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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부산행 - ‘헬조선’과 ‘혐오의 시대’를 그린 지옥도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6. 8. 18.

전지윤



<부산행>은 전체적으로 헬조선의 현실과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보여주는 종말론적 분위기로 가득했다. 좀비영화를 크게 좀비와 인간의 투쟁을 다룬 영화와, 좀비보다 더 무서운 인간들과의 투쟁을 다룬 영화로 나눈다면 이 영화는 후자에 더 가까웠다.

 

영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우리 사회와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주인공의 직업은 펀드매니저인데 초반에 개미 투자자를 걱정하는 부하 직원에게 너는 그런 거까지 신경쓰면서 일하냐고 나무란다.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어린 딸에게도 그럴 필요 없다고 꾸짖는다. 사람들에게 그는 개미핥기라고 불린다.

 

악역으로 나오는 또 다른 주요인물은 버스회사 상무로, 마찬가지로 옆의 사람들은 나몰라라 짓밟고서라도 자신을 지키겠다는 행태의 전형을 보여 준다. 이들이 헬조선에서 살아남고 성공하는 사람들의 전형이라면, 좀비들은 낙오하고 희생된 사람들의 전형처럼 보인다.

 

경쟁 속에서 아등바등하며 고생하지만 약삭빨리 살 궁리를 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먼저 좀비가 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한 할머니가 그렇다. 살아남은 단짝 할머니(동성연인인지 자매인지 분명치 않은)평생 고생만하고 착하게 살더니...’하며 애처로워 한다.

 

좀비들은 뻔히 앞에 있어도 신문지(혹시 조중동을 소품으로? ^^)로 가리면 보지 못하고, 빛이 없어도 보지 못한다. 소리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 영화 속에서 좀비들이 몰려가게 만드는 벨소리는 2002년 월드컵과 붉은악마를 떠올리게 하는 오 필승 코리아.

 

영화 속의 정부는 좀비 사태를 폭도들의 폭력 시위라며 유언비어에 속지 말고, 정부를 믿고 기다려라고 한다. 그 뒤에서 좀비 감염자와 감염 의심자에 대한 대량살처분이 진행됐다는 암시가 곳곳에 있다. 군인 좀비떼가 물밀 듯 달려오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공포는 공권력이 저지른 역사적 범죄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며 더 큰 압박감을 가한다.

 

결국, 이 영화를 보고나면 연상호 감독의 관객들이 차라리 좀비세상이 오는 게 낫겠다고 느끼길 바랬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진다. 물론 이 영화는 가족주의와 미소지니(여혐)적 요소가 보인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주요 인물들이 개저씨적이거나 마초적이고, 거슬리는 대사도 간간히 들리기 때문이다.(영화의 메시지와 모순되는 변칙개봉 논란을 자초한 것도 안타깝다.)

 

누구라도 이 사회에 공기처럼 퍼져있는 편견들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들고, 특히 남성 감독일수록 그럴 것이다. <매드맥스>를 만든 조지 밀러 감독처럼 페미니스트를 촬영 현장에 불러서 조언을 들으며 영화를 찍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시간과 형식이 제한된 영화라는 예술 장르에서 모든 정치적 측면이 잘 담겨있길 바라는 것은 무리인 점이 있다. 더구나 신파적 가족주의를 보여 준다는 장면이나, 캐릭터가 가부장적이라는 반응에 대해서는, 모든 예술작품이 그렇듯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다.

 

일단 나는 주인공의 딸에 대한 사랑과 지켜주려는 마음을 단지 가족주의라고 해석하긴 어렵다고 본다. 인간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랑이 자기 가족에게만 한정되고, 가족을 지킨다는 이유로 남을 해치고 악을 저지르며 가족까지 괴롭히는 게 가부장적 구조다.

 

영화 <대부>는 마피아 패밀리를 통해서 그것을 잘 그려 낸 대표적 영화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가족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손에 더 많은 피를 묻히게 되고, 가족들 위에 두려운 괴물이 돼 가고,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심지어 죽음을 가져온다.

 

<부산행>도 비슷한 것을 보여 준다. 주인공은 가족을 지킨다며 개미 핥기를 해 왔지만, 상처만 받아 온 딸은 이제 죽음으로 내몰리는데, 그 좀비 바이러스는 바로 그가 저지른 주가 작전 때문에 퍼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더 이상 자기 가족만을 위해 남을 짓밟는 것이 아닌 방향으로 변화돼 간다. 그럼에도 그는 원죄때문인지 살아남지 못한다. 무엇보다 개저씨적 가부장의 전형을 보여 준 악역의 말로도 비참하다. 감독 자신도 주요 남성 인물들의 죽음을 남성 중심적 기성세대가 퇴장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내가 <부산행>에서 가장 큰 감정 이입과 영화적 감흥을 받은 장면은 신파적이라는 평을 받는(아마 대중적 상업영화에 뛰어든 감독으로서 타협이 불가피했을) 남자 주인공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생존한 인간들이 있는 앞 칸과 좀비들이 몰려오는 뒷 칸 사이에 끼어 주인공들이 위기를 겪는 장면이었다.

 

나는 이 장면이 이 영화의 진정한 클라이맥스였고, 왜 우리가 사는 이곳이 헬조선인지 잘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장면에서 등골이 오싹하고 속이 타들어 갈뿐 아니라, 눈이 뜨겁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무능한 정부, 진실을 말하지 않는 언론, 물어뜯으려고 달려드는 좀비들 때문이 아니다.

 

그 장면에서 흉측한 좀비의 이빨보다 더 아프고 커다란 상처를 내는 것은 같은 편이었던, 같이 편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차가운 말 한마디와 싸늘한 눈초리들이다. 불신과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주인공들을 격리하기 위해 미친 듯이 출입문에 옷가지를 묶고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아마 의도적이었겠지만) 뒷 칸의 좀비떼와 너무나 비슷하게 묘사돼 있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것은 광기에 휩싸인 인간이라는 것을 역설하는 그 장면에서 벌어지는 것은 일종의 마녀사냥과 낙인찍기다. 그것을 가능케하는 것은 저들이 어떤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는, 저들이 나쁜 바이러스에 감염됐을지 모른다는, 저들이 우리 공동체를 파괴할지 모른다는, 다 같이 죽을 수는 없다는 불신과 혐오다.

 

그리고 이런 비극적 장면을 우리는 한국사회에 살면서 여러 번 목격해 왔다. 성폭력 피해 경험자들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것은 믿었던 주변 사람들이 뱉어내는 의심의 말과 눈초리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고된 삶에서 생기는 불만을 여혐으로 떠넘기고 표출하는 남성들에게 성차별적 사회구조보다 더 큰 분노를 느끼기 마련이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가장 아프게 기억하는 것은 경찰 폭력보다도, ‘산 자죽은 자로 나뉘어 동료이자 이웃이었던 사람들에게 배척당했던 기억이라고 한다. 종북몰이의 피해자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같은 진보진영의 동지들이 던지는 돌이었다.

 

세월호 유가족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한 것은 저들이 재학생 부모들을 부추겨 기억 교실이전을 압박하게 한 것일 것이다. 나도 이런 비슷한 경험들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동료들의 박수소리와 웃음소리조차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힐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결국, 나는 이 장면에서 <부산행>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있는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시대와 혐오의 시대에 대한 뛰어난 영화적 형상화를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 장면은 좀비가 된 언니를 연민하며 사람들의 집단광기를 지켜보던 할머니가 놀고들 있네라고 냉소하며 극단적 선택을 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 장면에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충격, 공포, 안타까움, 슬픔, 통쾌함, 카타르시스 어느 하나로 단순화되기 어렵다.

 

사랑하던 누군가가 감염자로 낙인찍혀 따돌림당하고 공동체에서 쫓겨날 때, 나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까. ‘저 사람은 감염됐지만 나는 감염돼지 않았다고 고발하고 선을 그으며 공동체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일까? 감염자의 가족, 친구, 연인이라는 이유로 의심받고 낙인찍히고 공동체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니까?

 

아니면 같이 손을 잡고 쏟아지는 돌을 맞으며 그 고통과 슬픔을 같이 하는 것일까? 나를 지켜주려고 같이 감염자가 된 친구와 연인을 바라보는 그 심정은 또 얼마나 처연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의 선택을 하고, 헬조선에 대한 그 많은 분노와 불만에도 이 착취와 억압의 구조가 유지되는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부산행>의 주요 등장 인물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또는 좀비가 된 연인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아니면 차리라 다 같이 좀비가 되는 게 낫다고 보며, 좀비가 되길 선택한다. 좀비든 사람이든 가차없고 무자비하게 다 죽이면서 감염을 막아낸 곳, 영화의 끝까지 좀비가 되지 않은 생존자 둘이 걸어 들어가는 부산은 또 다른 생지옥일 것이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 아귀다툼 속에 서로 상처와 고통을 주고받을 것인가, 아니면 다 같이 좀비가 돼서 디스토피아를 넘어서 달려갈 것인가? 경쟁과 불신의 논리를 거부했던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가 달려간 곳도 부산이었다는 것에서 위안을 찾아야 할까.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http://anotherworld.kr/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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