’ 운동과 관련한 일부 행동에서 무엇이 달랐든지 간에, 그것이 오늘날 극우파와 싸우기 위해 노동위원회의 자원을 동원하는 데 장애물이 됐다면 용납할 수 없다.
좀 더 작은 규모로는, 나는 종종 내 자신의 페이스북 피드를 통해 미국의 DSA를 씹는 것을 주된 취미로 하는 사람들을 본다. 음, 나는 그 기관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덧붙여서 그 안에서는 큰 논쟁이 있다. 그러나 극우파에 반란에 직면하여 우리는 연합 전선과 투쟁의 공동 전선을 만들면서 동지적인 토론을 해야 한다.
여기서의 도전과제 중 하나는 다음 기간 동안에 토론토와 온타리오주 전역에 걸쳐 반 포드[더그 포드는 온타리오의 반동적 주지사이다] 조직화 속에서 어떻게 그것을 실행할 것인가다. 그것이 배넌에 맞선 동원이 그렇게 중요했던 이유들 중 하나다. 그것이 더그 포드의 당선 이후 일어난 가장 크고 전투적인 행동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고, 앞으로 몇 달 동안 투쟁을 전진시키기 위한 자신감과 연대의식을 재건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회주의의 급진적 전통은 지금 당장의 정치적 급진화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한다. 나는 스스로를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전통과 강력하게 동일시한다. 그것은 선거, 의회를 통해서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반란과 대중 투쟁을 필요로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부가적인 것으로서 선거나 의회 캠페인이 없을 거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또한 그 전통이 그 시대나 후기 자본주의에 맞게 갱신돼야 한다고 믿는다. 마르크스, 레닌, 룩셈부르크, 그리고 그람시가 결코 이론화하지 못했던 모든 다양한 사회적 억압들은 우리의 정치적 이해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당신은 칼 마르크스에게서 장애인 권리에 대한 많은 주장들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로자 룩셈부르그에게서 트랜스젠더의 권리에 대한 많은 양의 언급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의 전통이 그 날의 새로운 투쟁과 연관을 맺으며 살아있고 발전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가 지키려는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전통은 반인종주의, 페미니즘, 퀴어적이고 생태사회주의적인 정치, 장애인권 투쟁 등에 의해 더욱 풍부해져야 한다. 이것들은 살아있는 전통의 일부로서 정치적 관점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
더욱 노력해야 한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독일, 미국, 그리고 물론 토론토에서 활동가들과 함께하면서 했던 토론들을 말함으로써 마무리를 짓겠다. 그것은 우리 좌파 또한 변곡점에 있다는 걸 나에게 정말로 확신시켰다. 나는 최근 사건들에 비추어 볼 때 좌파가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관용구의 표현이 보여주듯이 “더욱 노력해야 한다(raise our game).” 왜냐하면 극우파의 위험이 치명적으로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를 겁먹게 하고 우리 편에서 진정한 절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반면, 그 밖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결집하고 조직해야 할 지지자들을 우리가 무시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우리의 과제는 주변부에 머무는 급진적 사회주의를 훨씬 더 중요한 사회적 힘으로 옮겨가게 하는 것이다.
(기사 등록 20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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