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버철(Ian Birchall)
번역 이재빈
[편집자 주]이 글의 원제는 “Ian Birchall replies to his critics”이며 2013년 7월 4일에 작성되었다. 이 글은 <소셜리스트 리뷰(Socialist Review)>에서 진행된 논쟁의 일부이다. 2013년 1월에 SWP 성폭력 스캔들에 대처하는 맥락에서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레닌주의는 끝났는가?”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은 <LEFT21>에 번역 게재 되기도 했다. 이 글에 대한 반론으로 이안 버철이 쓴 글이 <소셜리스트 리뷰> 6월호에 실린 “레닌주의자가 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이다. (번역 http://istdebate.tistory.com/5) 이에 대한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재답변이 같은 잡지 7월호에 실렸는데 (번역 http://istdebate.tistory.com/12), 이 글은 이에 대한 이안 버철의 재답변이다. 이 글의 원문은 http://rs21.org.uk/2013/07/04/ian-birchall-replies-to-his-critics/ 에 있다. 교정·교열은 서범진 동지가 수고해줬다.
이안버철
내가 쓴 “레닌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여러 명의 필자들이 <소셜리스트 리뷰> 7월호에 반응을 보내주었고, 나는 이 글들을 기쁘게 읽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논점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런 주제는 가능한 한 남김없이 토론될 필요가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진리를 독점하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가 필요한 만큼 명확해지기 위해서는 토론이 더 충분히 이뤄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일부 반응들은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아마도 편집자가 분량 제한을 걸어두어서 너무나 짧게 쓰려다 생긴 문제로 보이는데, 내 견해의 논리구조를 평가하기보다는 논쟁점을 제시하는 데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마크 크랜츠는 다음과 같이 썼다. “버철의 말처럼 ‘봉기는 다수결로 수행될 수 없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봉기를 결정하기 위해 세 차례나 이를 표결에 붙였다. 최종 투표 결과는 찬성 20표, 반대 2표, 기권 3표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표결을 거부하지 않았다. 대중행동이나 각종 위원회에서 이뤄지는 표결은 혁명으로 가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내가 말하던 것은 표결 그 자체로는 볼셰비키의 평당원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릅쓰고 혁명에 나서도록 확신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객관적인 혁명적 조건과 지도부의 분명한 주장이 맞물리면서 이들은 비로소 정치적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4월 테제에서 레닌은 “인내심을 가지고 체계적이고 꾸준하게 설명을 제공할” 필요에 대해 주장했다. 오직 꾸준한 설명의 맥락 위에서만 표결은 효과적일 수 있다.
토니 필립스는 혁명가들의 임무가 “계급의 각성을 기다리며 주위를 맴도는 것”이 아니라며 나를 꾸짖었다. 이런 수사, 즉 “그만 투덜거리고 세상에 나오라”는 말은 최근 몇 달간 매우 일상적으로 들리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나는, 그리고 최근에 중앙위원회에 비판적인 견해를 견지해온 사람들 중 다수는 (토니가 은연중에 암시하듯)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노조 활동과 거리 캠페인에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경험적 확신
우리가 그동안 이런 활동들을 해온 이유는 우리의 경험과 객관적 조건이 결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SWP 지도부가 그만한 확신을 심어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IS시절부터 50년 넘게 우리 정치경향에 몸을 담아왔는데, 그 이유는 이 조직이야말로 이니셔티브를 발휘하면서 실천에서 나를 확신시켰기 때문이지, 표결의 객관적 지위를 명시한 규칙을 강조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토니는 꽤 올바른 말도 했다. “혁명정당의 규율은 자발적이다. 어떤 회원도 그들이 바라지 않는 일을 하도록 강제될 수는 없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특별 당 대회에서 한 연사가 “이게 싫거든 나가라”고 한 것보다는 덜 잔혹하게 들린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동지들이 이미 “나갔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에 우리는 SWP가 만 명의 당원을 거느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 중앙위원회의 자체 집계에 따르면 우리는 약 1천 명 수준의 당원을 보유할 뿐이다. 우리는 어쩌면 정말로 “우리의 규모에 비춰봤을 때 여러 중요한 운동들에서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축소된다면 영향력은 지금처럼 크지 않게 될 것이다.
케빈 코어는 우리에게 1917년 레닌이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혁명의 배신자 지노비예프를 배신자라고 낙인찍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대가도 치를 것입니다. 분열의 위협을 운운하는 자들에게 내가 보낼 답변은 마지막까지 이 두 배신자들을 축출하기 위한 전쟁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 혁명을 파괴하려는 주요 분자들을 처벌하지 않는 혁명정당은 사멸될 것입니다.”
케빈이 지적하듯 이것은 “사생결단”의 문제였다. 극도로 긴급한 상황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는 대부분의 상황과 직접적으로 비교될 수는 없다. 하지만 케빈은 우리에게 이 이야기의 절반만을 말한다. 지노비예프는 곧 지도부로 돌아왔다. 그는 이후에 페트로그라드 대표와 지역 정부의 수반이 되었고, 코민테른의 의장을 역임하기까지 했다.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볼셰비키에는 유능하고 경험 많은 간부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클리프는 『레닌』 3권 도입부에서 이 점을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꽤 정당하게 촉발된 단기간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자신에게 동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곧 인식했으며, 지노비예프처럼 경험이 풍부한 동지를 잃을 만큼의 여유도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후에 진행되는 사건들을 고려한다면 지노비예프가 당 지도부에서 영구적으로 축출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당시에 그 역할을 누가 맡을 수 있었을 지가 답변하기 곤란한 문제로 남는다. 능력 있는 모든 동지들이 최대한 활용되었던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인력난에 시달렸다. 나로서는 이 사건을 우리에게 직접적인 교훈으로 활용할 마음이 없지만, 규모가 줄어드는 추세에 놓인 당은 유능한 간부를 낭비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만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광범한 지도부
내 글에 대한 총체적인 답변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당은 어떤 부류인가?”이다. 많은 면에서 이 글은 매우 환영받을 만한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알렉스의 따뜻하고 정제된 목소리는 우리가 특별 당 대회에서 들었던 대부분의 수사와는 몹시 다르다. 그는 나(와 아마도 많은 반대파 동지들)를 “광범한 지도부”의 일원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실로 관대한 평가다. 그리고 이는 특별 당 대회를 앞두고 진행되었던 논쟁의 양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나는 정확히 6분만 말하라고 사회자에게 발언을 제지당했었다.
우리가 “힘든 내부 논쟁의 시기”를 거치고 있다는 알렉스의 인식 또한 환영할 만한 것이다. 그의 인식은 당 내부 회보에 실린 잘못된 낙관론들과는 날카롭게 대조된다. 내부 회보는 의도적으로 작은 성과들을 빼곡하게 기록하는 한편, 우리가 저지른 모든 실패는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억압받는 사람들과 억압자들을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나는 상처받은 사람들과 상처 주는 사람들을 동일시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알렉스가 제기하는 여러 논점의 일부에 대해서는 나 역시 대체로 공감한다. 그가 “중앙집중적인 정치 조직은 자본주의 권력이 가장 집중된 형태인 국가에 맞서는 온갖 다양한 형태의 투쟁에 집중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 난 기꺼이 그와 같은 편에 서고 있다. 한 가지 단서를 단다면 말이다.
SWP는 영국 국가에 도전할 수 있는 “당”이 아니다. “중앙집중적인 정치 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선전 그룹이다. 1970년대 급성장기에는 우리가 “당”이라고 믿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현재 이를 기정사실화 하는 것은 위험한 환상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조직의 형태와 관련된 어떤 주장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우리가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 현실적으로 살펴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어느 수준에서 연합이 이뤄지든 극좌파들의 광범한 정당은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를 회피한다”는 알렉스의 비판에 대해서도 내 입장은 다르지 않다. 다만 다시금 이 주장은 주의 깊게 표현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리스펙트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알렉스의 묘사대로라면 리스펙트는 “광범한 정당” 건설을 지향하는 정치적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나는 리스펙트 건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고, 우리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조지 갤러웨이의 압도적인 지위가 아니었더라면 성공했을 수도 있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또한 전체 좌파로서도 해볼 만한 모험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기회가 다시금 주어진다면 우리는 이를 움켜쥐어야 한다.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SWP가 자신들의 조직을 리스펙트에 용해시키지 않고 뚜렷한 혁명정당의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도 여전히 옳았다고 생각한다.
조직 문제
알렉스는 레닌에게 조직 문제가 핵심이라고 지적한 루카치의 말을 적절하게 인용했다는 점에서도 옳다. 분명 레닌(과 클리프의 레닌 연구)에서 배울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클리프의 견해를 따르는 알렉스가 인식하듯이 레닌의 독보적인 면모는 조직의 형태는 반드시 객관적 상황에 조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깨달았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레닌주의자”는 단지 조직의 필요성을 깨달은 사람들에 불과한가?
실제로 나는 “레닌주의”라는 용어에 대해서 꽤 열려 있다. 나는 나 자신이 레닌과 러시아 혁명의 정치적 전통 위에 있다는 점을 기쁘게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레닌주의”를 편의적으로 사용하면 의심을 거두지 못하겠다. (“트로츠키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일 스탈린주의자나 블레어의 추종자들에게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불린다면 나는 기꺼이 “그래, 난 그래서 자랑스럽다”고 답변할 것이다. 하지만 보다 가까운 이들에게라면 2013년의 “트로츠키주의”가 지닌 적절성을 보다 고려해서 답할 것이다.)
알렉스의 말처럼 우리가 레닌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든,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독특한 당 조직 모델을 발전시켜왔다.” 분명 사실이다. 이것은 곧 이에 대해 반드시 비판적인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정한 조직적 형태(집단투표, 분파규정 등)는 그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경험과 합리적 논증에 의거하여 정당화되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정밀한 검토를 거쳐서 수정되어야 한다.
지금 내가 보기에는 클리프, 던컨 핼러스, 크리스 하먼이 당 지도부에 있을 때에는 잘 작동되었던 모델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반나치 동맹, 광부 파업, 인두세 반대 투쟁, 전쟁저지연합 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벌어진 운동과 투쟁에 우리가 개입한 성과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이 모델은 어쩌면 덜 성공적이었다. 또한 최근의 위기는 몇 가지 논점을 큰 의문에 빠트렸다. 만일 내가 작년에 죽었다면 난 충성스럽고 행복한 당원으로서 죽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우려할 만한 질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현상을 발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지도부 집단 출마와 선출 시스템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독특한 모델” 중 하나다. 나는 언제나 집단투표를 지지했고 옹호해왔다. 이것은 대체로 이전의 형태인 40인 전국위원회의 “인기투표”적 성격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나 자신부터 이에 대한 의문이 자라고 있다. 우려스럽게도, 집단투표 체제는 점차 노동조합이나 작업장 활동에는 별다른 경험이 없는 당 상근자들이 배타적으로 지도부를 구성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알렉스는 “대부분 당원들보다 자신감과 권위를 가지고 빠르게 움직이며 그 스스로를 단지 조직 내의 산술적인 의견의 총합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지도부”를 거론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이 이것뿐이라 나도 안타깝다. 정말 그렇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
자신감과 권위
알렉스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여성의 소리>와 “하강기” 논쟁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지금 알렉스는 중앙위원회에 있는 반면 나는 그저 평당원일 뿐이다. 그러다보니 그가 소환하는 기억이 조금씩 다를 거라는 점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나는 몇 가지 점에서 진지하게 도전할 생각이다.
그는 클리프가 크리스 하먼을 <소셜리스트 워커> 편집부에서 제거한 이유가 당시 “펑크 신문” 논쟁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점에서 클리프가 전적으로 무원칙하게 행동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확실히 알렉스가 하먼, 제프리스, 그리고 그 자신이 취한 절제력 있는 태도가 분열을 피하는 데에 일조했다고 말한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논점을 누락시킨다. “펑크 신문” 비판은 특히 “펑크 신문” 안에서 산업 쟁점을 다룬 신문 표지가 줄어들고 있던 현상에 대해 이견이 발생해 시작되었다. 클리프가 편집부를 장악했을 때(누가 보더라도 그는 매우 안 좋은 편집자였지만) 그는 체계적으로 산업투쟁을 표지로 채택했다. 즉, 그는 비판자들에게 상당한 양보를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쓴 클리프 평전 9장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클리프는 비록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말을 듣고 타협하는 데에는 훌륭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클리프의 지도력이 “자신감과 권위”를 가지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그를 계승한 이들도 이런 덕목을 갖추고 있는지 나로서는 확신이 없다.
알렉스는 그 당시 논쟁의 “기간이 꽤 짧았다”고 말하지만, 그가 말한 것에 기초하더라도 <여성의 소리>와 하강기 논쟁은 그와 관련된 것까지 포함하여 약 3년간 지속되었다. 또 그는 올바르게 “치러야 할 대가가 있었고, 이때의 결정들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동지들은 당을 떠났다”고 적었다. 맞다. 그리고 어떤 손실들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지난 50년간 당원 자격을 유지하면서 나는 그 어떤 손실도 최근 몇 달처럼 커다랗고 재앙적인 규모였던 적을 본 적이 없다. 1975년 짐 히긴스의 분열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하강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1984∼85년의 광부파업 당시에 우리가 해냈던 훌륭한 일을 발판삼아 조직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이런 행운이 다시 따를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나는 일부 동지들이 “바다에는 고기가 얼마든지 있다”는 이론에 너무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알렉스는 비록 논쟁은 영원히 이어질 수 있지만, “혁명정당에서 토론은 반드시 행동으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히 옳은 말이지만, 우리는 토론에도 각기 다른 종류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는 알렉스와 자연변증법에 대해 커다란 견해 차이가 있으며, 프랑스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맹아적 형태들이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도 완전히 다르게 평가한다. 이러한 의견의 불일치는 무기한 지속될 것이며, 표결로 해소될 수도 없을 것이다. 반면, 만일 영국수호동맹(EDL)이 내일 행진한다면 우리는 오늘 밤에라도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이 결정을 따라야 한다. 비록 [그런 결정을 무시하려 하는] 난봉꾼이 있더라도 우리는 일단 결정하고 그에 대한 교훈을 사후에 토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당을 구해내기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위와는 어떤 면에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지금 논란은 1월의 분쟁위원회 보고서로부터 촉발되었다. “자신감과 권위”가 있는 지도부라면 이 상황에서 당이 받을 타격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다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특별 당 대회에서 내려진 결정은 이 점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데, 이 사건에 대해 무엇인가 수습하기에는 너무 늦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미 훌륭한 젊은 당원들을 잃어버렸고, 우리는 결코 이들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던져야 할 유일한 질문은 우리가 당을 구하기 위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고, 이에 대해서는 알렉스와 나 모두 답변할 열의가 있다. 알렉스가 말했듯 “책임은 지도부에 있다”. 나는 물론 다른 모든 당원들처럼 이 책임을 함께 질 의사가 있지만, 중앙위원회는 최근의 사태에 대한 특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들의 위기관리는 아주 엉망이었다.
내 생각에 우리에게는 중앙위원회의 혁신과 재구조 작업이 필요하다. 혁신이란 인적 쇄신을 말하는 것이고, 재구조란 캠페인과 작업장 활동에 경험이 있는 동지들에게까지 지도부를 확장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특정한 일정을 염두에 두지는 않겠지만, 혁신과 재구조가 없는 상태에서는 우리는 당 재건을 시작하지 못할 것이다.
알렉스는 마지막 단락에서 나에게 “우리는 그 동안 내부 논쟁으로 인해 내적으로 많은 상처를 입었다. 이제 우리는 SWP가 재통합되고 또한 우리의 실제 생활 속의 투쟁들로 전환하여 전진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내가 논쟁으로 꽤 상처를 받아서 좀 냉소적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더러 그만 입 다물라할 “의무”가 있다 말하는 것은 아니길 바란다. 알렉스는 아마 진심으로 그의 마지막 문단이 화해의 말이라 믿을 테지만, 정작 그 가지에는 열매가 거의 달려 있지 않다.
기술적인 가능성들
마지막으로 동지들 중에서는 어쩌면 내가 왜 9월에 나올 <소셜리스트 리뷰>의 출간을 기다리지 않고 블로그에 이 글을 굳이 게재하는지 염려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이 논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으며, 양 편에 속한 모든 동지들이 진심으로 이 문제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나로서는 우리 모두에게 이 글을 공개할 수 있는 기술적인 가능성을 없는 셈 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혁명가들은 언제나 상호 소통과 관련된 기술의 발전이 제공하는 여러 기회들을 움켜쥐어 왔다. 바뵈프와 그의 지지자들은 그들이 건설하려고 했던 평등주의적 공동체 안에서 수기 전신을 활용했다. 1895년 초에 레닌은 이미 나로드나야 볼랴 그룹의 비합법 간행물을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인터넷은 우리에게 종이 간행물보다 훨씬 더 빠르고 즉각적이며 확장성 있는 논쟁의 장을 발전시키도록 한다. 혁명가들이 이런 가능성을 반기지 않는 것도 사실 희한한 일일 것이다.
일부 동지들은 내가 내부 문제를 부적절하게 대중에게 공개했다고 느끼면서, 내가 <내부 회보>가 간행될 11월까지 기다렸어야만 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나는 영국 공산당의 주간지인 <월드 뉴스>가 1956년 12월부터 1957년 4월까지 발행했던 내용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공개적으로 판매되었던 이 간행물에는 SWP의 간행물 중 어떤 것보다도 헝가리 사태 이후의 내부 위기에 대한 폭넓은 논쟁의 장으로 기능했으며, 대중적으로 알리는 내용이든 내부적인 글이든 모든 것이 실려 있었다.
우리가 거리 운동이나 노동조합에서 협력하는 이들, <맑시즘> 토론회에 데려오려고 노력하는 이들, 혹은 우리가 가입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미 우리 내부 논쟁을 알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우리와 함께 하길 바란다면, 그들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내용들을 알 권리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물론 우리 당의 적대자들은 우리의 내부논쟁을 크게 반길 것이며, 우리가 겪는 문제로부터 이득을 취하려고 궁리할 것이다. 이 사건이 촉발되었던 초기 국면에서 적어도 한 명 이상의 동지가 염려했던 것도 바로 이런 점이었다.
하지만 라데크가 3월 행동의 비판자들이 공산당의 적대자들 수중에 놀아나고 있다고 주장했을 때, 코민테른 3차 회의에 참여한 클라라 체트킨이 한 말을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의 발언이 적들의 말과 글로 활용될 것을 염려해 우리의 행동 기준을 설정한다면, 우리는 결코 한 줄의 글도 써서도 한 마디의 말을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적들은 모든 것을 곡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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