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 온 박노자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서 시작된 전쟁에 대해서 분석하고 전망하는 글들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 우크라이나 침략 1주년: 세계화 이후의 세계
이제 조금 있으면 우크라이나 침공의 1주년이 될 것입니다. 특히 우크라이나 주민들에게 지옥과 같았던 이 시기는, 각각 구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세계의 상황을 대단히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단순화해서 이야기하면, 구소련에서는 피해국 우크라이나가 "초토화"를 당하는 사이에 가해국 러시아는 초강경 보안 기관 독재, 즉 최악의 안보-경찰 국가로 전락했습니다.
동유럽에서는 민족주의와 신권위주의로의 경향이 보다 강화되고, 전세계는 탈세계화와 군사화된 국가 자본주의로의 부분적 이행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일단 하나 하나씩 현 상황을 한 번 점검해보고, 세계 체제의 현재 변화들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침략의 피해국인 우크라이나는 국가로서의 놀라운 생명력을 과시했지만, 1년 동안의 침략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당했습니다. 2022년에 우크라이나의 국민총생산은 30% 이상 줄어들었습니다. 산업에 결정적인 전기 발전 시설의 절반 정도는 파괴를 당하고, 국토의 40% 이상이 지뢰 등 폭발물 피해를 당해 앞으로 농업에도 엄청난 지장을 받게 생겼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하지 못했지만, 우크라이나의 경제에 치명상에 가까운 피해를 입히는 데에 "성공" (?)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안에서는 이제 그 생산량이 크게 줄어든 대기업 소유주에 비해 서방의 원조를 받아 나누어주는 행정부의 영향력이 크게 강화됐습니다. 앞으로는 "원조 경제" 체제가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이며, 그 만큼 서방에 대한 종속 등이 심회될 전망입니다.
침략의 가해국인 러시아는 초강경 독재에의 이행과 국가 자본주의적 요소의 대폭적 강화, 그리고 서방 대신 중국에의 종속의 심화를 경험해 왔습니다. 서방 제재들이 가동된 2022년에, 2021년에 비해서 러시아와 중국의 무역은 30%나 늘어난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에는 러시아가 수출을 해서 위안화 (인민폐: 중국 돈)로 결제 받는 경우들이 전체 수출의 0,4%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무려 14%나 됩니다.
가면 갈수록 서방으로부터 고립을 당한 러시아는 중국 경제권으로 흡수되어 갑니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독재 정권의 강화, 전쟁 비판자와 재야 인사에 대한 매우 잔혹한 탄압과 동시에 경제의 주된 주체로서의 국가의 부상을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서방 투자가 중단되고 회수되는 상황, 민간 기업들이 신규 투자를 주춤하는 상황에서는, 국가가 나서서 수입 대체 산업 발전 (특히 항공업, 자동차, 정밀기계, IT 등)에 투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국가 자본주의적 경제 전환의 궁극적 목적은 자급자족형 군사주의 대국, 즉 "군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물론 완벽한 자급자족은 불가능할 거고 대중국 종속이 심할 수밖에 없겠지만, "최대한의 자급자족"을 지향하는 게 군국주의 시대의 "국책"입니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군사화와 경제에 있어서의 국가 역할의 강화 등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계 전체의 군비는 2022년에 역사상 최초로 2조 달러 (약 2500조원)를 돌파했습니다. 냉전의 마지막 해인 1989년에 비해 이제 무려 25%나 늘어난 것이죠. 이미 전쟁에 휘말렸거나 휘말릴 가능성이 높은 일부 국가들은 국민총생산의 4% 이상을 군비로 쓰는 고강도의 군사화 경향을 보입니다.
러시아 이외에는 사우디와 이스라엘, UAE, 카타르, 아제르바이잔 등은 이런 범주에 속합니다. 당국가 (중국, 월남, 북한 등)나 안보-경찰 체제의 국가 (러시아), 신권위주의 국가 (터키, 인도, 이스라엘 등) 이외에도, 전란기 속에서는 국가의 주도적인 경제적 역할은 가면 갈수록 더 돋보입니다. 미국의 반도체 정책이나 자동차 산업 등에 대한 사실상의 보호주의 정책 도입은 이런 경향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안보 능력이 약한 피후견 국가들의 후견 국가에 대한 종속성은 영구화된 안보 위기 속에서 계속 강화되어 가죠. 예컨대 동유럽이나 독일의 미국에 대한 안보 차원의 종속성은 확실히 2002년 전보다 이젠 훨씬 강합니다. 반대로 군사적 강국들이 자국의 실리를 추구하면서 각자도생, 자국 본위의 정책을 펼치고 있지요. 나토 가입국이면서도 러시아산 가스의 주된 공급 허브가 되어준 "양다리 정책"의 대명사인 터키나, 러시아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 강화하는 친미 국가 이스라엘은 아주 좋은 사례들이죠.
우크라이나 침략은, 거시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군사화되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경제 활동의 주체로서의 "국가"가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앞으로 아마도 약 10-15년 동안 미-중-러-인도 등 여러 열강들 사이에서의 전쟁과 갈등, 대립을 통한 "서열 정리", 그리고 종속 지대 (자원 지대 등)의 재분할 등이 대단히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그 뒤에는 재분할된 세계에서의 새로운 "규칙"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 전란기에 평화와 국제 연대, 기후 정의를 추구하는 각국 좌파들이 군국주의와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반대자로서의 역할을 얼마나 잘 하는가는, 결국 2030년대 이후의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의 좌파의 비중을 결정지을 것입니다. 한데 자국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막는 데에 완벽하게 실패하고만 러시아 좌파부터 시작해서, 아직도 국가주의,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좌파의 대열들은 전혀 제대로 조직되지 않고 있습니다. 굳이 1930년대와 비교하자면 좌파의 약함이야말로 오늘날 세계의 매우 안타까운 특징입니다....
● "침략 반대"라는 사회적 합의
애당초에 "침략"이라는 것은 "범죄"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침략 전쟁을 반대하는 묵자(墨子)와 같은 선각들이야 이미 춘추전국 시대 이후로부터 있어 왔지만, 대체로 근세 말기까지 무력을 써서 영토를 얻는 것은 그저 봉건 영주나 절대 왕국의 군주들의 "상식"이었습니다. 이 상식 아닌 "상식"은 계몽기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볼테르의 <Histoire de l’empire de Russie sous Pierre le Grand>(彼得大帝 시대의 俄羅斯 제국사 ,1759)에서도 피터 1세의 각종 침략 전쟁들은 "위대한 성취"로 미화돼 있는 것이죠. 계몽기까지만 해도 군사력 사용을 통한 군주의 영토 획득은, 자본가의 이윤 창출 등과 같은 "합법적 사업"으로 인식됐습니다. 실은 용병들을 대거 사용했던 그 당시의 전쟁들은 일종의 "사업"과 많은 면에서 상당히 흡사했죠.
군주들이 은행가들의 돈을 빌려 용병 등을 고용하고, 일정한 영토를 무력으로 확보하고 그 주민들에게 뜯어낸 세금 돈 등으로 빚을 갚고 추가적으로 소득을 올리곤 했습니다. 아마도 전쟁이라는 "특별한 비즈니스"에 대해 "비정상"이라고 본 최초의 계몽기 후기의 사상가는 간트 정도일 겁니다. 그의 <영구 평화론> (1795년)은 전쟁 아닌 평화를 민주 국가의 "정상적 상태"로 정의했죠. 군주국들의 "정상"은 18세기의 경우에는 전쟁들의 연속이었습니다.
한데 입헌 군주제/공화제의 시대인 19세기나 20세기 초반에도 특히 식민지 획득을 위한 침략에 대한 반대란 여전히 "소수"의 몫이었습니다. 예컨대 일본에서 1910년에 한국 "합방"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으로 여긴 것은 고토쿠 슈수이(幸徳 秋水) 등 초기 사회주의자/아나키스트 일부와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 啄木) 같은 일부 비주류 지식인 등이었습니다.
1914년에 제1차 대전이 벌어졌을 때에 볼셰비키와 같은 철저한 반전의 입장은 구미권의 사회주의/사민주의자 중에서도 소수에 국한돼 있었습니다. 한데 제1차 대전의 미증유의 도살은, 침략 전쟁을 "범죄"로 보려는 새로운 시각을 주류화시킨 것이죠. 1928년의 켈로그-브리앙 조약 (파리 조약)은, 바로 이와 같은 새로운 시각을 "법제화" 시킨 것입니다.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의무화시킨 그 조약은, 차후 뉘른베르그 재판과 동경 재판에서 파쇼 독일과 일제 전범들을 "평화에 대한 범죄" 혐의, 즉 "침략 전쟁 준비 및 도발, 수행" 혐의로 고소하여 유죄 판결을 언도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침략의 당연시"가 아닌 "침략 반대"는 국제적으로 새로운 통념으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물론 "침략 반대"가 통념화됐다고 해서 침략이 없어진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한데 침략 강행은, 전후의 세계에서는 엄창난 도덕적 자본(moral capital), 즉 명분의 상실을 수반했습니다. 예컨대 미국이 베트남에서 북베트남 폭격 및 캄보디아, 라오스 폭격 등 명백한 침략 행위를 감행해도 "법적 처벌"을 받진 않았지만, 1968년 이후로는 전세계적으로 규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패권 상실"을 처음 논하게 된 것은 1970년대인데, 그 근거는 바로 베트남에서의 현실적 패배와 전세계적인 침략국이라는 "누명"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세계적 "반미" 유행이 한국까지 번진 것은 1980년대초반부터지만 말입니다. 똑같은 스토리는,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에도 반복됐습니다. 1991년부터 일극 체제를 운영해온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함과 함께 세계 패권 국가라는 도덕적 헤게모니를 잃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이라크 침략의 긍극적인 패배까지 더하여 심각한 패권 쇠락 국면이 열리게 된 것이죠. 이라크 침략 과정에서 잃어버린 그 명분을, 미국이 지금 우크라이나 지원을 하면서 다시 되찾으려 하는 것이라 봐도 됩니다. 그게 대미 호감도가 막 오른 대부분의 유럽 국가나 일본, 한국, 대만에서 어느 선까지 통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밖에서의 세계에서는 미국의 명분 상실이 이미 회복이 불가능한 선까지 간 데도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미국이 이미 2003-9년에 이라크 침략으로 명분 상실을 경험했지만, 지금 그 이상의 상징 자본 상실을 경험하는 나라는 러시아입니다. 사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같은 경우에는 이라크 침공 이상으로 죄질이 나쁘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상당합니다. 미국은 침략을 감행해도 이라크 영토를 할양받아 합병하려는 등의 영토 강탈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이고 있는 건 정확히 "영토 강탈"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규모의 타국에 대한 강제적/폭력적 영토 강탈은, 세계 전후사에서는 그 유례 찾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러시아는 이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얼마나 많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강탈할 수 있을지는, 지금 저도 모르고 아무도 모릅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불확실성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한데 한 가지만 확실합니다.
러시아는 이렇게 해서 영토와 자원, 일부의 추가적 인구를 무력으로 얻을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상징 자본은 침략 전쟁의 화염 속에서 거의 남는 것없이 "소각"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침략의 현장과 가까운 유럽에서 말입니다. 대러시아 제재 등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유럽의 직간접적 무역 정도야 어느 정도 지속되겠지만,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투자나 기술 이전, 연구/교육 협력 등은 앞으로 수십년간 없거나 최소한의 수준에서 유지될 전망입니다. 침략국에 대해 "신뢰"라는 게 없으니까요.
결국 구미권과의 그 어떤 "신뢰" 관계가 불가능해진 차후의 러시아는, 당장의 경제적 타격은 없거나 크지 않아도 장기적으로는 선진권과의 기술 이전/연구 협력의 결여로 아마도 궁극적으로 그 "주변화" (peripherialization)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 될 것입니다. 미국과 달리 러시아는 잃을 수 있는 그 어떤 세계적 패권도 없습니다.
한데 결국 패권이 아닌 발전의 가능성들, 선진화의 가능성들을 잃게 될 셈이죠. "침략 반대"라는 전후 세계의 통념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것은 결국 러시아로서는 일종의 미래에 대한 "포기"입니다. 한데 국가 폭력 기구 종사자들이 수장으로 있는 독재라는 것은, 그다지 미래 지향적이지 않는 경우들이 세계적으로 허다합니다...
(기사 등록 202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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