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번갯불처럼 한국 사회를 비쳐 준 ‘정순신 사태’
정순신 국가수사본부장이 학교폭력 가해자인 자녀를 위해 끝장소송을 하며 피해학생을 2차가해한 것이 드러나 하루만에 사퇴한 사건은, ‘검폭’이 지배하는 ‘검찰공화국’의 한국사회를 마치 번갯불처럼 한번에 축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학교폭력과 성폭력 등을 경험해 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들의 끝없는 2차가해와 역고소 소송에 대한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재산이 8백억이 넘는 보수정치인의 사위이고 군면제를 받았다는 정순신은 대표적인 검찰 특수통이고 법무부장관 한동훈과 사시동기였다. 검찰에 있을 때 ‘인권감독관’도 했다지만, 이번에 사퇴의 변에서 “수사의 최종 목표는 유죄판결”이라고 적을 정도로 인권의식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표적을 정하면 그 사람의 가족과 영혼까지 탈탈 털어서 반드시 기소하고 만다는 전형적인 검찰특수통의 시각이다.
이런 사람을 경찰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한 것은 검찰개혁과 수사-기소 분리를 거꾸로 돌리려는 목적이었을 것이고, 더불어 그가 검사 퇴직 후 김만배의 변호사였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대장동 게이트에서 검사, 판사, 기자들을 덮어버리고 어떻게든 이재명을 엮어내려는 시도의 연장이었던 것 같다.
간첩조작 피해자였던 유우성 씨를 끝까지 괴롭힌 이시원이 대통령실 인사검증 책임자로 있고, 강진구 기자를 끝까지 괴롭히고 있는 한동훈이 법무부의 최고 책임자로 있는 상황에서, 그들과 절친이고 학교폭력 피해학생을 끝까지 괴롭힌 사람이 국가수사본부장으로 간 것은 사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인사검증을 통과했냐’고 놀랄 일은 아니다.
정순신은, 유명한 자립형사립고로 자식을 보내서 명문대 철학과를 거쳐 로스쿨을 들어가고 판검사로 나가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설계해 줬지만, 안타깝게도 삐뚤어진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물려줬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자녀는 강약약강의 태도로 혐오와 막말로 약한 학생을 괴롭히면서, 툭하면 검사 아버지를 자랑하며 ‘우리 아버지는 아는 사람이 많다, 판사와 친하면 무조건 재판에서 이긴다’를 말을 해 왔다고 한다.
(한편으로 ‘검사는 뇌물받는 직업이다’라는 말도 했다는데, 이것은 그의 자녀가 아버지에 대한 냉소와 반발심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게 한다. 부조리한 세상을 냉소하면서도, 거기서 더 높은 강자가 되라는 부모의 강요를 따르며 주변의 약자를 괴롭히는 학생의 황폐해진 내면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교사들의 평가에 따르면 정순신의 자녀가 자행한 학교폭력은 ‘심각성, 지속성, 고의성’이 매우 높았고 ‘반성과 화해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고 한다. 특히 문제는 이 가해학생의 ‘선도 가능성을 부모가 차단’하고 있다는 교사들의 평가다. 그래서 가해학생은 ‘절대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반성이 아니라 정당화를 계속했다’는 것이다.
기숙학교에서 학교폭력과 괴롭힘, 따돌림을 피할 곳이 없었을 피해학생은 병원에 입원했고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정순신은 자신의 전문적 법기술을 이용해서 가해학생인 자녀를 위해 2년간 6차례를 거친 입막음소송과 끝장소송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피해학생의 부모는 가해학생의 검사 부모가 자신들에게 어떤 해코지를 할지 두려워 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성폭력 가해자들이 절대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명예훼손 역고소와 손배소송을 통해서 피해자들을 끝없이 괴롭히는 일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피해자들의 문제제기와 입을 막기 위한 ‘전략적 봉쇄 소송’이고, 피해자를 끝없이 2차가해하며 지옥같은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정순신의 자녀가 지독한 학교폭력의 가해자였던 반면, 조국 교수의 자녀가 지독한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던 것도 상징적이다. 학교에서 가해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조국 교수의 자녀는 자신의 부모가 특수통 검사들의 집단적 괴롭힘에 시달리는 것도 지켜봐야 했다. 심지어 학교폭력 피해 후유증을 돌보려던 부모의 시도가 범죄로 기소되고 처벌되는 것도 지켜봐야 했다.
반면, 학교폭력의 가해자였던 정순신 자녀와 화려한 변칙적 스펙쌓기를 해온 한동훈 자녀의 엘리트 코스에는 어떤 걸림돌도 없었다. 결국 ‘정순신 사태’는 우리가 지금 법기술로 무장한채 ‘공정’과 ‘인권’을 들먹이는 냉혹한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검찰공화국’에 살고 있고, 이러한 강약약강의 질서 속에서 피해자들은 끝없는 괴롭힘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태 속에서 ‘검찰공화국은 망상이다’라면서 검찰개혁의 과제를 뒤로 미루며, 수사권-기소권 분리를 반대했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돌아보며 성찰하고 있을까? 하지만, 동시에 정순신 자녀 등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면서 인신공격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 물론, 정준신의 자녀는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이다. 하지만 주된 잘못은 부모에게 있고, 자녀의 신상까지 계속 파헤치던 검찰과 주류언론의 수법은 우리가 배우고 따라할 게 못된다.
● 1년전 우크라이나에서 봄은 침략, 폭격, 학살과 함께 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지 오늘로 1년이다. 우크라이나 민중에게 그것은 죽음과 재앙의 1년이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수많은 소중한 인간과 생명들이 사라진 1년. 전세계 사람들도 전쟁이 촉발한 식량난과 에너지난과 고물가 등으로 고통받았다. 전세계는 더욱 더 군사적 경쟁과 갈등 속으로 내몰렸다. 우크라이나 민중의 죽음과 고통 위에서 러시아 국민들이 이득을 얻었다고 볼 수도 없다.
러시아는 더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독재국가로 변했다. 이제 러시아는 "군대에 대한 가짜 정보"를 말하기만 해도 최대 10년형을 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됐다. 반전시위는 잔인하게 진압됐고 수천 명이 체포돼서 막대한 벌금을 부과받았다. 지난해 말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공개적 언급을 범죄로 규정한 ‘LGBT 선전 법률’까지 도입됐다.
푸틴과 소수 충성파들의 손으로 권력은 더욱 집중됐고, 그 안에서도 와그너그룹을 이끄는 프리고진 같은 특별히 더 잔인하고 폭력적인 인물의 위상이 높아졌다.(최근에 프리고진은 다시 밀려나고 있다고 한다.) 와그너그룹은 감옥의 중범죄자들을 신병으로 모집해서 전선에 투입한 다음에, 탈영을 하면 집단적으로 폭행 살해하면서 군기를 잡는 것으로 악명 높다.
아무런 명분도 정당성도 없는 전쟁과 침략이기 때문에 러시아 군대는 사기가 높지 않다. 그래서 지금 전쟁은 압도적인 군사력과 국력을 가진 러시아의 조기 승리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동부 바흐무트 지역에서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여기서 러시아는 화력과 병력을 끝없이 쏟아부으면서 소모전을 유도하고 있다.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우크라이나의 화력과 병력이 다 소진돼 버리면 자기들이 승리할 기회가 올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고기분쇄기’ 속에서 양쪽이 모두 하루에 100명씩 죽어도 결국은 인구가 몇 배는 더 많은 자기들에게 유리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무기 지원에 의존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비난하기 어렵다. 예컨대 1940년대에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 속에 있던 중국의 저항세력은 당시 일본과 경쟁 관계인 미국의 지원과 원조를 받아들였는데, 그것 때문에 당시 좌파들이 중국 민중의 저항을 지지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물론 당시에 일부 좌파는 ‘이제 미국과 일본의 대결이 됐으니 양쪽 모두 패배하라는 혁명적 패배주의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은 태도였다. 노엄 촘스키처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중간에 서서 ‘양쪽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당장 협상하라’고 말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촘스키가 거대한 기여를 했던 베트남 반전운동의 경험에 비추어도 그렇다. 당시에 베트남을 침공한 미국도 핵을 가지고 있었고, 베트남 저항군은 소련과 중국의 무기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촘스키는 베트남 저항군에게 무기 지원을 받지 말고 총을 내려놓고 즉각 협상에 나서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미군의 완전하고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미국의 침략이 일방적이었듯이 철수도 일방적이어야 한다. 협상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자신과 남을 속이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과거에 서방 강대국들의 침략, 억압에 맞서서 알제리, 쿠바, 북한 등 제3세계 약소국의 저항을 방어했던 좌파들이 우크라이나 민중의 저항을 방어하지 않고 핑계대는 것은 안타까운 비극이다.
물론 지금 우크라이나 정부는 반동적 우파도 아니지만 민중을 대변하는 좌파 정부도 아니다. 특히 젤렌스키 정부가 계속 팔레스타인 저항을 반대하고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다. 지금 서방 강대국 정부들이 진정으로 민주주의와 약소국의 자결권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경쟁자인 러시아를 약화시키며 서방 강대국들의 세계패권을 강화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서방 군수산업에도 시장이 열렸고, 전쟁 이후에도 우크라이나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재건할 경제적 특수를 기대할 것이다. 러시아의 패배는 미국 제국주의에게 이득인 측면이 있고, 미중 갈등에서도 유리한 고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러시아의 야만적 침략을 옹호하며 우크라이나 민중의 고통과 저항의 권리를 외면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미국 제국주의와 서방 강대국들의 패권을 약화시키는 것은 반전평화를 위한 국제적 민중 연대를 통해 이룰 과제이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민중을 침략, 폭격, 학살, 점령하는 것을 통해서 이뤄서도, 이룰 수도 없는 일이다.
미국 패권의 약화를 위해서 우크라이나 민중의 굴복과 패배를 기대하는 것은, 검찰공화국의 약화를 위해서 경찰의 고문과 조작 수사를 응원하는 것처럼 부조리한 것이다. 러시아의 침략이 시작됐던 1년전에 우크라이나의 사람들은 봄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봄은 침략 전쟁, 폭격, 죽음과 함께 시작됐다. 1년전을 떠올리면서 한 우크라이나 학생은 “봄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저는 로켓, 폭발, 빈거리, 빈가게,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러시아 군대는 즉각 무조건 철군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에 꽃이 피고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봄이 와야 한다.
● ‘동성 부부’ 건보 자격 인정 판결의 기쁨과 이어진 우울
윤석열 시대에는 저녁 뉴스를 보면서 계속 혀를 차고 욕을 하는게 일상이 돼 버렸다. 어제도 건설노조를 불법비리 조폭집단으로 몰면서 그것을 ‘청년세대와 일자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대통령을 보면서 터져나오는 분노의 방언들을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제 뉴스에서는 너무나 기쁘고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바로 항소심 법원이 ‘동성 부부’의 건보 자격을 인정한 판결이다. 앵커가 판결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는데 이번에는 욕설이 아니라 감탄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누구나 어떤 면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소수자에 속한다는 것은 다수자와 다르다는 것일 뿐, 그 자체로 틀리거나 잘못된 것일 수 없다”,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기존의 차별들은 국제사회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가고 있으며, 남아 있는 차별들도 언젠가는 폐지될 것이다.”
사법부가 ‘소수’의 부자와 권력자가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인 판결이다. 물론 이 판결 뒤에는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박한희 변호사님 등 뒤에서 온갖 노력을 다해 올바른 판결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한 분들의 엄청난 노고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재판부가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 반가운데, 돌아보면 이런 의미있는 판결들은 지난 몇 년간 간간이 있었다. 특히 1심보다는 항소심이나 대법원에서 그런 판결이 나오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는 2016년 촛불과 정권 교체의 성과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변화 덕분에 ‘민변’, ‘우리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 ‘젠더법연구회’ 등에서 노동권, 인권, 젠더정의 등에 관심을 가지던 법률가들이 사법부의 주요 자리에 진출하는 일이 그나마 더 많아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노동권과 인권에 대한 일관된 옹호로 전설적인 김선수 변호사가 대법관이 되는 일은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김선수 변호사는 통합진보당 강제해산도 반대하며 변호했던 사람이니, 보수우파의 눈으로 볼 때는 ‘종북좌파’가 대법관 자리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지난 대선을 전후해서 중단됐고 오히려 역전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윤석열 대통령은 800원 횡령한 버스기사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한 오석준을 대법관으로 임명했고, 앞으로도 5년 동안 대법관 14명 중 13명과 헌법재판관 9명 전원을 새로 임명하게 된다.
더구나 이미 검찰총장 때 판사 사찰 문건으로 재판부에 압력을 넣었다고 의심받아온 윤석열 정부는, 이제 대통령실과 한동훈 법무부가 판사들의 인사검증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제도적 통로도 만들어 놓은 상태이다.
마음에 안드는 판사들을 ‘우리법 연구회’라고 낙인찍으며 공격해 온 <조선일보>는 이것을 “비정상의 정상화”라며 환영하고 있다. 따라서 어제 판결을 듣고 기쁘면서도, 앞으로 이런 소식마저도 갈수록 줄어들 것을 생각하니 다시 우울해지면서 또 방언들을 중얼거리게 됐다.
● <조선일보>와 '안티조선' 운동의 추억
‘안티조선’ 운동이 한참이던 당시에 나도 그 취지와 고민을 적극 지지하며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글을 쓰고 했었다. 그런 글이 당시에 내가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아서 감옥에 갔을 때 검찰에 의해 ‘이적표현물’로 규정됐던 황당한 기억도 난다.(아이러니하게도 평생 가장 열심히 샅샅이 조선일보를 읽을 수 있었던 시절은 감옥에서였다.)
그래서 오늘날 <조선일보>의 역사와 성격에 대해서 잘 모를 수 있는 이들을 위해 당시의 주장과 근거들을 다시 소개하고 싶어서 과거의 글과 자료들을 찾아보며 쓴 글이다. 이 글을 쓰면서, 그리고 수십년간 아침마다 꾸준히 조선일보의 주요 기사와 사설, 칼럼들을 살펴본 사람으로서 느끼는 것은 ‘사회적 공기’가 아니라 ‘흉기’로서 조선일보의 성격과 구실은 전혀 변화가 없고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가끔 ‘심지어 <조선일보>도 이 문제에서는 윤석열을 욕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도 잘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조선일보가 윤석열 정부가 정말 잘되고 성공하길 바라고, 무엇보다 윤석열 정부의 반동적 정책과 목표들이 성공하길 바라는 방향 속에서 나오는 비판이라는 것이다. 즉 ‘감시와 비판’이 아니라 ‘지지와 독려’인 것이다.
잘 보면,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반동적 정책과 방향에 대해서 조선일보는 한번도 비판한 적이 없다. 오히려 더 강력하고 일관되고 효과적으로 그 방향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면서 ‘비판’할 뿐이다. 어차피 조선일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그 핵심인 일부인 기득권 카르텔의 이익을 지키고 늘리는 것이지, 특정 정권의 안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일보는 요즘 10.29 이태원 참사를 ‘핼로윈 참사’, ‘핼로윈 참사 유가족’이라고 바꿔서 부르고 있다. 여기서 조선일보의 의도는 명확하다. ‘핼로윈 축제에 놀러가서 죽은 사람들일 뿐이고 국가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유가족과 이태원 상인들은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조선일보의 용의주도함에 놀라면서 분노하게 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나는 조선일보에서 일하는 모든 분들을 싫어하거나 잘못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내 주변에도 내가 싫어하는 재벌기업이나 주류언론에서 일하는 분들이 있지만 그들을 비난하고 미워한 적은 없다.
더구나 조선일보에 실리는 모든 글과 기사들이 전부 틀렸거나 무가치할 리도 없다. 예컨대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는 자주 챙겨보고 도움을 얻었던 연재였다. 내가 주로 반대하고 비판하는 것은 조선일보 사주일가와 데스크와 논조와 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것을 돕는 이들이다. 심지어 그들조차도 나는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 보지, 결코 무슨 빌런들로 보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주도하는 조선일보의 사회적 위치와 구실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 너무나 해악적이고 문제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 이런 것을 잘 모르고 있는 분들에게는 설득하고 토론할 생각도 나지만 너무나 뻔히 잘 알고 안티조선 운동을 이끌기까지 했다가 이제 태도를 180도 뒤바꾼 이들(진중권, 강준만 등)에 대해서는 분노만 느끼게 되는 것이다.
● 대장동 특검, 김건희 특검, 이재명 체포동의안에 대한 판단 기준
윤석열 정권 1년이 지나면서 지금이 백래시(반동)의 시대라는 것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보통 백래시를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언제나 반동은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서로 연결돼 있다. 미국에서도 반페미니즘적 반동은 레이건 시대의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 신제국주의적 반혁명과 함께 했다.
반동의 또다른 특징은 가해자들이 스스로를 피해자로 탈바꿈시킨다는 데 있다.(‘역차별’의 피해자화) 페미니스트 시인이자 사상가인 오드리 로드는 “주인의 도구로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했지만, 반동의 주동자들은 ‘진보와 좌파의 도구를 가져와서 진보와 좌파의 집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성폭력 피해자나 반성폭력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자주 경험하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남성을 몸으로 유혹하다가 거절당하자 복수하려는 가해자’가 된다. 성폭력 피해자나 조력자가 거꾸로 명예훼손과 업무방해의 가해자가 돼서 고소와 고발을 당한다. 성폭력 가해와 2차가해를 반성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한 것이 ‘가스라이팅의 가해 행위’로 둔갑한다.
마찬가지다. 이 ‘피해자화’ 전략에서 최고의 잔머리를 보여주는 한동훈은 스스로 ‘가짜뉴스와 스토킹의 피해자’로 자리잡았다. 요즘 가장 목소리 높여서 ‘가짜뉴스’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 <조선일보>라는 것은 많은 것을 보여 준다. 검언정 카르텔을 통한 부패구조의 정점에 있던 세력이 요즘 자신들의 정적을 공격하는 최고의 무기는 ‘부패비리범’으로 낙인찍는 것이다.
지금 대통령실은 김건희를 주가조작의 주범이 아니라 ‘계좌를 활용당한 피해자’로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역시 최고봉은 김학의의 경우다. 이 성폭력 범죄자는 검찰과 언론에 의해서 어느 순간 ‘국가 폭력의 피해자’로 둔갑했다. 최근 1심에서 패했지만, 놀라운 것은 이 프레임이 몇 년 동안이나 성공적으로 작동해서 효과를 내 왔다는 데 있다.
이처럼 피해와 가해를 뒤죽박죽으로 섞으며 뒤집어버리는 반동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어지러운 혼동을 보이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측면이 있다. 무엇이 옳은 판단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지금 대장동 특검, 김건희 특검, 이재명 체포동의안 등에 대한 논란도 그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피해야 할 것은 먼저 법률적 요건, 검찰의 기소, 사법부의 판결을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 태도다. ‘법률과 사법적 국가기구들이 사회에서 가장 공정하고 중립적’이라는 환상이 언제부터 이렇게 진보좌파에게까지 뿌리내리게 된 것인지 한탄스러울 뿐이다.
또 진영과 정파에 따라서 유불리를 따지는 것이다. 이런 판단을 내리면 어느 쪽에 유리할지, 저런 판단을 내리면 어느 쪽에 불리할지, 이러면 누구를 편드는 것처럼 보일지, 저러면 다음 선거에서 도움이 될지, 이런 것들은 어느 순간에도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뉴스타파>의 모든 보도를 보면 항상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고 리영희 선생님의 말이다. "내가 종교처럼 숭상하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야, 분명해. 소위 애국, 이런게 아니야. 진실이야."
그리고 진실을 알려면 노력하고 피고들어야 한다. 언론이 떠들고 여론이 따라간다고 진실이 될 수는 없다. 지금 대장동 특검이나 이재명 체포동의안에 연결된 대장동 게이트(더불어 김건희 주가조작도)에 대해서 그 어느 곳보다 치열하고 샅샅이 파고들며 진실을 찾아온 것은 <뉴스타파>였다. 그 결과는 이 거대한 비리에 검찰과 언론이 몸통으로 엮여 있다는 것이다.
그 검찰(과 언론)이 지금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는 덮으면서, 몇 년 동안 별다른 증거도 못찾아 낸 이재명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여기서 이재명은 어느 당 대표이고, 이재명을 편들면 누구 편처럼 보이고, 어떤 입장이 우리에게 유리, 불리하고 등은 따져볼 아무 이유가 없다. 무엇이 진실인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진실을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쉽게 판단하는 사람들 때문에 누군가는 고통받게 된다. <뉴스타파>에서도 대장동 게이트를 가장 열심히 몇 년 동안 파헤치고, 1300쪽이 넘는 정영학 녹취록을 몇 번을 다시 읽어본 봉지욱 기자는 섣불리 판단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주장에 앞서 뉴스타파가 공개한 정영학 녹취록을 자세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검찰(과 언론)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일은 생길 수가 없다.
● 사람을 죽인 것은 지진이 아니라 국가다
빨간머리 앤은 ‘상상력이 없는 삶이란 생각해 볼 수도 없다’고 했다. 그렇게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놀라운 것이지만, 잔인한 것이기도 하다.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들려오는 처참한 소식들을 들으면서, 뉴스에 나오는 참혹한 장면들을 보면서,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저 건물더미에 깔려서 죽어가고 있는데 구하지 못한다면 내 마음은 어떠할까 상상해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마음들이 지금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지진 참사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전세계적인 연대와 모금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모금에 돈을 보내면서도 과연 이것이 고통받는 시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것인가 하는 걱정과 불안감이 떨쳐지지 않는다. 튀르키예 에르도안 대통령과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을 보면 도대체가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들의 행태를 보면 10.29 이태원 참사에서 윤석열 정부가 보여 준 말과 행동이 더 큰 재앙 속에서 훨씬 더 크고 냉혹한 방식으로 되풀이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에르도안은 지난해 탄광 폭발 사고 때도 “사고는 운명”이라고 했고, 이번에도 “재난에 준비돼 있기는 불가능”하다며 책임을 회피하기에만 급급하다.
그러면서 정부를 비판하며 책임을 묻는 주장들은 모두 ‘유언비어’, ‘가짜뉴스’라면서 억누르고 있다. 실제로 기자, 방송해설자, 평론가들이 조사를 받고 있다. 심지어 지진 대응과 구조에 유용한 구실을 하던 트위터를 일부 차단해 버렸다. 비상사태 선포도 정부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가로막기 위한 것에 주된 목적이 있다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지진이 대비하기도 피하기도 어려운 자연재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번과 비슷한 강도의 지진이 벌어졌는데도 대비가 잘 돼 있어서 사망자가 극소수에 머물렀던 일본 등 다른 나라들의 과거 기록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번에 튀르키예에서도 똑같은 지진에도 멀쩡한 건물과 무너진 건물의 차이도 말이다. 언제나 문제는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대응이다. 이것은 에르도안 정부가 추진해 온 시장만능주의 건설과 부동산 정책, 그것과 연결된 부패구조에 책임이 있다.
그것은 부동산 폭등만이 아니라 부실 시공과 건축을 낳았고 뇌물을 받은 정치인과 관료들은 내진설계에 대한 기준들을 지키지 않은 건물들을 눈감아 줬다. 에르도안이 지진에 대비한다면서 걷었던 지진세는 엉뚱한 곳으로 빼돌려지고 낭비됐다. 시리아에서 아사드 정부는 지진 대비가 아니라 반정부 시위대를 전투기로 학살하는데 열심이었고, 그렇게 폭격을 맞았던 건물들은 지진이 왔을 때 무너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이처럼 자신들의 책임을 면피하고 비판을 차단하는 최우선이었기에 지진에 대한 대응에서도 에르도안과 아사드는 최악이었다. 튀르키예와 시리아는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하고 대규모이며 최신 시설을 갖춘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군대 병력을 지진 대응과 인명 구조를 위해서 즉각 전부 동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시리아 아사드는 반정부 세력을 소탕한다며 지진지역을 다시 폭격하기도 했다.(물론 아사드의 학살을 도운 것에 대한 러시아의 책임과 독재를 응징한다는 경제재제가 지진 피해시민들에 대한 지원을 가로막은 것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골든타임을 놓치고 수만명의 죽음을 피하지 못한 것에는 이것이 큰 작용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지금 이 지역의 많은 시민들은 ‘국가는 없었다’고 말하고 있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지진이 아니라 국가다’라고 분노하고 있다. 이것은 이태원 참사를 겪은 우리에게도 완전히 타당하고 정당하게 보이는 분노이다. 지진이 낳은 피해와 고통도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만, 이러한 기억과 분노도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윤미향 의원과 가족이 지옥같던 3년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아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번 판결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손영미 소장님이었다. 비록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이지만(윤미향 의원도 재판 참관가서 딱 1번 본 것이 전부다), 지난 3년간 이 문제를 추적하면서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한 분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분이 살아서 이분들 곁에서 지금 이 소식을 함께 듣게 됐다면... 길원옥 선생님과 윤미향 의원의 우정과 만남을 가로막는 장벽이 사라질 수 있다면...
그리고 윤미향 의원과 가족이 겪은 3년간의 지옥을 생각한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았던 용기와 서로를 지켜준 사랑을 기억한다. 윤미향 의원을 어떻게든 외통위로 보내지 않으려던 기득권 우파와 민주당의 굴복은 집요하고 비굴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윤의원이 환노위와 농해수위에 가서 현장에서 투쟁하는 사람들과 연대 전선을 구축하고 전투력을 발휘하는, 결코 원하지 않았을 효과를 보고 놀랐을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족쇄가 풀린 윤미향 의원이 앞으로 보여줄 더 치열한 투쟁을 기대하면서도, 이제는 3년간 쌓인 상처와 울분을 치유할 수 있는 휴식과 여유도 가지시길 기대한다. 물론 윤석열 시대와 ‘검찰공화국’ 속에서 안심할 수는 없다. 저들은 또 무엇이든지 들고 나와서 윤의원을 ‘종북’으로 ‘비리’로 엮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또 흔들리는 사람들도 생길 것이다.
이제 재판 결과를 보고 반성적으로 태도를 바꾸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재판 결과가 뭐라고 하는 생각도 든다. 윤미향 의원이 무죄인 것은 재판 결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3년 동안 거기에 변함없이 존재했기에, 관심을 갖고 시간과 노력을 투여해 알아보려고 하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법적 판단을 중시하는 이들은 또 ‘윤미향은 밝혀졌지만 조국은 다르다’면서 ‘마녀 감별’을 하고 칸막이를 친다. 지난 3년간 이런 손절이 계속됐다. 이 글에서 여러 사람들을 지적하며 굳이 특정 좌파단체의 3년전 기사까지 언급한 것도 그것 때문이다. 마녀사냥에 위축되고 타협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잘못된 태도를 유지하거나, 심지어 글을 삭제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태도를 바꾸는 경우다.
지금 예상 외로 주로 민주당 정치인들(주로 여성 정치인들) 속에서 반성과 사과의 말이 나오는 것은 반가우면서도 씁쓸하다. 이처럼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고통받던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성찰적 태도는 무엇보다 진보적 대안과 좌파적 가치를 말하는 언론, 단체, 활동가들 속에서 더욱 먼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그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윤미향 마녀사냥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아니다. 족벌언론과 국민의힘과 관심을 쫓는 소란꾼들의 그러한 공격은 새삼스럽지 않은 상수이기 때문이다. 개혁언론들과 민주당과 진보정당과 진보적 지식인들 상당수의 침묵과 동조가 덧붙여져야 한다. 그럴 때만 대다수 시민은 '진영과 좌우를 떠나서 대부분의 언론과 정치인, 지식인들이 저러는 것을 보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위의 사진에서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윤미향, 김복동, 길원옥, 손영미 네 분 중에 이미 두 분은 돌아가시고 두 분은 같은 하늘 아래 있으면서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 검찰과 언론은 반드시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그래도 손영미 소장님은 우리 곁에 돌아올 수 없겠지만.”
http://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689
(기사 등록 20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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