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규
1. 영화가 시작되고 10분이 채 안돼 찔찔 울기 시작했다. 내가 기르는 개도 덜 익은 감을 던져주면 신나게 먹었고 심지어 제가 스스로 감을 따먹기도 했다. 물가를 지날 때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호두는 깊은 물을 겁 없이 뛰어드는 래브라도인데, 이제 나이가 많아 가만히 서있기도 힘에 부친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공을 던지라고 물어오겠노라고 보챘던 녀석이다.
대문 앞에서 차에서 내리지 않는 나를 멀뚱히 기다리고 선 표정이 미자의 어리둥절한 눈빛에 정확히 겹친다. 벼랑 끝에서 발휘하는 옥자의 기지를 기대할 수 있는 동물은 영화에서나 존재하지만, 심지어 그렇게 어이없는 장면에서도 나는 또 한 방울 쥐어짰다. 동물영화만 보면 맨날 운다.
2. 옥자는 괴물이다. 감독은 ‘돼지영화’라고 했는데, 옥자의 생김새는 하마에 가깝고 미자가 부여잡은 밧줄을 밟는 발은 코뿔소의 것이다. 두껍지만 비현실적으로 출렁이는 그의 가죽은 소 장수들이 등급 좋은 한우를 고르는 기준이기도 하다. 물론 옥자의 표정이 개처럼 보이는 이유는 개만큼 인간의 마음을 읽는 짐승이 없어서일 테다. 그래서 옥자는 현실의 일부만 반영하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이 요소는 영화를 유연하게 만들기 위해 중요하다.
동물보호단체가 종종 채택하는 방법 - 자극적인 영상으로 말초신경 건드리기 - 을 피하면서 실제 현대화된 도축장을 찍었다. 슈퍼돼지들의 살아있는 모습과 2분도체, 방혈 후 피를 모으는 용기, 팩에 들어가기 위해 토막 난 살점, 그리고 그것을 구워 시식하는 장면까지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 슈퍼돼지들은 비현실이고 미자와 교감하는 옥자도 아니다. 관객에게 숨쉬며 생각할 틈도 주면서, 필요한 만큼 불편하게 한다.
3. 비극의 원인을 단순하게 동물의 고통이나 생명 근본에 두지 않고, 미자와 옥자의 ‘관계’에 무게를 싣는다. 여느 돼지 농장처럼 미자의 농장에 삼천 마리의 돼지가 있었다면, 미자와 옥자가 깊은 교감을 하지 않았을 테고, 이 사단도 나지 않았다. 옥자가 미자와 힘을 합쳐 물고기를 잡을 정도의 지능을 갖지 못하고 마당의 닭처럼 그가 알아듣기 힘든 표현만 했다면, 옥자는 미자에게 그저 큰 백숙거리였을지도 모른다. 옥자를 구출한 미자는 도축장에 남은 다른 슈퍼돼지들에 대해 오래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이런 까닭으로 감독이 ‘동물권’이나 ‘비건’에 무지해서 이 따위 영화를 찍었다고 하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동물권(리)’이라는 낱말에 천착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나라가 얼마나 될까. 갑작스레 이슈로 뜬 ‘동물’에 ‘권리’라는 무거운 단어가 이렇게 쉽게 붙어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아무리 사랑해도 동물들은 인간 사회가 아끼고 챙겨주어야 할 ‘대상’이지, 동급의 구성원으로 세상을 만들어나가자 제안할 연대의 대상이 아니다.
4. 미자는 동양인이자 여성이자 어린 아이이지만 감독은 미자에게 약하고 미성숙한 이미지 덧씌우는 오류를 저지르지 않았다. 뉴욕 한 복판에서도 호락호락하게 약취를 당하는 여자애가 아니다. 영화에서 ‘여자애’란 소중한 것을 잃을 위기에서 미자처럼 두려움 없이 싸우는 사람이다. 이런 설정이 영화를 참 당당하게 한다.
5. 옥자는 GMO이다. 옥자를 가장 사랑하는 미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10년을 함께했다. 한국인에게 중요한 고발이다. 한국인의 GMO 소비량은 세계에서 가장 높기 때문이다. 한국은, 극히 일부 식품을 제외하고, GMO 여부를 표기하면 처벌하는 법을 갖고 있는 무서운 나라다. 심지어 표기 활자 폰트도 규제한다. GMO 생산자에게 가장 큰 자유를 허락하는 동시에 소비자에게는 가장 좁은 선택권을 주었는데, 놀랍게도 꽤 많은 환경운동가나 소비자운동가들이 GMO의 제한을 반대하고 있다.
영화에서처럼 GMO생산업체는 대부분 거짓말로 먹고 산다. 영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이다. 불리해진 기업은 가격을 내려 위기를 타개하기로 한다. 현실에서도 똑같다. 그럼 소비자는 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 기업의 본질 때문에 물건을 사지 말아야 하는가. 돈이 없어 싸다고 사먹는 사람의 잘못인가.
6. 실버는 ‘식량 생산 자체가 착취’라며 채식도 거부한다. 우스꽝스럽게 그린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감독이 적당한 선을 그어주는 게 고맙다. 매일 지나는 보도블럭이 얼마나 많은 목숨을 깔아뭉개고 덮였는지 생각하며 다리를 잘라야 하는 논리인데, 꽤 많은 수의 선한 사람(활동가)들이 보도블럭을 깔고 있는 자들보다(혹은 그들과 동급으로) 스스로의 다리를 탓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생명이나 지구에 대한 연민으로 ‘소비’를 제한하는 운동의 끝은 대기 중 탄소 증가를 막기 위해 스스로 숨을 참는 게 아닌가. 물론 실버는 죽지 않고 끝까지 함께 싸웠다. 어떻게든 이들과도 연대하고 토론해야 한다.
7. 수의사 조니를 보며 친숙한 울화와 연민을 느꼈다. 한국에도 테레비에 나와 동물을 이해하는 사람이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못하고) 스스로 광대가 되는 수의사들이 몇 있다. 이들이 작년부터 대유행 중인 ‘동물복지’의 기치를 뽑아 드는 모습을 바로 며칠 전에 보았다. 거창하게 국회의원도 부르고 언론도 불러 창립총회를 하더라.
감독은 동물농장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 와중에 과장된 표정과 상황에 맞지 않게 걸친 가운이 얼마나 싫었으면! 그들을 작위적인 연출의 피해자가 아니라 공범으로 그린다. 동물 블라블라가 뜰 수록, 수의사라는 직업은 얼굴마담(싫은 표현이지만 어휘가 달려서 죄송하다)이 되기에 너무 쉽다.
8. 운동을 폭력 진압하는 장면에서 사설민간보안업체로 나오는 블랙초크는 이름부터 ‘블랙워터’라는 세계최대의 용병회사를 대놓고 닮았다. 블랙워터는 크고 작은 분쟁(이라크 전쟁 같은)에서 정규군을 대신해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인다. 한국에도 ‘보안’업체의 허울을 쓰고 자본의 ‘주먹’ 역할을 하는 업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흔히 용역깡패라고도 불리는 조직폭력배들이 만든 회사들인데, 주로 하는 일은 건설업체의 사주를 받아 철거민들을 살던 곳에서 쫓아내거나,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두들겨 패는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강자의 편에 서서 직접적인 폭력으로 진압하는 역할을 맡는다. ‘돼지영화’의 감상평에서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다니, 역시.
9. 망자의 무덤 앞에서 첫 등장하고 내팽개쳐졌던 황금돼지가 결국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본가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설정이 슬프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끝도 없는 이윤추구가 친구의 생명과 교환되는 아주 짧은 순간이다. 미자는 황금돼지를 주고 살아있는 돼지를 산다. 이 방식의 싸움이 갖는 한계가 여기까지라는 얘기가 아닐까.
10. 깨알 같은 유머가 과하거나 차별적이지 않아서 좋다. 늘 그렇듯 배경음악이 영상과 적절히 들어맞고 감상하기에 아름답다. 자잘한 기제와 설정에 정통한 봉테일이지만 감정선을 섬세하게 어루만지지 못한 점은 그의 영화가 내 취향과 늘 부딪치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나는 봉준호 감독의 ‘모든’ 영화를 좋아한다.
(기사 등록 201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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