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노동자라고 해서 다 똑같은 노동자는 아닙니다. 사실 , 노동 계급이 전체적으로 훨씬 더 혁명적이었던 100년 전의 러시아에서도 이미 그랬습니다. 예컨대 소비에트 비밀 경찰들이 멘셰비키들의 정치 활동을 무조건 정지시킨 1922-23년까지만 해도 모스크바나 베트로그라드의 식자공 (인쇄공) 노조 간부들은 거의 다 볼셰비키 아닌 멘셰비키이었습니다. 인쇄소는 금속 공장 등보다 임금이 높고, 그 종사자들이 학력도 대우도 다소 좋아 "혁명"보다 "개혁"을 더 선호했던 것이죠.
또 다른 사례는 1918년 우랄 산맥 지역 북부의 이제브스크 (Izhevsk)와 보트킨스크 (Votkinsk) 무기 공장 노동자들의 볼셰비키들에 대한 반란이었습니다. 그 공장 노동자 중에서는 고숙련, 고임금 노동자들이 많은데다, 대부분 농토까지 소유하고 가금류 등도 기르고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볼셰비키들의 매우 급진적인 곡물 공출 정책 등에 맞서게 되고, 처음에 사혁당과 멘셰비키들의 지도를 받았다가 나중에 아예 반동 콜차크 제독의 군대와 합세한 것입니다 (결국 1922년 이후 그 반란에 가담한 일부 노동자들이 "백계로인"으로서 조선으로 유입돼 경성에서 살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볼셰비키들이 대체로 대공장 노동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노동자들의 소집단마다 그 이해관계나 정치적 지향은 조금씩 달랐죠. 심지어 1920년대에 지노비예프를 지지했던 레닌그라드 금속 공장들과 부하린을 지지했던 모스크바 지역의 방직 공장들 사이의 의견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후자는 훨씬 더 "온건"한 쪽이었죠).
100년 전의, 분화가 훨씬 덜 된 노동 계급도 그랬지만, 오늘날 특히 대한민국처럼 최첨단 제조업 국가에서는 노동 계급의 수직적 분화는 엄창나게 진척됐습니다. 예컨대 "잘 나가는 공기업"인 마사회를 보지요. 그 정규직의 평균 임금은 9천200만원 정도랍니다. 반대로 경마장 등을 청소하는 비정규직은 많아야 2천500만원 정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받는 "돈"도 3,5 정도의 차이지만, "신분"의 차이도 크지요. 은행 대출 받는 것부터 다를 것입니다. 고연봉의, 특히 대졸 이상 출신의 정규직은, 상황상 가능하면 펀드 투자를 할 수가 있고 어쩌면 대출 받아 부동산 투자까지 해서 비록 소액이긴 하지만 자본 소득과 임대 소득을 어느 정도 올릴 수 있습니다. 노동 소득과 동시에 말입니다.
반대로 많은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투자"는 커녕 노동 소득으로 가족까지 먹고 사는 게 어려운 과제입니다. 한국의 55세 이상 근로자 중에서는 거의 40% 가까이는 반복 저임금 근로자, 즉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빈곤을 이미 벗어날 수 없는 "워킹 푸어"들입니다.
이들도, 평균 연봉이 9천400만원 이상이 되는 사립대 정규직 교원도 원칙상 광의의 "노동자"들입니다. 그러니 이 "노동자"라는 용어는 이미 하층 빈곤층부터 일부 중상층까지의, 여러 가지 경제적 계층들을 아우르게 된 것입니다. 그 만큼은 "노동 계급"이라는 개념을 정치적으로도 하나의 단일한 존재로 보기가 좀 힘듭니다.
분절된 노동의 현실 속에서의 수직적 위치, 즉 한국 자본주의 "먹이사슬"에서의 서열적 위치는, 과연 노동자들의 정치 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요? 지난 번 대선 이후의 민주노총 간부들의 투표 성향을 물은 한 조사에 의하면, 더불어민주당을 찍은 건 42.6%, 국민의힘을 (!) 찍은 건 7.3%, 그리고 나머지는 각종 진보 정당에 투표했다고 나옵니다.
전체적으로 보수 여-야를 노동자들의 이해 관계를 대변해야 하는 사람들의 절반이나 지지한다는 것은, 분절화와 함께 일정한 보수화가 이루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한데, 정규직 노조 간부의 민주당 투표율이 49%인 반면, 비정규직, 무기계약직의 진보 정당 투표율이 각각 69.2%와 63.3%인 반면 민주당 투표율 (각각 24.9%와 31.3%)은 훨씬 더 낮은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니 일단 비정규직일수록 정치적으로 좀 더 급진적인 성향을 띤다는 결론을 아마도 잠정적으로 내릴 수 있을 겁니다.
이와 동시에, 보수적 주류에 의한 젊은 남녀 "갈리치기"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신자유주의 대한민국의 슬픈 현실에서는 20대 남성 노조 간부들의 국민의 힘 투표율이 상당히 높은 반면 20대 여성 노동자들의 진보 정당 지지율이 전체 유권자 중에서 가장 높은 편입니다. 즉, 같은 "노동자"라 해도 고용 형태, 소득, 젠더, 연령 등에 따라 정치적인 성향은 "극우"부터 "급진 좌파"까지 왔다갔다할 수 있는 겁니다.
더 이상 단일한 "노동(계급)"을 거론할 수 없게 된 현실 속에서는, 우리 좌파는 일차적으로 "주변부적 노동 계층"의 급진화에 기대를 걸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예컨대 저임금 하도급 기업의 비정규직과 20대 여성 비정규직들에게는 급진 정치에 대한 좀 더 높은 관심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사실, 구미권의 경우에는 지금 가장 급진적인 "주변부적 노동 계층"으로 대두되는 것은 바로 대학생과 젊은 실업자, 불안 노동자를 위시한 20대 "전체"입니다. 한데 신자유주의적 원자화와 남녀 갈라치기가 많이 주효한 한국의 경우에는, 20대 남녀의 정치 성향은 각각 많이 달라서 "전체"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기후 재앙, 세계적 전란기, 깊어가는 경제 침체 등 속에서 그 미래를 빼앗기고 마는 20대들이야말로 논리적으로 지금 반란군의 선봉이 돼야 마땅합니다. 한데 이 논리는 대한민국에서는 매우 부분적으로만 통하는 거죠....
(기사 등록 202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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