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들렌 무어Madelaine Moore
번역: 두견
마이클 A. 레보위츠(Michael A. Lebowitz)의 대표 저서인 <자본을 넘어서>(백의)를 소개하는 글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넘어서며 이후에 페미니스트들의 다양한 문제의식과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발전에도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이클 레보위츠는 최근에 사망했는데, 우리는 그의 이론적 혁신 시도를 다룬 관련 글들을 몇가지 번역 소개하고 있다. 이 글의 필자인 매들린 무어는 독일 빌레펠트 대학교의 박사후 연구원이다. 그녀는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이론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정치경제학을 발전시키는 것을 연구해 왔다.
내가 마이클 레보비츠의 <자본을 넘어서: 마르크스의 노동계급 정치경제학>를 처음 접한 것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통해서였다. 특히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서 티티 바타차리야의 '계급을 건너뛰지 않는 방법' 장은 마르크스주의 분석에서 사회적 재생산과 계급 투쟁의 중심을 사회적 공장에 두는 근거로 레보위츠를 활용하고 있다.
6년 전 박사 과정 초기에 혼자서 읽었을 때와 이번에 독서모임의 집단적 지혜와 함께 다시 읽는 것은 매우 다른 경험이었다. 2017년의 내 노트에는 이론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자본주의 내에서 자연과 사회적 재생산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이론적 접근 방식을 구축할 수 있는 틀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었다.
2022년에 다시 텍스트로 돌아오면서, 몇 가지 오래된 마르크스주의적 질문과 약점에 대한 독특한 견해가 더 분명해졌다. 이 책의 배경이 된 주장 중 일부는 1980~1990년대 신사회운동 논쟁에 필요한 마르크스주의적 해독제를 제공하려는 열망과 같이 당시의 것이지만, 레보위츠의 많은 주장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중요한 지점을 계속 압박하고 있으며 이후 사회적 재생산 이론가들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더 발전했다.
1992년에 처음 출간된 후 2004년에 대폭 개정된 <자본을 넘어서>는 지속적인 위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이유와 노동계급을 단순히 자본의 재생산과 위기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접근했을 때 무엇이 드러나는지에 대해 여전히 신선하고 비판적인 개입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주체성과 혁명적 의식을 자본주의 재생산의 추상적 힘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오래된 질문이다.
레보위츠는 마르크스의 <자본>이 미완성의 프로젝트였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그는 마르크스가 계급적 주체성을 분석할 수 있는 임금노동의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자본주의 재생산의 총체성과 경쟁했을 임금노동에 관한 책을 쓰지 못하고 누락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없다면 우리는 자본만이 주체가 되는 일방적인 마르크스주의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누락된 책에서 우리는 경제와 정치가 서로 어떻게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지, 그리고 노동력이라는 추상적 개념 뒤에 숨어 있는 살아있는 복합적 인간을 통해 지배, 수탈, 착취의 얽힌 과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탐구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레보위츠는 자본을 움직이는 것은 자본이며 투쟁은 부수적 효과라는 주장에 반대하고자 한다.
그의 주장을 전개하는 방식, 특히 기존의 일방적인 범주에 대한 완벽한 거울이나 다른 범주를 찾으려는 필요성은 때때로 강요된 것처럼 느껴질 수 있고, 가치와 경쟁과 같은 특정 논의는 아직 발전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지만, 이는 주장 자체의 한계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 (그리고 이미 극복된) 장벽이다.
구체적인 내용에서 벗어나 자본 중심주의에 반대하는 논문으로서 <자본을 넘어서>의 전반적인 목적과 그에 도달하기 위해 취한 조치들은 필요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레보위츠는 임금노동에 관한 누락된 책을 연구하면서 욕구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노동 계급의 필요, 즉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은 사회적, 역사적으로 불확정적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유연성은 가용한 자원에 따라 필요가 변화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요소이다. 상품으로서 노동력은 노동력의 가격(임금)이 우리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내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임금노동과 시장을 통한 소비뿐이다.
이는 비교적 간단한 주장이지만, 이 책 전체에 흐르는 붉은 실 중 하나, 즉 자본주의의 총체성 내에서 이 범주들 사이에는 필수적이지만 모순적인 관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 노동자는 노동력이자 소비자이며, 필요한 요구는 계급투쟁의 결과이지만, 레보비츠의 말을 인용하면 '각각의 새로운 요구는 노동자를 자본에 고정시키는 황금사슬의 새로운 고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은 매개체로서의 자본에 의존하며, 자본의 힘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노동가치 이론에 대한 논쟁에 완전히 들어가지 않으면서, 여기서 제안하는 것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가치에 관한 해리 클리버Harry Cleaver와 유사한 주장이다.
레보비츠는 '예를 들어 자본의 기술적 구성[자본이 사용하는 생산수단의 양과 노동력의 양의 단순 비율]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자본은 왜 일정한 양의 노동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새로운 요구가 생산되는 방식과 임금노동의 재생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자본이 매개자로 남아 있는 한, 재생산되는 것, 즉 자본에 대한 노동의 가치는 의존의 관계이다. 노동이 생산에 대한 확실한 투입물로서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본에 대한 노동의 가치는 재생산되는 권력 관계이다, 레보위츠에 따르면 "노동자에게 노동력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요구의 실현을 충족시키는 수단인 동시에 더 많은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장애가 되는, 즉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임금이 감소하면 노동력의 질이 떨어지거나 생산성이 증가하면 각 제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이 감소할 수 있지만, 아슬아슬하게 임금 관계는 여전히 재생산된다.
다시 말하지만, 레보비츠는 비생산적/생산적 노동에 대한 치열한 페미니스트 논쟁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면서 그에 대한 주장을 깊이 파고들지 않고 '우리에게 제시된 것은 자본을 위한 생산적 노동, 자본의 필요와 목표, 즉 가치화에 봉사하는 노동'이며, 이는 이러한 의존 관계의 재생산으로 인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계급투쟁을 자본주의적 재생산의 부수 효과가 아닌 핵심 동역학으로 재중심화하기 위해 레보비츠는 다양한 관점에서 필요들에 접근하고, 이를 통해 노동의 필요와 자본의 필요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어떻게 상충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자본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타자'로서 임금노동의 정치경제학이라는 그의 개념에 반영되어 있다.
임금노동의 정치경제학은 자본에 대항하는 것으로 구성되고 위의 긴장을 반영하지만, 자본주의의 총체성 안에 남아 있다. 비록 그의 도식이 어느 정도 평등함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의 권력은 평등하지 않으며 시스템 전체의 재생산에 필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 개념을 통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적 실천에 대한 루카치의 접근법만큼 ‘페미니스트적 관점 이론’[여성들의 삶과 경험이 사회의 구조와 권력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려는 접근방식]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관점에서 생산과 재생산의 다중 회로에 접근할 수 있으며, 이는 노동계급의 경험, 논리 및 요구를 부수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중심에 놓는다.
따라서 레보비츠는 일부 자율주의자나 페미니스트들의 개입과는 달리 이러한 다른 회로들이 자본으로부터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총체성 안에서 작동하며 가치화의 요구에 의해 매개된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이러한 매개가 임금노동의 정치경제학이 자본의 정치경제학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임금노동의 정치경제학은 자본주의 전체의 재생산에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자본의 정치경제학을 뛰어넘는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경험은 자본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 이상이다. 구체적인 노동은 추상적인 노동에 상응하지 않으며, 레보위츠와 많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가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이 '여분', 즉 뒤범벅이다.
노동자는 임금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비임금 노동자이기도 하며, 이는 동일한 노동하는 신체를 통해 발생한다. 데이비드 맥널리의 용어를 빌리자면, 총체성 안에는 차이 속의 통일성이 존재하며, 여기서 총체성이란 경제가 복잡하고 모순적인 방식으로 총체성의 다른 필수적인 부분을 매개하고 채색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방법론적 전제로서 이해된다.
레보위츠가 계급투쟁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뒷받침하는 이러한 서로 다른 정치경제학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대개 필수적이지만 모순되는 두 가지 '요구'이다: 1) 자본의 가치화 필요와 2) 노동자 자신의 발전의 요구, 그리고 이것이 동일한 공간, 사회적 관계 및 신체를 통해 발생할 수 있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긴장은 <자본을 넘어서> 이후 생산된 많은 사회적 재생산 분석의 출발점으로, 티티 바타차리야의 질문에서 잘 드러난다: "노동력이 상품 생산의 회로 밖에서 생산되지만 상품 생산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학교, 병원 또는 수도 서비스가 사회적 재생산의 장소이자 일터이자 자본주의 전체의 재생산에 필요한 조건으로서 수행하는 복잡하고 이중적인 역할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계급 투쟁과 요구의 전략적 복잡성을 풀기 시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레보위츠의 핵심 질문, 즉 자본주의는 왜 지속되는가? 그리고 왜 노동계급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가?로 돌아갈 수 있다.
이처럼 제시되는 위기 이론은 다층적이고 역동적이며, 이러한 다양한 관점에서 위기에 접근해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한계와 극복할 수 있는 한계로 바뀌는 경향이 있는 장벽을 구분하면 위기가 자본주의적 동영학의 핵심이며 시스템의 위기가 아니라 시스템 내부의 위기인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더 명확해진다.
다시 한 번, 레보비츠는 새로운 렌즈를 통해 일반적인 범주를 재구성하면서 지속적인 성장의 필요성으로 이해되는 M-C-M(화폐-상품-화폐)을 '생산 영역 내부에서 자본의 이야기는 모든 장벽을 넘어서는 경향에 대한 이야기인 성장-장벽-성장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명시적이라기보다는 암묵적이지만, 이는 원시적 축적을 필연적인 연속 과정으로 보는 최근의 많은 논의와 맞닿아 있으며,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탈성장에 대한 최근의 논의에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
자본의 역동성은 한계를 장벽으로 바꾸는 능력, 즉 새로운 축적의 장소, 새로운 필요, 새로운 의존성을 창출하는 능력에서 비롯되지만, 레보위츠에게 극복할 수 없는 한 가지 한계는 노동계급의 한계이다. 그러나 레보비츠의 모든 주장과 마찬가지로, 실제적 한계인 노동계급이 왜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지에 대한 그의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 보면, 그 답은 간단하지 않다.
노동계급을 하나의 통일된 주체로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노동계급이 스스로를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레보위츠는 '노동자를 주체로 간주하면 노동자 스스로가 생산되는(그리고 스스로를 생산하는) 조건이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존속을 설명하는 명백한 부분으로 떠오른다'고 주장한다.
노동계급이 (재)생산되는 조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노동계급은 착취, 억압, 지배의 구조에 의해 매개되는 주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레보위츠는 당대의 정통 마르크스주의 분석에 대한 비판적 반박과 사회적 재생산 이론과의 또 다른 연결고리를 제시하면서 인종과 특히 젠더 구분이 부차적인 투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체가 자본인 한, 인간을 임금노동자로서의 특성으로만 간주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그러나 주체가 임금노동자가 되는 순간, 인간이 존재하는 다른 관계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게 된다'고 말한다. 노동 계급 내에는 다양한 관점과 전략적 장벽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여성의 임금 노동은 가정 내 가부장적 권력 관계를 약화시키고 가사 노예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반면, 복지국가 정책의 핵심 기조인 가족 임금은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의 힘을 강화할 수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용어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지만, 이 주장의 함의는 착취의 경험은 단일한 것이 없으며 남성 블루칼라 노동자와 그의 노동조합이 반드시 변화의 유일한 주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레보위츠는 자본을 매개로 한 모든 투쟁을 요구의 매개체나 노동자 분리의 도구, 또는 바타차리야가 제안한 것처럼 자본 전반에 대한 잠재적 계급 투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개별 사장이나 자본가의 힘뿐만 아니라 자본 전체의 근본적인 힘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단순한 경제적 투쟁을 넘어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에 대한 폭넓고 포괄적인 이해와 가정과 지역사회를 포함한 계급 투쟁을 개발하는 것 이상으로, 이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는 아직 정의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자본을 넘어서>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방법론에 대한 중요한 개입으로 남아 있다. 레보위츠는 자본주의의 지속 가능성과 노동 계급의 주체성에 관한 오랜 질문에 대해 신선한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 특히 사회적 재생산 이론가들이 더 발전된 방식으로 접근했던 분석적 문제들을 열어준다.
명확한 정치적 전략이 없는 우리에게 노동계급을 직장, 가정, 지역사회에서 동등하게 투쟁하는 다양한 행위자로 이해할 수 있는 분석적 도구가 주어진다. 더 나아가, 투쟁을 통해 노동계급의 분리(레보비츠에게는 자본의 힘)를 극복하고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투쟁의 과정은 단순하지는 않지만 생산적이다. 그의 말처럼 투쟁의 과정 자체는 유용하다:
"가부장제나 인종차별의 종식이 자본주의의 지속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부장제와 인종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해 투쟁해온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종식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자본을 넘어서>는 끝없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복합성과 복잡하고 모순적인 총체로서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는 여러 회로에 주목한다.
(기사 등록 202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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