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꿈꾸어야 한다!”
- 레닌의 후기 활동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메아리
라스 T. 리
이 글은 라스 리가 레닌과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한 강연의 내용이다. 강연은 2010년 6월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 국제사회주의조직(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zation)의 ‘사회주의 2010’(Socialism 2010)에서 이뤄졌다. 라스 리는 러시아어 원자료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입각한 ‘레닌주의’에 대한 재해석으로 주목받아 왔고 <레닌의 재발견: 맥락에서 본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의 책을 썼다. 번역에 수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http://links.org.au/node/1980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시 볼 기회를 갖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제가 레닌의 생애 전체에 대한 전기 연구를 막 마친 시점에 말입니다. 제가 발견한 한 가지는, 솔직히 말하자면 다소 예상치 못하게 발견한 것인데요, 레닌의 전 생애에 걸쳐 나타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메아리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자리에서 레닌의 그 책의 기본 테마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고, 그것들 각각을 이후의 메아리들과 연결해 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왜 “메아리”라는 말을 썼을까요? 레닌 스스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 아주 많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1902년에 처음 출간되었습니다. 1907년에 그 책은 재출간되었는데, 그냥 레닌의 저작 선집의 일부로 출간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이 선집의 서문에서 레닌은 간단하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언급했을 뿐이고 그게 다였습니다.
그의 그 어떤 글에서도 다른 어떤 때에도 더 이상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도 <무엇을 할 것인가?>는 레닌 사후에 다시 발견되었을 뿐입니다. 사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볼셰비즘을 창시한 글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은 정말 신화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종종 특징적인 어휘들과 함께 나오는 그 책의 주요한 테마들 몇 가지가 레닌의 글에서 되풀이되어 나온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제 책 <레닌 재발견>은 어쩔 수 없이 논쟁적으로 날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제가 “교과서적 해석”이라고 전체적으로 이름붙인, 몇 가지의 깊이 뿌리박힌 편견들을 반박하는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교과서적 해석의 핵심 테마는 레닌이 “노동자들에 대한 우려”를 갖고 있었다는 검증되지 않은 단언이었습니다.
즉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의 기본적인 메시지가 다음과 같았다는 강력한 주장입니다. ‘혁명에 대한 노동자들의 이해와 헌신에는 한계가 있고, 따라서 스스로를 “직업적 혁명가들”이라 부르는 음모적 지식인들의 당이 노동자들을 대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레닌의 “노동자들에 대한 우려”라는 발상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좌파 버전과 우파 버전입니다. 우파 버전은 “<무엇을 할 것인가?>는 레닌이 노동자들을 경멸했음을 보여주고 이게 스탈린주의 독재정치를 설명해 준다”는 것입니다. 가장 저명한 좌파 버전은 대략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그렇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확실히 노동자들에 대한 레닌의 불신을 보여 주고, 다소 엘리트주의적이지만, 레닌은 그 이후에 곧 생각을 바꿨고, 그래서 괜찮다. 1905년 혁명이 일어나자,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혁명적 행동이 레닌을 감동시켜서 그는 180도 변했고 이제 마침내, 당 위원회에 노동자들을 모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동료 볼셰비키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영향에 깊이 젖어서 그것을 대단히 싫어했고 … 이런 식으로 나가는 이야기죠.
저는 “노동자들에 대한 우려”라는 해석이, 좌파 버전이든 우파 버전이든 그냥 틀렸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뒤죽박죽인 것, 뒤집힌 것으로서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특징은 오히려 노동자들에 대한 들뜬 열광이고, 이는 몇몇 저명한 좌파 저술가들과 반대로 레닌은 1905년을 <무엇을 할 것인가?>의 반증이 아니라 확증으로 보았다는 뜻이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우파 진영보다는 좌파 진영의 오해를 바로잡는 데 더 관심이 있습니다. 특히 저는 레닌이 1905년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부인했다고 보면서, 이게 레닌을 칭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좌파 진영의 그런 선의의 저술가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의 한 가지 목표는 실제로 레닌이 1905년을 자신이 1902년에 쓴 책에 대한 강력한 보증으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기본 테마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의 기본 테마들은 어떤 것일까요?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쓴 동기는 물론 당 문제의 구체적인 사태에 대해 구체적인 제안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제안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레닌의 보다 구체적인 정책 제안들에 프레임을 제공하는, 밑에 깔려 있는 시나리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시나리오”라는 용어는 제가 심사숙고해서 쓰는 용어인데, 우리가 레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닌이 모든 곳에서 보는, 밑에 깔려 있는 어떤 드라마나 어떤 역동적 상호작용을 느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의 핵심 테마는 마음을 움직이는 지도력(inspiring leadership)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저는 당연히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지도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 (레닌이 보기에) 대중 자신으로부터 나온 수천 명의, 보다 평범하지만 그래도 효과적인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리 집회에서 스스로 앞으로 나와서, 혁명적인 행동을 하자고 군중에게 촉구하는 한 노동자를 상상해 보세요. 레닌이 바란 일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영웅적이고 마음을 움직이는 지도자들에게는 영웅적인 동조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레닌은 노동자들에 대해, 단순히 잠재적인 지도자뿐만 아니라 동조자로 여기는, 그들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레닌은 훗날 활동가이자 지도자가 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노동자들은 당신의 메시지를 들을 준비가,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한 명의 활동가, 한 명의 실천가(praktik)가 기적을 만들 수 있다고 레닌은 말하는 것입니다.
남은 시간 동안에는, 제가 방금 대략적으로 묘사한 시나리오에서 전부 나오는 다음과 같은 테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 첫 번째, 노동자들은 열정적이고, 마음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동조자들이다.
* 두 번째, 잠재적인 지도자로서의 노동자들
* 세 번째, 지도자들이 동조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로 일어나는 기적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더 나아가서 일종의 계급 지도력, 즉 노동계급 전체가 ‘narod’ 즉 인민들, 고통 받는 대중,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지도자라는 점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동조자들
레닌과 그의 친구들은 세기의 전환기 즈음에 아주 놀라운 임무를 정했습니다. 한 줌의 망명가들인 그들이 지하신문을 인쇄해서, 광대한 러시아 제국으로 몰래 들여보내서, 그들의 신문이 짜르 체제의 전복을 위한 투쟁에 불을 붙이기를 바란 것입니다! 사실 그들의 신문 이름도 그것이었습니다. 불꽃, 즉 이스크라(Iskra)였죠.
그리고 그게 어떤 신문이었겠습니까! 만약 이스크라의 복사판을 한 번이라도 보실 기회가 있다면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지면 배치는 아니라는 걸 아실 겁니다. 읽는 게 정말 힘듭니다. 정말입니다. 이건 대중을 위해 눈높이를 낮춘 프로파간다가 아니며, 사실 굉장히 진지하고 성실한 독자들에게만 적합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레닌이 노동자들의 혁명적 경향에 대해 비관적이었다’고 말들을 합니다.
이런 교과서적 해석의 영향력있는 창시자들 중 한 명인 아담 울람(Adam Ulam)은 이 문제를 깨달았고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놀랄 만큼 비논리적인 저술”로 칭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만약 레닌이 노동자들을 그렇게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면 그는 도대체 어떻게 그의 미약하고 소규모인 지하신문, 박해받고 불안정한 작은 지하조직이 대중을 행동에 나서게 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는 놀랄 만큼 비논리적인 게 아니고, 전체로서의 노동자들이 혁명적 메시지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고, 열정을 갖고 있고, 기꺼이 받고 싶어 한다는 레닌의 기본 전제만 파악하면 사실 충분히 논리적입니다.
예를 들어 레닌은 왜 러시아 노동자들이 짜르 체제의 만행, “인민에 대한 경찰의 야수 같은 대우, 이교도 사냥, 농민에 대한 구타, 추악한 검열, 병사들에 대한 학대, 이제 막 시작된 가장 순수한 문화사업에까지 가해지는 탄압 등등”(<레닌 재발견 Lenin Rediscovered >[Haymarket Books, 2006] 738쪽/ <무엇을 할 것인가>[박종철출판사, 2008] 92쪽)에 더 저항하지 않는지를 자문합니다.
레닌은 독자에게 묻습니다: ‘이는 노동자들이 그게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혹은 노동자는 자신의 경제투쟁에만 관심이 있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우리 사회민주당원들이, 우리 혁명가들이, 우리 지하 활동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이 모든 만행에 대해 충분히 폭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폭로와 신문 지면상의 고발들을 노동자 대중에게 쏟아 붓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한다면(우리는 그렇게 해야 하며 또 할 수 있다) 학생들, 이교도들, 농민들, 작가들 위에서 광폭하게 날뛰면서 그들을 능멸하는 그 검은 세력이 바로 자신의 생활 곳곳에서 자신을 억누르고 핍박하는 세력임을 가장 평범한 노동자라도 깨닫게, 또는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그런 것을 느끼게 되면, 자기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 호응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레닌 재발견>, 738쪽/ <무엇을 할 것인가>, 92~93쪽)
레닌 생각의 진수는 이렇게 대담하게 노동자들로부터의 열정적인 호응을 기대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노동자들을 동조자로 보는 레닌의 태도는 세르주 주바토프라는 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드러납니다. 주바토프는 짜르 시대의 경찰관이었는데, 1900년 즈음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그들의 홈그라운드에서 패배시킬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낸 사람이었습니다.
1905년 혁명 이전에는 정치 정당뿐만 아니라 노동조합도 불법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세요. 주바토프의 발상은 ‘경찰 스스로가 반합법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이 짜르에게는 여전히 충성하고 심지어 감사하면서도 그들의 경제투쟁을 평화적인 방식으로 하도록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소위 “경찰 사회주의”에 대한 레닌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레닌의 관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토대로 한번 예측해 봅시다. 만약 레닌이 노동자들이 태생적으로 개량주의적이라고 생각했다면, 필요한 개혁들을 짜르 정부가 정말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경찰 노동조합들에 대해 그가 상당히 걱정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레닌의 태도는 매우 자신만만했습니다. 실제로 “계속해 봐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레닌에 따르면 이런 경찰 노동조합들은 모든 면에서 혁명적 지하 활동에 유익합니다. 첫 번째로, 경찰이 합법적 노동자 선전물들을 제공해 주는 일을 떠맡았으니 지하조직은 더 급진적인 것들을 몰래 들여보내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노동자들이 주바토프와 그 수하들의 반민주적이고, 반혁명적인 메시지에 잠깐이라도 속을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민주주주의자들이 주바토프의 메시지를 논박하는 일을 열심히 한다고 가정할 경우에 말입니다.
이게 바로 레닌이 1902년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말한 바입니다. 1년이 더 지난 후에, 1905년 혁명은 레닌에게 그가 이 책에서 했던 예측들을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05년 1월, 주바토프의 동조자중 한 명인 가퐁 신부는 노동자들을 이끌고 짜르 앞에 가서 충성스럽고 평화로운 탄원을 하도록 했고, 그들은 ‘피의 일요일’에 정부의 총을 맞아 쓰러졌으며 이는 노동계급의 큰 부분이 급진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레닌의 반응은 “아, 노동자들이 혁명적이구나. 놀랍군. 내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봐, 혁명이 일어난 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말했던 게 얼마나 맞는 말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거잖아(제가 재구성해본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그것도 여러 번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그가 “심지어 가장 후진적인 노동자들이라 할지라도 주바토프주의자들에 의해 [혁명적] 운동으로 이끌려 올 것이다”라고 예측했던 것을 자랑스럽게 가리켰습니다(Lenin, Polnoe Sobranie Sochinenii [PSS, Complete Collection of Works], 9:220-1).
그는 1905년 혁명에서 사건들로 인해 이것이 사실이었음이 증명되었다고 느낀 것입니다. 혁명의 발발은 또한 (레닌이 주장하기를) “일단 그들이 운동에 함께하게 되고 그들 자신의 운명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노동자들은 더 멀리 나아갈 것이다.(Lenin, PSS 9:174-7)”라던 예전 주장 역시 입증해 주었습니다. 1905년에 이루어진 이런 논평들은 레닌 스스로가 1902년의 자기 책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태도라고 느낀 바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레닌은 분명 부르주아지의 감언을 물리칠 수 있는 대중의 역량에 대해 보다 덜 확신하게 되기는 했습니다. 1921년에 Ganka Miasnikov라는 한 노동자 당원이 최소한 노동자들과 농민들에게라도 언론 자유를 허용할 것을 요청하며 레닌에게 편지를 썼을 때 레닌은 거의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이런 식으로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언론 자유는 우리가 부르주아에게 신문 발행을 허락한다는 것이고 그건 정치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레닌은 더 이상 1902년과 1905년에 보였던 “계속해 봐라!” 같은 태도를 더 이상 견지하지 않았던 것이죠.
다른 한편 레닌은 대중이 지식과 계몽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깊은 믿음은 계속 유지했습니다. 레닌은 러시아 노동자들이 지식, 읽기, 계몽, 세상에 대한 정보를 절실하게 갈망하고 있다고 고집함으로써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안된 실천적 제안들을 뒷받침했습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선동을 즉각적, 지역적, 엄격히 경제적인 투쟁에만 국한시키는 활동가는 누구든 간에 노동자들에게 유익하지 못하다’고 되풀이하여 말했습니다. 노동자들 스스로가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지요.
마지막으로 1923년 초에 출판된 그의 글들 중 하나(간과된 “Pages from a Diary”)에서 레닌은, 교육과 읽고쓰기 능력에 대한 캠페인을 제1순위로 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다시 이 테마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아직 탈피하지 못한, 그리고 맹렬한 노력 없이는 탈피할 수 없는 半아시아적 문화 부재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민 대중이 우리나라만큼이나 이토록 진짜 문화에 관심이 있는 곳은 없기 때문에 우리가 탈피할 가능성이 분명 존재하지만. 동시에 우리나라만큼 문화 문제가 이토록 심오하게 지속적으로 제시되는 곳은 없다.
그 어떤 다른 나라에서도 스스로의 결핍, 문화뿐아니라 읽고쓰기 능력의 결핍을 잘 알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손에 국가권력(the state vlast)이 있지는 않다. 그 어디서도 우리나라에서만큼 노동계급이 이 측면에서 스스로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런 헌신을 실제로 하고 있지는 않다(Lenin, PSS, 45:363-8).
지도자로서의 노동자들
우리는 노동자들을 동조자들로 보는 레닌의 관점,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관점을 검토했습니다. 이제 방정식의 다른 항, 즉 대오에서 올라와 지도자가 되는 노동자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물론, 레닌은 오직 지식인들만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거나 “직업적 혁명가들”과 같은 발상과 엮여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상적인 혁명적 활동가에 대해 레닌이 생각하는 이미지의 중심적인 특징은 노동자 출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레닌은 이 주제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매우 유창하게 말합니다. 그는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자신들의 대오에서 지도자들을 내보내고 있으며(vydvigat’), 그렇기 때문에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는 더욱 더 이 과정을 함께하며 돕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레닌이 독자들에게 말하기를, 노동자 대오 출신의 진짜 당 지도자들이 가장 좋은 지도자들이고, 우리에게 그런 사람들이 더 있다면 우리는 천하무적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먼저, 레닌은 당 조직 내에서 위로 올라가는 노동자가 획득하게 될 모든 훌륭한 자질들을 열거합니다.
그는 [혁명 활동 내의]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요령을 터득하고 경험을 쌓으며 시야와 지식의 폭을 넓힌다. 그는 다른 지방과 다른 당의 뛰어난 정치 지도자들을 바로 옆에서 관찰하면서, 자신도 그 같이 높은 수준에 올라설 수 있도록, 그리고 노동자 사회에 대한 지식과 신선한 사회주의적 신념을 [혁명 활동에서의] 자기 분야에 대한 숙련과 함께 아우를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런 숙련이 되지 않는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매우 잘 훈련된 적들의 대오와 강고한 투쟁을 벌일 수 없다.(<레닌 재발견>, p. 794/ <무엇을 할 것인가?> 172쪽 번역 일부 수정)
이어서 그는 이런 식으로 노동자 지도자들을 모집하는 데 성공할 경우 당에 돌아올 이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전문적으로 준비되어 오래도록 노동자 혁명가의 길을 걸어 온 사람들의 분견대가 생긴다면, 그때는 세계의 어느 정치 경찰도 이들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혁명에 지극히 헌신적인 이들 분견대는 가장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의 헌신적인 신뢰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레닌 재발견, 794쪽/ <무엇을 할 것인가?> 173쪽)
이것이 1902년 레닌의 생각이었습니다. 1905년까지 내다보면 레닌이 당 지역 위원회에 노동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새로운 노력을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좌파 쪽의 몇몇 저술가들은 이것을 보고 ‘아, 레닌이 3년 전과 달리 생각을 바꾼 것이 분명하구나. 1902년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다 알다시피 노동자들이 당 위원회에 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저술가들은 레닌이, 그들 말로는, 자기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를 칭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방금 봤다시피 레닌은 생각을 바꾼 게 아니고, 사실 1905년에 그는 이 사실을 다소 고집했습니다. 그는 이전에 노동자들을 위원회에 모집하자는 명확한 요청을 한 러시아 사회민주당 지도자는 자기밖에 없었다고 주장했고 이는 어느 정도는 정당했습니다.
1905년 그와 동료 볼셰비키들은 적절한 노동자들을 모집할 방안을 토론했지만, 위원회에 가능한 더 많은 노동자들을 오게 해야 한다는 목표는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1905년 이 에피소드의 제대로 된 버전을 강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씀드렸듯이 좌파의 영향력 있는 저술가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으로 틀린 해석을 강화하기 위해 이 에피소드를 사용하기 때문이죠.
두 가지 실제 사례, 1912년의 말리노프스키(Roman Malinovsky)와 1919년의 스베들로프(Jacob Sverdlov)에 대한 레닌의 반응을 살펴보면 이상적인 지도자로서 노동자에 대한 레닌의 이미지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가짜였고, 다른 사람은, 레닌이 생각하기엔 진짜였습니다.
말리노프스키는 누구였을까요? 1914년 그는 저명한 볼셰비키 지도자이자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었고, 짜르 시대의 입법기관인 두마에서 가장 저명한 연설가인 사회민주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경찰 스파이기도 했습니다. 1914년에 그는 발각될까봐 두려워서 러시아를 떠나서 폴란드에 있는 레닌의 집에서 나타났습니다.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행동이 그가 스파이임을 보여준다고 정확히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레닌은 아니었습니다. 레닌은 말리노프스키가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을 때 순진하게도 그를 믿었고 말리노프스키를 경찰 스파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누구든 맹렬하게 공격했습니다. 짜르가 전복되고 짜르 경찰 기록이 공개된 1917년에야 레닌은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레닌은 이 문제에 대해 이토록 고집스러웠을까요? 말리노프스키가 노동자 지도자에 대한 레닌의 이상적 이미지를 구현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말리노프스키는 정말 동료 노동자들에 의해 “이끌려 앞으로 나온” 사람이었는데, 처음에는 노동조합 지도자로서 그 다음에는 당의 지도자이자 연설가로서 그랬습니다. 그는 아는 게 많았고 유창하게 말을 잘 했고 듣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연설가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나온 레닌의 주장을 “말리노프스키같은 사람들에 의해 지도되는 당이라면 세계의 그 어떤 정치 경찰도 이 당을 패배시킬 수 없을 것이다”로 요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리노프스키는 딱 한 가지만 제외하면 이상적인 볼셰비키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가짜였고 계략에 의해 만들어진 자였습니다.
말리노프스키와 반대로 스베르들로프가 있었습니다. 스베르들로프는 말리노프스키와 비슷한 시기(1912년)에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로 인선된 고참 볼셰비키(Old Bolshevik)였습니다. 그러나 스베르들로프는 곧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졌습니다. 사실 그를 밀고한 것은 아마도 말리노프스키였을 것입니다. 1917년 혁명의 첫 해와 그 이후 반 년 동안, 스베르들로프는 상위 당 지도부의 중요한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는 1919년 초에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분명 그의 이름은 더 많이 알려졌을 것입니다. 1919년 3월에 레닌은 스베르들로프에 대한 추도 연설로서 짧은 연설을 합니다. 이 연설은 대단히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제가 <레닌 재발견>에서 지도력에 대한 레닌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 연설을 활용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레닌은 스베르들로프를 완벽한 전문적 혁명가(professional revolutionary), 즉 제가 번역한 대로라면 직업적 혁명가(revolutionary by trade)의 이상적 사례로 여깁니다. 스베르들로프와 같은 이상적인 전문적 혁명가의 한 가지 자질이 그 혹은 그녀가 인민들 속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라고 레닌은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는 같은 이미지, 심지어는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에 의해 “앞으로 이끌려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레닌은 세기의 전환기에, 다시 말해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쓰고 있던 바로 그 때 노동자들이 낡은 세대의 지식인 혁명가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레닌은 이 연설을 1919년, 즉 내전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를 시작할 때, 당시의 많은 지켜보는 사람들을 위해, 볼셰비키들의 본질적인 자질은 혁명적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비록 필요할 때 혁명적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유익한 자질이라 하더라도, 이는 볼셰비즘의 진짜 정수는 아니라고 레닌은 이야기합니다.
폭력은 오직 몇몇 구체적인 조건들 하에서만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진짜 정수는 다수 대중을 조직할 수 있는 볼셰비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직”이라는 말을 통해 레닌은 효율적인 사무 처리를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지도자가 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레닌의 유창한 러시아 용어를 사용하자면 진짜 리더(vozhd)말입니다.
스베르들로프에 대한 추도 연설에서, 레닌은 이상적인 리더/전문적 혁명가/조직가의 자질 목록을 쭉 읊고 지나갑니다. 이 목록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주의 깊게 읽었다면 꽤 익숙할 것입니다. 이상적인 지도자는
* 인민들 속으로부터 앞으로 나온다.
* 대의에 대한 완전한 헌신으로 인해 노동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 지하 활동이라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항상 선진 노동자들과의 연계를 유지한다.
* 필요한 실천적 지식과 재능을 습득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기본 발상을, 세계 전체에 걸쳐 끌어올리는 힘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다시 말해 마음을 움직이는 지도자는 국제적 시야를 가진다.)
레닌은 마음을 움직이는 지도자가 프롤레타리아의 대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만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대의가 그 지도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도 강조합니다. 가끔은 마치, 혁명적 노동자들이 거의 지도자들의 자아실현 수단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두 개의 인용문을 읽어 드릴게요. 하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나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17년 후인 스베르들로프의 추도 연설에서 나온 것입니다. 각각의 인용문에서 레닌은 말합니다. 대중적인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부상하기 전 옛날에는,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제대로 적용할 기회가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지도자 개인들은 대중운동에 의해 뒷받침되면서 빛을 발할 기회를 제대로 갖는다.
두 경우 모두에서 레닌은 특히 자기 형 알렉산더(Alexander)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렉산더는 잠재적인 지도자였는데 짜르를 암살하려는 무용한 노력 끝에 처형당하면서 비극적으로 삶을 버리고 맙니다. 레닌이 보기에 알렉산더는 지하 대중운동의 부상 이전에 너무 빨리 태어나서 살다 죽은 거죠.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인용한 부분입니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이론의 지도를 받으며,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초보적인[stikhiinyi] 각성을 거치고 있는 계급에 의지하고 있는 러시아 혁명가들이 마침내, 마침내! 스스로를 완전히 일으켜 모든 영웅적[bogatyrskii] 힘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정확히 바로 지금[즉, 1902년]이다.
‘bogatyri’는 러시아 민속 서사시의 크고 대단한 영웅들이었습니다. 지도자로서의 러시아 혁명가들에 대한 그의 낭만적인 관념을 드러내기 위해 이보다 나은 단어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1919년 스베르들로프 추도 연설에서 인용한 부분을 비교해 보세요.
수십 년에 걸친 러시아 혁명운동의 역사 속에는 혁명적 대의에 헌신했지만 그들의 혁명적 이상을 실천적으로 적용할 가능성을 누리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이전에는 이렇게 외따로 떨어져 있던 개인들, 혁명 투쟁의 영웅들에게 처음으로, 이 리더(vozhdi)들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진짜 기초 교육, 진짜 기반, 진짜 프레임, 진짜 지지자와 진짜 프롤레타리아 군대를 주었습니다.(Lenin, PSS 38:75).
각각의 경우에서 레닌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영웅들,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지금, 그리고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진짜 지도자가 될 수 있게 됐다고요.
기적
우리는 이제까지 노동자-동조자들과 노동자-지도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이 둘이 만나면, 둘이 상호작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봅시다. 일어나는 일은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기적입니다. 이건 레닌의 단어로, 러시아어로는 ‘chudo’이며, 한번 찾아보기 시작하면 “기적”이나 “기적적” 같은 단어들이 레닌의 어휘에서 꽤 자주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나온 말을 인용하고 싶은데, 제 맘대로 본다면 이 책에서 이게 가장 유명한 문장일 것 입니다.
이 대목은 레닌이 1870년대 이전 세대의 러시아 인민주의자 혁명가들을 되돌아보면서 시작됩니다. 레닌은 묻습니다: 이 사람들은 왜 영웅인가? 왜 우리는 이 사람들을 모범으로 우러러보는가? 그들에게 중앙집중적이고 음모적인 지하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아니다. 그들은 마음을 움직이는 지도자였기 때문에 영웅인 것이다. 이런 초기 혁명가들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그들의 연설은 초보적인[stikhiinyi] 방식으로 각성하는 대중의 응답하는 부름과 만났고, 지도자들의 끓어오르는 에너지는 혁명적 계급의 에너지를 만나서 뒷받침되었다.
그런 다음 이어서 레닌은 오늘날의, 즉 1902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동등한 역량의 지도자들을 배출해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레닌은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에게로 눈을 돌려서 말합니다.(그리고 저는 이 문장이 모든 ‘교과서’에 인용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실천성을 자랑하오. 그러나 당신들은 러시아의 활동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즉 하나의 서클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한 사람이라도 혁명 과업에서 얼마나 큰 기적을 낳을 수 있는지를 모르고 있소. (<레닌 재발견>, 770쪽/ <무엇을 할 것인가>, 139쪽 일부 수정)
같은 생각이 이미 꽤 유명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다른 구절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한테 혁명가 조직을 주면 러시아를 뒤집어 놓을 수 있다!” 맥락 속에서 보자면, 레닌은 여기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걸까요? 그는 한 무리의 지식인층 음모자들이 어떻게 손을 써서 짜리즘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죠! 레닌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재구성한 말입니다)
동지들, 주변을 둘러보세요! 러시아 노동자들이 혁명의 메시지를 받고 행동하고 싶어서 애태우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활동가들(praktiki) 속에 이미 존재하는 지도력에 대한 잠재성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들이 올라오도록 우리가 마음을 잡고 격려하면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노동자들로부터 배출될지 보이지 않습니까? 이런 잠재력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지체되고 있는 것입니까? 왜 짜르는 아직 물러가지 않은 것입니까?
동지들, 바로 우리가, 우리가 방해물입니다! 우리가 지하활동 실력을 갈고 닦아 짜르 정권이 그토록 절실하게 떨어뜨려 놓고 싶어 하는 것, 즉 노동자 지도자들과 노동자 동조자들을, 메시지와 청중들을 하나로 만들 수 있다면, 신께 맹세코 우리는 이 이음새를 끊어 놓을 수 있습니다!(대략 이런 뜻의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1902년에 레닌의 메시지였습니다. 약 10년 정도 지난 후 1913년에, 러시아의 혁명적 상황은 비교적 조용하던 몇 년을 거치고 나서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레닌은 또다시, 아주 작은 집단이 매우 큰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작고 박해받는 지하조직이 러시아를 움직이는 지렛대가 될 수 있는가를요. 1913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대중 시위 집회와 파업이 있었습니다. 레닌은 이런 파업과 집회의 원인과 결과를 이런 식으로 묘사했습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지하조직은 몇백 명의 노동자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프롤레타리아트의 꽃”[참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꽃”이라는 이미지는 스베르들로프 추도 연설에서 다시 등장합니다]이고, “러시아 노동계급 전체에 의해 존경받고 인정받”습니다. 이런 노동자들이 허접하고 형편없이 인쇄된 그리고 별로 보기에 매력적이지는 않은 팸플릿을 발행합니다. “그리고 기적이!”
25만 노동자들이 “한 사람처럼” 일어나서 페테르부르크에서 파업과 집회를 합니다. “수도의 모든 외곽 지역에서 그리고 도시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붉은 플래카드를 흔들고, 혁명가를 부르고, 크게 혁명을 외치며, 노동자 군중은 정부에 의해 동원된 경찰과 오흐라나(Okhrana: 보안 경찰)의 엄청난 힘에 맞서서 몇 시간 동안 싸웠다”고 합니다.
노동자들의 리플릿과 혁명 선동 발언은,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혁명을 통해 민주공화국을 세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페테르부르크의 도시 경계선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고통받고 착취받는 대중, 기본권을 박탈당하고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린 이들을 혁명적 행동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1905년에 스스로 만들었던 강력한 무기인 혁명적 파업은 그래서 “인민들을 혁명으로 선동하고, 일으키고, 일깨우고, 조직하고 있”습니다. 사실 노동절 파업과 집회는 “온 세계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확고부동하게 혁명의 길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 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높게 평가하는 레닌의 관점에서는, 페테르부르크의 소규모의 사회민주주의자 지하조직이 전 세계에 들리는 메시지를 보낸 셈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그 조직은 수백만 명을 향해 짜리즘 하에서 그들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진실을 폭로했고,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혁명적 투쟁에 대한 신뢰를 갖게 했”기 때문입니다(Lenin, PSS, 23:296-305).
사회민주주의적 메시지의 힘, 이것이 바로 레닌에게는 기적의 원천이었고, 미약한 지하 조직이라는 지렛대가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한쪽에는 진실을 전하는 메시지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것에 답할 수 있는 대중의 능력이 있으니까요.
전체로서의 계급이 갖는 지도력
레닌의 세계관에서는 사회민주주의적 메시지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노동자들뿐만은 아니며 러시아 인민 전체, 특히 농민들도 그렇게 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레닌은 전 세계가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의할 점은 이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전이며, 이 때 레닌은 엄밀하게 反짜르 민주주의 혁명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노동자 지도자들과 노동자 동조자들을 살펴봄으로써 지도력에 대한 레닌의 시나리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레닌의 지도력 시나리오 전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면 우리는 농민들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지도력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이런 한 계급 전체에 의한 지도력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라는 말의 핵심입니다. 이 측면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나오지만, 그 책이 쓰인 특정한 사정 때문에, 그 측면이 주요 초점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저는 레닌이 ‘전위’라는 단어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전위로서의 당이라는 뜻으로 자주 쓰기는 하지만(<무엇을 할 것인가?>에 “전위 정당”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기는 하지만요), 이 단어는 레닌과 다른 볼셰비키들에 의해 “인민(the narod) 전체의 전위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뜻으로 훨씬 더 자주 쓰인다는 것만 언급하겠습니다. 노동계급 전체가 전위고, 이 전위의 임무는 마음을 움직이는 지도력을 농민들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꿈꾸어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끝에 거의 다 가서 나오는 선동적인 대목에서, 레닌은 만약 당 신문에 대한 그의 구체적이고 상세한 제안이 시행된다면 일어날 일을 상상합니다. 레닌은 그의 특정한 계획이 그 자체로는 아주 작은 것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게 실제로 시행된다면 레닌은 그 계획이 무언가 훨씬 더 큰 것으로 불어난다고 봅니다.
그는 지식인층의 지도자들과 노동자들에 의해 “앞으로 이끌려 나온”(이전에 나왔던 그 말입니다) 지도자들이 “동원된 군대의 선두에 서서, 러시아의 치욕과 저주를 징벌하는 길로 전체 인민을 떨쳐 일어나게 할 것이다. 우리가 꿈꾸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일 아닌가!”라고 말합니다.(<레닌 재발견>, 828쪽/ <무엇을 할 것인가?> 221쪽)
이제 1923년 초로 빨리감기를 해서 레닌이 출판을 위해 쓴 마지막 글 “더 적지만 더 나은(Better Fewer but Better)”을 한번 보시죠. 여기서도 레닌은 자기가 생각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관료체계 밖에 있던 노동자들을 모집하여 관료제를 감찰하고 개선 방법을 제안하도록 함으로써 소비에트 관료제를 개선하고자 합니다. 유감스럽지만 이 계획은 그 자체로는 다소 필사적이며 실현가능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레닌은 아까 인용된 <무엇을 할 것인가?>의 구절과 매우 비슷한 방법으로 그의 글을 마무리합니다.
먼저, 레닌은 그의 계획의 세부사항들을 나열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계획을 광대하고 영웅적인 지평과 연결합니다. 국외의, 인도, 중국, 그리고 “전 세계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포함하는 세계 혁명. 국내에서 노동자들은 “농민들에 대한 지도력을 유지하고”(언급한 대로, 농민에 대한 노동자의 지도력은 레닌의 전 생에 걸쳐 계속된 테마였습니다), 그래서 소비에트 경제를 [상징적으로] ‘마력(馬力)에서 수력발전으로 전환’시키는 걸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다시 한 번 꿈을 꿀 필요성을 상기하면서 마무리합니다. 노동자 감찰 계획에 대해 “이것들이 내가 꿈꾸는 높은 임무들이다”라고 하면서.
그러므로 <무엇을 할 것인가?>와 그의 마지막 글 모두에서 레닌은 우리가 꿈꾸어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이런 우연은 그저 수사적 과장이 아닙니다. 이는 레닌의 생각이 전개되는 방식입니다. 레닌은 이것 혹은 저것을 개선하기 위한 상세한 계획을 들고 와서, 그것을 세계를 변혁하는 광대한 지평과 직접 연결합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그는 특정한 원동력을, 거의 말 그대로 기적적인 힘을 그토록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지도력이라는 원동력입니다. 영웅적인 지도자들에게는 영웅적인 동조자들이 있어야 하고, 레닌은 지도자들과 동조자들 양쪽에 대해서 다 높이 평가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 관점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핵심이고, 1902년에 쓰인 이 책의 메아리를 그의 평생에 걸쳐 이토록 많이 찾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anotherworld.kr/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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