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초등교사의 비극 – 이간질과 희생양 사냥은 안 된다
“난 정말 아이들을 사랑해서 우리나라를 사랑해서 교사가 됐어. 애들은 다 너무 예뻐. 근데 이제는 교육을 할 수가 없어. 기사를 보고 눈물이 멈추지가 않아. 교사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정말 죽고 싶어.”
서초구 초등학교에서 한 교사의 비극적 선택이 있은 후에 어떤 현직교사가 올린 글이다. 수많은 교사들이 느낄 슬픔과 절망을 보여 주는 이 글을 보면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가 예쁜 아이들을 만나서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와 교육의 모순을 생각하게 된다.
요즘은 고통에 시달리던 교사들의 비극적 소식이 많지만, 한 세대 전에는 학생들의 비극적 선택이 더 많았다. 그런 선택을 한 학생들도 비슷한 모순을 지적하고 절망을 토로했다.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가 싫어하는 것이지. 나에게 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라고 하는 분, 친구와 사귀지 말라고 슬픈 말만 하시는 분, 그 분이 날 15년 동안 키워준 사랑스런 엄마.”
이것은 1986년에 스스로 세상을 떠난 한 중학생이 친구에게 남긴 편지 형식의 유서에 담긴 내용이다. 이것은 또 학교에서 꿈을 키우고 친구를 사귀고 싶었던 학생을 가로막은 것이 가장 사랑하는 부모였다는 모순을 보여준다.
이렇게 우리의 교육과 학교는 서로를 사랑하는 학부모와 학생과 교사가 서로를 불신하고 대립하게 만들면서, 아이들의 꿈을 짓밟고 죽음으로 몰아가던 곳에서 이제 교사들의 희망까지 빼앗고 죽음을 선택하게 하는 곳으로 변화하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학교가 질서와 복종을 요구하는 군대와 비슷했다. 교장과 교사와 학생의 위계는 분명했고, 엄격한 규율과 체벌이 존재했다. 두발 단속과 복장 검열 속에 학생들의 자유와 인권은 보장되지 않았고 입시경쟁은 치열했다.
반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학교는 마트나 편의점과 비슷하다. 교육은 시장이고 상품이다. 공급자가 있고 소비자가 있고 서비스에 대한 끝없는 평가가 있고 불만이 접수된다. 입시경쟁은 더욱 더 시장화되면서 극심해졌다.
아이들은 경쟁과 입시에 내몰려 있고, 학부모들은 각자도생 사회의 압력에 직면해 있고, 교사들은 교육에 집중할 수 없는 조건인데, 사회와 국가는 그것을 방치해 왔다. 입시는 사교육 시장으로 넘어갔고, 학교폭력과 학내 갈등도 법기술자들이 좌우하는 법시장으로 넘어갔다.
강약약강의 사회 질서는 학교에서도 그대로고, 학생과 학부모는 공교육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지난 봄의 설문조사에서 현직교사의 87%가 이직이나 사직을 고민하고 있다는 응답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 교사가 학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이 터져나왔다.
더욱 충격적이고 절망적인 것은 ‘학생인권조례’와 ‘진보교육감’과 ‘전교조’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윤석열 정부의 반응이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학생의 인권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우선시되면서 교사들의 교권은 땅에 떨어지고 교실 현장은 붕괴되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대통령실 핵심관계자’는 “최근 발생한 초등 교사의 극단적 선택은 '학생인권조례'가 빚은 '교육 파탄'의 단적인 예”라며 이것이 “종북주사파가 추진했던 대한민국 붕괴시나리오의 일환”이라고 했다.
윤석열 정부가 계승한 보수우파 정부들은 교사들의 가장 기본적 권리인 노동3권과 정치적 참정권조차 가로막으며 전교조 마녀사냥에만 매달려 왔다. 자사고와 특목고를 만들며 교육을 서열화하면서 무한경쟁의 각자도생 속으로 학생, 학부모, 교사들을 몰아넣어 왔다.
그렇게 교사의 기본권조차 짓밟던 이들이 갑자기 ‘교권’의 수호자로 변신해서 그것을 ‘학생인권’과 대립시키며, 책임을 전가하고 새로운 희생양을 찾는데만 열심이다. 이것은 지금과 같은 비극을 낳은 교육의 위기를 해결하는게 아니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교권을 위해서 학생인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들의 목소리를 듣고 권리를 보장하면서 입시경쟁과 서열화, 승자독식과 각자도생 사회의 압력에서 학생과 학교와 교육을 지켜내는 길을 머리를 맞대고 함께 찾아가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의 장난기와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눈을 떠올려 보자. 학교에 들어가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시험지와 성적표가 쌓이는만큼 그 눈은 흐려지고 어두워진다. 왜냐하면 학교는 단지 국어, 영어, 수학만이 아니라 경쟁에서 이기는 법, 친구를 누르고 올라가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법을, 경쟁에서 떨어져도 그 상처를 이겨내고 자존심과 희망을 지킬 수 있는 법을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런 교육은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사랑하고, 학부모와 교사가 서로를 신뢰할 때 가능하다. 서로를 사랑하던 이들이 만나서 서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교육 현장의 위기와 모순을 해결할 길을 찾아야 한다.
● 핵발전, 핵무장을 위해 오염수 방류 지지하는 <조선일보> 김대중
한국의 기득권 보수우파의 정치적 고민과 방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선일보>, 특히 김대중 칼럼을 읽는 것이 매우 적절한 방법일 경우가 많다. 주필과 고문을 거친 김대중은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으로 요즘도 <조선일보>에 수시로 칼럼을 쓰고 있는데, 최근에 실린 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해 글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후쿠시마, 정말 ‘오염’ 때문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인데, 이 나라의 윤석열 정부와 기득권 보수우파 세력이 일본 기시다 정부의 오염수 방류를 앞장서 거들고 지지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김대중은 야당과 진보진영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이유가 “한국의 원자력 발전과 핵 무장을 반대하는, 이른바 ‘이재명식(式) 평화론’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런 비약이 의아하겠지만, 그의 논지는 나름 논리적이다. “우리의 원전이라고 불의의 사고에 휩싸이지 않는다는 법이 없”고 “우리는 핵무기를 가져야” 하는데,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면 그것에 도움이 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핵무기를 가지려면 핵연료 재처리가 필요하고, 핵연료 재처리를 하려면 핵발전소를 가동해야 하고, 핵발전소를 가동하다보면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고, 사고가 일어나면 오염수 방류 등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지금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면, 나중에 우리도 오염수 방류를 못하게 되고, 그것은 핵발전과 핵무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운동은 궁극적으로 “한국 내에 일고 있는 자체 핵무기 보유 여론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것”이라는 게 김대중의 결론이다. 그러면서 김대중은 “이재명식(式) 평화론”과 “문재인식(式) 반핵·반원전”을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적개심을 돋우는,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평화론’”이라고 규정한다. 그 분노와 적개심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김대중 칼럼이 한국의 기득권 보수우파의 코어 집단의 멘탈리티를 잘 보여준다면, 지금 한국의 보수우파 세력의 핵심은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더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지지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도 핵발전을 계속 하고 핵무장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그 과정에 나타날 재앙적 사고나 피해들 때문에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이유다.
윤석열 정부도 <조선일보>나 보수우파 일부의 이런 목소리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고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툭하면 내뱉는 호전적 발언과 행동들이 그것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윤석열은 ‘전술핵 배치’를 주장해 온 극우 유튜버 출신의 김영호를 통일부 장관 후보로 지명했다. 김영호는 “(윤석열 대통령은) 아무리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핵전쟁도 이제는 불사하겠다'라고 하는, 그런 입장”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것은 우리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고 막아내야 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 전세계에는 400개가 넘는 핵발전소가 존재하고 그 중에서 200여개는 지진과 쓰나미 등에 취약한 해수면에 위치하고 있다. 또 전세계에는 1만2000개가 넘는 핵무기가 존재한다.
‘핵’을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북한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핵발전소를 5번째로 많이 가진 나라는 한국이고, 전세계 핵무기의 절반을 가진 나라는 미국이다. 그러한 미국과 한국이 손을 잡고서 핵공격이 가능한 전략무기를 계속 한반도로 가져오고 있고, 한미일 동맹을 구축해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돕고 있다.
후쿠시마에서 오염수 방류가 성공하면, 세계 곳곳에서 불의의 사고나 생명의 피해를 감수하고 핵발전과 핵무장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것이 김대중 칼럼이 오염수 방류를 지지해야 한다고 한 이유였다. 결국 우리는 김대중 칼럼의 논리를 따라다가다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지제크 비판 – 좌파가 법과 질서의 구호를 가져오자고?
슬라보이 지제크(또는 슬라보예 지젝)의 읽기 어렵고 이해가기도 복잡한 철학적인 글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칼럼과 평론들은 꽤 좋았던 경우도 많았다. 학자가 이론에 머물지 않고 현실을 분석하고 의견을 내놓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최근 한겨레에 실린 프랑스 폭동에 대한 글은 별로였고 동의하기도 어렵다. 주요 대목을 인용하자면 이런 주장이다.
“프랑스 시위대는 저소득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시내버스를 공격했는데, 이는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지탱하는 시설을 파괴하는 행위이자,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격일 뿐이다.... 법과 질서를 빨리 회복하지 않으면 진보적 결과를 가져오는 대신 극우 지도자 마린 르펜을 다음 대통령으로 당선시킬 수 있다.... 이런 추세 속에서 좌파는 용기를 내어 법과 질서라는 슬로건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이번에 프랑스 빈민가 청소년들의 폭동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거꾸로 가난한 이들의 저항이었다. ‘폭동’의 참가자는 대부분 프랑스 변두리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던 이민자와 다인종 청소년들이었다. 그들은 구조적 인종차별과 경찰 폭력에도 시달리다가 ‘나헬’의 죽음을 계기로 그 분노를 폭발시켰다.
물론 ‘폭동’은 정치 지도부의 계획과 지도에 따라서 질서있게 벌어지는 시위가 아니다. 따라서 폭동을 통해서 고급상점과 식당만이 아니라 작은 가게와 자동차와 건물들이 파괴되고 불탔고, 그 과정에서 변두리에 사는 마찬가지로 가난한 이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것은 분명 비판할 수 있고 고쳐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모든 피억압자들의 저항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의료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노동자들이 병원 이용에 불편을 겪고, 장애인들이 지하철에서 투쟁하면 노동자들이 출퇴근에 불편을 겪는다. 따라서 ‘노동자와 장애인들의 저항은 가난한 이에 대한 공격’인가? 그것은 자기들만의 고급주택가에 살면서, 변두리의 소외받고 가난한 이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탓하게 만들려는 윤석열같은 지배자들의 전형적인 이간질 선동이다.
따라서 ‘법과 질서를 빨리 회복해야 한다’는 지제크의 주장도 틀렸다. 구체적 현실에서 지제크의 주장은 마크롱 정부가 무자비한 경찰 폭력과 법적 처벌을 통해서 폭동에 나선 빈민가 청소년들을 짓밟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마크롱은 가혹할 정도로 강력한 폭력적 대응으로 ‘폭동’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전혀 아니고, 빈민가 다인종 청소년들과 차별받는 이민자들의 불만과 분노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법과 질서를 숭배하는 극우익 지지자들의 자신감만 높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즉, 이것이야말로 지제크가 걱정하는 ‘극우 지도자 마린 르펜을 다음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가장 빠른 길이다.
실제로 마크롱의 강경 대응 속에서 르펜의 지지율은 더욱 치솟고 있다. ‘법과 질서를 지키며 이민자들의 폭동을 더 강력한 방식으로 해결할 사람’은 중도우파인 마크롱보다 극우 신나치인 르펜이라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제크는 문제를 악화시킬 방법을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제시하는 셈이다.
물론, 좌파는 무조건 법과 질서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검찰 특활비같은 문제에서 우리는 불법을 넘어서 무법천지인 윤석열, 한동훈, 정치검찰을 폭로하고 비판해야 마땅하다. 나헬을 죽인 프랑스 경찰의 대응도 명백한 불법 범죄로 처벌받아야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법과 질서’는 지배자들과 우익의 무기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는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대부분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있고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최근 타이 헌법재판소는 최근 총선에서 압도적 지지로 총리 후보에까지 오른 전진당 대표의 의원 자격을 정지시켜 버렸다. 그가 불법적으로 방송사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 방송사는 이미 20년 전부터 방송을 중단한 상태였다. 군주제 개혁 등 진보적 정책을 제시하고 시민들의 큰 지지를 얻은 전진당이 타이 지배자들의 권력을 위협하고 있는 게 진정한 이유였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지금 검찰이 야당에 대해서 펼치고 있는 온갖 압수수색, 수사, 기소들도 단순히 법질서에 따른 결정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우익과 지배자들의 구호였던 ‘법과 질서’를 좌파가 가져오자는 지제크의 주장은, 특히 그가 프랑스 ‘폭동’의 구체적 맥락에서 그런 주장을 한 것은 넌센스이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게 아니라 이번에 프랑스 거리에서 다인종 이민자 청소년들이 외친 구호가 맞다. ‘평등과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
● ‘가족인질극’ 시즌 2 생중계에 나선 검찰
영화에서 악당들의 잔인하고 비열한 행태를 보여주는 가장 흔한 장치 중에 하나가 ‘가족 인질극’이다. 주인공은 그 어떤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한다. 그때 악당은 최후의 수단으로 주인공의 가족이나 연인을 데려와 주인공 앞에서 고문하며 살해 위협을 가한다. 그러면 그 무엇도 꺾을 수 없던 주인공의 의지는 무너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2019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4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조국몰이’ 과정에서 ‘윤석열의 특수부 정치검찰’이 가장 중요하게 사용한 무기였다. 그래서 ‘가족인질극’은 ‘인디언 기우제식 수사’, ‘토끼몰이식 수사’, ‘초미세 먼지털이’ 등과 함께 조국 가족에 대한 검찰의 수사와 언론의 보도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용어가 됐다.
검찰-언론-권력 카르텔은 당시에 조국 교수를 향하여 ‘너가 물러서지 않으면 부인과 자녀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국민의힘 여상규 법사위원장은 솔직했다. “처와 자녀 등 온 가족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단 말이에요. 앞으로 구속될지도 몰라요.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관이 무슨 의미가 있죠?”
‘윤석열 특수부 정치검찰’은 이것을 구체적인 ‘특수수사기법’으로 작동시켰다. 자녀에게 갈 고통을 무기로 그 부모에게 자백을 압박했다. 이것은 감옥에 갇힌 상태로 검찰 수사실로 불려나가던 정경심 교수에게 집중됐다. 정경심 교수는 ‘당신이 수사에 협조해야지 자식들이 우리의 칼날을 피할 수 있다’는 검찰의 노골적 압박에 시달렸다.
2019년에 조민 씨가 최초로 방송 인터뷰에 응한 것은 이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당시 조민 씨는 “어머니가 저를 보호하려고 자신이 하지도 않은 그런 일들도 다 했다고 할 수도 있다. 어떻게 이걸 막을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이 방법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오게 됐다”고 했다.
‘멸문지화’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조국 교수의 가족은 그야말로 만신창이로 짓밟혔다. 어머니는 건강을 잃고 감옥에 있고, 아버지는 사회적 지위와 직업을 잃었으며, 그 자녀들은 청춘을 바쳐 이루어 온 경력과 학력이 인생에서 지워져 버렸다. 결국, 조국 교수의 자녀들은 최근에 학위를 반납하며 모든 법적 대응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검찰은 곧바로 “같은 혐의로 재판 받는 조 전 장관과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가 재판에서 혐의를 시인하는지를 고려해 조민 씨 처리 방향을 판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즉, ‘딸이 혐의를 인정했으니 이제 그 부모도 범죄를 자백하며 검찰 앞에 무릎을 꿇어야 그 딸을 놓아주겠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조민 씨는 범죄를 자백하거나 유죄를 인정한 적이 없다. 조민 씨는 올해 초 인터뷰에서 스스로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 “검찰과 언론과 정치권이 우리 가족에게 정말 가혹했다. 정말 본인들에게는 똑같은 잣대를 대는지 묻고싶다, 나는 도망가고 싶지 않다, 나는 떳떳하다, 더 이상 숨지 않겠다.”
관련 재판이 끝나고 나서야 뒤늦게 공개된 부산대 자체조사 결과에서도 조민 씨의 부산대 의전원 합격에서 영어 성적이 가장 중요했고, 부모가 개입한 사실은 전혀 없으며 동양대 표창장은 당락에 영향을 주지도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따라서 조민 씨가 법적 대응을 중단한 것은 혐의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끝없는 소송과 재판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일 뿐이다.
그런데 검찰을 이것을 또다시 조국 부부에 대한 가족인질극의 무기로 이용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을 거들고 있는 금태섭같은 이들의 태도이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툭하면 우려먹는 ‘조국몰이’말고는 팔아먹을 게 없는 금태섭은 최근에 또 조국 교수에 대해 ‘형식적인 사과말고 구체적 혐의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모든 압박은 가장 인간적인 감정들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잔인한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겪는 고통보다도, 가족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더욱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고통이 고스란히 더 크게 전해질 뿐 아니라, 나 때문에 상대방이 고통받는다는 자책 때문에 이중으로 고통받게 된다. 그것은 인질이 된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한번 먹이감을 정해서 사냥과 몰이를 시작하면 먼지가 날 때까지를 넘어서 피부가 벗겨질 때까지 털어대는 정치검찰의 수사와 ‘친검’ 언론의 보도는 윤석열 정부 지난 1년 동안 거침이 없었다. 야당과 민주노총과 건설노조를 계속 끝없이 압수수색하고 소환조사했고, 심지어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교통카드 내역과 은행 입출금 내역까지도 뒤졌다.
반면 검찰은 윤석열 부인과 장모에 대해서는 소환조차 하지 않고 불기소와 무혐의 처분하는 일들을 반복했고,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고 법이 개악될 때까지 기다려주고 있다. 그나마 이루었던 검찰개혁의 성과들은 모두 뒤집혔고, 모든 게 전속력으로 거꾸로 가고 있다.
최근 <뉴스타파>가 밝혀낸 검찰 특활비 사용의 대막장 실태는 정치검찰이야말로 바로 최고의 ‘내로남불’이며 ‘거악’이며 ‘이권 카르텔’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검찰 수사권을 축소하려고 할 때만 나라가 무너질 듯이 ‘공정과 상식’을 말하며 목소리를 높이던 그 많던 언론과 정치인, 지식인들은 조용하기만 하다. 그러니 ‘가족인질극’은 끝날 줄을 모른다.
● 미국의 우크라이나 집속탄 제공을 반대한다
‘적의 적은 우리의 친구이고, 적의 친구는 우리의 적이다’는 단순 논리는 대체로 현실을 설명하거나 현실에 적용하기 어렵다.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윤석열 정부는 지금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을 쫓아서 러시아에 맞서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이번에도 국내에서 폭우 피해로 수십명이 사망한 상황에서도 우크라이나로 가서 ‘사즉생 생즉사’를 떠들었다. 윤석열 정부의 이런 ‘가치외교’쇼는 솔직히 너무 역겨운데, 그러면서 우크라이나 난민이나 러시아 병역거부자들의 난민 신청은 내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국 재벌들은 서방 자본들의 러시아 철수를 새로운 돈벌이 기회로 이용하고 있다.
결국, 윤석열 정부는 큰형님 미국이 약소국을 침공하면 그것을 지지하고, 러시아와 맞서면 그것을 뛰따라가는 ‘꼬붕 외교’를 ‘가치 외교’라고 포장하고 있는 것 뿐이다. 여기서 유일한 ‘가치’는 한미동맹이다. 따라서 ‘윤석열은 우리의 적인데 그가 러시아에 반대하고 위선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니 우리는 러시아를 지지하고 우크라이나를 반대해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전쟁에서 좌파들은 당연히 우크라이나 민중의 저항을 지지해야 한다. 강대국의 억압과 침략에 직면한 약소국의 민중은 저항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좌파가 미국의 침공에 맞서서 베트남 민중의 저항을 지지한 것, 이스라엘의 억압에 맞서서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지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차이점은 있다. 베트남과 팔레스타인은 세계 최강대국이나 그 경비견 국가(이스라엘)에 맞섰다면, 지금 우크라이나 민중이 맞서고 있는 것은 불안정한 2등급 강대국이다. 그리고 지금의 2등급 강대국인 러시아는 원래 서방 강대국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푸틴이 20년도 전에 체첸을 침공했을 때 서방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며 그것을 응원했다. 2008년 그루지아를 침공했을 때도 눈감아 줬다. 서방 다국적 기업들의 친구로서 푸틴은 ‘G7+1’ 회의에 초대받았고 러시아의 석탄과 가스는 유럽 강대국들의 필수 수입품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자본주의의 모순과 푸틴의 과잉확장 시도, 세계 체제의 변화 속에서 좋은 관계는 사라졌다. 이제 서방 강대국들은 푸틴을 제재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주고 있다. 그들의 속셈이 무엇이든 우크라이나 민중의 저항은 지원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최근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집속탄을 지원하기로 한 것은 결코 지지할 수 없는 일이다.
집속탄은 그 피해자의 대다수가 어린이이고 이미 전세계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대표적인 야만적 전쟁 무기이기 때문이다. 이 무기는 러시아의 침략을 막아내는 효과를 넘어서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줄 것이고, 우크라이나 저항의 정당성을 떨어트릴 것이다. 즉, 이것은 우크라이나 민중의 저항을 돕는게 아니라 망치는 길이다.
러시아의 침공과 전쟁 때문에 잠시 가려졌던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의 위선은 최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제닌 난민촌 초토화 작전에서도 드러났다. 이스라엘은 지난주에 무장헬기, 전투기, 불도저, 장갑차, 미사일, 드론과 지상군으로 난민촌을 습격해 수백 명을 죽고 다치게 했다. 이것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하는 짓과 다를게 하나도 없지만 서방 강대국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서방 강대국들의 이중잣대만이 아니라 젤렌스키 정부가 툭하면 ‘우리는 우크라이나 특색의 이스라엘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틀려먹었는지도 보여 준다. 따라서 일부 좌파들이 러시아의 침략과 전쟁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서방 제국주의이나 나토가 지배하는 세계질서가 차선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물론, 이것을 또 아전인수로 해석해서 러시아의 침략과 전쟁을 옹호하는데 이용한다면 그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이번 만행을 비판해야 하는 이유는, 러시아가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자행하는 만행을 소규모로 반복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국의 집속탄 지원을 규탄해야 하는 이유는 이미 러시아가 전쟁 초기부터 우크라이나에서 집속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이민 청소년들의 폭동에 어떤 문제점이 있더라도 프랑스 국가에 맞서서는 그것을 지지해야 하듯이, 우크라이나 저항에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러시아의 침략과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점은 변화할 수 없다.
(기사 등록 2023.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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