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파시스트"라는 말은, 동서남북에서 특히 강력한 권위주의적 지향의, 반대파에게 평판이 매우 좋지 않은 정치인을 지칭할 때에 매우 자주 사용됩니다. 푸틴이나 습근평은 물론이거니와, 내란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윤석열이나 그 측근들에 대해서도 종종 "파시스트적 지향"이라고, 일부 제도권 외신에서도 언급하곤 합니다.
트럼프에 대해서도 물론 "파시즘"과의 연관성을 논하는 이들은 아주 수두룩합니다. 현재, 즉 2025년2월7일에, 워싱턴에서 트럼프와 머스크에 의한 그 해체를 반대해 싸우는 미국 해외개발처 (USAID)의 직원들 중에서는, "트럼프와 머스크, 해외개발처에 그 파시스트적 마수를 뻗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이들도 보입니다. 즉, "파쇼 트럼프"는 이미 일반에서 나름 정형화된 의식의 틀인 셈이죠. 과연 이와 같은 정의 (definition)는 역사학적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이는 것인가요?
파시즘에 대해서는 협의 (narrow meaning)과 광의 (broad meaning)의 정의가 가능합니다. 협의의 파시즘은 1920년대초부터 대체로 1970년대 초반까지의 일군의 극우파 운동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극우파 운동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숭배하면서 좌파를 "궤멸"시키려 하고, 좌파를 포함해 대개 몇 가지의 소수자 그룹 (각종 종족적 소수자,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들, 병역기피자 등등)을 "국민적인 희생양"으로 삼아 전멸시키거나 배제시켰고, 국유 내지 국가 통제하의 경제를 지향했습니다.
많은 경우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중하층의 선동가나 군 내지 비밀경찰의 하급 내지 중급 장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파시즘 운동을 통해 집권하면서 파시스트당 당원들이나 파시즘을 추진하려는 장교 그룹 등에게 출세의 길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의 전형적인 파시즘이란 물론 독일의 나치즘이죠.
중하층 선동가가 아닌 국가 관료에 의해서 실시됐던, 훨씬 더 보수적인 파시즘은 오늘날 한국인들의 조부나 조모, 내지 증조부, 증조모들이 1930년대말과 1940년대초반에 겪었던 일제말기의 파시즘이었습니다. 그 때에 "통제 경제"를 지향했던 일제는 조선에서도 조선주택영단 (대한주택공사의 모태) 등 국유 내지 국영 특수 법인, 회사들을 만드는 등 "공출", "배급", "국가에 의한 시장의 대체"의 세상을 만든 것이죠.
트럼프는 아무리 신보호주의 신봉자라 해도 국가를 가지고 시장을 대체시킬 생각은 분명 없습니다. 트럼프의 하수인들 중에서는 벤스와 같은 중하층 출신들도 종종 보이지만, 대체로 지금 트럼프를 중심으로 해서 뭉친 이들은 머스크와 같은 미국의 굴지의 억만장자들입니다. 그러니 협의의 "고전적인" 파시즘과는 트럼프주의는 아무래도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한데 파시즘을 "광의"로 정의한다면 이야기는 상당히 달라집니다. 광의의 파시즘은 강력한 리더 중심의 상명하달의 구조가 정치적 다원주의를 전복시키고 정상적인 합리적 관료제를 복종시킨다는 것부터 의미합니다. 즉 (한국사와 같은 경우) 정치 군인들이나 극우 정당 등이 의회를 무력화시키거나 자신들 밑으로 두고 관료들을 수족처럼 부린다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파시즘은 영토 팽창까지는 아니더라도 군사화와 군사주의를 숭상히 여기고, 대개 군비를 늘립니다. "병역 기피자 제로" 정책의, "군대 가야 남자가 된다"는 말이 "상식"처럼 주입됐던 한국적 1970년대를 생각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각종 소수자들이 박멸까진 아니더라도 고립과 배제, 폭력을 경험하야 하고, 사회는 기본적으로 다원화를 거부하면서 일원화를 지향합니다.
화교나 혼혈인 등을 "투명 인간" 취급하여 배제했던 "단일민족론" 전성기의 1970년대 한국을 상기해보시면 무슨 말인지 아실 것입니다. 국가가 경제를 국유화시키지 않아도 대개 보호주의와 관치 경제가 판칩니다. 박정희의 대구사점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그 교장 김용하의 아들 김우중이 바로 "재벌"이 될 수 있었던 박정희 시절 역시 생각해보시면 바로 이해 가실 것입니다.
즉, 쉽게 정리하자면 특정 극우 집단 (군부 등)의 "정치"가 의회, 사법, 관료제 등을 다스리고, 이 극우 정치 집단이 "강력한 리더"에 의해 통제되고, 이 집단과 리더가 각종 소수자들을 배제하면서 군사주의 등을 내세우고, 의회나 사법, 관료계처럼 경제도 "정치의 입김"에 왔다갔다해야 하는, 그런 정치적 운동이 만드는 상황을 "광의의 파시즘"이라 부르면 될 듯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광의의 파시즘으로 친다면 트럼프는 파시스트에 해당될까요? 네, 저는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트럼프주의는 트럼프라는 리더 없이는 상상이 불가능합니다. 즉, 카리스마적 리더가 그 정점에 있는 극우 운동인데, 이건 광의의 파시즘의 전형에 해당되죠. 트럼프는 공화당의 의회 장악 상황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시키고, 헌재 판사 임명권 등을 이용해 되도록이면 사법부까지 길들이려 합니다.
관료 기구 (검찰 등)로부터 자신을 수사했던 관료들을 추방시키는 등 "충성 분자" 위주로 재편을 시키고, 정적들의 입김이 강했던 일부 부처 (해외 개발처 등)를 아예 해체시킵니다. 한 줄로 묶여 군용기로 강제 퇴거를 당하는 "불법 체류자", 즉 소수자들에 대한 군사화된 국가 폭력의 장면들은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영감을 준다고 하는데, 이건 "소수자들에 대한 폭력적 배제",즉 역시 파시즘의 전형입니다.
트럼프의 강력한 동맹군인 머스크는 "정치적 자본가"의 전형입니다. 그의 우주 비행 사업이나 스타링크 등은 미 국방부와의 계약 등으로 거금을 벌고, 테슬라는 국가 (연방) 보조금 등의 힘으로 전국에서 팔리는 것입니다. 사실, 머스크와 미 국가의 관계는, 김우중이나 정주영, 이병철과 박정희 국가 사이의 관계와 질적으로 다르지 않죠. 그리고 국방비를 올리고 그린란드나 파나마 운하에 군침을 흘리고 캐나다 합방까지 거론하는 트럼프의 행위가 파시즘 특유의 "군사적 팽창주의"를 닮았다는 것은, 육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파시즘이란 꼭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전멸시키려 가스실을 만들고, 무솔리니가 "전체주의"를 설교하면서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려 하는,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꼭 특정 시기에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꼭 특정 소수자나 특정 국가 폭력의 형태 (예컨대 반유대주의, 식민지 획득 전쟁 등)만과 연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파시즘이란 자본주의 국가의 "원점", 일종의 "출발점"입니다.
위기에 빠지는 자본주의 국가는 그 위기 타개책으로 종종 각종 형태의 파시즘을 선택합니다. 중국에 추월을 당하고, 우크라이나에서의 러시아와의 대리전에서 이기지 못하고 있었던, 그 총국민생산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이 이제 아예 123%나 달하게 된 미국은 분명 2024년에 "위기 상황"에 몰려 있었습니다. 이제 트럼프는 보호주의부터 주적 중국과의 대립에 집중되는 전략까지 다 구사하여 이 위기에 "광의의 파시스트적" 방식으로 대처하려 합니다.
한데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공격적 정책의 남발은, 비록 파시스트적 색채는 분명해도 아마도 히틀러 시대 독일과 같은 "질서 정연한 나라"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지지도 못할 것입니다. 트럼프의 파시스트적 정책들이 궁극적으로 정책 난맥을 가중시켜 오히려 역으로 미국의 위기를 더 악화시키며 그 패권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제가 예상하고 있습니다.
(기사 등록 2024.2.20)
*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 http://www.anotherworld.kr/1300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 가입 신청 https://forms.gle/RJPxoUvQw4MQnkw57
- 문의: newactorg@gmail.com/ 010 - 8230 - 3097
' 세상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노자] 트럼프는 실패할 것이다 (2) | 2025.03.11 |
---|---|
세상읽기 – 트럼프와 푸틴/ 신극우 파시즘/ 김새론 추모 (0) | 2025.02.25 |
세상읽기 - 가자는 상품이 아니다/ 1.19 폭동/ 계엄 체포명단 (2) | 2025.02.10 |
[박노자] 글로벌 민족주의 시대의 개막 (1) | 2025.02.04 |
[박노자] "극우"의 시대 (0) | 2025.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