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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소연방 출범의 100주년: "실험적 국가"가 무엇을 남겼는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3. 1. 4.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오늘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공식 출범한지 딱 100주년입니다. 소연방이 형식적으로 동등한 국가체들의 '연방' (soyuz/union)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마도 정치인 레닌의 마지막의 승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스탈린을 비롯한 볼셰비키당 안에서의 "현실주의적" 보수파들이 동등한 국가체의 결합이 아닌, 여타의 군소 공화국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들어가서 실질적으로 '합방'되는 방식을 선호했지만, 레닌은 끝내 그 어떤 새로운 민족 국가가 가입할 수도, 기존의 연방 공화국이 - 적어도 이론적으로 - 탈퇴할 수도 있는 '연방'의 형식을 고집해 우크라이나 (!)와 그루지아 (조지아) 등지의 "민족 볼셰비키"들의 힘을 빌려 간신히 스탈린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크라이나인들이 이론적으로 독립을 선언할 수 있는 국가체인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갖게 된 것이죠. 물론 소비에트 시대에는 그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은 결코 '독립 국가'는 아니었으며, 레닌의 편에 서서 '연방'의 형식을 끝까지 고집한 흐리스티안 라코브스키 등 우크라이나의 볼셰비키들은 거의 전부 다 "트로츠키주의""민족주의" 혐의로 나중에 대숙청에 희생됐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부 구조나 행정구역 구획 등은 오늘날 우크라이나라는 국가의 '골격'이 된 것이죠. 우크라이나 민족의 존재를 부인하고 우크라이나란 국가를 러시아에 합병시키거나 그 속지로 만들려는 푸틴이 레닌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 고수나 소련 연방 구성 방식에 대해 그토록 많은 비난을 퍼붓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푸틴은 스스로를 레닌이 아닌 스탈린의 계승자로 인식하는 겁니다.

소련의 형식인 "동등한 공화국들의 결합체"는 레닌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지만, 전체적으로 소련이란 존재는 "이상"/"이념""현실"의 어떤 타협에 가까웠습니다. 국가의 형식은 "연방"이었지만, 스탈린 이후로는 그 모든 공화국들의 영구적인 집권 정당인 공산당의 조직은 결코 "연방"의 원칙에 기반하지 않았습니다. 여타 공화국들의 공산당들은 사실 소련 공산당의 "지부"이었으며, 모스크바의 정치국/중앙위와는 상명하달식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공산당의 "민주적 집권주의"를 군대식 상명하달 조직으로 바꾼 것은 스탈린 시절이지만, 이론적으로 몇 개 사회주의 정파의 선거를 통한 경쟁과 상호 견제를 허용할 수도 있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유일당의 영구집권으로 해석한 건 이미 레닌 시절이었습니다. 비볼셰비키 사회주의 정당들의 일부 (멘셰비키 등)는 약 1921-22년까지 활동할 수 있었지만, 그 다음은 - 레닌의 동의하에 - 정치 시장은 완벽한 독점 체제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크게 뵈서는 내전의 종식 (1920-21) 이후 소련의 역사는 "현실"의 이름으로 "이념"이 점차 뒤로 물러나고, "혁명적 국가"에서 "혁명적"이 퇴색하고 "국가"에 보다 더 강하게 방점이 찍혀지게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사회학적으로 새로운 지배층인 당-국가 간부층이 형성되어가고 대타적 계층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죠.

간부층의 수령이라고 할 스탈린이 사망했던 당시에는 간부층의 전체적인 보수적 성향대로 소련 장교들이 다시 제정 시절처럼 "계급장"을 달게 되고, "애국적" 내용의 "국사" 수업들이 부활되고, 제정 러시아처럼 동성애가 불법화되고, 여성들이 낙태권까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스탈린 시대의 엄창난 사회적 퇴보의 일부는 나중에 다시 수정됐지만 (낙태권은 스탈린 사망 이후에 돌아왔죠), 크게 봐서는 소련의 역사는 사회적인 점차적 "보수화" 역사이었던 만큼 그 궁극적 몰락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혁명의 이념을 계속 등지다가는 결국 혁명 이후의 "실험적 국가" 체제도 굳이 고집할 필요가 자연 없어지는 것이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다면 "실험적 국가"가 남긴 것은 오로지 간부층에 의거한 사회의 점차적 보수화인가요?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간부층은 대중들을 "대표"한다기보다는 이미 1920년대 초반부터 대중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지만, 혁명이 바꾼 사회인 만큼 대중들의 정치-경제적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1937년은 끔찍한 대숙청의 해이기도 했지만, 소련에서 의료가 완전히 "무상"이 된 해이기도 했죠.

유럽 국가 치고 근대적 의료 접근성이 애당초에 최악이었던 러시아의 민중들이 "무료로 의사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갈망, 요구했으며, 공산당은 그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지구상의 최초의 "무상 의료 체제"가 태어난 것이죠. 1950년대 이후에 국가에 어느 정도의 '여력'이 생겨 소련은 비록 다당제 선거에서 원하는 정당 후보를 찍을 권리는 없어도 아파트를 무료로 배정 받고, 별장을 지을 땅과 텃밭까지 무료로 제공 받을 권리가 있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정치적 권리의 결핍은, 사회적 권리의 풍족으로 "보상"되는 식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무언의 "사회적 계약"에는 물론 대중들의 탈정치화 등 많은 문제들도 내포돼 있지만, 러시아 등지에서의 "소련 향수"의 지속은 그 매력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소련의 간부층은 굳이 내전을 그렇게까지 원하지 않았으며 보다 부유하고 발달된 서방으로부터의 기술 이전 등을 필요로 했지만, 서방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개인 자본가가 없는 산업 국가"인 소련은 늘 "위협"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련도 - 스탈린의 코민테른 숙청 등 외국 혁명자들에 대한 배신의 역사도 만만치 않게 존재하지만 - 소련대로 서방 지배층에 반기를 드는 전세계의 혁명-해방 세력들을 지원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소 관계는 결코 평등하지 않았고 소련의 의도에 있어서는 지정학적 부분들이 컸지만, 1950년대말에 이르러 약소국 북한도 제3세계 국가 중에서 최초로 무상 의료, 교육, 보육 체계를 구축한 것도 이런 소련으로부터의 지원에 크게 힘 입은 바 있었습니다. 북한뿐만 아니고 베트남부터 남아공의 투쟁 조직 (ANC)이나 팔레스타인 투사까지 들어갔던 소련의 지원은 - 그 의도는 비록 단순히 "연대"에만 기반하지 않았다 해도 - 결국 세계의 지도를 바꾸게 됐습니다. 만약 그런 지원이 없었다면 베트남의 항미 항전에서의 승리나 쿠바에서의 혁명 정권의 지속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크라이나를 짓밟고 있는 푸틴에게는 "스탈린 제국"의 영토를 "수복"하는 게 주요 과제이지만, 세계의 진보 세력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련 경험의 명암들을 균형적으로 파악하여, 그 긍정적 측면들을 어떻게 살릴 것이고 그 과오들을 앞으로 어떻게 피할 것인가를 고민해보는 것입니다. 전세계적 연대나 사회적 임금 (복지 비용 등)의 최대화, 완전한 사회적 보장 등은 우리 길이지만, 상명하달식의 영구적인 집권 정당의 독재는 분명히 미래 지향적인 정치적 시스템은 아니지요. 민주성이 있는 사회주의 혁명, 민주성이 최대화돼 있는 비자본주의적 사회 건설이라는 화두는, 앞으로도 계속 세계 혁명가들의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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