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래
모든 억압은 연결돼 있다(출처: http://rebloggy.com/post/class-racism-sexism-feminism-capitalism-oppression-privilege-misogyny-socialism/63021736591)
‘소수자’라는 개념이 과연 적절한가부터 시작해서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소수자의 해방이 체제 혹은 사회총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이르기까지, 소수자 해방 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쟁들이 진행 중이다.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뚜렷하게 가시화되면서 이러한 문제들은 좌파 활동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이 글은, 첫째로 이 개념이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공통분모를 적절하게 포착할 수 있으며 둘째로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들여다봄으로써 보다 실천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여 이 문제에 대한 약간의 생각을 전개해본 결과물이다. 그 내용은 크게 네 가지 명제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사회는 특정한 인간집단을 ‘표준’으로 정의하며, 여기에 맞지 않는 ‘비표준적인’ 인간을 소수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생산, 유통, 공공정책 등의 영역에서, 현재 사회는 정말로 모든 인간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는다. 대신 ‘표준’에 해당하는 인간상을 정해놓고 그의 상황이 곧 모든 인간의 상황인 것처럼 사회를 운영한다.(뒤에서 말하겠지만 이것은 ‘그 인간을 위해서’ 사회를 운영한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이것은 사회가 기본값으로 전제하는 표준적인 착취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신체적 특성, 역사적 경험, 사회화된 방식, 정체성과 지향 등 온갖 이유에서 이 ‘표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주변화되고 열등한 존재로 취급된다.
성별주의, 인종주의, 이성애중심주의, 에이블리즘(장애인 차별, 비장애인 중심주의), 나이주의는 모두 특정한 인간집단을 '보편' '표준'으로 대우하고 나머지를 그에 미달하는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차별은 물론 지배와 종속관계를 생산하는 시스템이다. 여기서 ‘표준’ ‘보편’의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 해당 시스템에서의 다수자다.
교통시설을 비롯한 공공시설들이 이용자들은 모두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걸을 수 있다는 전제로 설계될 때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휠체어 이용자 등 이러한 전제에 들어맞지 않는 장애인은 ‘응당 이용할 권리를 가진 이용자’가 아니라 ‘정상적으로 시설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시혜가 필요한 대상’으로 간주되며, 그럼으로써 비장애인에게 의존하도록 강요당한다. 이것이 비장애인을 다수자로, 장애인을 소수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이 사회에서 ‘다수자 중의 다수자’는 누구인가? 누가 ‘인간’으로 호명되고 인간의 기본값으로 전제되는가? 누구의 필요가 가장 무비판적으로 ‘국민적’이라는 칭호를 얻는가? 지금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한 인간의 그림이 떠오를 것이다. 그는 청소년도 노인도 아닌 시스젠더 헤테로, 즉 탄생시에 사회적으로 지정된 성별과 성 정체성이 일치하는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성, 그리고 의외롭게도, 사무직에 종사하는 정규직 노동자나 건실한 자영업자이다.
여기서 우리는 계급지배의 독특함을 볼 수 있다. 계급지배(classism)는 지배자가 아니라 피지배자가 ‘보편’ ‘표준’이라는 점에서 다른 억압과 차별의 양상들과 다르다. 성별주의, 인종주의, 이성애중심주의, 에이블리즘, 나이주의 하에서 시스젠더 남성,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비청소년 비노인 인구가 ‘표준적’임으로 인해서 다른 집단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과 달리 자본가나 엘리트 정치인은 ‘표준’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우월하다고 간주된다. (종차별주의라는 예외를 제외한다면.)
이것은 계급지배 하에서 피지배자들이 너무 압도적으로 다수이기 때문에 지배자들을 표준으로 삼는 이데올로기가 대중의 동의 및 수동적인 공모를 끌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같은 비청소년 … 비장애인 남성 노동자도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육체노동자 등 ‘노동자 내의 상대적 소수’가 되는 순간 표준에서 이탈한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이 점에서 성별주의에서 나이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억압의 당사자들을 ‘소수자’라고 칭하는 한편 근로인민 전체를 ‘소수자’로 지칭하는 것은 대체로 피하는 일반화된 용례는 타당성이 있다. 수적 다수와 소수가 언제나 자동적으로 억압자, 피억압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통상 ‘소수자에 대한 억압’이라고 칭해지는 억압들은 피억압자들이 수적으로 적어도 압도적 다수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이다.
이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양한 억압의 피억압자’들이나 ‘차별의 피해자’ 등 다른 이름을 제안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 흔히 ‘소수자’라는 말로써 지칭되는, ‘피억압자 일반’과는 구분되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지해야 한다.
둘째, 다수자 역시 억압을 당하지만, 소수자들이 당하는 억압이 양적·질적으로 더 심하고 많다.
서로 다른 소수자 집단들에 대한 억압들은, 비록 개념적으로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구분되어 나타나지만, 독립적 근원으로 비롯되어 현실에서 서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회총체의 다른 측면들이다. ‘표준적 인간상’에서 이러한 측면들은 서로 분리불가능하게 결합되어 나타난다. 즉 이 사회의 표준적 인간은, 비청소년/비노인/시스젠더/이성애자/비장애인‘이면서’ 남성이며 노동자인 것이 아니라 ‘비청소년 … 비장애인‘이기 때문에’ 비로소 (온전한) 남성이며 노동자일 수 있다.
그리고 이 ‘표준’이 피지배 근로인민을 다수자로 상정하고 그들의 예속상태를 정상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이 ‘표준적 인간’에게도 분명하게 억압적이다. 재생산노동을 전가할 수 있는 '정상가족'을 거느렸기에 하루종일 회사에서 '성실할' 수 있는 남성 가장은 가정에서는 권위를 세우면서 다소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소외된 노동, 소외된 삶을 강요당하는 충실한 임금노예에 불과하다. 바로 그 ‘비청소년 … 비장애인 남성’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 때문에 말이다.
이것은 성별주의에 맞선 운동과 계급지배에 맞선 운동을 어설프게 결합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억지 논리가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들이 당면하고, 경험하고, 심지어 자인하는 현실에 대한 기술이다. 다수자 중의 다수자에게도 이 체제는 살 만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표준적 피착취자'의 범주에조차 들지 못하는 '나머지'가 받는 착취•억압과 동일시해서는 곤란하다. '비표준적' 인간들이 받는 억압은 질적•양적으로 특수하며 ‘표준적’ 인간들은 여기서 많은 경우 직접적 가해자가 된다.
노동계급 여성이 같은 계급의 남성에게 당하는 성폭력은 변형된 계급착취의 형태로 환원될 수 없으며, 가해자가 계급지배의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어떤 점에서는 하나도 도움되지 않는다. 그 사실이 그의 행위책임을 면해줄 수 없음은 물론 그가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에게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방식과 정도의 악행을 여성에게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지워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수자와 소수자가 단순히 '서로 다른 방식으로 착취당하는' 분업관계에 있고 그래서 양자간에 고통과 특권의 등가교환 같은 것이 성립한다고 보아도 곤란하다.
첫째, 소수자들은 '표준적' 착취의 방식에서 놓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면에서 훨씬 더 심하게 착취당하는 경우도 많다. 청소년, 유색인, 성소수자, 여성들도 임금노동을 하며, 그들의 소수자성으로 인해 더 높은 확률로 저임금·불안정 노동에 혹사당한다.
둘째, 다수자와 소수자가 실제로 사회적으로 다른 역할을 하고 기여를 교환하는 경우에도 그 교환은 많은 경우 소수자에게 불공정하다. 남성이 임금을 벌고 여성이 집안일을 하는 가정이 남성은 사냥하고 여성은 채집하던 시대의 분업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사노동이 사회적으로 전혀 인정받고 보상받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적 인정과 주도권은 물론 많은 경우 심지어 여성을 폭행하고 학대할 권력까지도 남성의 손에 쥐어진다는 사실에 눈을 감는 것이다.
요컨대 다수자와 소수자 사이에는 분명한 권력 낙차가 있다. 이 낙차에서 성적 기득권, 인종적 기득권 등 온갖 종류의 기득권이 발생하며, 여기서 자신의 고통에 대한 보상을 구하고 그것을 놓기를 거부하는 태도야말로 피지배집단의 단결된 투쟁을 저해하는 가장 큰 질곡이다. 그것은 다수자들에게 자신의 박탈감과 분노를 풀 수 있는 손쉬운 화풀이 대상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체제에 대항하는 대신 더 약한 동료들을 공격하게 만든다. 인종주의와 파시즘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소수자들로 하여금 단결과 연대가 또다른 다수자 지배의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든다. 해결되지 못한 성폭력 문제가 불러오는 운동에 대한 불신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피억압자들이 자신들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체제에 맞서 함께 일어서는 대신 온갖 계층과 집단들로 분할되어 자신에 대한 영속적인 분할지배를 자기 의지로 열렬히 지지하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다수자-소수자의 분할은 사회주의 운동에 핵심적인 실천적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정말로 효과적인 실천은 일단 문제를 인지해야만 가능하다. 노동계급의 일부가 나머지 일부에게 저지르는 폭력을(특히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르는 폭력을) 계급의식의 이름으로 이해하고 용서할 것을 설파하는 좌파들은 의도가 무엇이든 다수자들이 공감할 수 없는 경험과 고통들에 대해서 분노하고 항의하기를 그만두라고 소수자들에게 요구함으로써 이 인지를 방해한다. 그들은 마치 자신이 내린 진단명에 맞지 않는 증상은 아무리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도 무시해버리는 의사처럼 행동하면서 자신이 과학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셋째, 소수자 억압은 이분법보다는 위계에 가까운 방식으로 작동하며 소수자들 사이에도 위계는 있다.
다수자가 인간 전체를 대표한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수자 외의 나머지를 하나로 묶어서 그들 사이에서는 권력낙차나 가•피해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존재하는 억압을 비가시화하는 잘못된 인식이다. 다른 억압들의 상호교차, 가령 남성 장애인이 여성 장애인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고 백인 여성이 흑인 여성을 차별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인종주의나 성별주의 같은 개별적 억압의 내부에도 위계가 있기 때문이다.
체제는 단순히 표준과 비표준을 이분하는 것이 아니라 표준을 정상으로, 가장 많이 혐오당하는 사람들을 밑바닥으로 하는 일련의 위계에 사람들을 배치한다. 비록 누가 위이고 아래인지가 분명치 않거나 변동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가령 아시아인은 인종적 '비표준'이지만 종종 흑인보다 유리한 위치에 놓이고 그것을 이용하여 흑인을 차별한다. 여기서 인종주의자 아시아인은 그를 피억압자로 만드는 그것과 완전히 동일한 구조에 의해서 억압자가 된다. 물론 이 ‘비백인들’의 위계는 인종적 구성이나 인종들의 사회적 지위가 달라지면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백인을 정점으로 하는 인종의 위계 자체는 여전히 남는다.
일부 좌파들은 이러한 언술을 곧 인종주의가 아시아인에게 이득이며 인종주의는 아시아인들의 악의 때문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단순히 지금의 사회 구조가 어떤 사람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힘과 자원을 부여하고,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를 해치게 될 나쁜 일들에 그것을 사용하도록 유도하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유도에 따른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리고 그 자신 똑같은 방식으로 억압받고 있는 사람조차 많은 경우 이렇게 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억압자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체제에 대한 복무자’ ‘차별의 행위자’ 등 다른 표현을 제안해도 괜찮다. 하지만 어떤 표현을 쓰든 우리는 이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는 동일한 구조 하에서 누군가에 의한 피해자인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 대한 가해자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억압자=악, 피억압자=선이라는 명확한 이분법을 흐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매우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사태를 단순화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위험하기까지 하다. 가장 큰 위험은 무엇보다도 피억압자 가운데 일부의 입장이 곧 소수자 해방을 대변하는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위계에서 더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방임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시스젠더 여성의 관점을 곧 성인지, 성평등과 동일시할 경우 시스젠더 여성이 가하는 성소수자나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을 구조의 일부로서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모두가 자기 이익을 추구할 뿐이고 세상에는 절대적 선도 악도 없다는 상대론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차피 차별적인 구조 속에 있고 벗어나려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구조결정론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누구도 차별받고 억압받지 않는 세계’라는 이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현실이 그렇지 않으며 우리는 그렇지 않은 현실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서로를 차별하고 차별받게 만드는 구조 속에 있으며, 특별한 악의가 없이도 그 구조를 재생산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려면 이 구조 속에서 몸에 밴 생각과 행동의 양식을 고치고 이러한 구조의 작동을 멈추기 위해 의식하고 노력하고 투쟁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이 구조를 바꿀 힘을 가지게 된다.
넷째, 다수자-소수자 분할과 위계는 의식적 실천으로만 지양할 수 있다.
구조가 문제라는 것은 단지 적아를 달리 구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구조 그 자체가 아닌 어떤 인간집단을 적으로 설정하고 '나머지는 어쨌든 같은 편이고 우리 안의 권력관계나 가피해는 비본질적이거나 허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오도되어 있다는 뜻이다. 남성/여성의 전선이든 자본가/민중의 전선이든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구조가 문제라는 것은 그것을 폐절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전선의 한 편에 선다고 해서 그것으로부터 놓여날 수 없다는 뜻이다. 소수자에 대한 억압은 사회구조적, 물질적 현실적 토대가 있으며 이 토대는 계급의식을 설파하는 것만으로 넘어설 수 없다.
이 토대를 바꾸기 위해서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실천이 필요하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분개나 억울함과 같은 감정적 반응들을 포함하며, 우리는 여기에 매몰되는 것을 피하되 그것이 일정 부분 투쟁에 당연히 수반되며 투쟁을 추동하는 동력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다수자-소수자의 분할은 피억압자들의 단결을 너무 치명적으로 방해하기 때문에, 이 분할에 맞선 투쟁은 ‘사회주의 이후에 해결될 문제’로 미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핵심적 과제로 여겨져야 한다.
물론 우리는 체제를 변화시키기 전에 임금노동을 폐지할 수 없듯 다수자-소수자의 분할도 철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임금노동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모순에 맞선 투쟁 속에서 비로소 자본주의를 넘어 사회주의에 대한 의식과 지향이 자라나고, 그것이 또다시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실천을 추동하듯이, 소수자 해방을 위한 실천 역시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으며 또 시작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자매애나 계급의식 같은 ‘동일성에 대한 의식’의 해일이 이러한 끊임없는 의식적 노력을 대체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이 사회는 우리를 다른 조건에 배치하며, 이것은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위계를 수반한다. 연대와 단결은 이 위계를 무시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실천으로 지양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려면 이 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으로 다가오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차이와 단결의 변증법을 통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바꿀 만큼 거대한 세력으로 결집할 수 있을 것이다.
(기사 등록 201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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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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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세상을향한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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