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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신자유주의와 비서구/ 균세로의 귀환?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3. 7. 17.

[러시아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 온 박노자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서 시작된 전쟁에 대해서 분석하고 전망하는 글들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신자유주의와 비서구의 부상

애당초부터 좌파는 신자유주의에 결사 반대합니다. 매우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자유'는 노동에 대한 초착취의 '자유'일 뿐이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란 결국 공해와 저임금 일자리 수출 등을 의미해 왔기 때문입니다. 좌파로서 신자유주의를 긍정할 일이라고 당연 없을 것입니다. 한데 신자유주의 시대가 초래한 지경학적 (geo-economical) 변화들을 객관적으로 보다보면 재미있는 부분들이 조금 보입니다. 비록 레이건과 대처가 의도한 바야 절대 아니었겠지만, 사실 신자유주의 시대야말로 서구의 패권 시대를 끝내는 데에 아주 큰 견인차 역할을 한 바 있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 본격화 이전의, 예컨대 1980년의 세계를 한 번 상상해봅시다. '미소 양극 체제'라고 하지만, 소련과 그 위성 국가, 내지 그 당시 중국의 그 진영 바깥에서의 세계적 영향력은 사실 미미했습니다. 소련의 세계 총생산에서의 비중은 약 10% 안팎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소련은 동구권 이외의 국가에다 거의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것이죠. 소련/동구권/중국/북한/베트남 등을 제외한 세계에서는 구미권과 일본의 영향력은 거의 모든 방면에 절대적이었습니다.

세계 총생산이나 세계 제조업 총생산에 있어서의 미국의 몫은 약 30%, 단연 가장 컸습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서독과 영국, 프랑스 등은 특히 IT 등을 위시해서 최첨단 기술을 거의 독점했습니다 (, 무기나 원전, 우주공학 등 일부 분야에서 소련도 세계적 노우하우의 일부를 보유했습니다). 소련권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우수 대학들은 전부 다 구미권과 일본에 있었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과 대만 등을 정치적 고려에 의해서 차관과 시장 접근 공여 등을 통해서 "키우고 있었던" 과정이 있었지만, 이게 어디까지나 냉전의 상황에서 "필요해서" 한 것이었습니다. 극소수의 신흥 산업국 이외에는 첨단 자본주의는 구미권과 일본의 독점물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신자유주의적 공장 이전, 저임금 국가 투자 집중, 구미권/일본 자본의 세계적 확산과 현지에서의 공업 투자 등의 40여년 동안의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과정이 잇따랐습니다. 물론 구미권/일본 자본가들이 "선심"을 쓴 것이 아니고 중국을 비롯한 신흥 시장들에게 "폭리"를 노려서 이 과정에 들어간 거죠. 한데 좌우간, 한 번 오늘날 세계를 점검해봅시다. 미국 경제의 세계적 비중은 무려 23%로 여전히 만만치 않지만, 17%를 차지하게 된 중국은 이미 제조업 등의 여러 분야에서 미국을 사실상 추월했습니다.

제조업으로 이야기하면 미국의 몫은 16%밖에 안되고, 중국은 그것보다 거의 2배나 되는 비중을 차지합니다. 첨단 기술로 치면, 반도체 분야에 있어서 중국이 미국과 대만 등의 수준에 머지 않아 도달할 가능성이 있기에 미국이 중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제재에 돌입한 것입니다. , '추월'의 현실적 위험성이 있어 미국이 부득불 선수를 친 셈입니다.

사실 1980년의 세계에는 그런 위험성은 존재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첨단 사업이었던 컴퓨터 제작 등에 있어서는 소련은 미국에 한참 뒤떨어져 있었던 것이죠. QS 세계 대학 랭킹 등을 보면 여전히 최우수 100개 대학은 주로 구미권/일본에 있지만, 17위가 청화대가 되고 18위가 북경대 된 것 역시 1980년의 세계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KAIST41위나 된 것도 40년 전에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고요.

중국 등 신흥 시장에 막 홍수처럼 밀려간 구미권/일본 자본이야 '폭리'를 노렸을 뿐이지만, 이 투자/무역 붐을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중국이나 걸프 국가, 그리고 인도나 터키, 인도네시아 등 비교적 '강성'인 국가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역이용해 어느 정도 "부상"에 성공한 것입니다. 물론 이와 함께 과거의 "3세계"는 부익부빈익빈식으로 양분되고 말았습니다.

중국 등처럼 외자를 이용해 빠른 산업화에 성공하지 못한, 보다 약한 많은 국가들은, 결국 점차 중국 자본의 경제 식민지 위치로 전락해가고 있습니다. 동남아의 라오스부터 중앙아시아의 타지키스탄, 아프리카의 잠비아나 앙골라 등 그런 경우들도 수두룩합니다. 주변부의 강한 국가들에게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어느 정도 '기회'가 되었던 반면, 보다 약한 국가들에게는 경제적 재식민화의 함정이 열린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일반적 법칙인 약육강식은 이 경우에도 적용된 것입니다.

세계화가 지속되면 서구 패권이 장기적으로 위기에 빠진다는 사실을 드디어 눈치 챈 미국은 이제 탈세계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미국의 산업 정책들은 이제 신자유주의라기보다는 1930년대식 보호주의에 더 가깝습니다. 한데 세계는 이미 바뀌고 말았습니다. 43년 전에는 구미권과 일본은 세계 총생산의 약 65%를 차지했지만, 지금 그 비중은 40%에 불과하고 경향적으로 감소돼 갑니다. "서구 패권 이후"의 세계의 윤곽은 이미 점차 잡혀가고 있습니다.

40-50년 후의 세계에서 펜타곤과 하버드, 국제어로서의 영어 등이 현재와 같은 위치를 갖고 있지 않을 것은 어디까지나 분명한 일입니다. 이런 패권 쇠락이 가능해진 여러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자살 골'이 되고 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이었습니다. 물론 이 '자살골'을 놓게 된 이유란, 구미권/일본에서의 경향적 이윤율의 저하이었죠. 한데 이 세계화의 결과란, 구미권/일본 지배자들의 예상과 결국 상당히 다르게 나왔습니다...

국제 체제, 균세 (balance of power)로의 귀환?

애당초 국제 체제는 균세 (均勢)를 중점적 개념으로 해서 작동돼 왔습니다. 슈메르에서 여러 도시 국가들이 상호 각축하면서 나름의 '세력 균형'을 이루었던 시대부터, 은나라라와 동이(東夷서융(戎狄남만(南蠻북적(北狄) 등 주변 세력들이 균형을 이루었던 시대부터 그래 왔습니다. 균세, 즉 세력 균형의 원칙이란 사실 간단합니다. 특정 국가가 지나치게 약해지면 주변 열강들이 그 영토를 분할 점령하는가 하면, 지나치게 강해지거나 어느 수준 이상의 야망을 보여 '균형'을 위협할 경우 열강들이 연대해서 그 나라의 기를 전쟁으로 꺾는 것입니다.

대체로 유럽의 국제 질서는 1945년까지 '균형'의 문제를 중심으로 움직여 왔습니다. 혁명 이후 프랑스가 강해지고 주변을 점령하자 영국과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이 연합해서 결국 1815년에 나폴레옹을 완패시켜 프랑스를 '2등 열강'으로 강등시키고, 1870년 이후 통일된 독일이 강해지자 결국 영---이의 연합 세력과 부딪친 것입니다.

슈메르 시대나 19세기 유럽에서나 '균세' 체제의 불가피한 동반자는 정기적인 열강 사이의 전쟁들이었습니다. 전쟁이 아니면 한 번 잘못 기울어졌다 싶은 균형을 다시 잡을 수 있는 수단은 없었습니다. 이와 약간 다르게 동아시아는 대개 패권 제국 중심의 조공 체제이었지만, 예컨대 송나라와 요나라, 그리고 그 다음에 금나라의 장기 대립만 해도 차라리 '균세'에 가까웠습니다.

이런 체제에서의 획기적인 변화가 생긴 것은 1945년 이후, -소의 제2차세계대전 승리와 핵무기 생산의 시작 이후이었습니다. 냉전 체제에서는 처음부터는 열강은 딱 두 군데, -소뿐이었습니다. '균형'이란 이제 이 두 초강대국 사이의 관계를 의미했습니다. 이런 양극 체제는 세계사에서 처음이었던 것입니다. 한데 양극 체제라 하지만, 처음부터 불완전한 양극 체제이었습니다.

소련은 군사를 포함한 모든 방면에서는 미국에 비해 열세이었습니다. , 소련은 아무리 가난하고 후진적이라 해도 ''을 가지고 있었던 이상 미국은 그 영향권 (동구)을 인정하여 그 안에서의 직접적 간섭을 자제했습니다. 이 양극 체제 속에서 주변부에서 계속적인 대리전들이 수행됐지만, -소는 직접 무력 갈등을 회피했는가 하면, 과거의 서구 열강들인 영---이 등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미 제국의 후국으로 재편됐습니다. 이 전례 없는 양극 체제는 유럽 열강 사이의 각축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든 것입니다.

유럽 바깥의 열강들은 - 중국과 인도의 1962년 국경 전쟁 등에서 보이듯 - 종종 전쟁을 수행했지만, 냉전 시대에는 초강대국과 주변부 열강 사이의 거리는 대단히 멀었습니다. , 이 체제에서는 유럽은 미 제국의 후국이 되고, 중국, 인도, 이란, 터키 등의 위상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1991년 소련 몰락 이후 한 때에는 세계가 정말 동아시아 청나라 시대를 연상케 하는 '패권 제국 중심의 일극 체제'로 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었습니다. 한데 이라크에서의 패배와 2008년 공황으로 미 제국의 위세가 꺾이면서 일극 체제가 끝내 제대로 형성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트럼프 집권과 펜데믹 대응 실패, 아프간 철수 등으로 미국의 위상이 추락하면서 세계 질서가 점점 다시 '균세'의 시대로, 1945년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미국은 여전히 군사와 금융, 과학 등 일부 부문에서 상대적 우위를 보유하지만, 앞으로 약 15-20년 사이에 그 우위가 중국에 의해 상대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중국은 분명히 유라시아의 최강의 국가로 이미 그 위치를 확정했지만, 동시에 그 주변에 인도와 러시아 등이 또 중국과 협력하면서 은근히 견제를 합니다.

이외에는 이 새로운 국제 질서의 작동 원리는, 솔직히 1914년 이전의 유럽의 열강 질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요구 수준이 높은 특정 열강을 다른 열강들이 견제하면서, 서로 엇비슷한 전쟁 수행 능력을 보유한 여러 세력들이 상호 협력과 견제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점령을 시도하자 미국과 그 유럽 후국들, 그리고 일본과 한국 등이 연대해서 경제 제재와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등으로 러시아를 견제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민중들의 저항과 함께 그 견제가 주효하여, 러시아가 실질적으로 점령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 영토의 비율은 현재 아마도 15-20%를 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보다 훨씬 못미칠 가능성도 큽니다). 시리아에서는 러시아와 이란, 터키가 서로를 견제하는가 하면, 중국에 경제적으로 기대는 러시아는 동시에 인도, 베트남과의 관계를 강화해 또 은근한 대중국 견제를 합니다. 이렇게 전쟁과 상호 견제, 그리고 필요시의 협업은 바로 열강 사이의 '균세' 시스템의 작동법입니다.

이런 균세 시스템의 재도래를, 민족주의적 경향의 국내 일부 지식인들이 "다극화"라고 하여 반기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반길 만한 게 뭐가 있는가, 싶습니다. 1914년 이전 체제로의 회귀는, 여러 가지 의미들을 지니지만, 하나의 큰 변화는 열강 사이의 직접 충돌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현재까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현장에서 200명 이상의 외국인 전사들이 우크라이나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가 전사했는데, 그들 중의 수십명은 미국과 폴란드, 영국, 독일 등 나토 국가들의 출신들입니다. 전장에서 나토 국가 출신의 전사들과 러시아 병사들이 서로를 죽이는 것은 확전의 불씨가 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또한, 대만을 중심으로 충돌이 발생될 경우 중-미 직접 무장 충돌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예상됩니다.

---러의 전쟁이 예사이었던 19세기 정도는 아니지만, 사실 균세의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세계는 늘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균형이 약간이라도 깨질 것 같으면 바로 군사적 대응이 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균세' 원리로 돌아가는 세계에서는 현재에 비해 전쟁들은 훨씬 대규모화되고 일상화될 것입니다. 유럽 및 동아시아에서의 장기 평화가 지금 끝나가고 있는데, "다극 체제'라고 하여 좋아할 일이 뭐가 있나, 싶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국형 열강 사이의 영구적인 경쟁을 의미하는 '다극'이 아니고 평화입니다. 미 제국 패권 체제도 그랬지만, 균세 시스템도 평화를 절대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민초 차원의 평화 운동이 그 힘을 키우고, 영구 전쟁 체제의 경제적 배경, 즉 전시 무기 판매 등으로 군수 복합체가 얻는 초과 이윤 등에 대한 '불편한 질문'들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경쟁 열강에서 거주하지만 똑같이 영구 전쟁 체제에 반대하는 민초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연대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데 아직까지 세계의 좌파적 반전 운동은 아쉽게도 그 단계까지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사 등록 2023.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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