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경
[트럼프 취임 직후 미국을 중심으로 전세계 7개 대륙의 7백여 곳에서 무려 5백만여 명이 참여한 거대한 시위가 벌어졌다. 한국에서도 2천여 명이 모여서 강남대로를 행진했다. 미국 현지에서 이 역사적 시위에 직접 참가한, 이 글의 필자인 남수경은 미국 뉴욕에서 도시빈민, 이주민, 여성, 성소수자 등을 대변하는 공익인권변호사로 일하고 있으며, 법률서비스노동조합(Legal Services Staff Association UAW/NOLSW)의 조합원이다. 대구경북지역 독립 대안 언론인 <뉴스민>에 실렸던 글(http://www.newsmin.co.kr/news/17320/)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필자와<뉴스민>에 감사드린다.]
필자가 참가한 뉴욕의 시위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가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피하고 싶었던 그 순간이 드디어 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절망을 느끼는 이때, 역설적이지만 희망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한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나라가 일어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진실을 자명하게 밝힌다”라는 이 나라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주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나란히 같이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그 꿈이 있습니다!
1963년 인종차별에 반대해 모인 워싱턴 대행진 때, 링컨 기념관 앞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라는 유명한 연설 일부이다. 워싱턴 대행진 정식 명칭이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March on Washington for Jobs and Freedom)”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차별받고 있던 흑인들이 경제적 평등과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운 것이다.
킹 목사는 이날 연설에서 미국 사회 변화의 필요성과 잠재적인 희망에 대해 얘기했다. 킹 목사가 예견했던 것처럼 그날은 미국 역사상 “자유를 위한 가장 위대한 시위가 있었던 날”로 역사에 기록된다.
2017년 1월 21일, 오십여 년이 흐른 후 같은 자리에서 또 다른 역사가 만들어졌다. 바로 워싱턴 여성행진이다. 이 행진의 조직자들은 1963년 워싱턴 행진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의 행진도 “워싱턴 여성행진(Women’s March on Washington)”이라 불렀다.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라는 모토로 진행된 행진은 1963년 워싱턴 대행진과 마찬가지로 자유와 평등을 위한 위대한 투쟁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행진에 참여하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버스를 대절하고, 기차와 비행기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엄청난 인파가 워싱턴에 집결했다. 모인 사람들은 여성뿐만이 아니었다. 남성도 대거 참여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하기 위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온 가족도 많이 보였다.
그리고 이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목소리로 외치는 장관을 이루어 냈다. 한 연사의 말처럼 행진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이 바로 민주주의의 참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워싱턴뿐만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뉴욕, 보스턴, 시카고, 덴버,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등 미국 각 지역에서 약 400만 명이 트럼프 정권의 혐오와 분열 시도에 반대하는 행진에 참여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단일 집회로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미국뿐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전 세계 30여 개 국에서도 지지 행진이 벌어졌다. 지구촌에서 모두 670여 개 도시에서 같은 날 여성행진에 참여했다.
한국에서도 2천여 명이 모여 강남대로를 행진했다.
이 거대한 역사적 행진의 시작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 대선 과정에서 여성, 유색인종, 성소수자, 이민자뿐 아니라 장애인까지 거리낌 없이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그에게서 성폭력을 당했다는 여성들의 고발이 빗발쳤음에도 트럼프가 당선됐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이 특히, 여성들이 절망에 빠졌었다. 하지만 선거 다음 날 바로 몇몇 여성들이 이대로 절망만 하지 말자고, 무엇이든 힘을 합쳐 같이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곧 이들은 취임식 다음 날 워싱턴에서 항의행진을 제안했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이후 워싱턴을 포함해 미국 각 지역, 전 세계 주요 도시들에서 자매행진(Sister March)이 조직됐다. 소수 몇 사람으로 시작된 작은 불길이 얼마나 커다랗고 아름답게 활활 타오를 수 있는지를 우리는 1월 21일 눈앞에서 보았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여성행진 참가자들은 여성들의 권리만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다. 여성행진 조직자들이 발표한 기본입장을 보자. 운동의 지향은 여성에 대한 폭력 반대, 낙태권, 동일노동 동일임금 같은 여성운동 고유의 이슈들뿐 아니라 원주인, 이민자, 성소수자, 유색인종 등 모든 사람의 인권과 환경, 의료, 경제적 정의 등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여성행진은 앞으로 예상되는 트럼프의 반동적 공격에 맞서는 투쟁을 결의하는 장이면서도, 동시에 위트가 넘치는 연대의 장이기도 했다. 한 예로, 푸시햇(pussyhat)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워싱턴 행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푸시햇이라는 고양이 귀가 달린 분홍색 털모자를 쓰고 나왔다.
Pussy는 새끼고양이란 뜻과 함께 여성의 성기를 비하하는 속어다. 트럼프가 자신의 성폭력 전력을 자랑하는 녹음내용이 공개되면서, 이 여성비하 표현이 선거 기간 내내 언론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행진을 조직한 여성들은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이 여성비하 표현을 역설적으로 이용했다. 우리 모두 당당히 푸시햇을 쓰고 나오자고. 워싱턴 행진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행진을 지지하는 의미로 분홍 털모자를 손으로 짜서 행진 참가자들에게 전달했다. 여성들이 인권과 평등을 위한 투쟁에 연대해 함께 싸우겠다는 상징이면서, 동시에 여성비하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한 분홍모자 물결은 워싱턴 행진에서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었다.
1월 21일 여성행진은 대중들이 트럼프 정권의 반동적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트럼프의 인종주의 공격에 맞서 방관하지 않고 맞서 싸우겠다는 걸 보여주었다. 사실 취임 전에 시작된 트럼프 정권에 대한 반발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전체 득표수에서 300만 표 가까이 힐러리 클린턴에게 뒤진 트럼프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절반의 유권자들을 포함한 전체 유권자 중 기껏해야 4분의 1의 지지만 얻었을 뿐이다. 취임식 직전 이루어진 갤럽 조사에서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은 역대 최악을 기록했다.
여성행진에 나온 많은 연사가 얘기한 것처럼 행진은 단순히 일회성 행사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행진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투쟁이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장하고 지키는 거대한 운동의 시작일 뿐이라고, 단거리 전력 질주가 아닌 기나긴 여정의 마라톤이라고 선언했다.
8년 전,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당선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하던 날,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둘 커다란 회의실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흑인 대통령 취임식을 함께 지켜보았다.
많은 동료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기쁨의 눈물을 8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오바마가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약속한 “변화와 희망”을 믿은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변화를 실현해 주기를 바라며 평화롭게 제자리로 돌아가 기다렸다.
하지만 지난 8년 동안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경제 불평등은 더 심화 되었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과 전쟁은 더 확대됐다. 2008년 대선 때 부시의 이라크 전쟁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오바마는 불과 4년 후 재선에서 그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공화당 롬니 후보에 맞서 <뉴욕타임즈>의 표현에 의하면 “강경파 공화당원”처럼 전쟁을 옹호했다. 전쟁은 더 확대되었지만, 부시 정권 하에서 강력하게 진행되었던 반전 운동은 도리어 사그라졌다.
이민개혁과 서류미비 이민자 사면이라는 공약 대신 오바마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이민자를 추방하면서 추방사령관(deporter-in-chief)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백악관에 앉아 있었지만, 인종차별은 더 심해지고, 유색인종에 대한 공권력 살인은 지난 8년 동안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지난 8년간 이러한 희망의 좌절이 트럼프 당선에 일조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올해 대통령 취임식 날 나의 회사동료 중 그 누구도 회의실에 모여 취임식을 지켜보지 않았다. 대신 많은 동료들이 주말 내내 예정된 다양한 트럼프 반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결근하거나 조퇴했다.
나의 동료와 같은 사람들이 취임식 주말 미 전역에서 거리에 나선 사람들이다. 각양각색 모습은 다르지만, 함께 구호를 외치고 행진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희망을 보았다. 여성행진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이 지난 두 달 동안 처음으로 희망을 다시 맛본 날이 바로 1월 21일 여성행진이라고 말한다.
물론 트럼프의 언사에 고무된 백인우월주의자 같은 인종주의자들도 한동안 날뛸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희망에 고무된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지난 8년처럼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의 힘을 믿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싸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희망이다. 저항은 이미 시작됐다. 그래서 앞으로 4년이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절망적으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기사 등록 2017.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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