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페북에서 유대인 역사나 문화, 그리고 저희 가족 (대가족인 만큼 아마도 한국식 표현하자면 "문중" 같은 표현은 더 맞겠죠?)의 가족사 등 여러 그룹에 소속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 타임라인을 보면 유달리 이스라엘의 국가적 프로파간다나 각종의 친이스라엘 단체들의 광고 같은 게 많이 들어옵니다.
차단하려 해도 차단할 수 있는 길이 없어서 일단 "연구" 삼아 열심히 지켜보고 있는데, 한 가지 괄목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이 광고들의 대부분은, 그 잠재적 독자를 "혈통적 유대인"으로만 상정하는 것처럼 그 워딩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민족끼리" (?) 이스라엘의 "위대함"이나 "민족사에 있어서의 중심성" 등을 부각시키려 하는 것이죠.
아무래도 특히 유럽에서는 이스라엘은 사실 "괜찮은" 지지 세력이라고는 거의 없습니다. 노르웨이만 해도 이스라엘을 상습적으로 편 들어주는 사람들은 대개 극우파들이고, 그들 중의 상당수는 "반유대주의" 혐의마저 있는 문제 인물들입니다.
단, 그들은 - 그나마 "서구화됐다" 싶은 유대인 이상으로 - 회회교 신도 내지 아랍인들을 더 증오하는 관계로 팔레스타인과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곤 합니다. 정부들이야 미국의 눈치를 보고 조심조심하고 그렇지만, 유럽의 시민 사회 안에서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는 지배적입니다.
아마도 이건 이스라엘이 소셜 미디어에서 벌이는 "사이버 전쟁"의 방향을 이렇게 "민족 내부"로 돌리게끔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이와 동시에, 현재 이스라엘 집권 세력들의 극단적인 혈통적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집착도 아마도 한 몫을 했을 겁니다.
이스라엘은 상당히 극단적인 사례긴 하지만, 유일한 사례가 아니다는 점은 더 걱정스럽습니다. 사실, 세계화의 노도 속에서 한 때에 거의 사라졌다 싶었던 "핏줄"의 담론과 "핏줄"의 정치는, 세계화가 위기를 맞아 이제 그 종언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거의 일종의 "레네상스"를 구가하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의 장기 집권은, 슬로바키아나 루마니아, 우크라이나에서 거주하는 "헝가리 혈통"의 "우리 민족 동포"에 대한 그 정권의 보라는 듯한 지원의 과시와 직결돼 있습니다. 즉, "헝가리 핏줄 위주의 외교"는 국민 집단 내부 결속에 큰 도움이 되는 모양입니다.
참, 헝가리는 이스라엘의 편에 서서 유엔 총회에서 투포를 지속적으로 하는 몇 안되는 유럽 국가 중의 하나죠. 두 혈통주의 사이의 모종의 "교감"이 가능한 모양입니다. 이스라엘과 최근에 각을 세우는 또 하나의 장기 집권 중의 정권은 바로 터키의 에르도완 정권인데, 그 정권 역시 "만국의 혈통적 튜르크인 총화단결"을 부르짖는 겁니다.
오스만 제국 시절의 "영화"를 되찾는 것과 혈통적 민족주의는 그 정권 이데올로기의 두 개의 골자죠. 유럽 중심권이나 미국으로 가면 "핏줄 이데올로기"는 대개 그냥 서구인들의 인종주의를 의미합니다.
이탈리아의 현재 멜로니 정권의 반이슬람적 정책이나 최근의 네덜란드 총선에서 최대의 득표율을 보인 극우 정당 PVV의 당수 게에르트 윌데르스의 "이슬람 금지" 제안, 그리고 또 다시 미국 대통령이 될지도 모를 트럼프의 "이슬람 국가로부터의 이민 금지" 등은, 이 인종주의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죠.
대개 구미권의 인종주의자들은 "모든 백인들의 핏줄"을 긍정하는 한편 중동인이나 북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적 배척을 이슬라모포비아적 수사로 포장합니다. "핏줄"을 대놓고 내세울 수 없는 다민족 국가의 경우, 최근에는 "핏줄"을 대체해서 "우리 민족/국민"을 결속시켜주는 기제로 "정신적인 핏줄"이라고 할 "국어"를 자주 이용합니다.
중국에서는 소수자들에게는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표준어" (한어의 보통화)의 상용을 요구하면서, 소수자 언어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민족 학교들을 주변화시키거나 아예 문닫게 만듭니다. 옛날에는 중국의 수능 격인 "고과" (高考)를 조선어로도 칠 수 있었지만, 요즘 조선인들도 다 "오로지 보통화"로 대입 시험을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대간의 조선어 능력의 전수가 엄청나게 방해 받죠. 러시아에서는 요즘 푸틴 독재의 공식 이념은 "러시아적 세계" (루스키 미르)라는 이념인데, 그 "러시아적 세계"의 중심에는 바로 "러어 구사"가 놓여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러군에 포로로 잡힌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만약 심문 시에 러어를 쓰지 않고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고집하면 엄청난 잔혹 행위를 당한다는 이야기를, 귀환한 포로로부터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 크렘린의 목표는 적어도 러시아 영토 안에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 특수성 등을 최소화시키거나 아예 말살시키는 것인데, "완벽한 러어 사용"은 정치적 "충성"과 등치되는 것입니다. "핏줄"에 대한 호소가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우면 새로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그 대신에 "언어"가 놓이게 되는 거죠.
세계화 시대의 종언을 전후한 이 전세계적인 민족주의적 퇴행 속에서는, 대한민국의 이념적 지형과 정책은 약간 특수합니다. 한국에서는 "민족"과 "국민"은 엄연히 완전하게 중첩되지 않고 중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민족"/"민족어"라면 극우들의 혐오 대상인 북한이나 중국 동포 (조선족)도 부득불 포함돼야 하는데, 한국 극우 정권의 이념적 행동방식은 바로 반북 콤플렉스의 노골적 이용과 혐중 정서의 은근한 부채질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의 경우에는 혈통주의를 대개 저임금 노동력 확보 정책 차원의 부차적인 수단으로만 이용합니다. 즉, "해외 동포"라고 하여 중-러 동포에게 입국과 거주의 기회를 주고, 그들에 대한 저임금 착취를 가능케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아무리 "혈통주의"를 표면적으로 내세워도 대한민국은 중-러에서 온 동표들에게는 국적을 부여하는 데에 굉장히 옹색합니다.
그들이 법적인 "한국인"이 되어 신분 불안이 완전하게 해소되면 그들에 대한 착취가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죠. 한데 그렇다고 해서 한국형 혈통주의는 그 독소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예컨대 만약 해외 동포 (F4)나 방문 취업 (H2) 비자의 소유자인 "혈통적 동포"의 "비동포 가족"이 함께 한국에서 살자면 그 가족이 받아야 할 비자는 바로 F1, 즉 방문동거 비자입니다.
그 비자를 받으면 계절근로 이외의 취업 활동은 원칙상 금지돼 있습니다. 즉, 예컨대 4명의 조부, 조모 중에서난 한 명이 고려인이었던 우즈베키스탄의 공민이 한국에 오면 그 공민은 "동포 비자"를 받아 정상적으로 경제 생활할 수 있게 되지만, "고려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는" 그 우즈베크인 배우자는 F1 비자밖에 못받아 정상적인 경제적 삶을 영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정상"으로 보이는 만큼 혈통주의가 한국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은 상당히 크다고 봅니다. 그래도 윤 정권의 경우 그 "메인" 이데올로기는 "핏줄"이 아니라 "자본" 중심입니다.
친일파든 친미파든 "자본주의 문명"을 "후진 조선"에 심어주었다 싶은 모든 과거의 지배자들을 기리고, 대미/대일 "협력", 즉 사실상의 종미/친일을 합리화는 거야말로 윤 정권 이념의 중심이죠. 한데 국가 주권이 상당히 제한돼 있는 한국은 세계적으로 치면 그렇게 대표적인 사례는 아닐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은 "피"와 "말"의 공통성으로 퇴행하고, "피"와 "말", 아니면 "피부색" 중심의 폐쇄적 커뮤니티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참, 내년인 2024년은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선거들의 해"일 겁니다.
40여개국에서 대선이나 총선이 진행될 걱인데, 그들 중에서는 한국의 "천조국" 격인 미국부터 시작해서 상당수에서는 극우들이 승리를 거둘 가능성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핏줄"이나 "피부색", 아니면 "말"을 본질화시키고 중심에 놓는 퇴행적 이데올로기들의 폭발적인 확산에 우리는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을 퇴치시키는 최적의 방법은 바로 저항의 지구화죠.
(기사 등록 202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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