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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내부로부터 억압과 운동사회 성폭력에 대한 고민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11. 19.

전지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많은 억압과 차별, 착취로 뒤덮여 있다. 벨 훅스는 서로 맞물린 모순의 복합성을 드러내기 위해 제국주의 백인우월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라고 표현하곤 한다. 자본가편아니면 노동자편이라는 편가르기로 모든 걸 설명한다면 너무 단순한 것이다.

 

억압은 위로부터만 오지 않고 내부로부터, 옆에서 오기도 한다. 특히 경제정치 권력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쉽게 직면하는 건 성적 억압과 폭력이다. 노동자연대 지도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동지들을 돕는 등의 경험과 과정 속에서 갑갑한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안희정 판결을 규탄하는 집회에 갔다가 가해에 책임있고 어떤 사과도 없는 단체의 깃발을 보게되는 경우에 심경은 복잡 불편하기 마련이다. 다른 연대 투쟁 현장에 갔다가 그런 단체 담당자를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피해자와 같이 간 경우엔 그처럼 참담한 기분도 없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분위기에 숨막히곤 한다.

 

물론 찝찝함을 덜어주며 빠져나갈 곳들이 있다. 문제가 없는 완벽한 단체가 어디 있겠어, 법적 수사나 판결로 입증된 것도 아니잖아, 이 문제는 성폭력과는 다른 사안이니까, 역량있고 열심인 단체를 문제삼는 건 운동과 연대 확대에 도움 안 되니...

 

하지만 그동안 사회운동이 내세워 온 잣대를 생각해보면 모순이 생긴다. 법적 판결을 기준으로 삼으면 많은 미투 피해자들도 연대가 어렵고, 통일부 장관 후보라고 성폭력이 문제가 안 될 수는 없으며, 능력과 기여가 많으니 탁현민을 봐주자고 하진 않는다.

 

그러나, 같은 잣대를 운동사회 내부에 적용하는 건 항상 어렵다. 안희정을 강력 비난하는 사람들 속에서 가해에 책임있는 사람들, 그들을 편드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긴 쉬워도 비슷한 사안이 주변에서 벌어지면 판단하기 훨씬 어렵다.

 

멀리, 위에 있는, 만나본적도 없는 가해자는 타고난 괴물로 쉽게 단순화된다. ‘가해자성말고도 그의 인격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은 사라진다. 그런 가해자를 비판하는 건 어렵지 않다. 떼지어 공격하는 무리에 섞이기도 쉽지만, 그 속에서 성폭력의 사회구조적 측면에 대한 고민은 쉽게 흐려진다.

 

반면 가까운 곳에서 나와 친밀한 관계와 수많은 연결고리를 갖고 있던 가해자는 다르다. 가해자성 외에 그의 인격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못볼 수가 없다. 지나온 과정과 피해자와 단순치 않은 관계를 알기에 괴물로 단순화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런 일면적 규정과 비난에 반발감이 들게 된다.

 

피해자의 경우도 비슷하다. 멀리있는 피해자는 비교적 쉽게 동정의 대상이 된다. 정의감을 드러내며 피해자를 응원하는 사람들 속에서 인격의 다양한 요소들은 사라지고 단순히 피해자화된다. 물론, 정해진 피해자상과 안맞는 사람은 처음부터 꽃뱀취급을 받고, 나중에라도 그런 언행이 밝혀지면 동정은 쉽게 불신과 비난으로 바뀐다.

 

가까운 관계 속의 피해자에게 더 불신이 생기기 쉬운 이유도 비슷하다. ‘정해진 피해자상과는 다른 구체적이고 복잡한 측면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순수한 피해자가 아닌 감정적이고, 실수하고, 오바하고, 부정확한 기억도 하는 피해자, 피해자와 가해자와의 단순치 않은 관계, 그저 괴물은 아닌 가해자 등을 가장 잘 아는 게 바로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멀리있는 가해자를 비난하는데 동참하긴 쉬워도 가까운 가해자에겐 그러기 어려운것처럼, 멀리있는 피해자에 쉽게 감정이입하는 사람들이 막상 가까운 피해자에겐 다른 태도를 취하곤 한다. 단순히 가해자를 낙인찍고 도려내는 것이 전부인것처럼 접근하는 경우, 반발이 일어나 문제는 더 뒤틀린다. 그런 화살이 자신에게 향할지 모른다는 우려만 커진다.

 

게다가 문제를 일으킨 가해자들은 대개 반성, 사과보다는 조용히 사라지거나 일단 엎드려서 문제가 잊혀지길 바라며 책임을 피하곤 한다. 반면 용기를 내서 침묵을 깬 피해자들은 문제제기를 하며 사건 해결과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피해자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다보면, 사람들의 원망은 시야에서 희미해진 가해자보다 당장 설치고 들쑤시고있는 피해자를 향하는 서글픈 부조리가 나타난다.

 

그래서 사회적 이슈가 된 사건의 피해자에겐 그토록 공감을 보내고, 가해자에게 단호한 사람들이 막상 자신들 내부나 주변에서 벌어진 사건에선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 같다. 안희정 규탄 성명 등에 쉽게 동참하는 단체들이 운동사회 사건에 대한 연대 호소 앞엔 주저하는 것 같다.

 

안희정 규탄 성명에 이름을 올리고 나서, 그 다음날 회의나 집회에서 안희정 친구나 동료를 마주치거나 앞으로도 계속 부대끼는 일은 없다. 하지만 운동사회 사건이라면 얼마든지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고 계산하고 따져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결국, 권력자과 정치인의 성폭력을 비난하고 피해자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이, 막상 자기 주변에서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단지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태도라고 볼 수 없다. 분명히 문제는 더 복잡하고 어렵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은 온당치 않다. 우리는 위에서, 밖으로부터 억압에 그렇듯이 옆에서, 안으로부터 억압에도 민감해야하고 그것에 맞서야 한다. 아니 오히려 더 철저하고 더 효과적으로 맞서야 한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운동사회에서 피해자가 고립되고 좌절하다가 떠나간다면 그것처럼 비극적인 일도 없다. 가해자나 가해에 책임있는 사람들을 정말로 아낀다면 잘못에서 배우고 거듭나도록 도와야 한다. 피해자를 외면하지 말아야 하고, 침묵하지 말고 비판해야 한다.

 

물론 잘못을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낙인찍는 과도한 경향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을 지적한 사람의 탓은 아니다. 잘못에 대한 지적과 비판은 그 자체로 낙인이 아니며, 그것이 낙인이라면 스스로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 만든 것이다.

 

나도 노동자연대 관련 사건에서 반성하고 피해자를 방어한 사람으로만 기억돼선 안 된다. 나는 2012년부터 2014년 초까지 잘못을 방조하고 침묵한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평생 걸머져야 할 이 책임은 그 2년 동안 내가 침묵하면서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누구든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필요한 것은 언제든지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를 통해 신뢰를 회복하려는 노력이며,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디지털성범죄 카르텔과 사회적 공범 구조

 

고문에 가까운 폭력적 갑질과 무엇보다 디지털성범죄의 주범으로서 저지른 죄악과 피해자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양진호와 웹하드카르텔의 공범들은 아무리 비난받아도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몇몇 괴물의 문제만은 아니며, ‘괴물도 결국 우리 사회가 만들어냈다는 고민은 남는다.

 

양진호 폭행 동영상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부분은 사무실의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눈도 돌리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들 모두가 사실 디지털성폭력 카르텔의 일부이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동시에 우리 모두가, 집단 안에서 흐름을 거스르지 말고, 튀지 말아야 한다고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가해의 일부가 된다.

 

예전에 수백명이 모인 자리 가운데 앉혀져 3시간 넘게 30여명에게 연달아 비난과 모독을 받던 기억이 난다. 그 악몽같던 순간에 이건 너무하다며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자리의 수백명은 계속 박수를 치며 동조했고, 나중에 그런 대접을 불러낸 사람이 문제였다는 결론으로 나간 걸 확인했다. 왜 그럴까, 지금도 그 현상을 설명해내려 노력중이다.

 

얼마 전 죄많은 소녀를 봤다. 소문대로 큰 울림이 있는 영화였다. 이 사회의 여성혐오를 단지 반영만 한 것일지 갸우뚱해지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구조를 비껴서 개인만 속죄양삼는 양상을 잘 집어낸 영화로 봤다. 그 속에서 누구도 진실을 궁금해하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서로 증오와 상처를 주고받는다.

 

억울하게 표적으로 몰린 사람의 사무치는 마음이 영화 내내 고통스러울 정도다. 그것이 감탄할만한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약을 먹고 발버둥치는 장면, 수화로 복수를 예고하는 장면, 억지로 피토하듯 말하고 그 앞에서 자신을 찌르는 상대방 ...

 

구조와 집단에 대한 성찰이 빠진채 개인만 악마화할 때, 몇가지 어긋남도 보게 된다. ‘양진호는 미친 사람이며 사회에서 격리해 입원시켜야 한다는 말 등은 의도는 아니겠지만,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을 담은 발언으로 또다른 상처를 낳는다.

 

반유대주의는 과거가 아님을 보여준 피츠버그 총기난사 사건을 보고도 아차 싶었다. 이스라엘의 국가 테러는 비난해야 마땅하지만, 그 비난에 반유대주의적 편견이 섞인 걸 그냥 넘겨오지 않았던가.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에 또다른 소수자 혐오가 담긴 적은 없는가. 잘못에 대한 단죄와 비판을 또다른 편견과 섞지 않는 것, 개인을 넘어서 사회구조적 측면을 겨누는 것은 항상 쉽지 않은 것 같다.


 

가부장 폭력과 남성성의 문제

 

잔인한 가정폭력 사건들과 주로 남성이 범인인 끔찍한 사건들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벨 훅스는 이런 사건들의 사회구조적 원인에 주목해 가정 폭력보다는 가부장 폭력이 더 적절한 명명이라 했다. 이렇게 보면 그 뜻이 아무리 좋아도 가족과 가부장을 유지한다는 전제 속에 추진되는 어떤 대책도 한계가 있다는 것은 더 분명해진다.

 

아주 사랑스러운 한 남자아이를 알고 있다. 그 아이가 어디서 나눠주는 선물을 받으러 갔다 칼을 들고 시무룩해 돌아온 얘길 들었다. 예쁜인형을 받고싶었는데 남자아이는 모두 칼을 받아가는 분위기였단 것이다.

 

그 아이는 춤도 매우 좋아하는데, 앞에서 춤출 사람을 선발할 땐 손들지 못했다. ‘형들은 아무도 손 안들고여자아이만 뽑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어릴때부터 젠더필터링을 하고, 아이들이 서로 하도록 만든다.

 

대중매체는 남자아이들에게 그들이 남자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한다... 남자 아이들과 성인 남성들은 종종 가부장적 남성성의 가장 나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폭력적으로 행동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남자다움을 확실히 보여주는 가장 쉽고 값싼 방법이기 때문이다.”(벨 훅스,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

 

가부장제에서 남성은 많은 인간적 감정을 틀어막고 드러내지 말라고 요구받는다. 그것은 약한 것이고, 남자답지 않은것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허용되는 것은 분노이고 그것은 남성성과 남성다움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친절하고 조용해 보이는 많은 남성들도 속에 분노와 폭력성을 품고 있다. ‘저 사람이 저래도 화나면 무섭다는 말을 듣는다. 그것은 위력과 폭력으로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이 때문에 벨 훅스는 여성들이 때때로 주변 남성들이 사라지길 바란다고 지적했다. 이번에 엄마를 죽인 아빠가 사형되길 바라는 딸들처럼? 하지만 동시에 그런 바람 때문에 괴로워 한다는 것이다. 모든 남성들이 사라지거나 갇혀있는 게 해결책은 아닐 것이기에, 우리는 같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기사 등록 2018.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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