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갑수(<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 번역자)
[아래 글은 지난 12월 중순에 있었던 '제8회 제주4.3평화포럼'에서 발표된 글이다. 광주항쟁에서 벌어진 학살과 그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분명하게 지적하는 이 글을 옮겨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제주4.3평화재단과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광주 항쟁 1이래 지난 38년 간, 광주의 온전한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은 두 갈래로 뻗어 나갔다. 그 한 갈래는 학살의 참혹을 빚은 쿠데타를 감행한 전두환과 그 일당에 대한 사법적 처벌을 향했고, 다른 방향은 피에 젖은 전두환의 권력욕을 지지한 미국의 도덕적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쟁과 관련한 중요한 사실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민간인을 향한 발포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 미국이 광주의 참혹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언제 알게 됐는지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나는 광주의 비극과 관련, 한국인이 미국에게 공식 사과를 받을 만 하다고 믿는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자국 국민에게 저지른 과오조차도 반성하고 있지 않다. 1998년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시민자유법(Civil Liberties Act)을 발효했다. 2차대전 당시, 수용소에 감금한 10만명의 일본계 미국인에게 사과하고 보상하기 위함이었다. 집단 수용이 일어난 지 무려 46년만의 일이었다.(Quereshi 2013)
한국인의 호소만으로는 미국은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사과를 받기 위해서는, 한국인은 그들의 요구를 조율하고, 항쟁 진압과 관련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심화해야 한다. 광주 항쟁 관련 미국이 갖고 있는 모든 정보를 한국인들이 완전히 접근할 수 있다면, 이러한 정교화 작업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정보 공개: 짤막한 개요
항쟁 이후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은 몇 가지 계기를 통해 광주의 폭력 진압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한국인의 이해를 넓혀 왔다. 전두환 정권이 광주 보도를 엄격히 검열했던 1980년 초, 한국의 학생운동권과 재야는 주한미군 사령관 우두머리인 한미연합사가 보병 20사단을 시위 진압을 위해 한국 군부에게 지휘권을 넘긴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공수부대가 한미연합사 지휘하에 있지 않았더라도, 이들이 광주에서 자행한 만행을 미국은 그 당시에 이미 훤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이것을 한국인은 인권 외교 공약으로 당선된 지미 카터의 배신이라고 여겼다. 당시까지 급진주의 운동이 부재했던 한국에서, 미국에 대한 환멸은 반미주의로 발전했다. 시카고대학교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1980년대 한국 학생운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학생들이 무엇을 항의하고 있냐고? 시금석은, 언제나 광주와 광주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었다. 인권 외교 정책을 통해 지미 카터 대통령은 미국이 박정희 독재, 인권침해 그리고 테러에 대해 뭔가 할 것이라는 희망을 구축했었다.”(Cumings 1997, 384)
1989년 6월 19일, 국회 광주위의 거듭된 요청에 의해, 당시 아버지 부시 행정부는 배경설명(Backgrounder)을 발표했다.(USIS 1980) 이 성명서의 주요 내용은 미국은 전두환이 광주에 공수부대를 파견한 것을 사전에 절대 알지 못했고, 미국은 전두환의 폭력적 정권 찬탈을 절대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9페이지 분량의 이 변명은 그 후, 발간된 미국의 한국 담당자들의 회고록에서 그대로 반복됐다(위컴 주한미군 사령관, 윌리엄 H. 글라이스틴 대사, 그리고 당시 미국 NSC 관리 도널드 P. 그레그).
마침내 1996년 1월, 미국 “저널 오브 커머스”(The Journal of Commerce)의 탐사전문기자 팀 셔록(Tim Shorrock)이 미국 정보공개법(FOIA)을 통해 입수한 기밀해제 문서를 공개하면서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셔록의 문서들은 미국이 최소한 서울과 광주에 공수부대 여단을 배치하려는 전두환의 비상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또한 백악관과 국무성, 그리고 국방부 최고 대한정책 담당자들을 위한 정부 부처간 커뮤니케이션 링크, "체로키"(Cherokee)를 밝혀냈다.(Shorrock, The Cherokee Files 1996)
2014년 4월~2017년 3월 Wikileaks는 서울 주재 미국대사관과 국무성 사이에 수백 개의 외교 전문을 포함해 2백50만 건에 가까운 카터 행정부 시절 외교 전문을 공개했다. CIA는 또 2017년 1월 20일 FOIA 자료실(https://www.cia.gov/library/readingroom/home)을 통해 약 1천3백만 건의 기밀 해제 문서를 공개했다. 5.18 기념 재단의 요청에 따라, 나는 광주항쟁 관련된 기밀 해제 문서 42개를 찾아냈다. 거의 예외없이 내용이 일부 삭제되었지만, 문서들은 1980년 5월 광주와 관련, 인권을 저버리고 군사적 안정을 단호하게 선택한 미국의 냉전적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2017년 5월, 광주MBC의 김인정 기자는, 80년 5월22일 백악관 정책 검토회의에 참가한 당시 국방부 차관보 니콜라스 플랫(Nichols Platt)을 만나 그의 회의 당시 친필 노트를 입수 했다. 바로 이 정책 회담에서, 미국의 12명의 고위관료와 3명의 군장성은 “한국정부에 의한 광주의 질서회복을 우선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2 수기노트는 미국 지배층 상부에 뿌리내린 냉전 논리의 일면을 보여줬다.
광주 진압 직후, 5월27일에 나온 CIA의 한국상황 보고서. 대부분 검열된 채 공개됐음.
전두환, 브루스터, 글라이스틴, 베시
광주학살 6개월 전,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은 무력으로 군권을 장악했다. 그날 밤, 전두환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동원했고, 한미연합사 규정을 과감히 어겨가며, 전방의 9사단을 서울 시내로 동원했다. 다음 날, 많은 장성과 장교들이 체포되거나, 전역해야만 했다.
이른바 12/12 사태와 관련하여, 잘 안 알려진 사실은 <뉴욕 타임즈>가 최악의 하극상으로 부른 이 사건 이틀만에, 위컴 주한미군 사령관 반대를 무릅쓰고, 주한 미대사가 하극상의 우두머리 전두환을 대사관 관저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그 만남은 당시 CIA 한국지부장 로버트 G 브루스터 (Robert G. Brewster)가 주선했다.(Gleysteen, 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 Carter and Korea in Crisis 2012, 83)
글라이스틴과 전두환의 첫 만남은 장소와 시기에서 외교상 관례를 벗어난 일이었다. 또한 김대중의 첫 미대사관저 방문과 사뭇 달랐다. 정치가이자 노벨평화상을 장차 수상할 김대중이 미국대사관저에 공식적으로 첫 발을 디딘 것은 1987년 7월이었다. 김대중을 독립기념일 리셉션에 초대하기 전에, CIA 경력 40년의 미국대사 제임스 R 릴리(James R. Lilley)는 직접 김대중의 과거에 대해 조사를 했다. 릴리는 김대중이 “파괴분자”나 “북한 첩자”가 아니라는 결정을 내렸다.(Lilley 2004, 281)
전두환에게 글레이스틴이 신속히 만날 수 있었던 사실이 그들이 논의한 것보다 더 중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회동을 그의 폭력적 권력 장악에 대한 미국의 승인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동에 대한 소식이 퍼지자, 사람들은 설득 당하기 시작했다. 미 대사관의 무관 제임스 V. 영(James V. Young)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회동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나와 미국 대사관 직원들에게 다가와 미국 정부가 전두환을 지지했다는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전두환과 글라이스틴 대사가 그런 훈훈한 모임을 가졌느냐고 말이다.”(Young 2003, 83)
실제로, 회동은 쿠데타 괴수와 서울 주재 미 외교 수장 사이에 훈훈함을 꽃피웠던 듯하다. 회동 직후, 12월 14일 밤, 글라이스틴은 국무성으로 전문을 보내, 12/12를 “사실상 쿠데타”(coup in all but name)로 지칭한 자신의 묘사가 경솔했다며, 철회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국무성도 공개적으로 그런 표현을 공개적으로는 쓰지 말라고 충언한다. 이유인 즉 슨, 기존 정부가 여전히 존재하는 한, 12/12를 고전적 쿠데타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Gleysteen, Need for Care in Characterization December 12 Incident 1979)
글라이스틴은 한국이 완전한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군을 동원한다는 전두환의 비상 계획을 승인해야만 했다고 믿었다.(Shorrock, The View From Washington 2017, 149) 한국의 정치 반대세력에 대한 그의 편견은 전두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요소였다. 그러나 일찌기 쿠데타 주동자 전두환을 지지한 인물은 브루스터인 것으로 보인다. 3
위컴에 따르면, 전두환이 12/12 권력 찬탈을 계획하면서, 부하들에게 브루스터와의 우정과 탄탄한 업무 관계를 활용해 미국 대사를 설득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두환이 군을 장악한 후, 브루스터는 전두환이 유일한 수단이며, 미국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라도, 그와 협력해야 한다고 위컴에게 말했다.(Wickham 2000, 79)
또한, 전두환은 주한 사령관을 지내고 육군참모 차장으로 부임한 존W. 베시를 통해, 공식채널를 우회하여, 미 군부 내부와 직통할 수 있는 일종의 백채널을 갖고 있었다. “모든 메시지는 전두환과 베시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당시 국방성 차관보였던 플랫이 광주MBC와 인터뷰에서 말했다. “우리는 베시를 통해, 국방성과 전두환 사이의 특별한 채널을 갖고 있었다.(Kim 2017)
브루스터와 베시는 각각 1982년과 2016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브루스터가 전두환에 대해 그의 상사와 동료에게 뭐라고 보고했는지 공개되지 않고 있다. 또한 베시와 전두환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예비계획
1996년, 셔록은 전두환이 민간인을 향해 특수부대를 사용할 계획을 미국이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가 획득한 기밀해제 문건 중 어느 것도 공수부대가 언제 광주로 배치됐는지를 특정하지 못했다. 셔록은 다음과 같이 실종된 고리를 설명한다.
이들 문서 어느 것도 이들 특수부대가 광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카터 행정부가 전두환이 시위 진압에 공수부대를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공식입장과 단호하게 모순된다.(Shorrock, The View From Washington 2017, 151)
같은 해, 셔록이 당시 NSC의 아시아 정보 담당자인 그레그에게 광주에 정예부대가 배치되는 것을 미국이 알지 못했던 이유를 묻자, 그레그는 공수부대의 이동에 대한 정보가 미 대사관이나 백악관의 정책수립 담당자들에게 닿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정보의 흐름을 살펴보는게 그의 임무의 일부이기는 했지만, 그레그는 “군정보국이나 CIA에서 걸려진 뒤, 읽었다.”고 말했다.(Shorrock, The Cherokee Files 1996)
그레그의 진술은 1980년 5월 23일 국가안보보좌관 지브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에게 보낸 NSC의 일원인 마이클 옥센버그(Michel Oksenberg)의 메모의 내용과 일반적으로 일치한다. 옥센버그가 미국이 한국 상황에 뒤쳐져 왔는지에 대해 열거한 이유 중의 하나는 “군부 내부의 권력 다툼 중인 일부 세력의 계략에 의해 병력 이동이 있었는데, 우리는 사전 인지를 못했다”였다. 이 중요한 메모는 5.18항쟁의 비극적 운명을 봉인한 백악관 정책검토회의 다음날 나왔다.(Oksenberg 1980)
이 두사람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12/12 사태 전후부터, 전두환은 곧잘 한미 연합사 규칙을 위반하고, 국군을 자신의 사설 경비 용역처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적 결함과 사실상의 허점에도 불구하고, 이들 주장은 미국의 최고 정책 결정 수준에서 전두환의 병력 배치에 대한 사전 인지가 부족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전두환이 브루스터와 베시와 나눈 통신과 대화 내용의 전면 공개가 시급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백채널을 통해 전두환의 활동에 대한 정보가 전달되는 것을 억누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셔록도 다음과 같이 적시한다. “내 정보공개 요청을 검토한 기관간 협의체는 광주 항쟁 전후, 위컴 장군과 한국의 카운터파트나 미국 정부 사이에 오간 통신문의 공개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거부했다.”(Shorrock, The View From Washington 2017, 151)
사망자 숫자
항쟁 희생자의 숫자는 광주를 공부하는 연구자와 저널리스트들을 괴롭히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1996년 한국 정부가 발표한 공식 사망자 숫자는 196명이었으나, 정부는 288명의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했다.(Wudunn 1996) 오늘날까지, 사망자 숫자는 확정되지 않았고, 약 81명이 실종 상태이다.
그러나 80년 5월 22일 백악관 정책검토 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은 이미 하루 전날 있었던 도청 앞 집단 발포 희생자 수를 추정해 내고 있었다. 플랫 메모에 따르면, 위컴과 글라이스틴은 광주에서 60여명이 사망하고, 400여명이 부상했다고 보고 했다. “당시 아무도 몰랐다. 꽤 이른 시기였다”라고 사망자 숫자에 대해 광주 MBC 인터뷰에서 플랫은 말했다.(Kim 2017).
실제로, 도청 집단 발포 하루 만에 나온 미국의 사망자 추정치 60명은 16년 후, 1996년 한국정부가 공식 발표한 54명의 근사치이다. 기밀의 추가 해제를 제외하고는, 미국이 어떻게 그렇게 신속하고 정확한 추정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4 또한 추가 기밀해제는 광주항쟁 사망자 숫자를 정확히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
이 글에서, 나는 지금까지 기밀 해제된 미국 문서를 검토해, 전두환과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정보공개 필요성을 강조했다. 광주항쟁 이후, 점점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에게 전두환의 학살을 묵인했다며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광주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고, 초강대국으로서 이 항쟁에 대해 어떻게 결정을 내렸는지 아직 완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사과 요구는 도덕적 정치적 함의로 얼룩져 있다. 한국인은 광주 봉기에 대한 스스로의 그림을 아직 완성 못하고 있다.
최근 미국은 냉전 시대에 저지른 잘못을 시정하는데 어느 정도 태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2016년 3월, 아르헨티나를 국빈 방문한 버락 오바마 (Barrack Obama)대통령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가 자행한 “추악한 전쟁”(Guerra Sucia)에 대한 미국 기밀 정보를 해제하겠다고 약속했다. 오바마는 사과는 하지 않았지만, 추악한 전쟁 당시 미국의 정책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Davis 2016) 2017년 1월, 이임을 앞둔 주한 미대사 마크 리퍼트(Mark Lippert)는 마지막 공식 일정으로 518기념재단을 방문했다. 그는 광주 관련 기밀문건 해제를 위해 개인적 노력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 모든 움직임을 부정적으로 평가 절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은 사과나 유감 이전에 모든 정보를 여과없이 완전히 공개해야 한다. 완전 공개없이 완전한 사과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미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과는 정보의 완전 공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용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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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ames V. 2003. Eye on Korea: An Insider Account of Korean-American Relations. College Station, TX: Texas A&M University Press.
(기사 등록 2018.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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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 공식정부 명칭인 “광주 518 민주화 운동” 대신 “광주항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유인 즉 슨,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운동”보다 “항쟁”이 걸맞게 표현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플랫 메모는 다음 사이트에서 내려 받을 수 있다. https://www.kjmbc.co.kr/board/index.cfm?bbs_name=todaynews&wr_id=218999&w=view&page=0& 5월22일 회의 기록은 다음 사이트에서 내려 받을 수 있다. https://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122095 [본문으로]
- 글라이스틴의 편협함은 그가 작성한 79년 8월15일자 전문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일부 재야인사들이 YH 여성 노동자들에게 취업을 알선해 주지 않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핀잔을 줬다. See https://wikileaks.org/plusd/cables/1979SEOUL12520_e.html [본문으로]
- 2017년 5월, 나는 그레그에게 플랫의 수기 노트를 보여주며, 미국이 어떻게 사망자 숫자를 정확히 계산했는지를 물어봤다. 그해 88세였던 그레그는 백악관 정책검토회의의 참석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레그는 사망자 숫자가 논의 됐는지 조차 기억 못한다고 말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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