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최근에 우연치 않게 문 대통령의 이 인터뷰를 접하게 됐습니다(링크) 통일과 미군 지위 등을 언급한 문 대통령은, 이런, 아주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 바 있습니다:
"남북 통일 이후에도 동북아 전체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 논급의 내용을 논하기 전에는 한 가지 단서를 달겠습니다. 저는 어떤 면에서는 문 대통령의 고심들을 인간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가 미국에 가서 직면해야 할 것은 펜타곤이라는 이 세계 최악의 대량 살상 메커니즘입니다. 북-미 관계 개선으로 나름의 정치적, 상징적 자본을 벌겠다는 트럼프가 있어서 약간의 제어는 되지만, 사실 펜타곤의 매파들은 이북의 대륙간 미사일 개발 성공을 일종의 “casus belli”, 즉 대북 침략을 감행하기에 충분한 “전쟁 명분”으로 인식합니다.
국무부 같으면 대북 화해를 주장하는 일파도 있지만 일단 대통령이 호전적으로 나가고 그 대통령 뒤에 국회에서의 다수가 있다면 한/조선반도는 순식간에 사람 살 수 없는 폐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시리아나 예멘을 보시면 이게 어떤 의미인지 실감하실 터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미국에 가서 미국 정책 입안자, 정책 전문가 집단을 “설득”해야 하는 문 대통령의 입장은 동감할만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죠.
한나라 초기의 삼걸 중의 한 명인 韓信이 袴下之辱을 본 것, 즉, 그를 위협한 무뢰한 가랑이 사이에 기어 들어간 고사(사마천의 <사기> 참조)를 연상케 하는 대목일 수도 있죠.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 한 이야기라고 해서 무슨 법적 구속력이 있다거나 그런 게 아닌 이상 이를 미군 주둔 지속에 대한 “약속”이라고 본다면 좀 과한 해석일 수도 있습니다.
한데 이와 동시에 문 대통령의 발언은 대단히 우려스러운 측면도 지니고 있습니다. 바미당이나 자한당 같은 극우들이야 미군 바지 가랑이 안으로 들어가고 그 가랑이를 붙잡는 것을 ‘욕’이 아닌 ‘명예’로 아는 거야 천하가 다 아는 일입니다. 한데 문 대통령의 발언이 웅변적으로 보여주듯이, 극우뿐만 아니라 중도 자유주의자들도 인제 미군의 한/조선반도에서의 “영원한 주둔”을 받아들여, 보-혁의 차이를 넘어 “영원한 손님”으로서의 미국의 역할이 수용됐다는 것은 한국 정치 주류의 현실입니다.
정의당과 그 왼쪽에 있는 정당들은 여전히 원칙상 미군철수론자들이긴 하지만, 아마도 정의당이 더 주류화되자면 “미군의 영원한 주둔”을 기존사실로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수용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군의 영구적 주둔”은 한국 주류 정치의 도그마, 나아가서 주류정치로 들어오기 위한 “필수적 통과의례”가 됐다는 것이죠. 물론 어떤 면에서는 “미군 영구 주둔”의 수용은 그저 “현실과의 타협”이라고 할 수 있기도 합니다. 까놓고 이야기하면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사보호령에 불과합니다. 미국으로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고 돈이 바닥 나면 한/조선반도 남반부에 대한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할지도 모르지만, 단지 점령지 주민들의 ‘의지’만으로는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 대통령의 후계자들 중에서는 누가 설령 “미군 철수”를 언급하기 시작한다면 일단 외국인 투자가 40% 정도 되는 증시부터 무너지겠죠? 다음에 “반덤핑조치”, 그 다음에 진짜 무역 제재들이 가해지고, 그 단계에서는 이미 이 “용감한 대통령”은 탄핵 몰이 대상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 대통령은 사실상의 군사보호령의 “자치단체장”(?)인 자신의 권력의 한계점을 명시했다고도 볼 수 있는 거죠. 솔직히 한 번 자신들에게 물어봅시다. 가령 심상정 대표가 현대판 “내지”에 가도 “조선주둔군을 철수하라”고 외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건 다 알면서도 한국 주류 정치의 도그마를 그대로 반영한 문 대통령의 논급을 한 번 재음미해봅시다. “동북아 전체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라고 하셨는데, 이걸 외교어에서 그냥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오늘과 같은 지역질서를 흔들지도 모를 중국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삼척동자가 여기까지 쉽게 이해할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몇 가지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미군이 한/조선반도에 주둔하든 말든 간에 만의 하나에 중-미 간의 무력 갈등이 생긴다면 현 동맹 체제 하에서는 한/조선반도 역시 시리아나 예멘이 됩니다. 그러니까 "안정과 평화"의 비결은 중-미 긴장의 완화, 그렇지 않으면 중-미 갈등이 지속돼도 한/조선반도의 전장화 시나리오를 예방하는 조치들일 텐데, 이건 꼭 “미군의 주둔”일까요? 반대로, 미군의 철수, 즉 한/조선반도 중립화에의 근접은 한/조선반도 전장화 시나리오를 더 잘 예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중국의 패권이 잘못하면 이웃에 대한 부담 내지 압박이 될 수 있다는 것까지야 사실입니다. 한데 남북/북남이 정말로 “느슨한 연방체” 같은 것을 이룰 수 있다면 그 상비 병력이 합쳐서 약 2백만 정도 될 것입니다. 물론 군축을 해서 이를 2~3배 축소시켜야 하겠지만, 적어도 중/일과 같은 지역적 패권 세력들로부터 이 반도를 지키기에는 “통일 코리아”는 충분한 힘을 가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을 공연히 자극시킬 뿐인 미군은 정말로 필요할까요? 그리고 성주나 평택, 동두천 등 미군 주둔지의 인권 문제는요? 미군 주둔 지대 주민들을 문 대통령이 생각하는 “동북아 평화와 안정”의 희생물로 만들 작정인가요?
다시 한 번 강조컨대, 저는 자국의 군대에 대한 지휘권마저도 완전한 의미에서 가지지 못한 대통령의 입장을 동감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의 권한의 실질적인 한계를 잘 아는 거고, 그의 평화 노력에 지지와 성원을 보냅니다. 그렇지만 그가 대표하는 한국 주류 정치의 “영구적인 미군주둔론”에는 아주 아주 심각한 문제들이 내재돼 있습니다. 이 논리는 미군이 이 땅의 실질적 주인이 된 오늘날 상황을 그냥 수용하자는 이야기인데, 이러면 안 됩니다. 미군 주둔지 피해자들의 인권 차원에서도 안되고 중-미 긴장이 언제 무력 갈등으로 번질지도 모를 지역 상황의 논리 차원에서도 안 됩니다. 궁극적으로 미군 철수와 중립화야말로 평화로의 길이라는 건 저의 굳건한 신념입니다....
(기사 등록 201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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