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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이준석은 장애인들에게 사과하고 사퇴하라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4. 26.

전지윤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가 촉발한 전장연을 겨냥한 공격과 혐오 선동에 관해서 비판하고 분석한 글들을 묶었다.]

 

이준석 혐오정치의 새로운 표적이 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국민의힘 대표 이준석의 혐오정치가 여성과 중국인에 이어서 찾아낸 다음 타겟은 장애인이라는 것이 분명해 지고 있다. 이준석은 어제 오늘 이틀 동안에만 연달아서 10개에 가까운 페이스북글을 올리면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공격하고 있다. 이 모든 글들을 관통하면서 반복되는 이준석의 논리는 매우 단순하다.

‘국민의힘은 그동안 전장연의 요구를 적극 소통하고 수용해 왔다. 그래서 그 요구는 대부분 받아들여지고 개선되고 있다. 그런데 전장연은 민주당과 문재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을 윤석열과 국민의힘에 묻고 있다. 그러면서 시민들의 출퇴근길을 볼모로 잡고 있다. 심지어 임종을 지키러 가는 시민에게 막말도 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그냥 이상한 인간들이다. 따라서 장애인은 착한 약자라는 언더도그마는 틀렸고, 이들의 불법행동을 막는 게 당연하고 정당하다.’

이 단순한 논리가 모조리 허위사실과 사실의 왜곡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국민의힘이 장애인들의 요구를 적극 소통하고 수용해 왔다’? 무려 1842일이라는 전장연 역사상 최장기였던 광화문 농성이 시작되고 끝났던 시기는 정확히 박근혜 정부 5년과 겹친다. 장애인들의 요구를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던 게 바로 박근혜 정부과 국민의힘이었다.

전장연이 문재인에게 물어야 할 책임을 윤석열과 국민의힘에 묻고 있다’? 전장연은 문재인 5년 동안 가장 앞장서 약속을 지키라고 비판하고 투쟁해 왔고, 장애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점이 있다면 이런 투쟁의 결과이고, 윤석열과 국민의힘은 장애인의 요구를 무시하고 권리를 가로막아온 책임에 대한 정당한 비판과 항의를 받고 있을 뿐이다.

죄 없는 시민들의 출퇴근길을 인질과 볼모로 잡고 있다’? 공공부문 노동자 투쟁을 공격하던 전형적인 공안 논리가 이렇게 다시 이준석의 입에서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부활했다. 여기서도 정말도 출퇴근길 시민들을 인질로 삼고 있는 것은 장애인들의 기본적 권리조차 부정하고 있는 이준석과 국민의힘이지 전장연이 아니다.

심지어 임종을 지키러 가는 시민에게 막말도 했다’? 이것은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는 말실수와 단편적 사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 폭로된 문건에서 서울교통공사는 앞뒤맥락과 전후사실을 자르는 악마의 편집을 통해서 이 사안을 전장연 공격에 활용하자고 주문했다. 그리고 이준석은 가장 열심히 그러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은 무조건 착하고 약자라는 언더도그마 프레임은 틀렸다’? 바로 이것이 지금 상황의 핵심이다. 우리 사회와 특히 기득권 우파들의 논리구조 속에는 장애인들은 그저 착하고 불쌍하고 도와줘야 하는 사회적 약자라고 프레임화되어 있다.

여기서 머리 속에 그려지는 장애인들은 평소에는 주변에서 잘 보이지 않고 복지시설에서 얌전히 보살핌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다가 우리가 선물을 갖고 찾아가면 고마워하면서 순진하고 착한 표정으로 같이 사진 찍어주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의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돼야 하는 장애인들이, 수동적으로 동정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권리를 요구하며 능동적으로 투쟁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침범해 그 질서와 규범을 위태롭게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러면 동정과 시혜의 시선은 순식간에 적대와 증오의 시선으로 바뀌게 된다. 순진한 표정으로 동정과 시혜를 얌전히 받아들이는 착한 장애인, 이제 분노한 얼굴로 권리와 투쟁을 말하는 나쁜 장애인으로 변화한다. 남자들의 친절한 배려를 다소곳히 받아들여야 할 여자들이, 권리와 투쟁을 말하는 순간 극렬 페미니스트로 바뀌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수많은 장애인 단체 중에서도 특히 전장연이 권력과 언론의 집중적 공격을 받아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장연은 얌전히 동정과 시혜를 받아들이는 착한 장애인이라는 언더도그마를 거부한 대표적인 나쁜 장애인단체이기 때문이다. 전장연은 장애인의 날이 아니라 장애해방 투쟁의 날이라고 말하면서 20년간 투쟁을 벌여왔고, 그러한 전장연의 투쟁은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 왔다.

그리고 이제 이준석과 국민의힘의 혐오정치는 전장연을 다음 표적으로 좌표 찍었다. 왜 지금 시점이고 전장연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윤석열은 기득권우파의 결사적인 재결집과 온갖 야비한 방법에도 불구하고 매우 아슬아슬한 표차로 겨우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더구나 대통령 당선자가 퇴임 직전의 대통령보다도 지지율이 낮은 위기에 처해 있다.

여가부 폐지 고집과 청와대 용산 이전 등으로 벌써부터 내외부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여론은 악화하고 있다. 취임 이후의 주도권 장악과 지방선거 준비를 위해서는 뭔가 또 다른 결집점이 필요하고, 특히 오세훈의 서울시가 그 중심이 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인수위를 상대로 요구하며 앞장서 투쟁하는 전장연이 눈에 들어 온 것이다.

더구나 오세훈과 서울교통공사는 이미 전장연을 으로 설정해 두고 심리전과 여론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준석은 여기에 올라타면서 혐오정치와 혐오선동의 새로운 공간을 열어가려고 한다. 문제는 이준석의 새로울 것 없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그것이 낳고 있고, 낳게 될 정치적 효과이다.

이미 전장연의 지하철 출퇴근 시위는 심각한 혐오와 욕설, 막말, 물리적 폭력에 대한 위협 등에 직면해 왔다. 그런데 이제 곧 집권여당의 대표가 될 사람이 그런 혐오와 폭력이 정당하다는 권위를 부여하고 나선 것이다. 전장연을 증오하며 공격하던 이들에게 잘 하고 있고 더 많이 하라’, ‘이제부터 선을 넘어가도 된다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그것은 당장 각종 온라인 공간에서 전장연과 장애인 활동가들에 대한 온갖 혐오, 막말, 욕설이 폭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편견 -> 혐오표현 -> 차별행동 -> 증오범죄로 나아가는 혐오의 피라미드현상에 따라서 더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지금 전장연을 공격하고 있는 이준석과 그 추종자들이 과연 남들이 1시간이면 갈 거리를 2시간 반이나 가야 하는 장애인들의 경험을, 문턱과 계단이 없는 건물과 식당을 찾지못해 밥을 굶어보거나 바지에 소변을 봐야했던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지하철에서 리프트를 타다가 굴러 떨어져 죽은 동료의 소식을 듣고 느낀 슬픔과 분노를, 불이 났는데도 뻔히 보면서도 방바닥에서 꿈쩍도 못하고 죽어간 친구의 소식을 듣고 느낀 울분과 공포를 상상해 본 적이 있을까. 이렇게 윤석열과 혐오의 시대는 저들이 취임하기 전부터 다시 또 더 위험해지고 있다.

지금 이준석에 맞선 전장연의 투쟁이 중요한 이유

이번 상황을 통해서 몇 가지가 분명해졌다. 첫째, 이준석은 똑똑하지는 않지만 정말 노력하는 혐오선동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그의 언행을 보면 트럼프의 성공 사례를 정말 깊이 고민하고 학습해서 모방하려는 지독한 정성과 집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오늘 그는 전장연의 투쟁이 진행되는 전철역들을 보면 결국 겨냥한 것은 노원, 도봉, 강북, 성북에 주거하는 서민들이라는 글을 올렸다. ‘장애인 : 가난한 강북 주민들이라는 대립 구도를 만들어내는 그 노림수를 보면 그의 영혼이 얼마나 깊은 시궁창에 들어가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둘째, 이번에도 기획재정부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복지를 확대하고 차별을 완화하려는 길목마다 막아서고 갑질을 하던 기획재정부 말이다. 장애인 관련 법안의 예산을 배정하지 않아서 빈껍데기로 만들어온 기재부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과 집권민주당의 요구도 무시하던 기재부가 얼마 전 윤석열의 요청에 순식간에 청와대 용산 이전 비용을 견적까지 내서 갖다바친 것을 보고 참으로 기가 막혔다. 원래 예산을 감사해서 깎는 게 기재부가 하던 일인데 윤석열 앞에서는 다소곳하고 공손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과 기재부의 환상적인 콜라보, 이것이 선출돼지 않은 이 나라의 진짜 권력자들의 끈끈한 카르텔이다. 정말 해체돼야할 것은 여가부가 아니라 기재부이지만 누구도 감히 저 오만한 기재부 권력에 도전하지 못해 왔다. 그나마 기재부에 정면으로 맞서던 전장연은 지금 이준석에게 정신없이 난타당하고 있다.

셋째, 여성과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할당제가 왜 여전히 의미있고 필요한지가 드러났다. 이번에 이준석이 깽판을 치면서 전장연의 목줄을 조이며 혐오정치의 인질극을 벌이는데도 국민의힘에서 아무도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

오세훈은 전장연은 시위를 자제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준석을 거들면서 연합 공격에 나섰다.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섣부른 판단과 언어 사용을 통해 오해와 혐오를 조장하지 말라며 용기있게 나선 것이 바로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이다. 인터뷰 내용을 보면 너무나 구구절절히 옳고 감동적이다.

이것을 보고 어떻게 국민의힘에 저런 분이 있지라는 신선한 충격을 받고 알아보니 김의원은 국민의힘이 지난 총선 때 비례대표 전용 위성정당으로 만든 미래한국당에서 소수자 배려 차원에서 당선우선순위에 배치하면서 의원이 된 분이다.

위성정당이라는 꼼수 속에서도 여성 장애인에게 비례의원인 될 기회가 주어진 역설이다. 결국 이준석이 강조한 실력을 최우선으로 해서 뽑았다는 그 많은 똑똑하다는 자들 중에서는 아무도 쓸모가 없었던 반면, 그나마 소수자에게 기회를 보장할 때 의미있는 목소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이준석과 국민의힘도 나만큼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게 무슨 개망신이고, 어떻게 우리 당에 저런 사람이 들어왔지싶을 것이다. 아마도 역시 소수자 배려와 할당은 안 되고 위험하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능력과 실력이 중요하다면서 명문대 출신, 판검사 출신, 중년남성들을 더욱 더 많이 뽑을 것이다. 그리고 선출 권력과 비선출 권력의 융합인 이 당은 더욱 더 혐오와 차별에 찌든 집단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럴수록 한국사회는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지금 전장연의 투쟁이 너무 중요한 이유다.

#전장연후원 #장애인권리예산보장 #출근길지하철탑니다

국민은행 009901-04-017158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준석의 혐오정치는 무엇을 노리고 어떻게 진화해 왔는가

미국에서 유일하게 수치심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젊고 백인이고 도시에 살고 북부 출신이고 대학교육을 받은 이성애자 개신교도에 정규직이고 안색이 좋고 몸무게와 키가 적당한 남성이다.”(어빙 고프만, <낙인>)

요즘 상황에서, 이것을 보면 아마도 이준석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어떻게 누군가를 낙인찍고 갈라칠 것인지 정말 고민하고 노력하는 혐오 정치인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비열한 행동인지 조금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이준석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지적했듯이 나는 이준석이 자신의 성착취 비위 의혹과 공방이 커지는 것을 덮고 눈을 돌리기 위해 전장연을 희생양삼았다고 강력 의심한다. (https://alook.so/posts/jdted5V) 그래서 이준석과 주류언론들은 내일 있을 전장연 박경석 공동대표의 토론도 무슨 신나는 싸움 구경처럼 만들고 있다.

반에서 제일 만만할 것처럼 보이는 친구를 지목해 너 옥상으로 따라와하고서 그것을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기회로 삼는 일진처럼 행동하고 있는 이준석은 요즘 내가 언제 여성을 혐오하고 장애인을 혐오했는지 증거를 하나라도 가져와보라고 오히려 큰소리치고 있다.

뻔뻔하지만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KKK의 홈페이지에 가보면 우리는 나라와 백인을 사랑하는 사랑의 집단이라고 돼 있다고 한다. 차별금지법에 결사 반대하는 극우개신교 지도자들은 항상 우리는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서 이러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련된 이미지와 그럴듯한 논리로 혐오정치를 포장하는 것은 오늘날 일부 극우 정치세력에게서 발견되는 특징인데, 대표적으로 이번에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는 프랑스의 마린 르펜이 그렇다. 혐오정치에 대한 이준석의 고민과 노력도 발전하고 진화해 왔다.

2011년에 처음 정치에 입문했을 때 이준석은 당시 전국철거민연합에 대해서 진짜 미친놈들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이준석은 그런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정도는 똑똑했던 것 같다.

그 몇 년 후에 이준석은 나는 동성애에 비판적이다라고 에둘러 쓰면서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쪽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요즘 이준석을 보면 거친 표현이나 욕설, 막말 등은 절대 피하면서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부추기고 혐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 이준석의 언행은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라는 혐오표현의 일반적 정의에 가장 부합하는 것들이다. 물론 혐오표현에는 보다 폭력적이고 수위가 높은 것들이 있고, 비교적 낮은 수위의 것들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낮은 수위의 표현이더라도 그것이 어떤 상황과 맥락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에 의해서 어떤 대상을 향해 이뤄지느냐에 따라서 그 부정적 효과는 매우 파괴적일 수 있다. 노골적인 높은 수위의 혐오표현보다도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장애인에 대한 구조적 차별과 배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집권여당의 대표가 장애인 운동단체를 표적삼아 시민을 볼모로 잡고 불법행동을 하는 이상한 집단으로 낙인찍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의도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준석의 SNS, 이준석이 공유한 유튜브, 청년극우플랫폼, 이준석의 주장을 실은 언론들에 곧 장애인을 벌레에 비유하면서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수많은 댓글들이(이미 있기도 했지만) 엄청나게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준석이 정말로 장애인 혐오를 한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다면, 지금 당장 내가 이런 것을 부추긴 것을 후회하고 사과한다. 이것은 범죄이고 폭력이며 나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거꾸로 지금 내가 왜 사과하냐, 전장연이 나한테 사과해야 한다고 뻗대고 있다.

이준석은 아마도, ‘내가 그런 댓글을 직접 단 것도 아니고, 그런 댓글을 달라고 시킨 것도 아니다라고 변명할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 시대에 나치 중에서 가장 위험하고 사악한 자는 직접 유대인을 죽인 자들이 아니었다. 바로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증오를 유포하고 주입한 자들이 가장 큰 역사적 범죄자들이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위안 삼을 수 있는 것은 이준석의 인질극이 지금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지금 기성정치권에서 나서서 이준석을 옹호하고 편드는 이는 찾기 어렵다. 진보정당뿐 아니라 민주당도 이준석을 비판하고 있고, 심지어 국민의힘에서도 비판 목소리들이 나왔다. 윤석열 인수위도 일단은 선을 긋는 듯한 태도를 취해야 했다.

어제 문대통령도 이준석을 겨냥해 혐오와 차별은 그 자체로 배격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전장연과는 결이 다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도 이준석의 사과와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이준석과 주류언론들의 과장과 달리 막상 기층 시민들 속에서도 전장연의 출근길 투쟁에 대한 엄청난 거부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실제로 그동안 출근길 투쟁에 몇 번 가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봤던 결과는 단순하지 않았다. 투쟁 조끼를 입고 장애인 동지들과 같이 시민들과 부딪친 적도 있고, 그냥 옆 칸에서 승객들 속에 섞여 이동해 본 적도 있다. 물론 거기에는 나서서 욕설과 막말을 하는 목소리 큰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시민들의 반응과 표정은 대개 속내를 알기 어려운 곤혹스럽고 길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한편으로는 정해진 시간에 직장이나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초조한 불편함, 한편으로는 장애인들의 절박함을 무조건 탓할 수도 없는 난처함이 낳은 모순된 반응과 표정으로 보였다.

그런데 왜 그 많은 모든 사람들이 매일같이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빈틈 하나없는 짐짝같은 지하철을 타고 직장과 학교에 가야 하는 것일까? 그래야 사회와 기업과 경제와 교육이 기존의 질서대로 정상적으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 질서와 규칙에 따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지금 상태로 유지하게 만드는 힘일 것이다. 윤석열 인수위와 기재부는 끝내 장애인들을 무시할 것이고, 전장연은 다시 지하철 타기를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혐오뿐 아니라 꼭 저 방법 밖에 없는가라는 생각도 다시 커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진보는 기존 질서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불복종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준석이 이해할지는 몰라도 봐야 할 영화 <코다>

최근에 아카데미에서 여러 상을 받은 영화 <코다>는 지금 이준석이 전장연을 인질로 잡고 혐오선동과 몰이를 하는 상황에서 꼭 볼만한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 지금 이준석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더구나 큰 재미와 감동까지 얻을 수 있다. 이준석에게도 권하고 싶은 영화이지만, 과연 그가 이런 영화를 보고 이해하고 공감할 능력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을지는 상당히 의문스럽다.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감독이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의 작가였던 션 헤이더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였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를 봤을 때 <오뉴블>의 정서가 곳곳에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성적 농담들이 그렇다. 짖궂은 성적 농담들이 불쾌한 감정이 아니라 유쾌한 감정과 폭소를 유발하도록 하는 특기가 여전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농인(청각장애인) 부모가 낳은 청인(비청각장애인) 자녀인 루비이다. 농인 부모와 가족은 모두 실제 농인 배우들이 연기했는데 이번에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은 것에서 보이듯 연기가 장난이 아니고, 특히 수어 연기는 수어가 얼마나 생명력이 넘치고 아름다운 언어인지를 느끼게 해 준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느낄 장면 중에 하나는 농인인 아빠가 가수를 꿈꾸는 루비의 목울대에 손을 대고서, 자신의 딸이 부르는 노래의 의미와 감동을 온몸으로 느끼려고 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보게 되는 것은 장애인이 공동체의 구성원이지만 작업장과 지역사회에 함께 살기 위한 편의들이 없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이다.

그것은 장애인들을 공동체에서 추방하고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루비가 노래를 부르는 공연 장면에서 영화가 루비 아빠의 관점을 택하면서 영화에서 모든 음향과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비장애인들이 음악을 즐기고 있는 그 순간에 농인들은 비존재가 되어 버린다.

물론 농인들은 존재를 드러내고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친다. 루비의 노래를 들으며 웃고 우는 다른 이들의 표정을 관찰하는 것이 그 하나의 방법이었다. 또 루비는 곳곳에서 수어통역을 통해서 가족과 공동체를 연결시킨다. 이렇게 루비가 공짜 통역사로서 희생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크고 작은 비극이다.

루비 가족은 루비가 없으면 세상과 연결돼지 못하고 따돌림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루비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꿈 사이에서 갈등한다. 루비가 간만에 남자 친구와 멋진 데이트를 하는 그 순간에 루비의 가족은 크나큰 절망 속에 던져진다. 루비가 즐기는 행복한 시간과 루비 가족이 직면한 고통의 시간의 대비는 우리에게 묻는다.

이것의 누구의 잘못이고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무엇이 이 사랑스럽고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가족 구성원들 속에서 서로를 원망하는 마음과 좌절감을 만들어냈을까? 루비 가족의 삶과 루비의 꿈은 왜 양립 불가능한 것이 된 것인가? 이것은 명백히 루비 가족의 탓도 루비의 잘못도 아니다.

루비의 가족이 일하는 어업 현장에, 루비 가족이 살아가는 지역사회에 그들을 위한 편의와 시설이 마련돼 있어야 했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어업시장에서 더 착취받고 있었고, 딸의 공연장에서도 존재가 지워져 있었고, 루비는 공짜통역사구실을 강요받고 있었고, 루비 가족은 서로를 원망하게 됐던 것이다.

영화에는 루비 가족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상업적 기준과 제도를 도입하면서 어민들을 갈취해서 큰 수익을 얻어가는 어업당국에 대한 묘사가 나오기는 하지만, 대체로 누가 이러한 차별과 배제를 통해서 이익을 얻는지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누가 이러한 장애인 차별과 배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하는지 잘 알고 있다.

바로 이준석과 같은 우파 정치인과 권력자들이다. 루비의 공연을 보러간 가족들이 만약 우리도 내 딸의 노래를 즐기고 싶다. 수어통역을 제공하기 전에는 공연을 계속할 수 없다고 막아섰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준석같은 이는 왜 다른 관객들을 볼모로 인질극을 벌이느냐. 최대다수의 불행과 불편을 야기하려는 비문명적 불법 행동이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루비 가족까지 포함해 더 많은 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멋진 노래 공연을 감상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상식을 거부하는 이준석같은 이들의 야만은 정말 놀라운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누구의 고통과 희생을 바탕으로 이익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야만을 거부하는 이들의 투쟁이야말로 문명을 만들어 왔다.

<코다>에서 루비의 엄마로 나온 배우 말리 매틀린은 <코다> 제작사에 모든 농인 배역을 실제 농인 배우에게 맡길 것을 요구하고 쟁취했다. 이미 10년 전에도 매틀린은 넷플릭스의 모든 영상물에 자막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고 함께 투쟁해서 그것을 이루어냈다.

그 결과가 단지 대사만이 아니라 그 장면의 상황과 분위기까지도 자막으로 설명해주는 지금의 넷플릭스 자막이다. 이것이 도움과 재미까지 더해 주기에 나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꼭 자막을 틀어 놓는다. 마치 전장연이 투쟁으로 만들어낸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지금 이준석까지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 됐듯이 말이다.

누구도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더 인간답고 문명적인 사회에서 살도록 해주는 이러한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이준석같은 이가 막아선다고 멈춰설 리가 없다. 이 투쟁에 앞장서는 이들은 자신들이 누구의 꿈과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합니다. 여기에 있어야하지만 그러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 없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싸워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름아닌 바로 우리의 권리와 우리의 자유를 요구하며 우리가 승리할 때까지 이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정신장애인 당사자 활동가 쥬디 챔벌린의 2003년 집회 연설)

 

박경석 "죽을지은정 잊혀지지는 않겠습니다"

그저께 토론을 보면서, 먼저 이준석이 그 순간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여서 기분이 매우 참담했다. 자신이 이렇게 또 논란과 이슈의 주인공의 되고, 주목을 받으면서 의제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어쩜 그렇게 숨길 수 없게 드러나는지...

그리고 사과, 반성, 성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준석의 태도, 더구나 오히려 박경석 대표의 처음 시민에 대한 사과 발언에, 마치 자신이 그 사과를 받아주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짐짓 박경석 대표를 칭찬하는 장면에 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계속되는 그의 논리와 주장들은 주요 대목마다 정말 기가 막혀서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나도 욕 많이 먹는다. 그런 활동을 하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유명 정치인이자 당대표로서 그가 시민들에게 욕을 먹는 것과 장애인 활동가가 일상적으로 겪는 혐오와 막말이 비교 가능한 것인가?

박경석 대표가 이런 게 하버드에서 토론 방법인가라고 하자, 이준석 대표는 바로 발끈하면서 그건 비아냥이라고 했고, 박경석 대표는 몇 번이나 그것을 사과했다. 그 정도 비유도 발끈하고 사과를 받으면서 자신은 절대 사과도 안 하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결국 사회는 장애인에게 좋은 쪽으로 진보해 왔다는 말은 또 어떤가. 그 진보 속에서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의 피와 눈물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그 진보를 가로막는 구실을 한 당사자의 입에서 그것이 나올 말인가?

무엇보다 박경석 대표가 신이 난 게 눈에 보인다. 내가 전장연을 띄워줬다는 말에서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멘탈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지난 한 달 동안 박경석 대표는 물론 수많은 장애인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고, 눈물 흘리며 삭발까지 하게 만든 사람의 입에는 절대 올려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래도 그제 토론은 처음 순간에 이미 그 의미와 내용의 모든 것을 보여 줬다고 생각한다. 바로 박경석 대표의 첫 발언이었다. 이 발언에 모든 것이 담겨있었고, 거기서 이미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이준석과의 토론이 아니고, 박경석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 자리에는 두 명이 앉아 있었지만, 박경석 대표의 보이지 않는 등 뒤에는 수많은 장애인들과 그 친구들이 함께 서 있었던 것이다. 박경석 대표가 자신의 페북에 올리신 그 내용을 가져온다. https://www.facebook.com/kyungseok.park/posts/4879473115434425 그리고 못 보신 분은 꼭 그 부분이라도 보길 권하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BNJclf9LoI8

차별과 혐오에 사랑과 연대로 맞서야

어제는 4.20 장애차별철폐 투쟁의 날이었다. 그 전에 여의도 국회 앞의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단식농성장에 가서 점심 피켓팅을 같이했다. 단식농성이 벌써 10일이 넘어간 미류 님과 이종걸 님의 수척해진 얼굴을 보면서 안타까움이 너무 컸다. 이어서 동지들과 함께 여의도 전장연 농성장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가했다.

집회도 의미있었지만 행진에서 많은 이들이 해방감을 느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봄 날씨 속에서 여의도 대로를 가득채운 천여 명이 같이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속에서 코로나 3년 동안 갑갑했던 마음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저녁에는 다시 차별금지법 단식농성장으로 가서 저녁 문화제에 함께 했다. 그러나 어제는 다가오는 윤석열 시대에 대한 걱정이 더 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점심 피켓팅을 하고 있는데, 차별금지법 절대 반대를 외치면서 조직적으로 피켓팅을 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을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피켓에는 차별금지법이 자유를 탄압하는 법이고 다수를 역차별하는 법이고 어린 학생들에게 동성애를 의무교육하는 법이라고 돼 있었다. 바로 옆에 서서 나란히 피켓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도 시도해 봤지만 확고한 잘못된 신념만 확인할 수 있었다.

더 놀란 것은 두 대 이상의 차량이 차별금지법과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며 계속 국회 앞 도로를 왕복 운행하면서 커다란 스피커로 쏟아내고 있는 방송의 내용이었다. 왜곡과 과장과 증오로 뒤범벅이 된 내용을 듣자니 머리가 지끈지끈할 정도였다.

특히 그 중 한 대는 문죄인 사형, 총살이라고 적힌 선전물들을 차량 곳곳에 붙여놓고 계속 문재인 간첩 개*끼야!”라는 방송을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내 옆에서 차별금지법 반대 피켓팅 중인 사람에게 저게 뭐냐고 했더니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관심없고 안들린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민주사회에 저런 사람도 있는 것이지라며 얼버무렸다.

이것이 일부 언론과 지식인들이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파시즘의 요소까지 보였다고 비난해 온 문재인 정부 말기에 국회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요즘 혐오범죄적 유튜브인 가로세로연구소의 죽을 때까지 괴롭히며 피 묻은 돈벌기 방송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조국 교수의 부인이 입원한 병원과 딸이 근무하는 병원까지 찾아가 몰카를 찍고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며 괴롭힌 것이다. 그가 누구든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그런 공포와 고통 속에 있다면 당사자는 가슴이 타들어가서 잠시도 숨쉬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가세연같은 이들만 물만난 물고기처럼 그러는 것은 아니다.

바로 어제 420 집회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비판한 이준석같은 정치인들이 더 큰 힘을 가지게 된 시대가 왔다. 그리고 윤석열, 이준석 이런 정치인들의 중요한 공통점은 내가 언제 혐오를 이용하고 부추겼다는 말이냐고 항상 오리발을 내민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가세연보다도 더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는 혐오의 몸통은 바로 이런 정치인들이다. 왜냐하면 이런 정치인과 그들을 돕는 권력기관과 언론 등이 바로 가세연같은 혐오범죄자들이 더욱 활개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이선균이 그저 아무 말없이 코를 막는 제스춰만으로 송강호는 엄청난 모욕감과 분노를 느껴야 했듯이, 가세연처럼 막말과 욕설과 막장 행동을 직접하지 않는다고 윤석열과 이준석같은 정치인이 혐오정치와 구조에서 하는 중심적 구실이 가려질 수 없다

민주당은 더 이상 이런 세력에 타협하고 굴복하지 말고, 차별금지법을 지금 당장 통과시켜야 한다. 또 눈 앞에 다가온 윤석열, 이준석과 혐오정치의 폭주 시대에 더욱 많은 이들이 국회 앞 차별금지법 단식농성장에 연대하고, 다시 출근길 지하철 타기를 시작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투쟁에 함께해야 한다. 차별과 혐오에 사랑과 연대로 맞서야 한다

* 인권재단사람이 진행하는 차별금지법 제정 농성 지원 긴급모금 https://bit.ly/3rzHyli

(기사 등록 202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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