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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마르크스 프로젝트의 완료: 마이클 레보위츠 인터뷰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3. 8. 29.

마이클 A. 레보위츠(Michael A. Lebowitz)가 2006년에 했던 인터뷰이다. 레보위츠는 1965년부터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교(Simon Fraser University)에서 마르크스 경제학과 비교 경제 체제를 가르쳤고 그의 대표 저서인 <자본을 넘어서>(백의)는 한국에서도 출판된 바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혁신 시도로 주목받아 온 그는 최근에 사망했는데, 우리는 그의 주장을 소개하는 관련 글들을 몇가지 번역소개해 왔다. 이 인터뷰는 당시에 베네수엘라의 가능성에 대한 과도한 낙관과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집착 등이 보이지만, 레보위츠의 삶과 사상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번역: 두견)

출처: https://links.org.au/completing-marxs-project-interview-michael-lebowitz

* <자본을 넘어서: 마르크스의 노동계급 정치경제학>의 저자 마이클 레보위츠(Michael A. Lebowitz)는 마르크스가 임금 노동에 관한 책도 쓰려고 했던 의도를 고려할 때 <자본>만으로는 일면적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 저작의 불완전성은 이론이 뒤틀리고 경제주의와 강령적 편협성을 특징으로하는 좌파를 양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가 살고 있는 베네수엘라에서 이야기를 나눴고, 그는 공산주의자로서 개인적 성장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는 기계공이셨고 어머니는 회계 담당자였던 노동 계급 출신이다. 많은 노동자 계급이 그렇듯 나도 어렸을 때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돈이 없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녀야 했지만 나는 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 나는 마케팅 리서치에 중점을 두고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기 제조 회사에서 풀타임으로 시장 조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일을 하면서 이 사회의 많은 모순들을 발견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회사(반노조 회사였음)가 무노조 경영이 가능한 미국 남부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사실상 평생 실업자가 되어 단기 일자리를 전전해야 했다.

동시에 나는 밤에 경제학 수업을 들으며 완전 경쟁을 통해 가격이 결정되는 방식에 대한 신고전주의적 정설을 배웠다. 하지만 낮에는 가격 담합에 연루된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 회사의 통계와 예측 등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그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경험을 통해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나는 뉴욕에 살면서 저녁에는 뉴욕대학교 경영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모든 좌파 단체를 돌아다녔다. 그들 중 누구와도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좌파와 일반적으로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를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운동가는 아니었고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거짓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순전히 지적인 거부감이었다.

1960년에 나는 위스콘신 대학원에 진학했다. 나는 이론의 문제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순수 이론보다는 경제 제도와 역사 분야에서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나는 위스콘신 대학에 비종파적 사회주의 동아리가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정치 활동가가 되었다. 또한 '쿠바를 위한 공정' 캠페인에서 쿠바 혁명을 지지하는 활동을 했다. 나는 <뉴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를 모델로 한 저널인 '좌파적 탐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들'SDS의 포트 휴런 창립 대회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최종 성명서의 경제 부문 초안을 작성하는 데 참여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의 오만함을 가지고 그곳에 있었다. 나는 이 불쌍하고 혼란스러운 자유주의자들에게 진리의 빛을 전하고있었다!

하지만 60년대 초에 나는 시민권 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운동은 모두 독특했다. 이 운동들을 통해 우리는 좌파의 외연이 넓어지고 사회 자체에서 좌파적 사고를 가진 새로운 계층이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965년 캐나다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러 떠났을 때 나는 스스로를 SDS 활동가로 규정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냉담한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이 아니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학생운동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전통적인 좌파 그룹이나 흐름에 동조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 중 상당수가 꽤 어리석고 종파적이라고 느꼈다.

공산당의 궤도에 어느 정도 끌려 들어간 시기도 있었지만, 나와 함께 좌파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탈퇴한 젊은이들이었다. 그것이 나의 주요 정치적 기준점이었던 것 같다. 캐나다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신민주당에서 수년 동안 좌파적 분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주정부에 있던 시절에는 정책위원장을 맡아 사람들이 투쟁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그래서 나는 단순히 "산림산업을 국유화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산림산업의 장부를 정부가 공개하게 만들고 노동자 계급이 감독하면서 산업 내에서 노동자 통제를 추구할 수 있는 형태를 위해 싸웠다. , 내가 본 투쟁 방식은 단순히 "노동자 통제 속에 모든 것을 국유화하자"라는 구호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 잘 이해하고 더 많은 요구를 할 수 있게 해줄 것이었다. 처음에 신민주당에서 일하는 것은 노동 계급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것은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 수단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선거 기계에 불과했다.

*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좌파의 많은 실천이 '어리석었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대한 이해도 일방적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떻게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나?

나는 오랫동안 뭔가 빠진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를 살펴보니 그의 이론은 자본주의 분석과 자본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관한 것이었다. 좋은 이야기였다. 반면에 정치 활동은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 운동과 다른 캠페인에 참여한 경험을 통해 나는 사람들이 투쟁을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킨다는 기본적 진리를 깨달았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할 수 있을까, 이 생각이 내 정치 세계관의 핵심 관심사가 되었다.

밴쿠버에서 나는 지역 커뮤니티 조직에 많이 참여했다. 사람들을 한데 모아 정치적으로 연결되도록 격려하고 피켓을 들고 다른 형태의 투쟁을 시작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치에 대해 완전히 구분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경제학, 과학, 자본에 대한 분석이 있고, 반면에 저기에는 정치가 있다. 내가 끌리는 정치학 문헌이 있다면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과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그람시였다.

* EP 톰슨은 1780년에서 1832년 사이에 우리 계급이 스스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투쟁을 벌이는 과정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영국 노동자들이 자신들 스스로와 통치자 및 고용주들에 맞서는 점에서 이해관계의 동일시를 느끼게 되었다"고 썼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유일하게 우려하는 것은 그 자체를 계급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다. 계급 자체가 계급적일 때, 의식적으로 투쟁할 때만 계급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그 자체가 계급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내 머릿속에서 과학과 정치가 연결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70년대에 나는 <요강>과 헤겔을 읽으면서 <자본>에 빠진 부분이 있고 임금 노동에 관한 책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점점 더 끌렸다. 하지만 그 간극의 중요성을 완전히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몇 년 동안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림의 작은 부분들이 계속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이것이 마르크스의 절대적으로 중요한 측면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이야기한 것은 자본주의의 전부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 작동하는 자본의 성격, 즉 자본의 단면을 연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의 한 측면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내가 가장 큰 문제를 느끼는 사람들은 학술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단순히 "<자본>은 진리"이며, 자본이 처음이자 마지막 단어이며, <자본>에 없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 것 같다. 그들은 개방적이고 비판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책의 수호자'로 여긴다.

내가 놓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투쟁을 통해 환경과 자신을 모두 변화시킨다는 혁명적 실천의 개념을 인정하는 마르크스의 전체적 측면이다. 수년 동안 읽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이 개념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그 구분법을 끝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경제, 여기까지는 정치라는 범주적 구분은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다.

* 엘렌 메익신스 우드Ellen Meiskins Wood<자본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에서 자본주의의 본질 자체가 이러한 현상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는 경제와 정치를 명백하게 분리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 전투성과 정치적 의식을 분리한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계급 갈등은 생산 현장, 일터, 고용주와 피고용인 간의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다. 어떤 면에서 좌파는 정치적 실천에서 이 이분법을 자발적으로 복제한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매우 강조점을 두게 되는데...

당신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본을 바라본 다음에 자본의 반대편, 즉 노동계급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계급을 자본과의 관계에서 '타자'로서만, 그 반대편으로서만 이해한다. 그들은 노동계급이 자본과 구체적으로 관련되어 있을 때, 즉 자본에 고용되고 자본에 의해 노동에 투입되며 자본이 판매하는 상품 시장을 구성할 때만 노동계급을 고려한다.

이것이 바로 1844년 마르크스가 거부한 것이다! 그는 경제학자들이 노동자를 노동자로서만 바라볼 뿐, 역사적 주체인 인간으로서 바라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노동계급의 다면성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핵심 문제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하에서 모든 측면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단순히 노동조합 투쟁에만 초점을 맞출 수는 없다. 노동자들의 모든 욕구와 투쟁, 이 비인간적인 사회에서 인간으로서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모든 방법을 살펴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좌파 활동의 대부분을 특징짓는 것이 경제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레닌의 비판은 계급투쟁을 경제투쟁의 관점에서만 보는 경향을 물리치기 위한 그의 투쟁과 관련이 있다. 좌파의 소규모 그룹이 민주주의적 투쟁에 참여하는 경우에, 그것은 종종 새로운 회원과 새로운 간부를 모집하기 위한 순전히 도구적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투쟁에 대해 진정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인 접근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당신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인간 발전 개념과 건설해야 할 대안 사회의 중심으로 인간의 역량을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또한 마르크스는 실천의 과정을 통해, 혁명적 투쟁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활동을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을 통해 그러한 사회로 나아가는 단 하나의 방법을 보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 점을 기본 통찰력으로 삼고 시작한다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는 형식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실천이다. 민주주의는 의사 결정의 방식이 아니라 사람들이 투쟁을 통해 발전하고 자기 변화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 대자적 계급으로 부상하는 방식이다. 민주주의를 실천으로 이해하면 사람들이 활동을 통해 자신감, 자존심, 존엄성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많은 모순과 문제가 있지만, 흥미로운 점은 인민들이 아래로부터 스스로를 주장하고, 스스로의 독립적인 요구를 표현하기 시작하고, 자신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잠재력 개발을 강조하고 참여와 주도적 활동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헌법의 맥락에서 그렇게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목표로 내세운 헌법은 자신의 투쟁 논리를 따르려는 대중과 변증법적으로 기능한다. 차베스는 이러한 움직임을 장려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발전함에 따라 차베스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압력도 커지고 있다. 나는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흥미진진하다고 보는데, 이는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한 인간 역량 개발에 대한 강조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모순이 있지만 이것이 핵심이다.

* 하지만 조직에 대한 문제는 어떠한가? 대중의 자기 변혁의 중요성, 역사에서 주체의 역할에 대해 당신이 말한 것은 우리가 만드는 정치 조직의 유형과 그 강령에 영향을 미칠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투쟁을 쿠바인들이 항상 사용하는 용어 인 아이디어의 싸움으로 본다면 그것은 한 영역, 한 수준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모든 영역에서 지배적인 사상과 문화에 도전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상호 보완적인 과정이 있다. 한 영역에서 성과를 거두면 그 프로젝트의 핵심 주체인 사람들이 그곳에서 배운 교훈을 삶의 다른 측면에 적용할 것이다.

따라서 임금 투쟁, 노동시간에 대한 투쟁 등 어느 한 가지 투쟁 영역만 중요하다고 단편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옛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정치 조직, 또는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캐나다 서부 해안의 옛 사회주의자들이 나에게 설명한 조직을 예로 들어 보겠다. 이들은 오늘날 많은 종파에는 볼 수 없는 폭 넓은 활동을 했다. 그들은 문화 클럽과 스포츠 협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실 그들도 오래된 워블리[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전통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것이 필요한 조직 형태에 대한 특별한 개념으로 이어졌을까? 잘 모르겠다.

나는 활동가들을 한데 모으고 투쟁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조직의 기초를 형성하는 이론이다. 쿠바에 있는 좋은 친구와 내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내가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의 자기 계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마이클, 당신이 하는 말 대부분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전위 조직의 위치는 어디일까?"라고 물었다.

나는 전위 조직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다시 말해, 투사들의 발전, 현대 사회에서 자신과 자신의 역할에 대해 매우 다른 개념을 가진 사람들의 자기 계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 이론이 조직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따라서 당신이 내부 투쟁에 참여하는 방법, 내부 조직 형태는 당신의 활동이 사람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보다 나에게는 덜 관심을 가지게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항상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 즉 진정한 노동계급 운동이 저지른 실수가 무오류한 중앙위원회가 내린 모든 결정보다 훨씬 더 많은 결실을 맺는다는 말을 떠올린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계급은 투쟁에 참여하고 종종 패배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다음 번을 위한 교훈을 얻는다.

* 진정한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국제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고 보는가? 당신 책의 초판 서평자는 이 책이 최악의 시기인 1992년에 나왔다고 썼다. 당신은 <자본을 넘어서>가 좌파에서 입증된 마르크스에서의 후퇴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지금은 더 낙관적인가?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의 부활은 일률적인 현상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투쟁의 부활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에서도 투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살아나고 있는 상황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물론 북아메리카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고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투쟁이 그 지역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자본을 넘어서>가 기여하기를 바라는 것은 마르크스로 돌아가 사상가로서의 마르크스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의 저술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작업을 완성해야 하며, 그 과정은 그가 쓴 것뿐만 아니라 그가 쓰지 못하고 남긴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나의 희망 중 하나는 사람들이 나처럼 <요강>이나 헤겔을 통해 고군분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또는 더 진지하게는 새롭게 투쟁에 뛰어든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이 투쟁을 시작하고 자본의 문제적 논리를 더 잘 인식하고 진정한 대안을 찾기 시작할 때, 낡은 버전의 "마르크스주의"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진정한 비전, 즉 해방에 대한 그의 진정한 개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건조하고 학문적인 훈련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마르크스 작업의 궁극적인 완성은 공산주의적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내 책이 그 과정에서 가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사 등록 2023.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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