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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국제 강도들의 시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1. 5.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전운이 감돌고 있다, 좀 진부한 표현이 있습니다. 저는 최근 화웨이사 부회장이자 최고재무책임자인 맹만주(孟晚舟)씨의 캐나다에서의 체포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표현은 바로 그 표현이었습니다.[맹만주는 얼마 후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맹만주는 과연 누구인가요? 중국 공산당이 집중적으로 키우고 있는 화웨사 창업주인 임정비(任正非)사장의 딸입니다. 우리로 치면 삼성이씨의 이부진 내지 이서현 격이 되는데, 회사 내에서 갖고 있는 역할로 따지면 차라리 이재용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지금 화웨이가 삼성을 점차 따라잡고 있는 걸로 봐서는 이재용보다 좀 더 똑똑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녀의 체포를 미국 당국이 요청했는데, 혐의는 이란에 대한 미국 단독 제재의 위반이랍니다. 유엔 제재도 아니고 미국 단독의 제재 말이죠. 물론 화웨이가 이란에 팔았다는 설비에 미국산 부품이 있었다고 미국 당국이 항변할 수 있지만, 어쨌든 그 어떤 국제법적 구속력도 없는 미국 단독의 제재를 위반했다고 해서 외국 사업인을 잡아 들이는 것은 여태까지의 국제법 내지 외교 역사에 찾아보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건 사실상 전쟁 행위에 가깝습니다. 아니면, 일상적 현실에 더 가까운 비유를 쓰자면 강도짓의 일종이라고 봐야죠.

 

물론 미국의 국제적 강도짓을 이야기하자면 책 몇 권이나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월남 침공 시절 북월남 내지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 대한 폭격 등 엄청난 사건들도 하도 많아 거기에 비해 자국이 자의적으로 선포한 제재를 위반했다고 해서 자국과 관련이 없는 외국 사업가를 체포하게 했다는 것은 그냥 미동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보통 평상시에 미국은 - 다른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 국제적 갑질을 어차피 저항 능력이 제한돼 있거나 아예 없는 약소국을 상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거의 20년 전에 유고 폭격이라는, 국제법에 아무 근거도 없는 무단 불법적 폭거를 자행했을 때에 과연 죽은 미군은 몇 명이나 됐을까요? 사고사를 당한 몇 명은 있었지만, 그게 다이었습니다. 어차피 대응하기가 어려운 약자 아니라면 그 어느 열강도 쉽게 도발하지 않습니다. 열강들 사이의 무력 갈등의 비용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한데 지금 미국은 같은 급의 열강인 중국을 상대로 해서 일종의 인질 작전을 벌인 것이죠. 이건 결코 평소와 같은 미국 스타일이 아니고 모종의 비정상적 상황의 도래를 예고하는 신호입니다.

 

인질 작전만은 문제입니까? 한 때에 미국의 외교가 쏘련 견제코드로 돌아갔는데, 인제 화웨이 견제가 그 코드가 된듯합니다. 미국의 전방위 압력의 결과로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일본 등이 주요 국가 프로젝트를 위한 전자 설비 구매 때에 화웨이를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화웨이라는 미국 하이텍 업체들의 경쟁사를 시장의 장에서 기술이나 품질 등으로 압도, 제어할 수 없는 미국은, 결국 자유 시장의 구호가 무색해지게끔 비시장적인 압력, 즉 군사력이 뒷받침하는 외교력을 통한 압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화웨이뿐만 아니고 하이텍에 대한 미국의 독점을 깰 수 있는 중국의 다른 업체들도 인제 미국 외교력의 장벽에 부딪칠 셈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맹만주 인질 사태가 보여주듯이, 이 압력 행사 과정에서는 국제법 따위가 무시되고 말 것입니다. 중국이 거기에 질세라 역시 인질 전략을 그대로 씁니다. 첩보 행위 혐의로 최근 중국에서 붙잡힌 전직 캐나다 외교관 Michael Kovrig은 바로 일종의 맞인질인 셈이죠. , 강도를 상대하자면 강대강 전략이 맞을 수도 있는데, 핵무장한 열강들 사이의 그런 강도 행위들을 보면 솔직히 소름이 끼칠 정도죠.

 

우리가 지난 사드 상태에서 봤듯이, 고래 싸움에 맨 먼저 터지는 것이 새우임에 틀림없습니다. 터지지 않으려면... 일단 양쪽의 상호 도발적인 행위에 휘말리지 않을 만큼의 주권 행사에 대한 국내적 합의부터 필요합니다. 이념, 성향, 정치적 지향 등과 무관하게 중미 갈등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는 부분에 다수가 의식을 같이 한다면 이 갈등으로부터 거리를 가질 만큼의 주권 행사를 하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이럴 때야말로 주권이 왜 필요한지 실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빠른 시일 내에 북조선과 친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남북/북남이 필요시에 행동을 같이 해야 한/조선반도를 전쟁 참회로부터 지키기가 더 쉬워질 겁니다


 

(기사 등록 20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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