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노동의 추출, 가치, 임금을 넘어선 투쟁
알레산드라 메사드리Alessandra Mezzadri
번역: 두견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 착취와 계급의 경계를 확장하면서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의미를 더욱 깊이 고찰하는 이 글의 필자인 알레산드라 메사드리는 페미니스트 정치경제학자로 런던 SOAS(동양과 아프리카 연구 대학)에서 개발학 선임 강사로 재직 중이다. 연구 및 강의 관심 분야는 글로벌 상품 사슬, 비공식 노동, 국제 노동 기준 및 현대판 노예제, 개발과 사회적 재생산 접근법의 페미니즘, 인도의 정치경제이다. 이것은 2022년 연말에 <역사적 유물론>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출처: https://www.historicalmaterialism.org/articles/unbounding-exploitation
먼저,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역사적 유물론> 토론회 주최측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 플랫폼을 함께 공유해준 동료 패널들에게도 감사드리며, 그들의 작업은 나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나는 여기서 세 가지 쟁점에 따라 내 의견을 정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이에 성실히 답변했다.
* 쟁점 1: 마르크스주의 전통, 마르크스주의와 교류하는 전통, 그리고 실제 사회적 투쟁에서 얻은 철학적, 정치적 개념 중 당신 자신의 이론적/경험적 연구 프로젝트에 영감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세계 경제 전반의 노동 관계를 연구하는 페미니스트 정치경제학자로서, 마르크스주의자라기보다는 모든 마르크스주의적인 개념을 연구하는 페미니스트 정치경제학자로서, 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항상 '착취'라는 개념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받았다. 특히 <자본> 제1권에서 펼쳐지는 모든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핵심을 고려할 때, 나는 여기서 내 운명을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르크스에게 착취는 가치 창출 과정의 핵심이었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다이앤 엘슨Diane Elson(1979)이 강조한 것처럼, 이는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 이론의 기초이자 자연 가격 형성에 관한 이론을 도출하는 것이 목표였던 고전 정치경제학의 다른 가치 이론과 차별화되는 요소였다. 마르크스의 메시지는 자본주의 하에서 모든 사물의 가치는 인간의 노동력을 통해 창출되고, 그 노동력이 창출한 가치에 비해 낮은 비율로 지불된다는 다소 단순한 것이었다. 엘슨의 말을 빌리자면, 마르크스는 사실상 '노동의 가치 이론'을 발전시킨 셈이다.
특히 착취는 철학적, 작동적, 정치적 개념이다. 착취의 철학적 본질은 말 그대로 정치경제학을 거꾸로 뒤집는 혁명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며, 최근 코로나19에 대한 키앙가 야마타 테일러Keeanga Yamahtta Taylor의 말을 빌리자면 '바닥이 수면 위로 올라와 빛에 노출되는' 것이다.
모든 가치는 노동과 착취로 이루어진다는 혁명적인 발견은 팬데믹을 통해서도 의심할 여지없이 드러났다. 나에게 이 사실을 무엇보다도 가장 잘 보여주는 이미지가 바로 인도의 화가 하시프 칸Hasif Khan이 2020년에 그린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전 세계가 멈추면서 모든 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즉 시스템의 톱니바퀴를 떠난 노동의 강을 보여준다.
착취의 작동적인 성격은 '생산의 숨겨진 거처'의 신비를 푸는 데 초점을 맞춰 상품의 세계와 상품을 만드는 요소를 연구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데 있다. 이는 노동과정 이론과 노동체제 분석에서 구체적인 의제로 자리 잡았으며, 해리 브레이버만Harry Braverman과 마이클 뷰라보이Michael Burawoy같은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이 개척한 이 분야는 다양한 환경에서 숨겨진 거처 또는 생산의 작동을 밝히는 데 기여해 왔다.
착취를 자본주의 역사의 핵심 동력 중 하나로 설정하는 것은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혁명적 정치와 재분배 정치, 그리고 그들이 세상을 만드는 데 핵심적으로 기여한 정치의 토대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큰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의 땀을 말하는 것이며, 이 땀은 어떻게 추출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철학적, 작업적, 정치적 파급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쟁점이다. 오랫동안 많은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서는 착취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핵심적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협소했다.
이것은 상품 생산의 영역과 자본주의적 노동 공간으로 이해되어 온 것의 경계에 크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자본주의 상품 생산(과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의 분석에서 중심이었던 시장거래)의 세계에 편향된 틀을 제안하고 있던 고전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르크스 자신이 <자본> 제 1권에서 연구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적으로 우발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했는데, 이 생산양식은 비록 유일하지는 않았지만 주로 백인 남성 유럽 노동자들이 존재했던 곳이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세바스찬 리우Sebastian Rioux가 강조한 것처럼 마르크스가 자율적이고 자기 재생산적인 생산 영역에 유력하게 의존하며 데이비드 맥널리David McNally가 '남성 노동자의 자기 탄생 신화'라고 불렀던 것을 유지한 이유 중 일부이다.
특히 '노동자'가 마치 스스로 만들어진 것처럼 생산의 숨겨진 거처에 갑자기 등장한다는 관찰은 마르크스주의 '생산우선주의'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비판의 기초이자 사회적 재생산 개념을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누가 노동자를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은 실제로 티티 바타차리아Tithi Bhattacharya, 수 퍼거슨Sue Ferguson, 사라 패리스Sara Farris 등이 수많은 <역사적 유물론> 컨퍼런스에서 설명한 것처럼 사회적 재생산 이론(SRT)을 비롯한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분석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나는 이 질문이 착취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유럽, 미국, 인도에서 마리아 로사 달라 코스타Maria Rosa Dalla Costa, 셀마 제임스Selma James,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 레오폴디나 포르투나티Leopoldina Fortunati, 알리사 델 레Alisa del Re, 안토넬라 피키오Antonella Picchio, 마리아 미즈Maria Mies, 로히니 헨스만Rohini Hensman 같은 초기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가들이 제기한 이 질문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의 착취를 보이지 않게 만들었던 자본주의적 생산의 숨겨진 거처의 좁은 정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같은 시기에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나 로다 레독Rhoda Reddock과 같은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노예제도와 도제계약에 대한 분석도 (유럽) 공장에 한정된 착취에 대한 이해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러한 모든 분석은 역사적으로나 오늘날 우리가 착취를 분석해야 할 공간과 착취의 경계를 넓게 열어준다.
이러한 공간에는 공장뿐만 아니라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여성을 가두는 부엌과 침실, 노예와 도제계약 노동을 강요하고 식민지배 목적을 위해 여성에게 가정생활을 부정하거나 허용한 농장, 또는 올랜도 패터슨Orlando Patterson이 '사회적 죽음'이라고 부르는 자본주의적 설계에서 배제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한계 공간도 포함된다. 최근 유럽 해안을 따라서 있는 구조선에 갇힌 이주민들의 모습이 이러한 예외의 영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떠오른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임금 없는 공간으로 정의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삶을 조직하는 주요 원리인 착취는 이러한 무임금 환경에서도 작동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과 자이루스 바나지Jairus Banaji(2003, 2010)의 명쾌한 지적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임금노동의 유무가 아니라 노동 잉여가치의 추출이기 때문이다.
안토넬라 피키오Antonella Picchio와 실비아 페데리치는 <임금의 가부장제>에서 노동 경험을 구조화하는 불평등과 권력 관계의 지표로서 임금을 재이론화하면서 임금은 노동의 가치를 만든다기 보다는 가격을 매기는 한 형태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자본이 노동 잉여 추출의 지배력을 기반으로 정의된다면, 임금 노동은 착취가 나타날 수 있는 유일한 형태가 아니다.
낸시 폴브레Nancy Folbre, 이사벨라 바커Isabella Bakker,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등이 설명한 것처럼 사실 역사적으로 개발도상국, 탈식민지 세계 또는 세계 남반구로 분류되는 대다수 세계에서는, 전 세계 여성들에게 착취는 주로 (겉보기에는) 무임금 관계로 나타났다. 적어도 1980년대 신자유주의적 '돌봄의 위기'를 불러온 여성화된 고용과 재생산 서비스의 시장화 및 금융화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실, 오늘날 끊임없이 재조직되는 생산/재생산 연속체를 따라 무급, 유급, 위장된 임금노동 또는 자영업의 복잡한 조합이 공식적으로 전 세계 상품 회로에 포함되며, 이 모두가 노동의 기능을 수행하므로 헨리 베른슈타인Henry Bernstein의 계몽적이고 분석적인 분류법을 사용하자면 다양하고 다중적인 '노동하는 계급들'을 대표하게 된다.
나는 이러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노동 경험과 투쟁을 통해 착취의 특별하고 구체적인 복합성을 배우고, 모든 곳에서 자본주의적 삶을 조직하는 핵심 원리로서 착취의 광범위한 철학적 의미를 재확인할 수 있으며, 이 개념이 임금 노동과의 건조하고 진부한 결합으로 납작하게 되는 것과 싸울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나는, 내가 '노동착취공장Sweatshop 체제'라고 정의한 것을 연구하면서 인도 도시 변두리와 농촌의 골목에서 시장화 및 비시장화 된 다른 순환을 따라 진행되는 착취, 사회적 재생산과의 관계, 무임금, 사회적 억압에 대해 가장 많이 배웠다. 이 연구는 남유럽의 지역적이고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에 대한 나의 이전 경제적 분석과 여전히 비공식화된 노동 및 상품 시장에 기반한 이탈리아의 불균등하고 결합적인 발전에 노출되어 성장한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임금 노동만을 기준으로 한 분석만으로는 ‘노동착취공장’ 체제 내 노동자들의 경험을 파악할 수 없다. 첫째, 인도 섬유부의 최근 공식 통계에 따르면 1,20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공장과 작업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지만, 계산하면 대략 1:3의 비율로 비공식 작업장, 가족 단위 및 가정에서 수천만 명이 더 많은 땀을 흘리고 있다.
후자의 대부분은 고전적인 임금 노동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 기능을 수행한다. 세계화된 순환에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착취당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면(이는 명백한 이론적, 구체적 불합리이다), 착취에 대한 배타적 - 사실 엘리트주의적 - 이해를 버릴 필요가 있다.
둘째, '노동착취공장' 체제와 같은 세계화된 생산 시스템의 기반을 분석하면 내가 '가치의 사회적 재생산'이라고 부르는 메커니즘, 즉 (무급) 재생산 활동과 영역이 어떻게 착취율을 형성하는지 알 수 있다. 즉, 착취는 생산적이면서 재생산적인 경험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마리오 트론티Mario Tronti의 통찰을 '여성화'한 실비아 페데리치가 주장한 것처럼 공장은 언제나 ‘사회적 공장’이다. 착취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마르크스 분석의 몇 가지 주요 논점을 재검토하는 데 도움이 되며, 이는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진다.
* 이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고전적 논쟁을 재검토하고 마르크스주의 안팎의 새로운 논쟁에 기여하는가?
내가 제안하는 착취와 가치에 대한 견해는 마르크스주의의 몇 가지 고전적인 논쟁을 재검토한다. 몇 가지를 언급할 수 있다. 첫째,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에 대한 논쟁이다. 제가 제안하는 착취와 노동 잉여가치 추출에 대한 이해를 통해 노동 관계에 적용되는 교환/사용 사이의 경직된 구분이 완전히 무너진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실 나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해(가치를 단순히 '효용'에 기초한 것으로 이론화하는 것으로 발전)를 거부하기 위해 대신 발전시킨 이 구별의 통합된 버전이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부문적 프레임워크에 내재된 고정적 성격과 내재성을 고려할 때 너무 오랫동안 ESRA(초기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 대한 막대기로 사용되어 왔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는 강력한 주장이므로 이에 대해 설명하겠다.
사회적 재생산 활동과 영역의 비생산적/비가치 창출적 성격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마르크스가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를 구분한 것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한다. 이들은 사회적 재생산 활동은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를 생산하며, 후자는 상품 생산에서만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재생산 활동은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 노동 과정 이론가 폴 스미스Paul Smith가 제시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의 생산적 성격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의 주장에 대한 초기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나는 스미스의 주장이 두 가지 근거에서 부정확하다고 주장한다.
첫째, 그것은 동어반복이다. 재생산 노동은 교환가치에서만 가치 생산자의 역할이 부여되는 틀에서 사용가치만 생산하므로 가치 생산이 아니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마치 별개의 분석 단위인 것처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EP 톰슨Thompson의 말을 인용하자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고전경제학이나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서 말하는 '사물'이 아닌 노동이라는 동일한 관계에 대한 두 가지 의미 부여 용어(또는 가능태potentia)이다.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므로(이는 레오폴디나 포르투나티의 <재생산의 비밀>에서 모든 개인에게서 우리 각자의 분할할 수 없는 노동/노동력으로서 어떻게 구현되는지에 대한 관찰의 기초이기도 하다), 둘 중 하나를 생성하는 네트워크나 활동(즉, 생산/재생산)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작업이다.
마지막으로, 사용/교환 가치를 노동/노동력에 적용하는 방법론적 일관성, 즉 '가장 귀중한 상품'과 다른 모든 것의 가치 척도를 노동/노동력에 적용하는 방법론적 일관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노동 관계에 대한 역동적이고 구체적인 지리적, 인류학적, 사회학적 분석은 실제로 착취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생산과 재생산이 상호 침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글에서 나는 이러한 상호 침투가 ‘노동착취 공장’ 체제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메커니즘, 즉 노동자의 일상 생활의 산업적 인프라를 통해 일어나는 메커니즘에 주목했다; 이주와 이동성에 기반한 고용주에 의한, 그리고 재택근무의 공식적인 대체 과정을 통한 재생산 비용의 외부화가 그것이다.
착취의 경계를 넓히면 마르크스주의의 두 번째 고전적 논쟁, 즉 혁명적 주체성과 관련된 논쟁도 재검토할 수 있다.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이상 역사적으로 규정됐던 주로 남성, 백인, 공장 내에서 일하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아니다.
사실, 협소하게 규정됐던 '생산주의적' 착취의 경직된 경계를 분쇄함으로써 우리는 혁명적 주체가 공장뿐만 아니라 들판, 농장, 가정, 거리, 창고 등 말 그대로 모든 곳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실제로 자본주의의 길고 폭력적인 역사를 통틀어 이 모든 공간에서 혁명적 주체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산업 지역에서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위해 싸울 뿐만 아니라 토지 재분배를 위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맞서, 원주민 및 조상 땅의 수탈에 맞서, 타니아 리Tania Li와 푸조 세메디Pujo Semedi가 최근 '기업 점령'이라고 부르는 것에 맞서, 빈민가에서 철거에 맞서, 스스로 결정하는 소득을 위해, 팬데믹 이후의 세계에서 가사 및 돌봄 노동에 대한 임금을 위해, 자연과 지구 생태 보호를 위해 싸우고 있는 이들을 여전히 찾을 수 있다.
‘제약이 없는 착취’를 통해 우리는 혁명적 주체를 잃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다중화하고, 기반을 획득하고, 모든 것을 차지하며, 마침내 공통의 투쟁 역사를 찾고 구축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착취에 대한 '제약이 없는' 관점은 이미 주장했듯이 다양한 맥락과 다양한 모습으로 일어날 수 있는 계급 투쟁을 인식하고 증폭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2001년 <소셜리스트 레지스터>에 실린 난디니 구웁투Nandini Gooptu와 바바라 해리스-화이트Barbara Harriss-White의 중요한 논문에서 언급한 '계급을 넘어선 투쟁'을 눈에 보이게 만들고, 최근 수프리야 로이초두리Supriya RoyChowdhury도 강조한 노동계급 연대의 보다 포용적인 정치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투쟁을 언급하면서 이번 종합토론에서 제가 제시받은 세 번째 쟁점으로 넘어가겠다. 이것은
* 이러한 개념과 아이디어가 자본주의, 식민주의, 인종주의의 동맹에 대항하는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정치의 광범위한 동맹을 이루어내는 데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까?
나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이론적 도구를 혁명적으로 바꿔야만 식민주의적이고 인종적이며 이성애 가부장적인 생산 방식인 자본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고, 우리를 다른 방식으로 일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본의 대표자들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는 이 글을 도발적으로 시작하면서 글로벌 섬유 대기업인 ‘리바이스’Levi’s의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마케팅 캠페인을 담은 다른 사진으로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억압 아래에서 내가 '포괄의 가치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에 기반하여 착취에 대한 제약이 없는 이해를 채택함으로써 우리는 노동과 가치 창출에 대한 서로의 기여를 인정하고, 우리의 투쟁을 명확하게 만들고, 서로의 목소리를 증폭시킬 수 있다.
모든 사람을 노동자로 인정해야 할 필요성을 전달하기 위해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두 번째 멋진 이미지가 있다. 쿠바의 예술가 아멜리아 펠라에즈Amelia Peláez가 1931년에 그린 '라 코스투레라'La Costurera이다. 그림 속 여인이 바느질을 통해 상품뿐만 아니라 자신도 만드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노동자로 보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를 노동자이자 가치 창출자로 인식하는 것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실제로 전 세계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자본주의, 식민지와 신식민지적 인종주의 동맹에 의해 형성된 영역에서 생산적이고 재생산적인 투쟁과 요구를 표명하면서 이미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고 있다. ‘폭스콘’ 기숙사들을 가로질러 동원되는 중국 전자산업 노동자들은 오늘날 글로벌 공장에서 '생산적' 영역과 '재생산적' 영역이 동등하게 자본을 위해 작동하고 있으며, 중국 노동사회학자 푼 응아이Pun Ngai의 말을 빌리자면 노동 체제는 항상 '기숙사'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생산과 재생산에 대한 요구는 착취에 맞서는 노동계급의 공동 요구이기도 하다. 상품, 재생산, 신용 시장과 영역에 걸쳐 착취가 맞물려 있는 인도 ‘노동착취공장’ 체제의 최하층에 있는 비공식화된 노동자 계급은 고 칼리안 산얄Kalyan Sanyal이 탈식민주의적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조건에서 임금 중심 투쟁과 소득 중심 투쟁의 연속성과 상호보완성을 보여준다.
최근 덕 히엔 응우옌Duc Hien Nguyen, 엘리 고어Ellie Gore, 엠마누엘 데이비드Emmanuel David 등이 탐구한 LGBTQ+ 노동자에 대한 새로운 문헌들은 우리에게 재분배 투쟁과 인정 투쟁 사이의 허구적인 구분선에 대해 알려준다. 인도에서 남아프리카에 이르는 농장과 광산 노동자들은 계급적 억압이 항상 카스트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케랄라Kerala 지역의 문나르Munnar 차 벨트에서 우리는 자야실란 라이Jayaseelan Rai를 통해 달릿 여성 차 노동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착취와 이를 가능하게 한 인종차별적이고 카스트주의적인 자본-노조 동맹을 규탄하며 파업을 벌였는지 배웠다. 뭄바이에서 더반에 이르는 빈민가 주민들은, 고인이지만 큰 영감을 주는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가 '슬럼의 행성'이라고 불렀던 곳에서 주택 캠페인이 단순히 권리를 기반으로 한 강탈 완화의 요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준다.
이 투쟁은 무엇보다도 아난야 로이Ananya Roy가 지적했듯이 도시 빈민을 희생자에서 역사의 주체로 바꾸는 노동 중심적 이해의 공간이면서 새로운 울타리치기(인클로져)에 대항하는 노동 계급의 투쟁이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는 투쟁은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와 루시 길모어Ruthie Gilmore가 흔히 감옥-산업복합체라고 부르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흑인) 노동의 군대를 재생산하는 (사이드야 하트먼Saidiya Hartman의 말을 빌리면) ‘노예제도의 현대적 후유증’과 싸우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준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전 세계의 ‘니우나메노스’NiUnaMenos(여성혐오 범죄에 반대하는 ‘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 운동) 운동은 자기결정권 소득이 비공식화된 노동계급 요구의 한 형태이며, 베로니카 가고Veronica Gago와 루시 카발레로Luci Caballero가 주장한 것처럼 파업은 공장을 넘어서 거리와 가정으로 넘쳐나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스트 파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아르헨티나의 경험과 같은 저자들이 쓴 <부채의 페미니스트적 읽기>에서 우리는 불안정한 노동, 부채, 젠더화되거나 인종화된 폭력 사이의 복잡한 연관성, 즉 고용 경험을 넘어선 복잡한 사회적 과정으로서 나타나는 착취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배운다.
과거와 현대의 구체적인 투쟁에서 얻은 이러한 모든 교훈은 착취를 단순한 산업 노동의 범주로 좁게 해석하는 것을 거부할 필요성을 요구한다. 착취를 산업적 상품 생산이라는 질식할 것 같은 벽 안에 가두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단결하여 싸울 수 있는 전체적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이론은 무기이다.
그것은 세상을 한꺼번에 모두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법이자 정치적 요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를 거짓되게 갈라놓고 억압하는 단층선이 마침내 경계를 넘어서서 우리 모두를 대표할 수 있도록 개념을 확장해 보자.
(기사 등록 202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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