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제가 1991년에 고려대에서 잠시 공부하게 됐을 때에는 저로서 가장 놀라운 일은 바로 젊은 나이의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을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공산주의를 국가적 목표로 설정한 나라에서 나고 자랐지만, 1980년대에 성장하면서 제 동년배나 20대 등 젊은층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좌파적 개인들을 거의 본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입당을 지향하고, 입당하기 위해서는 입으로는 "레닌의 유훈을 실천하는 데에 인생을 바치겠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야 수두룩했습니다. 한데 그들은 좌파라기보다는 단순한 출세주의자들이었죠. 한국으로 치면 검사 되겠다고 사시를 준비하는 이들과 큰 차이 없었던 것이죠. 정말로 레닌에 대해 애정을 갖고, 레닌이나 마르크스의 노작을 읽는 1980년대의 소련인들은 대체로 60-70대 이상의 "베테랑"들이었습니다.
1970-80년대의 소련에서 보기 드문 다소 창조적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는 1983년에 작고한 미하일 리브시츠 (Mikhail Lifshitz)이라는 한 때의 게오르그 루카치의 동지이었는데, 그는 아예 1905년생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학생들은 있어도 제자는 없었습니다.
1980년대 중후반 소련의 지식 사회에서는 좌파는 대단히 미약했으며, 주류는 고전적 자유주의 (사회학자 유리 레바다, 철학자 메라브 마마르다슈빌리)나 근대화론 (역사 사회학자 이고르 클럄킨), 아니면 종교나 민족 문화로의 회귀 (문학 사학자 디므트리 리하쵸브) 정도이었습니다. 나라로서 소련은 아직 존재했지만, 지식 생산의 장에서는 소련을 뒷받침해온 좌파 사상은 이미 거의 밀려난 상태이었습니다.
학생 사회도 마찬가지로, 89학번으로 저와 함께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의 동양학부에 입학한 이들 중에서는 좌파 사상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저 말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려대에 가서 거기에서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으면서 노학 연대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공장 취업하여 평생 민주 노조 건설 등에 바칠 것이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한국 젊은이들을 보고 저는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련의 1920년대나 60년대를 다시 보는 것 같았습니다.
1960년대말까지만 해도 소련에서는 좌파는 사상이나 문예의 "핵심"이었습니다. 1960년대의 소련의 최고 인기의 문학인은 노래 시인 불라트 오쿠자와 (Bulat Okudzhava)이었는데, 그는 가는 데마다 1957년에 지은 그의 "센티멘탈한 행진곡"을 불렀습니다. 거기에서 가장 유명한 마지막 구절은:
나는 그래도 그 유일한 전쟁, 내전에서 꼭 전사했으면 싶다.
먼저 투성이 군모를 쓴 정치 위원들은
말없이 나의 시체를 굳어볼 것이다.
스탈린 대숙청에 유명한 공산주의자 아버지를 잃은 오쿠자와는, "그래도" 본인이 시간 여행할 수 있다면 적백 내전 시대에 돌아가서 전장에서 전사라도 하고 싶다고 못박곤 했습니다. 그게 소련 1960년대의 시대 정신이었습니다.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그랬듯이, 소련의 1960년대 세대에게도 체 케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최고의 영웅들이었습니다.
한데 1970년대에 접어들자 판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쿠자와는 노래보다 애수 넘치는 역사 소설 쓰기로 전환을 하고, 1970년대 소련의 최고 인기 소설가인 유리 트리포노프 (Yuri Trifonov)의 주요 주제는 바로 "출세주의"와 "혁명 사상의 배신"입니다. 1970-80년대의 필독서가 된 트리포노프의 <강변의 주택> (1976년)이라는 소설에서는 간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는 한 노동자층 출신은, 내전에서 볼셰비키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자신의 스승을 냉정하게 배신을 하고, 그 배신의 덕으로 "학계 귄위"가 되는 것입니다.
트리포노프의 소설 주인공 중에서는 내전에서 전사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출세 등을 통해 "잘 살아보세"를 실천하는, 추해도 너무나 추한 인물들은 다수의 주인공을 차지합니다. 이건 혁명 사상 등을 이미 내심 다 포기한 소련 사회의, 슬픔에 찬 자화상이었습니다. 소련의 외형은 1991년에 무너졌지만, 소련이라는 사회의 핵심을 이룬 좌파적 이념이란 이미 1970년대에 거의 빈사 상태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련만 과연 그랬을까요? 1970년대에 이미 산업화를 이룬, 비교적 안정된 제1,2세계 사회들을 보면 사실 "우경화"를 겪지 않은 사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1970년대에 한 때에 1968년의 혁명 열정에 극좌파적 입장을 취한 일각의 신진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 등이 보수화되어 "신흥 철학자"의 이름으로 신보수주의적 철학을 이끌게 됐습니다.
1980년대 이후 서구 학계를 석권하게 된 미셀 푸코 철학의 정치적 근저 중의 하나는 바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한 반감과 반발이었습니다. 영미권이나 독일 등에서는 1970년대는 사회적 변혁에서 개개인의 인권에 초점이 옮겨지는 시대이었습니다. 인권 담론은 당연히 필요했으나, 보수적 시각에서 전개된 1970년대의 인권 담론에서는 사회적 변화에 대한 관심은 대단히 저조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1979년에 영국에서, 1980년에 미국에서, 그리고 1982년에 서독에서 각각 신보수 정치인들이 집권하게 됩니다. 그 집권과 그 뒤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는 1970년대에 시작된 보수화는 한층 더 공고화된 것이었습니다. 보수화를 거부한 사회들은 대개 제3세계, 특히는 신흥 공업 국가나 주변부 산업 사회들이었습니다.
한국, 아르헨티나, 브라질, 남아공 등에서 민주화 투쟁의 화염 속에서는 오히려 보수화가 아닌 사회의 상당한 급진화가 이루어졌던 시기는 1980년대이었습니다. 산업화도 해내지 못한 극빈국 (에티오피아, 니카라과 등)의 경우 1970-80년대는 혁명의 시대이었습니다. 한데 미국이나 유럽, 소련에서는 1970년대에 대중의 욕망이나 일상적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 (1968년 혁명의 "대항문화") 등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는, 다수가 비교적 편하게 살 수 있는 "대중 복지/소비 사회"의 건설을 거의 완성했습니다.
그 분위기에서는 더이상 대중적인 저항은 어려워졌고,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급진파들은, "무장 투쟁"을 선언한 일본의 일부 신좌파처럼 그저 대중으로부터 고립만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중적인 복지, 소비 사회의 경제적 기반이 전후 황금기의 종식으로 그 유지가 어려워지자 미국과 영국부터 시작해서 1980년대 선진권은 극단적 개인화를 그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로 선회했습니다. 그런 극단적 개인화는, 더더욱더 그 어떤 대중적인 집단적 저항을 더 어렵게 만든 것입니다.
이제는 선진권에서 신자유주의마저도 파산했습니다. 장기 침체에 빠진 경제는, 이제 전쟁과 군비 증강 등으로 인위적으로 "부양"돼야 하는 거고, 그래도 성장 둔화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인플레이 등으로 실질 소비량은 줄고, 설상가상으로 이제 기후 참사 등으로 인류 전체가 위기에 빠진 느낌이 전반적으로 확산합니다.
신자유주의 파산, 기후 참극의 도래, 그리고 오늘날 가자 학살과 같은 미국의 지역적 하위 파트너들의 노골적인 전쟁 범죄 등이 과연 다시 한 번 선진권에서 대중적인 급진성의 회복을 가져다줄까요? 그 정도를 미리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젊은층의 급진화는 일부 구미권 사회에서는 보입니다. 위기 심화에 따라 그 정도가 더 커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 적어도 일부의 사회에서는 - 새로운 좌경화의 시대를 머지 않아 볼 것 같습니다.
(기사 등록 202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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