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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2023년: 위기의 지속, 희망의 근거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3. 12. 26.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다사다난했던 2023년은 이제 저물어갑니다. 지나간 한 해를 평하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뭐니뭐니해도 "위기"일 것입니다. 2000년대말부터 시작된 중첩적 위기는 2020-21년 코로나 국면 등에 의해서 더 격화돼 계속 지구인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2023년에는 과거에 비해 그 괴로움은 더 한것이죠.

일단 기후 위기는 가면 갈수록 심화 일로로 이어져 왔습니다. 2023년은 기록된 역사상 가장 더운 해이었습니다. 저도 7월의 서울을 경험해 직접 겪었지만, 서울의 한여름 폭염은 35도 이상이었습니다. 한국에서만 해도 폭염 관련 온열질환 피해자는 2818, 폭염 사망자는 32명으로 각각 집계돼 여태까지 최악의 수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도 대체로 같은 경향이었습니다. 기후 위기 대책은 여태까지 거의 실효를 거두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실패"의 가장 핵심적 포인트 중의 하나죠.

신자유주의의 말기적 위기도 지속, 심화되었습니다. 코로나 이후의 잠시의 회복세는 2022년부터 지속적으로 약화돼 왔는데, 그 약화는 2023년에 가속화되었습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잘 나가는 것은 국가가 반도체 기술 개발 등에 천문학적인 지원을 퍼붓는 국가 관료 자본주의 체제의 중국이나 군사 케인스주의로 금년 성장률 3% 안팎을 기록할 러시아, 그리고 역시 연료와 무기 수출 등으로 비교적 괜찮은 성장률 (2,3% 정도)을 보일 미국 정도입니다.

2022년 이후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중국 (값싼 러시아산 연료료의 대량 수입), 러시아 (군사 케인스주의, 무기 생산 등에 의한 성장 효과), 미국 (러시아산 가스를 더이상 수입하지 못하는 유럽에의 LNG 수출량 증가, 무기 수출 등) 등 세계의 주요 포식자들은 골고루 이득을 봤지만 유럽 경제는 침체 내지 마이너스 성장 국면을 맞게 됐습니다. 한국 (성장률 1,5% 전망)은 승자 (미국)와 피해자 (유럽) 사이의 "중간 지대", 무기 수출을 통해 미국과 같은 방식의 전시 폭리 취득을 시도해 왔지만, 그 성과는 한국 언론의 뻥튀기와 달리 그리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경제 성장도 "열강"이냐 아니냐에 따라 큰 폭의 차이를 보였지만, 그 열매도 가면 갈수록 중상층 이하의 계층들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무기와 연료 수출로 상대적 호황을 기록한 미국이나 전시 특수로 노동력 부족 현상이 일어나 시장 노임이 올라간 러시아에서는 인플레이를 감안한 실질 제조업 임금은 올랐지만, 대부분의 경제에서는 코로나 국면 이후의 고인플레이로 하층과 중산층의 상대적 빈곤화는 지속됐습니다.

한국은 역시 일종의 "중간지대"로는, 실질임금은 그냥 제자리일 뿐입니다. , 예컨대 독일 등 유럽 경제들에 비해서 전쟁의 피해를 훨씬 덜 받은 셈이죠. 상대적 빈곤화의 확대는 정치적으로 중도, 온건 정파들을 약화시키고 "극단"을 몰고 오게 돼 있는데, 선진권의 제도내/주류적 좌파가 신자유주의적 경향에 동화된 이상 이 새로운 "극단의 시대"는 대체로 좌파가 아닌 우파에 유리합니다.

비교적 잘 살고 온화한 스칸디나비아에서마저도 금년 핀란드 총선에서는 극우 핀인당은 20%, 작년 스웨덴 총선에서는 극우 스웨덴민주주의자당은 20,5%를 각각 득표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역시 경제가 그나마 괜찮은 편인 네덜란드에서는 두 개의 극우 정당은 도합 26%를 얻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가면 갈수록 유럽의 우파 정치를 중도 우파 (각종의 기민당 등)가 아닌 극우파가 주도하게 됩니다. 트럼프 계열이 공화당을 장악한 미국도 마찬가지인데, 그만큼 신자유주의 위기 시기의 자본주의는 "중도" 본위의 기존의 의회주의 제도와 잘 맞지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말기적 위기와 팍스 아메리카나, 즉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는 복합적으로 중첩돼 있습니다. 미 경제는 국채 발행 등을 통한 예산 조달 능력, 무기와 연료, 하이테크 수출 등으로 저성장이긴 하지만 어쨌든 "성장"을 하고 있는데, 지정학적으로는 미국의 패권적 지위에 대한 도전들은 계속 강해져가고 있습니다.

지난 2023년 동안 미국의 두 군데의 피보호국, 즉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은 외부 침공 내지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그 둘 중의 어느 쪽도 잘 응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계획, 주도한 우크라이나의 대반격이 완전하게 실패했는가 하면, 이스라엘은 가자를 초토화하고 현재까지 2만 명 정도의 민간인을 살해했지만 하마스의 고위 간부들을 제거하는 일과 하마스 군사 조직의 파괴에 지금까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피보호국들이 군사적으로 고전을 거듭했지만, 미국은 산업전에서 고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4년 전부터 미국이 경쟁 국가 중국의 주요 기업인 화웨이를 시범케이스 삼아 제재했지만, 화웨이는 그 제재를 뚫어 금년에 7나노 칩을 탑재한 최신 "메이트 60프로" 휴대폰을 발표했습니다. 미국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천문학적 국가 보조금을 지불해 가면서 반도체 개발에 있어서의 네덜란드와 한국 등과의 갭을 줄여 왔습니다.

니제르에서의 친러 성향의 쿠데타 세력에 속수무책이었던 미국은, 베네수엘라에서 본래 제거 작전의 대상이었던 마두로를 지금 불가불 조건부 포용해 유가 관리, 조절을 헤야 하는 등 그 지정학적 목표치들을 낮추고 있습니다. 금년 미국 외교의 주요 목표 중의 하나는 사우디와 이스라엘 수교의 막후 알선이었는데, 하마스의 공격으로 불발에 그치고 말았고 사우디는 갈수록 중-러 쪽으로 표류하고 있습니다.

즉 미국은 여전히 패권 국가의 위치를 지키고 있지만, 커져가는 도전에 과거만큼 잘 응전하지 못하고 있어 힘이 빠지는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세계는 1990년대 이후의 단극 질서에서 벗어나 가면 갈수록 미 패권에 도전하는 주요 경쟁자 중국, 그리고 각자 그 실리를 추구해 그 주위의 영향권을 구축하는 군소 열강인 러시아, 인도, 터키, 이란 등의 합종연횡, 이전투구의 장이 되어 갑니다.

끝으로 대한민국에 대해 몇 마디를 덧붙이자면 정치 검사 집단의 그 지배 구조 장기화 시도는 지금 대체로 실패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지금 정치 검사들이 주도하는 극우 블럭은, 전체 유권자들의 3분의 1 이상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고 경쟁 세력 (자유주의 보수 등)의 지지기반을 공략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권의 간판 정책인 대일 편향 (친일) 외교 등은, 오히려 그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를 20%대로 종종 낮추게 하는 등 그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됩니다.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 때에도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윤 정권의 행각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윤이 내세우는 뉴라이트적 역사관/세계관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여전히 공유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고 세계의 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한국에서는 윤 정권 "다음"에 차라리 중도 우파 (민주당 계열)의 재집권이 더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중도 우파는 신자유주의의 큰 틀을 수정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전쟁에 연루될 위험성을 약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것도 하나의 기대지만, 그것보다 제게 개인적으로 더 많은 희망을 준 것은 지속적인 노조 조직률 증가 (몇년 전의 9%부터 지금의 14%까지)와 최근의 가자 학살 반대의 연대적 시위들의 고조입니다. 그래도 보수의 헤게모니 속에서도 노동과 국제 연대 중심의 진보 세력은 그 위치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조금씩 세를 확장하기도 합니다. 매우 더딘 과정이지만, 그래도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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