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DJ DOC 논란에 대한 허승영 동지의 글(http://www.anotherworld.kr/364)은 항상 그랬듯이 사려깊은 고민과 유익한 지적들로 가득했다. 다양한 측면에 대한 지적과 설명은 나뿐 아니라 이 논란에 관심있던 사람들에게 여러 측면에서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 대해 몇 가지 결이 다른 생각도 들었는데, 그것이 비록 크지는 않지만 논의의 발전을 위해서 써보고자 한다. 허승영 동지의 지적처럼 “답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치열한 토론과 비판이 오갈 것”이고 이것은 모두에게 도움이기 때문이다. 내가 허승영 동지 글에서 동의하는 많은 부분들은 반복이 될테니, 생략하고 나머지 부분에 집중하겠다.
먼저 나는 ‘대립과 분란을 넘어 소통과 이해로’(이하 ‘소통과 이해’)에서 허승영 동지가 DJ DOC에 대해 좀 지나치게 너그럽다고 느꼈다. 그들의 용기를 칭찬하고 예술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이후 논의에서도 “DJ DOC가 함께 참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말했다.
물론 누구든 그렇듯 DOC에 대해서도 평가하고 사줄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여성 문제에서는 DOC에 대해서 반성과 성찰을 권할 측면이 더 많다. 이번 노래 가사만이 아니라 DOC는 과거에 한 여성그룹에게 씻기 힘든 상처를 준 바 있다. 요즘에도 DOC 멤버중 한 명은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심각하게 넘쳐나는 케이블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아무런 문제의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번에 DOC에 공연에 대해 여성주의 활동가들이 반발했던 것도 단지 이번 노래만이 아니라 그런 맥락과 배경이 있었다. 그런데 관련된 많은 논의 과정에서(특히 DOC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일수록) 다소 아쉽게도 이 부분을 간과하는 측면이 있어 보인다.
DOC의 재능과 긍정적 측면을 살리길 원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문제에 대해 따끔하고 쓰디쓴 고언을 해야 한다. 나도 DOC의 몇몇 노래와 추억들을 여전히 좋게 간직하고 있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DOC가 반성과 성찰을 통해 거듭나고 신뢰를 회복하려 노력하는 게 먼저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둘째, DOC의 이번 노래에 대한 ‘소통과 이해’의 가치 판단이 좀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날카로운 비판적 지적을 하면서도, 그와 대치되는 여러 다른 의견들을 대체로 별 반박없이 교차적으로 소개한 것이 그런 인상을 낳고 있다. “[문제있는 부분을] 제외하면 좋은 노래”라는 평가까지 덧붙어 더 그렇게 느껴진다.
‘소통과 이해’가 소개한 여러 의견 중에서 먼저 DOC의 ‘그것이 아닌 의도’는 근거가 되기 어렵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여성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변명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주관적 의도가 아니라 객관적 결과이다.
‘미스’가 아니라 ‘미스테이크’를 말한 것이라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이 부분은 알려졌듯이 문제제기가 나오자 나중에 바꾼 것이었고, 그것도 여전히 ‘미스’라고 부르면서 뮤직비디오 자막에서만 그렇게 해놓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미스테이크’가 아니라 ‘미스(테이크)’라고 함으로써 두 가지 해석을 다 가능하게 했다. 유럽연합에서도 사용 금지를 권고한 ‘세뇨리타’도 여전히 그대로다.
‘돼지와 김정은’ 이야기도 그렇다. 외모를 문제삼는 것은 일반적으로 별로이지만,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간과되기 어렵다. ‘쥐명박’과 ‘닭그네’도 동등하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왜냐하면 외모로 평가받고 상처받는 것은 이 사회에서 압도적으로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노래에 대한 “다양한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얘기”하고 “다양성을 인정해야”하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또 “작가의 의도, 사회적 반영, 수용자의 반응, 텍스트의 내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나름의 분명한 가치 판단을 흐리는 결과가 돼서는 안 된다.
예컨대 ‘선 자리가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진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것은 각자가 서로 다른 자리에서 본 풍경이 다 타당하지 어느 하나가 옳은 게 아니란 말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거기서 가장 약하고 아픈 처지에 있는 사람의 자리에서 보려고 해야 한다. 그럴 때 강하고 힘 있는 자리에서 못 보던 많은 풍경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DOC의 이번 노래를 우리가 어떤 사람의 자리에서 들어야할지 분명해 진다. 중식이밴드의 ‘야동을 보다가’ 논란 때 내가 느낀 것이 이것이다. 나는 처음에 그 노래가 매우 신선하며, 독특한 예술적 성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논란이 벌어지고, 많은 반박을 접하고 나서, 내 자신이 ‘리벤지포르노에 고통받는 여성’이라고 생각하며 그 노래를 다시 들어 보았다. 그러면서 느낀 소름끼치는 기분은 아직도 남아있다.
DOC 노래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미스 박’이라고 무시와 하대 당하던 여성이 광장에 나와서 그 노래를 듣는다고 생각해보자. 외모에 대한 스트레스로 성형 수술을 하고, 그것이 또 콤플렉스가 된 여성이 광장에 나와서 “하도 찔러대서 얼굴이 빵빵” 가사를 듣는다고 생각해 보자. 해석은 다양할 수 있지만 우리는 특정 해석을 편들어야 할 때가 있다.
셋째. “대립과 분란을 넘어 소통과 이해로”가자는 이 글의 기조는 매우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좀 공평무사하게 들렸다. ‘소통과 이해’는 “<수취인 분명>을 좋게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차별주의자나 여성혐오론자라고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수취인 분명>이 집회 무대에 서는 것에 문제제기를 했던 사람을 비난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맞다 둘 다 잘못된 것이다. 서로 감정적으로 대립하기 보다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소통해야 한다. 그런데, DOC 논란 과정에서 현실에서 벌어진 일은 단지 양쪽 모두 귀를 막고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목격한 것은 문제제기를 한 여성단체들과 DOC 공연을 취소시킨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의 페북과 홈페이지를 뒤덮은 차마 보기 괴로운 심각한 공격들이었다. ‘박그네같은 것들’, ‘메갈년들’, ‘꼴페미’, ‘페미나치’, ‘미친년들’. ‘그거 따질때냐’, ‘뒤져라’, ‘지랄하네’, ‘염병하네’ ... 이것 자체가 한국 사회의 여성 차별과 혐오를 증거하고 있었다.
일부 여성주의 활동가들에게서 겉보기에 다소 과하고 감정적으로 보이는 반발이 나온 것은 바로 이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개별 사례까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전체적 그림은 이런 것이었다. 이런 맥락은 못 본 채 감정적 반작용부터 본 일부 사람들은 ‘DOC 노래를 좋게 보고 공연 취소를 아쉬워하는 나 같은 사람은 다 여혐론자인 거냐’고 오해하고 불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해는 오해다. 정말 진지하게 우호적으로 DOC 노래가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며 의문과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매도와 비난을 하는 경우는 찾기가 쉽지 않다. 설사 특정 개인이 그런 성마른 태도를 보였더라도 그것이 마치 여성주의 진영 전체의 프레임과 태도인 것처럼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서 있는 사회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랜동안 차별과 혐오에 고통받아 온 사람들이 있다. 이것을 대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직접 겪어왔거나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매우 민감하고 아무리 작은 가시라도 바로 빼고 싶어 한다.
상대적으로 차별과 혐오에 덜 직면해 왔거나 그 고통을 간접적으로 겪어 온 사람들은 아무래도 덜 민감할 수 있다. 또, 다른 가치들이 다 같이 중요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잘못도 탓도 아니지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양쪽 모두에게 ‘상대를 이해하고 소통하려고 하라’고 하기 보다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위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더 강조해서 말해야 한다. 고통과 상처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까칠함을 이해하고 먼저 손을 내밀자고 말이다.
아직도 한국 사회는 이 문제에서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왜 200만이 촛불에 나오는데도 ‘여성들에겐 촛불시위에 나가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글이 일부 여성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겠는가. ‘왜 촛불 이후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설 자리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제기되겠는가? 그런 생각과 의문에 동의하기 어렵고, 그것을 고쳐먹으라고 말하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불신은 먼저 공감하고 손을 내미는 실천적 연대 속에서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200만 촛불이 여성과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 그것을 바탕에 두고 박근혜 이후 사회에 대한 꿈을 그려갈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출처: 박하여행(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
(기사 등록 2016.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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